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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용헌집(容軒集)》 해제(解題)
- 조선 초기 국정 운영의 유력자, 이원(李原)의 《용헌집(容軒集)》 -
정재훈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1. 머리말
이 책은 용헌(容軒) 이원(李原, 1368~1429)의 문집인 《용헌집(容軒集)》을 번역한 것이다. 이원은 고려 말에 태어나 조선 초에 주로 활동하며, 조선의 건국 시기에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제도를 확립하는 데에 공이 큰 인물이다. 고려 말 조선 초는 역사적인 격동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많은 인물들이 시대의 변혁기에 대응하며 살았다. 그 가운데서도 이원은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대응한 인물에 속한다.
이원은 태조 때에 출사하여 왕조의 기틀을 닦는 데 필요한 건의를 많이 하였다. 또 태종이 즉위하여서는 그의 측근이 되어 고위의 내외 관직을 역임하면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외교에도 능력을 발휘하여 세종 대까지 세 차례나 중국에 사신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세종 대에는 좌의정까지 올라서 정국 운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기도 하였다.
다만 말년에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여산(礪山)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하지만 서거정(徐居正)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 “성품이 충직하였으며 학문의 올바름으로 보완하였기 때문에 논의에서 제시한 것과 사업에서 조치한 것이 참으로 볼만하였다.”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 왕조가 새롭게 안정되어 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이원의 문집은 여말선초의 지배 세력의 동향, 훈구 세력의 성격 등을 이해하는 데 매우 긴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문집의 상당 부분은 시(詩)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차지하고 있으나 이 문집의 번역을 계기로 조선 초의 동향에 대한 연구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 가계와 생애
이원은 본관이 고성(固城)이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이다. 1368년(공민왕17) 1월에 출생하여 1429년(세종11) 6월 19일에 62세로 유배지인 여산(礪山)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조인 존비(尊庇)는 관직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렀고, 조부 암(嵒)은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필적할 만큼 명필로 유명하였는데, 특히 예서(隷書)와 전서(篆書)를 잘 썼다. 이암은 관직이 공민왕 대에 수 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충정왕(忠定王)의 즉위에 공이 있어서 그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부친인 강(岡)은 공민왕의 신임을 받았는데,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있던 36세에 죽었다. 원래 추밀(樞密)은 시호를 내리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의 특별한 배려로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와 같이 보면 이원의 가계는 이미 선대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하거나 국왕의 지우(知遇)를 받는 등 명문거족(名門巨族)의 성격이 있었다. 그의 가문은 이원 대에 이르러서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태종 대에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올라서 공신으로서 기반을 굳혔으며 전처 허씨와의 사이에 1남 2녀, 후처 최씨와의 사이에서 6남 4녀 등 모두 7남 6녀를 낳아서 가문이 번화(繁華)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조선 초의 대학자인 권근(權近)은 그의 자형이고, 권근의 손자이며 세조 대의 공신인 권람(權擥)은 그의 사위이다. 아들 가운데 유명했던 인물로는 대(臺)ㆍ지(墀) 등이 있고, 손자로는 륙(陸)이 있다. 또 손서(孫壻)로는 선비 화가로 이름이 높았던 강희안(姜希顔)이 있고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부친인 윤호(尹壕)가 있다.
