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방귀를 트고 싶다
이 화 은
「튼다」라는 말은 개통 또는 소통을 말함이다. 시작과 동시에 진행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친한 사람과는 먼저 말을 튼다. 더 친해지면 방귀도 튼다. 마음을 트고 몸을 튼다. 드물게 상처를 트는 경우도 있다. 작은 상처는 친한 사람끼리 쉽게 틀수도 있지만 상처가 깊을수록 트기 어렵다. 내 상처를 함께 아파해 줄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남의 불행이 내 행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남의 상처로 내 상처를 위로 받는 게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지독한 상처를 똑 같이 나눠준, 그야말로 지독한 사랑을 나는 알고 있다. 아니 지독히 질투하고 있다. 1887년에 태어나 1968년에 돌아가신 이태리 사람 「비오」 신부는 몸에 다섯 군데의 상처를 평생 지니고 살았다고 한다.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에 진물이 흐르는 헌데를 50년간 징표처럼 안고 살았다니!
오상五傷!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자기와 똑 같은 상처를 그에게 선물한 것이다. 즉 그들은 상처를 튼 것이다. 참으로 우직하고 미련스러운 사랑의 방식이 아닌가. 예수의 재산이 상처뿐이었으니 자기의 전 재산을 몽땅 내어준 셈이다. 종교적 의미를 떠나서 자기의 치명적인 고통을 함께 나누는 그들의 우직하고 미련한 사랑이 나는 못내 부러웠다.
시를 읽을 때도 습관처럼 상처를 더듬게 된다. 상처가 없는 시는 주인이 없는 빈 집 같아 몇 번 흠흠 거리다 하릴 없이 되돌아 나오고 만다.
시와 트고 싶다. 말을 트고 몸을 트고 마음을 트고 싶다. 서로의 악취에 코를 싸매면서도 한없이 좋기만 한 방귀까지 트고 싶다. 예수와 「비오」 신부처럼 상처를 나눠 가지며 그렇게 사랑하고 싶은데!
며칠 전 오래 묵은 상처 하나를 꺼내 먼지를 털어 내고 다시 들여다보다가 결국 도로 덮고 말았다. 아니 잡지사에 보냈다가 다른 시로 바꾸고 말았다. 아팠기 때문이다. 시를 쓰면서 이렇게 아플 필요가 있나 싶었다. 결국 나는 아프지 않은 상처를 원했던 것인가. 아프지 않은 시를 두고 아프다고 거짓 비명을 지르는 중인가. 엉덩이에 난 뽀드락지 하나로 「비오」 신부의 오상 흉내를 내고 싶으신가. 자책도 습관이다.
꽃이 피기도 전에 꽃 지는 일이 두려운 나는 저 봄과도 꽃 한 송이 트지 못하고 있다.
상처가 부재중인 시 속에 앉아 상처가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다
.
말을 섞는다는 건
혀를 섞는다는 말
말을,
반으로 잘라 서로의 몸에 바꾸어
삽입한다는 말
그래서 몸을 섞고 나면 남과 여는
서로
반말을 한다는데
반만 말해도 된다는데
싸래기 눈이
싸래기밥 먹고 지저귀는 빈 입처럼
시끄러운 겨울날
싸그락싸그락
싸래기 눈이 내 혓바닥을
긁어대는 날에는 나도
누군가와 말을 트고 싶다
이화은 「반말論」 부분
말을 트고 몸을 트고 나면 반만 말해도 된다. 반의반만 말해도 된다. 그러고 싶은데 아니 사실은 침묵하고 싶은데, 말하지 않아도 찰 떡 같이 붙어있는 시와 나는 그런 사이가 되고 싶은데! 오늘도 빈 말만 무성했다.
----------------------------------------------
2019년 포엠포엠 봄호
첫댓글 예수님과 상처까지 튼 비오 신부가 부럽습니다
부러우면서도 나에게 진물이 흐르는 오상을 50년간 가지고 살라면 고개를 흔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알량한 신앙이 그 불편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아요
시도 트고 말도 트고 마음도 트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 방귀 맛이 납니다
역시 시 기질이 대단하십니다
여러겹으로 '트인' 시!
시제목부터 장난이 아님니다요 '詩와 방귀를 트고 싶다'
'상처가 없는 시는 주인이 없는 빈 집 같아 몇 번 흠흠 거리다 하릴 없이 되돌아 나오고 만다.'
곰곰 생각하게 하는 말입니다
사그락 사그락 긁어댄다는 표현을 저도 어제 쓴 시에 표현을 했는데
오늘에야 선생님의 시를 보았는데, 절대 선생님의 시를 표절한 것은 아닌데
먼저 발표한 사람이 말을 전세내는 것과 같은,
오 찌릿해라.
<꽃잎이 잎새에게> 수정본 나오면 곧바로 보이겠습니다.
사실 어제 쓴 것이라 산고를 거쳐 제출할려고 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