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길에 있을 때에 급히 화친하라
구속사 아카데미
복된 교회 신 창섭 목사
본문: 여호수아 9:1-21절
9: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9: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9:16 그들과 조약을 맺은 후 사흘이 지나서야 그들이 이웃에서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들이라 함을 들으니라
여호수아 9장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9장의 내용은 독특합니다. 기브온에 살고 있는 히위 사람들이 원방에서 온 것처럼 위장하고 이스라엘을 속여 화친하는 약조를 맺는 내용입니다. “그들과 언약을 맺은 3일이 지나서야 그들이 이웃에 있어”(16)멸하여야 할 대상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음으로(19) 멸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나무패며 물 긷는 자로 삼았다(27)는 것이 9장의 요약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서 한 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10장까지 계속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두 장을 할애하고 있는 셈입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하심은 이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 히위 족속이 속인 것이 사악한 일이라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까?
㉡ 아니면 여호수아가 묻지(기도)아니한 것을 책망하기 위해서입니까? 이점에서 성경을 교훈적인 관점으로 보느냐? 구속사라는 관점으로 보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교훈적인 관점은 히위 족속이 속인 점, 여호수아가 묻지 아니한 실수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보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여기에는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물었다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참조:신 20:16-18)
① 만일 “다 죽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사랑의 하나님과 충돌하게 됩니다. 그리고 용서하기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마18:21-22)는 긍휼의 하나님이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② 만일 “살리라” 하셨다면 말씀하신 바를 손바닥 뒤집듯이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과 충돌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신명기 20:16절에서는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섞이게 되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숭배하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바는 상반(相反)된 듯이 보이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공의)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두 속성과 결부 된 중요한 진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반 된 듯이 보이는 하나님의 두 속성을 어느 하나 손상됨이 없이 화친하기를 그토록 원한 기브온 사람들을 받아 주셨다는 것이 본문을 통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9:1-3절에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 첫째 반응은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여섯) 왕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와 아이를 정복했다”는 말을 듣게 되자 합세하여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1-2)는 반응이고,
㉡ 또 다른 반응은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3) 화친하기를 나타낸 반응입니다. 똑 같은 것을 들었는데 반응은 상반(相反)되게 나타났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적한 자들은 멸망을 당했고 화친한 기브온 거민들은 멸망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했다는 점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이 얼마나 예민한가를 보십시오. 1절에서도 “이 일을 듣고”라고 말씀하고, 3절에서도 “행한 일을 듣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똑 같은 사실을 듣고 그들은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나타냈으며 두 부류로 갈라졌습니다. 저들은 멸망을 당하였고, 이들은 살게 되었습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들이 “이 일을 들었다”면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었겠습니까? 노아의 때와 롯의 때, 그리고 현재의 때를 생각하게 합니다.
9장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해졌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싸움을 했듯이 현재도 선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일”, 즉 복음을 듣고 이에 대항하여 더불어 싸우고자 하는 자들은 멸망이요. 화친하고자 하는 자들은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9장의 핵심은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15)는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시편 2편은 메시아의 예언 장으로 유명합니다. 거기서도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시2:12)는 촉구입니다. 주님께서도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마5:24-25)고 화목할 것을 재촉하십니다.
“길에서(시2:12), 길에 있을 때에”(마5:24)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은 재판을 받으러 가는 도상에 있는 것입니다. 내일로 미루다가는 화친할 기회를 잃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재판(심판)받아 옥에 가두게 될까 염려하라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옥”은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감옥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결국 지옥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는 것처럼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그네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을 받으러 가는 도상(途上)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급히” 화친해야 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고 경고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언약”을 맺고 “맹세”(15)한 문맥은 정탐꾼들이 여리고의 기생 라합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언약하고 맹세하였던 일과 결부됩니다. 이는 일찍이 여호와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창22:16) “언약과 맹세”입니다. 또한 모세가 죽기 전에 모압 평지에서 제 2세대들에게 “언약에 참여하며” “맹세에 참여”(신29:12)시켰던 일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언약과 맹세”를 가리켜 “이 두 가지 변치 못 할 사실”(히6:18)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멸망 받아 마땅한 기브온 사람들이 이 두 가지에 참예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놀라운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인 것입니다.
이점에서 간과해서는 아니 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브온 족속들이 언약과 맹세에 참여하게 된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의 고백이 9:24-25절에 나타납니다.
㉠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들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즉 들었다고 말합니다.
㉡ “당신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숨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합니다. 이는 결단입니다.
㉢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합니다. 이는 죽이든지 살리든지 뜻대로 하라는 위탁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맹세하신 내용의 핵심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갈3:8)고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이었던 기브온 사람들은 속여서 목숨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평범한 일로 구원을 얻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결단하여 은혜를 입은 것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살기 위해 비상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저들의 고백은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한 고백과 동일합니다.(수2:9-10) 그래서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 같이 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도 무너지고 아이 성도 무너지고 이제 3일 후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저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같이 한 일” 즉 변장하고 화친을 청한 일을 대할 때에 어찌하여 속인 일, 묻지 아니한 일은 중요시 하면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비상한 결단으로 화친을 청한 일, 그래서 생명을 유지하게 된 일은 등한히 여기고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마치 주님 당시에 나면서 소경된 자가 눈을 떴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안식일을 범했다는 조문만을 내세우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처사(요9장)라 할 것입니다.
이점에서 조심해야 할 점은 기브온 사람들이 속였다는 그 일 자체는 옳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이를 옹호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또한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한”(14)일은 중대한 실수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문맥은 그런 교훈을 말씀하려는 문맥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느냐는 문맥이라는 점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변장하고 축복받은 것도 장자의 축복, 즉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려는 믿음으로 보고 있으며 라합의 거짓말, 기브온 족속이 속인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아니하고 내면에 있는 믿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여호수아 9장은 “거짓말, 묻지 아니한 일”을 책망하고 교훈하기 위해서 한 장을 할애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중심점은 멸망 받아 마땅한 기브온 사람들이 화친하여 은혜를 입고 복음에 참여하게 되었다는데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점을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2-13)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설교의 결론은 신. 구약을 막론하고 하나님과 화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뿐이라는 진리입니다. 여호수아는 “예수”의 예표로 등장합니다. 이렇게 해서 기브온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즉 복음 안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과 결별을 했으며 전에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날개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인을 바꾼 것입니다.
그리하여 본문 9장은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9:27)고 마치고 있습니다.
㉠ “그 날에”(멸망 받을 그 날에),
㉡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오늘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닌지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