이원의 생애는 권수(卷首)에 수록된 연보를 통해 그 대략을 살필 수 있다. 이원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부친을 여의었다. 이후 5세부터 자형인 권근에게 수학하였는데, 권근이 자식처럼 가르쳤다고 하니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원은 고려 말인 1385년(우왕11)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시관(試官)인 정몽주(鄭夢周)는 일찍 세상을 뜬 이원의 부친 이강을 떠올리며, 하늘이 무심하지 않음을 감탄하였다고 한다. 조선 왕조의 건국 과정에서 당시 관료와 지식인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건국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적극적으로 반대한 사람도 있었으며, 그 사이에서 현실을 묵인하거나 은둔한 사례도 있었다. 이원의 경우 고려 말인 1388년 21세에 사복시 승(司僕寺丞)으로 사환(仕宦)을 시작한 이래 공조와 예조의 좌랑(佐郞) 및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조선이 건국될 때 이원은 25세로 대체로 조선 왕조의 건국을 긍정적으로 보고 협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건국 이후에 사헌부 지평을 지냈고, 태조 대에는 주로 사헌부에서 시사(侍史), 중승(中丞)으로 활동하였던 사실을 통해 당시 다수 관료들처럼 건국에 협조적인 입장을 취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원이 사헌부에서 근무하며 동료들과 함께 올린 상소에는 당시 급무인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필요한 내용이 많았다.
이후 정종 대에 그간의 능력을 인정받아 우부승지에 임명되었고, 다시 당상관에 올라 곧 좌승지가 되었다. 정종 대에 이원은 우부승지로서 정종과 이방원(李芳遠 태종) 사이에서 둘의 관계를 매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정치의 토대를 닦게 되었다. 이후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 협력하여 좌명 공신(佐命功臣) 4등에 녹훈되고 철성군(鐵城君)에 봉해졌다.
태종 대에 그는 관직 생활에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 시기에 그는 대사헌, 판한성부사, 예조 판서, 병조 판서,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 의정부 찬성, 이조 판서 등의 내직을 거쳤고, 외직으로는 경기도 관찰사, 평양부윤 겸 서북면도순문찰리사(平壤府尹兼西北面都巡問察理使), 경상도 관찰사, 강원도 동북면 순찰사 등의 관직을 거쳤다. 1418년(태종18)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태종 대에 이원의 정치적 역할은 그가 거친 관직으로도 알 수 있지만 그가 태종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신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태종은 그에게 빈전도감 판사(殯殿都監判事), 신경 제조(新京提調),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위관(委官), 봉책보(封冊寶)와 같은 특별한 직책을 맡겨서 그를 깊이 신뢰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또 왕조에서 행하는 주요 의식(儀式)에서 국왕을 대신하여 행사를 주관하기도 하였고, 공신(功臣)들의 범죄를 다루는 미묘한 사건을 맡아 처리하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 그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관료로서의 일상적인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데에도 비교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태종 대에 관료로서의 행적은 크게 사헌부 대사헌과 예조ㆍ병조ㆍ이조의 판서, 경기도 관찰사ㆍ평양 부윤 등의 외직인 지방관, 그리고 우의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사헌부 대사헌은 태종 대에만 세 차례를 지낼 정도로 자주 임명되었다. 이원이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사헌부의 풍속을 변화시켰는데, ‘안색을 바로 하여 조정에 임하고, 악을 제거하고 선을 떨치며, 꺼리지 않고 바른말을 하여 사헌부 신하로서의 체모가 있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직무를 잘 수행하였다.
이 시기 사헌부는 국왕에 대한 간쟁을 담당하고 백관의 잘못을 시정함으로써 관료제 운영에서 그 역할이 매우 중요하였다. 더구나 왕조가 개창(開創)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국왕과 관료 사이에서 한편으로는 비판을 하고, 한편으로는 조정을 하는 역할을 통해 관료제의 안정적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사헌부의 대간(臺諫)으로서의 직무였기에 이원의 역할은 매우 컸다. 이원은 검교직(檢校職)의 혁파와 대간의 자격 강화를 주장하였고, 대간의 일상적인 임무인 백관에 대한 탄핵 활동도 수행하였다.
판서로서 이원은 예조에서 근무하며 과전(科田)의 수조법(收租法) 논의에 참여하기도 하였는데, 사전(祀典) 체제의 재편이나 체제의 정비, 향촌 질서의 재편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병조에서 판서로서는 비교적 오래 근무하였는데, 이때에도 세자(世子)의 계사(啓事) 참여는 필요하지만 임금이 주체가 되어 결정할 것을 주장하였고, 부렴(賦斂)을 위해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하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 병조의 업무인 군역에 관해 제안하기도 하고 강무(講武)의 시행에 대해 건의하기도 하였다.
