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1-6절)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 곧 의인과 악인인 죄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악인은 곧 죄인으로 연결이 됩니다. 그럼 악인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시편 1편의 악인은 세상이 말하는 질이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1절의 악인의
꾀는 인간적인 처세술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자연스러워 본인도 모릅니다.
성경은 외식이라고 하지만 세상에서는 미학이기에 영국에서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죄인의 길도 삶의 방법 곧 테크닉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압니다.
오만한 자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른 자리인데 경쟁사회에서 당연시 됩니다.
따라서 세속의 가치로는 이런 것들을 쉽게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일들은 속으로 막연히 저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은 하지만
오히려 현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사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것들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불이익을 당하고 바보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성경이 이런 사람들을 악인들이라고 할 뿐 세상은 여전히 이런 사람이 득세합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분기점을 사람의 행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의 삼팔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이와 같이 복이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은 현재 복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계속 그 복이 발전해 가는 모습을 말하나 악인은 명사로서 언제나 그대로인
상태로 고착되어 버린 것을 말합니다.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으로 결정이 되었으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롬8:10) 복 있는 사람은 타고난
운명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지속이 되는 존재이며 어떤 상태 속에서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는 사람입니다. 어떤 이들의 말처럼 후천적 사주라고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 있는 사람은 팔자가 서로 다른 악인과 같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1절에서 실제로 복 있는 사람들에게는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 등과 같은 것들에는 별 관심이 없어집니다. 한참 아래 것들의 값어치들입니다
복이 있는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려면 이런 것을 내다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악인들은 악한 짓을 저질러 악인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니 악인들이 됩니다.
불법정치 자금 같은 것을 남이 보면 악인데 본인들은 하나 같이 악이라고 인정하지
않듯이 여기서의 악인도 자기는 아무 하자가 없는 사람인 줄 압니다. 다만 복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저 사람은 성경이 말씀하는 악인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여러분 앞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아요? 의인인 체하는 악인들 말입니다.
남의 험담을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지 않듯이 복을 받은 사람이 1절의
금지사항을 위반하면 성령이 근심을 하시므로 속이 편치 못해 그만 두게 됩니다.
그러나 4절에 악인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게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 있는 사람들처럼 1절의 금령을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악인이라는 말입니다. 두 마음을 자유자재로 운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악인(惡人)은 여러 가지 마음이 엉켜 있는 상태의 사람을 말합니다(double mind).
교회 안에는 니고데모와 같은 신사 악인이 있고 나사로와 같은 거지 의인이 있습니다.
의인은 잘나서 의인이 아니라 1절처럼 좇지 아니하며...서지 아니하며...앉지 아니하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의인인 겁니다. 그러므로 선과 악이나 의와 죄는 반드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된 건 칭의라 하므로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여호와의 율법(2절)은 복 있는 쪽을 편드는 것도 아니고 악인이 걸려 넘어 지도록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복 있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여호와의 율법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자동으로 악인으로 분류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의인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의인이 어느 순간부터 여호와의 율법의
편이 되므로 복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복은 성향이 바뀌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복인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2절의 상태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1절의 독소조항을 거절하는
것은 복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어서 자랑이 되지 않습니다. 예컨대 학생이
결석하지 않고 학교 왔으니 상을 달라 한다고 선생님이 상을 주겠는가요?
신자들 중에는 인격과 삶이 변화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있는 반면에
신앙의 지식만 늘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달라지는 쪽도 있습니다.
시편 1편의 악인은 2-3절이 없습니다. 악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처세나 삶의 테크닉이나 경쟁에서 이길 궁리만 합니다. 그래서 주의
율법을 묵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됩니다(4절)
목표도 방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이란 도로에 안전운행을 위한 표지판과
같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할 일이 너무 많아 묵상할 시간도 없고 또 묵상이 주는 복이 뭔지도 모릅니다.
인생살이가 얼마나 힘이 드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묵상하여 그의 십자가의 사활의
의미를 좇아가서 성령의 감동으로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일을 하라고 하느냐고 반문할 겁니다. 거기다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니 영 체질에 안 맞는 겁니다.
인격의 열매가 뭔지 형통하게 하는 잎사귀가 뭔지 도무지 모릅니다.
오직 현재 눈에 보이는 현실의 것들만 채워지면 그만입니다. 이 세대가 잘못하면
신앙적인 악인들을 양산할 수 있습니다. 이 악인은 인간의 선과 악의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더 깨끗하고 양심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여호와의 율법이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는 결코 인기가 없고 현실세계에는 안 맞는 겁니다.
분명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며 힘의 원천임에도 현실에는
안 맞으니 지금도 그리스도는 바깥에서 건축자의 버린 돌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만일 신자가 죄 사함과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다
쓰지만 말고 자신이 말씀 안으로 스며들어가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묵상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이 악인으로 간주하고 맙니다.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2절)
만약 지금 이렇게 하고 있다면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은 아브라함에게처럼
약속으로 와서 소망의 인내를 통해 우리들에게 현실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으로 그 분의 말씀 안에서 우리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언제나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십니다.
신앙의 성장은 반드시 사고와 묵상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복 있는 사람은
환경이나 사정의 탓을 하지 않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성향에 의해 부득불
말씀을 즐거이 묵상하게 됩니다. 체질이 바뀐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은 믿음에
의해 살아진다는 말인 겁니다. 믿음이 그 안에서 늘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의를 얻어 그 의를 따라 성령이 역사하여 주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므로
그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며 세상은 세상대로 낄낄대겠지만 의인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영광의 찬양으로 길길이 뛰게 됩니다. 하늘만 쳐다보고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만년 어린아이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받았는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병아리의 암수를
감별하는 정도의 일입니다. 거듭났는가 회개를 어떻게 하는가 등등의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와 같이 말하는 단체를 이단 운운하면서 정작 그들은 평생
그 자리에서 맴 돌고 있다고 어떤 유명한 교수가 말을 한 적이 있답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봐야합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다.
묵상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로 인해
이 죄와 육체가 처리되어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의 자리로 항상 되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요 구원입니다. 바로 의인의 모임입니다(5절) 영원한
구원은 오늘이 내일과 연결되고 지금의 천국이 장래의 천국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구원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6절)
첫댓글 구원은 오늘이 내일과 연결되고 지금의 천국이 장래의 천국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구원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