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축하 새벽예배(2024.3.31.)
굿모닝/ 평화의 인사
묵상/ 막 16:1-8
찬송/ 160장
기도/ 남태양 권사
본문/ 요 20:19-22
설교/ 평강이 있을지어다
기도
찬송/ 167장
축도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22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린다.
다 함께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인 부활절 인사를 해보자. 후창 할 때에 ‘정말’에 강조점을 둔다.
선창-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후창-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향해 평화의 인사를 전하신다. 요한복음 20장에는 “평강이 있을지어다”(20:19, 21, 26)라고 인사 문구가 세 차례 반복된다.
첫 번째는 안식 후 첫날 저녁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두 번째는 제자들에게 파송의 말씀을 하신 후에, 그리고 세 번째는 8일 후 다시 제자들을 방문해서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도 함께 하던 때였다.
십자가 사건도 끔찍했지만, 그 직후에 불어올 후폭풍 때문에 당시 제자들은 몹시 긴장하였을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가 사흘이 지났다.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하여 함께 모여 있었고, 문을 굳게 닫았다. 그들은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주님의 무덤에 다녀와서 전한 주님의 부활소식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후하여 제자들과 여성들의 태도를 비교해 보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한 마디로 제자들은 여성들보다 평안하지 못하였다. 제자들은 십자가로부터 모두 도망쳤음에도, 여성들은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켰다. 그리고 사흘 후 무덤으로 찾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증인이 된 사람은 바로 여성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은 남자들보다 위기관리와 극복의 능력이 뛰어난 듯하다.
예수님의 부활 인사에도 그 차이점이 잘 드러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을 찾아온 여성들과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물으셨다.
“평안하냐”(마 28:9).
그런데 숨어있는 제자들을 직접 찾아가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19).
마치 평화는 예수님의 부활 인사처럼 들린다. 그런데 어감에 차이가 있다.
여인들에게는 (내가 염려하지 않아도 너희 모두) ‘평안하지?’라고 안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내가 너희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해 염려한다. 그러니 모두)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라고 당부하신다.
여기에서 평강은 평안, 평화, 화평과 다 같은 말인데, 한 마디로 부활하신 주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부활의 선물이다.
예수님은 평안이 없는 사람들, 평강을 빼앗아가는 삶의 위기, 평화를 갈망하는 사회를 향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그 평안, 평강, 평화는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예수님이 묻는 평화의 인사는 전쟁이 그친 후에 누릴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다. 환난과 재난이 지난 후에 저절로 얻게 될 사후적 의미의 평화가 아니다. 지금 네가 겪는 위기의 순간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네 안에, 평화가 있는지 묻고 계신다.
예수님이 물으시는 것은 지금, 여기, 내 삶 한가운데 하나님의 평화를 믿느냐? 날마다 필요한 일용할 평화가 있느냐? 고통 받는 사람까지도 감싸줄 그런 평화가 있느냐? 고 물으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하신 ‘평화’는 십자가라는 그 끝 모를 아픔과 모진 수난 직후에 나온 ‘평화’이기에 남다르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인 평안과는 다른 ‘그 분의 평안’이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 평화는 모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에 대한 선언은 이미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약속하신 것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위에서 주”(요 19:11)시는 평안이다. 일시적이거나, 임시적이 아니다.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환경과 조건을 변화시킨다. 평안을 주시는 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세상이 주는 평안은 충분하지 못하다.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평화는 변덕스럽다,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그림자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평안의 추구란 ‘문제로부터 도피’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이런 저런 도피수단을 찾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근거는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에게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평화의 보호망이 되신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해 평화를 빌어 주신 후, 그들을 평화의 사도로 파송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이렇듯 평화는 곧 ‘부활신앙’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의 평화를 증거 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자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예수님의 평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 말씀하신다.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
우리 스스로 평화를 만들 수 없다. 오직 성령만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얻게 하며, 내 삶과 세상에서 그런 평강을 누리게 한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우리에게 평화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여러분 위에 주님의 평안, 평강, 평화가 언제나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우리 스스로 평화를 만들 수 없다. 오직 성령만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얻게 하며, 내 삶과 세상에서 그런 평강을 누리게 한다. "
우리는 할수 없습니다. 겸손히 나를 비워 주님의 평화를 이루게 하옵소서. 제가 할수 없지만 당신이 하시겠다는 말씀에 희망을 담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