지방관으로서 이원은 이미 태조 대에도 양근군(楊根郡)에 임명되어 군정을 경험하였다. 태종 대에는 1402년(태종2) 경기도에 관찰사로 나가서 ‘무능한 사람을 물리치고 유능한 사람을 서용하는 일을 매우 명백하게 하니 교활한 토호들이 두려워 위축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또 다음 해에 평양 부윤으로 부임해서는 대동관(大同館)을 수리하는 데에 직접 나서서 모범을 보이니 백성이 기꺼이 부역하여 공사가 빨리 완성되었다고 한다.
평양 부윤은 지방관 가운데서도 가장 위상이 높았는데, 이는 대중국 외교에서 사신 영접 등의 일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정 능력뿐만이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유능한 인물이 부윤으로 제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이원 역시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이원은 외교에서도 역량을 발휘하였는데, 세종 대까지 모두 세 차례나 중국에 사신 가서 외교 현안을 해결하였다. 태종의 즉위로 명나라에서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내려 준 것에 대한 사은(謝恩)을 위해 1403년(태종3) 명나라에 갔을 때는 《통감강목(通鑑綱目)》과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얻어 오기도 하였다. 또 세종 대에는 명나라의 문황제(文皇帝)가 사신으로 온 이원을 보고 그의 풍채가 뛰어난 데 감탄하여 다시 올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태종 대에 조명(朝明) 간에 미묘한 외교 사안이 발생했을 때 이원을 보내 일을 처리할 것을 건의하는 것을 보면 그의 외교 능력은 조선과 명에서 모두 인정받았던 셈이다.
세종 대에 이원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이미 우의정이었던 이원은 좌명 공신 박은(朴誾)이 물러나면서 1420년(세종2)에 좌의정이 되었다. 1422년에 태조의 비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능인 제릉(齊陵)에서 시행된 제례에서 태상왕(太上王)이 초헌관(初獻官), 주상(主上)이 아헌관(亞獻官), 이원이 종헌관(終獻官)이 되었던 일은 그의 위상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정국의 운영과 관련된 일에도 이원의 의견은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예를 들어 1419년(세종1) 7월에 대마도를 치러 갔던 수군들이 해안에 머물고 있는데, 이들을 다시 가게 하는 것보다는 정비를 한 이후에 시기를 보아 결정할 것을 건의하였고, 상왕인 태종은 이를 수용하였다. 또 1424년 당시 문제가 되었던 사사(寺社) 노비의 혁파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원은 급격한 변화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변화를 추구하였다. 불교를 이단으로 비판하기는 하였지만 승려들이나 승선(僧選), 승비(僧批), 승록사(僧錄司)를 갑자기 없애는 것에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던 것을 보면 그의 이러한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또 1425년(세종7) 6월, 관리의 승급이나 수령의 파면 등에 대해서도 관료제의 안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제시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1명이던 사관을 2명으로 늘려서 입시하게 하는 등 사관 제도를 정립하는 데에도 중요한 건의를 하였다.
