2024년 7월 24일 수요일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 허진 옮김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 홍한별 옮김
재독(再讀)을 권합니다.
작년 겨울부턴가 몇몇 지인들이 참 좋다며 이야기했던 책이다. 한번 읽어봐야겠다 마음먹었지만 도서관 대출이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던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꽤 기다린 끝에 손에 쥐었다. 소설치고는 얇은 책의 두께가 일단 신선했고 가벼웠다.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무엇이 많은 사람을 이야기 속으로 이끌었을까.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11쪽) 첫 문단인데 가볍지 않다. 그려질 듯 그려지지 않는 배경은 더욱이 무겁게 다가왔다. 1985년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 낯설기만 한 그곳에서 처음엔 조금 헤맸다. 희미한 배경에서 점점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주인공 펄롱이 아내인 아일린과 나누는 대화, 자신과 타인을 향한 시선과 질문은 지난밤 내가 남편과 나눈 대화, 이따금 깊어지는 나의 고민과 너무나도 비슷했다.
펄롱은 꾸역꾸역 살아가는 고단한 일상에서 끊임없이 자신과 주변을 깊이 바라본다. 그러다 마주한 과거의 아픔과 그 아픔으로 인한 존재의 고민, 현실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좇아간다. 그러고는 ‘자기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117쪽) 치열한 갈등 속에서 마침내 자신을, 타인을 구하는 선택을 한다. 펄롱 못지않게 혹독한 시기를 버티고 지내면서 내가 가진 것들을 지키고자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는, 용기 있는 그의 행동에 짜릿함과 먹먹함을 느꼈으리라. 어라, 그런데 그 순간 벌써 이야기가 끝난다. 모든 것이 시작될 것 같은 바로 그 순간. 아쉬운 마음에 이미 다 넘긴 책장 뒤에 무언가 더 있지 않을까 뒤적이다 다시 첫 장으로 돌아갔다.
미시즈 윌슨, 펄롱의 어머니, 네드, 미시즈 케호, 아일린, 펄롱의 딸 다섯, 수녀원장, 그리고 세라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펄롱의 시선과 생각을 한번 더 찬찬히 따라갔다. 내가 삶의 곳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소설 읽기의 매력이 여기에 있구나. 마음만 먹으면 여러 번, 아주 자세하게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생각과 느낌을 면면히 만나고 무한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다 나에게도 있는 어떤 모습을 마주하기도 한다. 그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느낄수록 그의 행동은 나의 것이 된다. 나의 삶에도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내가 펄롱인 것처럼, 펄롱이 나인 것처럼 그렇게 읽혔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43쪽)이 반복되는 삶에서 펄롱이 던지는 질문 “뭐가 중요한 걸까.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44쪽)은 요즘 내가 자주 머무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엄마가 함께 있는 시간은 잔소리로 채워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 나는 나에게 중요한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때때로 끙끙거리며 고민한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22쪽) 알았기에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만족하며, 때로는 울컥할 정도로 감격하며(35쪽),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그것뿐일까?’ 묻게 된다.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채 나 역시 펄롱처럼 고뇌한다. 펄롱은 용기 내어 세라를 돕기로 선택한 순간, 그리고 비로소 행동한 그 순간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아나는 느낌,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119-120쪽). 나도 느껴보고 싶다.
어느날엔가 나도 용기를 내어 행동해야 할 순간을 만난다면, 그 순간 ‘수월한 침묵과 자멸적 용기의 갈림길’에서 갈등하게 된다면 펄롱의 말을 기억하겠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119쪽) 그리고 펄롱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껏 내가 지켜왔던, 계속해서 지키고픈 나의 일상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생각하겠다. 누군가가 날마다 나에게 보여준 친절, 나를 가르치고 격려했던 이들, 그들이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지금의 내가 있음을(120쪽). 그 숱한 도움을 기억하며 용기를 내보겠다. 더불어 오늘 하루,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날마다의 친절을,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의 지혜로운 도움을 더하는 삶을 살아가겠다. 그것이 합해져서 또 하나의 삶이 자라갈 것을 믿기에.
첫댓글 누군가가 날마다 나에게 보여준 친절, 나를 가르치고 격려했던 이들, 그들이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지금의 내가 있음을(120쪽). 그 숱한 도움을 기억하며 용기를 내보겠다. --> 이런 결심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라니! 너무 귀하지 않나요? 혜화 쌤의 고민과 감상과 결심에 저도 같은 마음으로 끄덕끄덕. ^^
맞아요! 혜화샘
그래서 저도 소설이 어려우면서도 좋아요.
이야기 속 사람들이 모두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