이원의 이러한 활동은 전반적으로 조선 초기 새 왕조의 통치 기반을 정비하는 데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역할이 막중하고 권세가 높아짐에 따라 한편에서 그에 대한 비판도 있게 되었다. 이원을 비판하는 어떤 사람이, 그가 부상(富商) 내은달(內隱達)의 딸을 서로 첩으로 들이려고 홍여방(洪汝方)과 다툰 것을 탄핵하였는데, 태종이 이를 문제 삼지 않은 적도 있었다. 또 1424년에 뇌물 사건으로 표피(豹皮)와 표지(表紙)를 받은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결국 1426년 3월, 사헌부에서는 이원이 친인척에게 관직을 남발한 점, 노비 취득 과정이 석연하지 않은 점, 문제가 되었던 첩을 임금의 명령을 어기면서 들인 점 등을 이유로 탄핵하였다. 세종은 그에게 큰 문제가 없다고 보았지만 사헌부에서 거듭 요청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어서 결국 여산(礪山)에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 일부 탄핵받을 일을 했지만 신도비에도 ‘10여 년 동안 현명한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고 인사에 사사로움을 개입시키지 않았다’고 나와 있듯이 전반적으로 관직 생활에서 바르고, 인사에서 공정하게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세종은 그의 능력이 아쉬웠던 듯 큰일을 의논할 때마다 이원이 있었으면 잘 처리했을 것이라고 탄식하였다 한다.
3. 문집의 형태와 편찬ㆍ간행
《용헌집》의 판본은 4권 2책으로 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이 기준이 된다. 권수제와 판심제가 ‘容軒先生文集’이며, 판본은 석인본(石印本)으로 연보와 목록, 본집이 합쳐진 형태이다. 반엽(半葉)은 10행 18자, 반곽(半郭)의 크기는 20.8×16cm, 어미는 상이엽화문어미(上二葉花紋魚尾)이다. 이 석인본은 1957년 경상도 청도(淸道)에서 간행되었다.
《용헌집》은 이원의 사후에 즉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유배지에서 세상을 마쳤으며, 세조 2년(1456)에 가서야 복권이 되었기 때문이다. 복권이 된 후에도 문집이 단독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원의 시는 철성이씨세고(鐵城李氏世稿)인 《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에 편입되어 1476년에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철성연방집》은 이원의 손자인 공조 참의 이륙(李陸)이 성종 7년(1476)에 엮어 간행한 책이다. 권수(卷首)에 철성 이씨의 족보를 시조인 진(瑨)으로부터 8촌 대까지 설명한 다음 묘지명(墓誌銘)과 서(序)를 수록하였고, 그다음에 평재(平齋 이강(李岡))의 시 1권 40수와 용헌(容軒)의 시 1권 231수가 차례로 실려 있다. 이암(李嵒)과 아들 강(岡)의 묘지명은 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이색(李穡)이 썼으며 강의 묘지명에는 서거정(徐居正)의 글이 병렬(竝列)되어 있다. 서(序)는 서거정, 이륙, 정인지(鄭麟趾)가 쓴 세 편이 있고 끝에 유윤겸(柳允謙), 윤호(尹壕) 및 후손 보(保)의 발(跋)이 있다. 유윤겸에게 교정을 받고 경상 감사 윤호의 도움을 받아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에도 《철성연방집》은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그때마다 저자의 시도 편입되어 간행되었다.
이후 1925년 안동의 의병 권상규(權相圭)는 고성 이씨 후손들에게 이원에 관한 자료가 없어진 것을 애석하게 여겨 비각(秘閣)에 소장된 열성(列聖)의 실록(實錄)을 살펴 조사하여서 저자의 관자(官資)ㆍ제배(除拜) 기록 및 소(疏)ㆍ계(啓)ㆍ헌의(獻議) 등의 글을 뽑았다. 여기에 후손 이종박(李鍾博)이 권상규와 함께 실록 및 가승(家乘)을 바탕으로 연보(年譜)를 만들고, 저자의 시문 및 제가(諸家)가 지은 글을 합하여 4권 2책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후손 이우기(李宇基)ㆍ이정태(李庭泰) 등이 1957년 도주(道州 청도(淸道)) 군자정(君子亭)에서 석인(石印)으로 간행하였다.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62-52), 연세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 번역서의 대본은 국립중앙도서관본이다.
4. 수록 내용
《용헌집》은 모두 4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卷首)에는 연보(年譜), 1475년(성종6)에 쓴 정인지(鄭麟趾)의 서(序), 목록이 실려 있고, 권1~2는 시(詩), 권3은 문(文), 권4는 증유(贈遺)ㆍ척록(摭錄)ㆍ부록(附錄)이다.
〈용헌선생문집 서문〉은 1475년 문집을 만들었을 때 정인지가 쓴 것이다. 이원의 손자 이륙(李陸)이 유고(遺稿) 1질을 가져와 부탁하여서 서문을 작성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원의 시문이 많지 않지만 군자의 기상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권1에는 〈이격 선생의 시에 차운하다〔次李先生格韻〕〉 등 시 41제가 수록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지금의 동두천시에 해당하는 사천(沙川), 광주(廣州)에 해당하는 광릉(廣陵), 장단(長湍), 마전(麻田), 회암사(檜巖寺), 철원(鐵原), 강화(江華) 등을 소재로 하여 주로 경기도 관찰사를 지낼 때의 소회를 쓴 시, 시중루(侍中樓), 대동강(大同江), 정주(靜州), 개천군(价川郡), 인왕사(仁王寺) 등을 소재로 하여 평양 부윤에 있을 때 지은 시, 또 당시 교유하였던 판서 유겸(柳謙), 곡산 군수 정 사군(鄭使君) 등에 화답한 시, 이 밖에 경상도 관찰사 함부림(咸傅霖), 참의 고봉례(高鳳禮),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 광주 목사(廣州牧使) 유겸(柳謙), 함주 목사(咸州牧使) 이안우(李安愚) 등과 교유한 시 등이다.
권2에도 〈급히 써서 영가군이 중원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전송하다〔走筆送永嘉君奉使中原〕〉 등 시 157제가 실려 있다. 권1~2에 실린 시는 모두 198제로서 《철성연방집》에 실린 것과 거의 일치하나 《철성연방집》에는 없는 〈어제 연구(御製聯句)〉 1수가 있으며, 반대로 《철성연방집》에 있는 〈앞의 운자(韻字)를 쓰다〔用前韻〕〉가 없다. 《철성연방집》 권3 말미에는 〈김천 무민루(金泉撫民樓)〉 시가 제목만 수록되어 있다.
권2에 실린 시를 몇 가지로 나누어서 살피면 다음과 같다. 대체로 사신 가는 이들을 전송하는 시로, 영가군(永嘉君) 권홍(權弘), 옥천군(玉川君) 유창(劉敞),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설미수(偰眉壽) 등에게 준 것이 있다. 두 번째로는 지방관으로 나가는 이를 전송하거나 지방관에게 보내는 시로 강원도 관찰사 윤사수(尹思修), 황해도 관찰사 함부림, 평양 부윤 박신(朴信), 경차관(敬差官) 허해(許該), 광주 목사 유겸 등에게 보낸 것이 있다. 세 번째로는 시를 주고받으며 교유(交遊)를 하였던 예로써 허형(許衡)ㆍ안노생(安魯生)ㆍ이첨(李詹)ㆍ하륜(河崙)ㆍ권홍ㆍ윤개(尹愷)ㆍ배충(裵衷)ㆍ정효복(鄭孝復)ㆍ성석린(成石璘)ㆍ이감(李敢)ㆍ변계량ㆍ김섭(金涉)ㆍ민설(閔渫)ㆍ탁광무(卓光茂) 등에게 보낸 시가 있다. 네 번째로는 사찰에서 짓거나 승려들과 교유하였던 예로 진관사(眞觀社), 승려 삼정(杉庭)과 일운(一雲), 개성사(開聖寺), 관음사(觀音寺), 승가사(僧伽寺), 일본 승려 범령(梵齡), 보흥사(普興寺), 명정암(明正庵), 인왕사(仁王寺), 영통사(靈通寺) 등과 관련된 시가 있다. 다섯 번째로는 누각 등의 명승지에서 감상을 읊은 시로 평안도 용천군(龍川郡) 이언(伊彦), 상주(尙州)의 새로 지은 누각, 경상도 김해의 연자루(燕子樓), 안동(安東)의 영호루(映湖樓), 예천(醴泉), 여주(驪州), 함창(咸昌), 청도(淸道), 선산(善山), 언양(彥陽) 동헌, 개령(開寧)의 무민루(撫民樓), 울주 팔경(蔚州八景), 경주(慶州) 동헌, 황간(黃澗)의 누각, 순흥(順興)의 누각, 초계(草溪)의 감정루(鑑政樓), 창녕의 구암(龜庵), 평안도 순천(順川)의 누각, 성천(成川)의 서루(西樓), 대동관(大同館), 마전(麻田)의 동헌, 임진정(臨津亭), 양천정(陽川亭), 안산(安山)의 동헌, 양주(楊州)의 동헌, 합천 징심루(澄心樓), 회원루(會元樓), 영남루(嶺南樓), 영주(榮州)의 동헌, 영산루(靈山樓), 영덕(盈德)의 청심루(淸心樓) 등을 소재로 한 것이 있다. 이 가운데 사찰에서 짓거나 승려들과 교유한 시가 몇 수 보이는데, 이는 조선 초 불교를 배격하는 가운데서도 이원이 불교계와 교류를 하였던 증거로 볼 수 있다.
권3에는 문(文)으로 소(疏) 17편, 차계(箚啓) 13편, 전(箋) 2편, 헌의(獻議) 5편이 실려 있다. 대체로 저자가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 올린 장주(章奏)를 조선왕조실록에서 뽑아서 각 문체의 형식으로 구분하고 같은 문체 내에서는 시대순으로 편차하였다. 따라서 상소나 차계, 전이나 헌의에 실린 내용은 새로운 내용을 담은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지 않다. 다만 이원이 활동한 시기인 조선 초기의 정치와 제도, 외교, 사회와 국방 등 여러 방면에서 주요한 문제를 적지 않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검토의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조선 왕조가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올린 상소인 〈열 가지 조항을 올리는 소〔上十條疏〕〉(1392, 태조1)에서 기강을 세울 것, 상과 벌을 명확하게 할 것,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 간쟁을 받아들일 것, 참소하는 말을 막을 것, 편안함과 욕망을 경계할 것, 절약과 검소를 숭상할 것, 환관을 배척할 것, 승려를 가려서 없앨 것, 궁궐 출입을 엄하게 할 것을 청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기본적인 원칙을 제시하였다. 또 같은 해에 올린 〈열한 가지 조항을 올리는 소〔上十一條疏〕〉에서는 서북면 군사의 배치와 운용 방법, 중관(中官)과 엄수(閹竪)의 제어 방법, 내탕고(內帑庫)의 출납 등 구체적인 치세의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상소나 계에서는 의장(衣章)을 정할 것, 검교(檢校)를 혁파할 것, 동궁(東宮)을 세우고 사부(師傅)를 둘 것, 노비(奴婢) 쟁송(爭訟)을 금할 것, 사사(寺社) 노비를 혁파할 것, 좌사(左史)와 우사(右史)를 둘 것, 시종(侍從)을 줄이고 강무(講武)를 잠시 행할 것 등 제도의 정비나 개혁 등에 관한 것이 많다. 이 밖에도 환관 조순(曺恂)의 처벌을 청한 것, 공신인 이숙번(李叔蕃)과 장담(張湛)의 잘못을 탄핵한 것, 사신으로 가서 잘못한 권희달(權希達) 등에게 죄줄 것을 청한 것, 양녕대군(讓寧大君)에 관해 청한 것 등은 궁중이나 공신, 대군 등 국왕과 밀접하게 관련된 일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였던 이원의 입장을 잘 살필 수 있는 글이다. 국왕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에도 여러 차례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태상왕에게 휘호를 올릴 것을 청하는 계〔請上太上王徽號啓〕〉와 〈주상 전하에게 경하를 올리는 전〔上主上殿下賀箋〕〉 등을 통해 살필 수 있다.
권4에는 변계량(卞季良), 이직(李稷), 권근(權近)이 지은 증유(贈遺) 5편, 《도학연원록(道學淵源錄)》ㆍ《대동운옥(大東韻玉)》ㆍ가전세록(家傳世錄)의 척록(摭錄) 3편, 부록 11편이 실려 있다. 증유는 이원이 관찰사 및 평양 부윤으로 있을 때 받은 시와 문이다. 부록에는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비롯하여 명계서원(明溪書院)ㆍ명호서원(明湖書院) 등 이원이 배향(配享)된 서원의 봉안문(奉安文)ㆍ상향축문(常享祝文)ㆍ고유문(告由文) 등이 실려 있다. 권미(卷尾)에는 권상규(權相圭)의 후서(後敍)와 1957년에 쓴 이중구(李仲久)의 발문(跋文)이 실려 있다. 후서와 발문 뒤에는 각각 ‘丙申仲夏重刊道州君子亭’, ‘丁酉仲秋重刊于道州君子亭’이란 간기(刊記)가 있다.
5. 맺음말
이상으로 이원의 가계와 생애, 문집의 형태와 편찬ㆍ간행, 수록 내용 등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원은 여말선초의 시대적 전환기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시문에도 능하였던 훈구파의 일원이었다. 여말선초의 변화가 매우 컸고, 이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다양하였기에 중앙의 무대에서 고위직에 있으면서 현실에 대응하였던 이원을 살피는 것은 이 시기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이원은 좌명 공신으로 태종의 측근이 되었고, 이후 태종 대와 세종 대의 초반에 걸쳐 내외의 주요 관직을 거쳤다. 또한 중국에 세 차례나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경력을 통해 조선 초 왕조의 개창기에 각종 제도의 정비와 외교, 국방, 사회 등 각종 제기된 정국 현안에 대해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태종과 세종의 가장 중요한 의논 상대가 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세종이 국정의 주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원을 아쉬워하였다는 점은 이를 증명해 준다.
다만 경장(更張)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새로운 변화보다는 기존 체제의 안정적인 유지와 정비에 더욱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헌집》의 번역을 통해 여말선초 지배 세력의 교체 과정과 정국의 추이, 주요 국정의 현안, 훈구 세력의 정체 등을 밝히는 데 조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2013년 11월 10일
ⓒ 한국고전번역원 | 정재훈 | 2013
첫댓글 고려 말 조선 초는 역사적인 격동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많은 인물들이 시대의 변혁기에 대응하며 살았다.
그 가운데서도 이원은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대응한 인물에 속한다
조선 초의 대학자인 권근(權近)은 그의 자형이고,
권근의 손자이며 세조 대의 공신인 권람(權擥)은 그의 사위이다.
손서(孫壻)로는 선비 화가로 이름이 높았던 강희안(姜希顔)이 있고
제릉(齊陵) : 황해북도 개풍군 대련리에 있다
수도 천도 이전에 만들어진 능묘이기 때문에 개성에 위치,
후릉 등과 함께 북한에 있는 조선 왕릉 중 하나.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 1337년 음력 9월 ~ 1391년 10월 21일(음력 9월 23일))의 능
조선 태조(太祖)의 첫 아내로 정종과 태종의 생모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여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지병인 위장병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안천부원군 한경(安川府院君 韓卿)과 삼한국대부인 신씨(三韓國大夫人 申氏)의 딸로 본관은 안변(安邊)이다.
태조 2년(1393년)에 절비(節妃)로 추증되었다가
1398년 그녀의 소생들이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태조가 하야하고
그녀의 둘째 아들인 정종이 즉위하여 비로소 왕후로 승격되었다.
시호는 승인순성신의왕후(承仁順聖神懿王后)이며,
1897년 대한제국 수립 후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로 추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