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12월 12일이었다. 대한민국 극소수의 ‘절대 갑’이라는 대한항공의 조양호 회장이 언론 앞에 나와 머리를 여섯번이나 조아리며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사과를 한 날 말이다. 정확히 35년 전 그날은 대한민국의 군부가 쿠데타로 다시 정권을 장악한 날이기도 했다.
항공업계 전대미문의 대한항공 ‘땅콩리턴’ 사건에 참여연대가 고발장을 접수했고 검찰은 그다음 날 전격적으로 대한항공을 압수수색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시민단체의 고발에 검찰이 이렇게 순식간에 공조를 이뤄낸 적이 있었을까?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을 출두시키라는 압력이 강해졌고, 출국금지가 이뤄졌으며, 고발장이 접수된 지 3일 만에 전격 조사와 재벌 총수의 사과가 이어졌다. 한국사회를 살아오면서 재벌가의 부녀가 같은 날 시차를 두고 고두(叩頭)하는 것은 처음 보는 풍경인 듯했다. 게다가 마흔이 넘은 자식을 잘못 가르쳤다며 사과하는 것도 희한한 장면이었다.
모든 이슈의 블랙홀: 분노와 놀이 사이에서
언제나 ‘떡밥’에 대한 갈망이 큰 인터넷에는 비판과 조롱, 해학과 비난, 가십과 루머로 가득 찼다. 인터넷 뉴스는 정말 미친 듯이 쏟아졌다. ‘라면 상무’ 사건에 이어 남양유업 사건으로 촉발된 갑의 횡포 논란에다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폭행사건에 이르는 대한민국 절대 갑 재벌2·3세 논란, 그리고 세월호사건과 잠실 롯데월드 문제, 씽크홀로 이어지는 안전에 대한 논란까지, 이번 땅콩리턴 사건은 이 모든 이슈를 망라하였다. 게다가 학력위조로 출발해서 정치권 비리까지 ‘진화’했던 신정아 사건처럼 단순히 항공안전과 절대 갑 논란이 아니라 정치권과 대학에까지 불길이 번지고 있는 중이다.
에어아시아 회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디스’를 날렸고, 해당 견과류 상품 수입업체는 “물 들어 올 때 노 저어야 한다”를 광고문구로 프로모션을 진행했다. 그리고 초유의 재벌 부녀의 고개 숙인 사과가 이어진 문제의 그날, 사그라들 줄 알았던 논란은 사건의 피해자인 사무장이 모자이크도 없이 전격 등장하면서 오히려 증폭됐다. ‘갑질’의 피해자들 중에 이렇게 미디어에 얼굴을 내밀고 직접 자기 피해사실을 호소했던 적이 있었던가?
게이트가 닫히는 순간 기장은 기내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갖게 된다. 기체결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테러용의자가 타고 있던 것도 아니고, 하물며 미확인 수하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비행기에 대한 세계 최고의 편집증을 갖고 있는 미국, 그것도 뉴욕 땅에서 어떻게 기장은 게이트 리턴을 결정했을까? 아무리 권위주의적인 기업문화로 유명하다지만 도대체 대한항공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기장은 누구였을까? 2011년 고용노동부가 불법파견이라고 판단한 해외용역업체 소속의 외국인 파일럿은 아마 아닐 거라는 짐작을 했다. 그렇다면 상하관계가 뚜렷하고 권위주의적 문화가 좀더 심하다는 군 출신의 조종사였을까? 아니면 상대적으로 이들보다는 덜 권위주의적이라는 항공대학이나 일반 대학을 마친 후 비행훈련을 수료한 민간 출신의 조종사였을까? 사실확인 결과 민간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상대적으로 군 출신 조종사들에 비해서 사측과 긴장, 마찰이 있고 ‘덜’ 권위주의적이라는 민간 출신 조종사마저 사주 자녀의 불평에 자기권한을 포기할 정도라면 도대체 저곳은 얼마나 심각한 것일까? 이 사실은 대한항공 내부에서 권위주의적 문화와 권력이 전문직의 권위와 의사결정을 얼마나 지배하고 압도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권위주의의 비극: 도처에 존재하는 마름들
하지만 이런 권위주의의 병폐는 사주와 고용인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도처에 존재한다. 1989년 리비아 트리폴리 공항의 대한항공 803편 추락사건, 97년 229명이 사망한 대한항공 801편 괌 추락사건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항공사고에 대해 해외 전문가들은 종종 권위주의적인 한국의 조종실 문화를 사고의 원인으로 지적해왔다. 물론 오리엔탈리즘적인 분석이라는 일각의 비판이 있지만, 어느정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또한 승무원들 사이에도 흡사 군대와 같은 권위주의적 문화는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지상직을 보면 항공사의 정규직 직원과 비정규직 사이에도 이러한 권력관계가 그대로 나타나곤 한다. 뿐만 아니라 승객들이 승무원을 비롯한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회사는 이러한 수많은 권력관계를 경영에 종종 이용하기도 한다. 사주는 이렇게 수많은 권위주의적 갑을관계와 권력관계의 정점에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비록 ‘절대갑’이 없는 상황에서도 도처에 ‘갑질’ 혹은 ‘마름질’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재벌의 횡포와 갑의 전횡 등 일련의 논란도 중요하지만, 이번 사건은 궁극적으로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한국의 공적·사적 영역을 철저하게 장악하고, 폭력과 패악이 재생산되도록 작동하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권위주의에 대한 성찰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역사학자 전우용이 트위터에 올린 짧은 글은 바로 이런 지점을 포착하고 있다. “(…) 독재는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작은 독재자들이 독재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입니다.”
좀더 이어서 생각해보면, 매순간 “작은 독재자”를 만들어내는 권위주의의 짙은 그림자가 우리의 일상생활을 지배하고, 그것이 바로 삶에 대한 피로와 과도한 감정의 착취를 낳으며, 끝내 우리의 안위와 안전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한국사회에서만큼은, 성과 중심의 피로보다, 이처럼 권위주의체제하에서 독버섯처럼 퍼져나가 우리 일상을 식민화한, 모멸에 바탕을 둔 권력의 작동방식과 지배질서가 우리를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소비자 시대’를 맞는 결과는 참혹할 정도다. 식당에서 종업원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들, 콜센터 직원에게 온갖 분풀이를 하는 사람들, 경비원에게 음식을 던져주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소비의 권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를 착취하는 마름들이자 작은 독재자인 것이다.
다시, 민주화라는 것
군사정권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지도 이제 20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 군사주의가 공들여 빚어낸 한국의 권위주의는 도처에 남아서 아직도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눈높이 서비스, 친절이라는 미명 아래 일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있다. ‘소비자는 왕’이기 때문이다. 노동과 시중 그리고 굴욕은 이렇게 한국적 권위주의하에서 삼위일체를 완벽하게 이뤘다. 이같은 상황에서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상의 민주화일 것이다.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는, 말하긴 너무도 쉽지만 한국사회에서 아직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단순한 명제를 삶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이 사건이 대충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면 대한항공 홍보팀과 해당 승무원들에게는 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 직위가 높을수록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하달하는 데 익숙한 한국의 권위주의 문화를 생각할 때, 이들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어째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정언을 할 수 없었는지 생각하지는 않은 채 “왜 나에게 아무도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느냐?”라고 화를 냈다는 조양호 회장을 보니 더더욱 그러하다. 절대 갑에 대한 분노가 주변에 있다는 사실과, 자신에게 무의식적으로 자리잡은 ‘작은 조현아’를 성찰함으로써 일상의 민주화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이런 사건은 주인공만 바뀐 채 반복되는 막장드라마처럼 한국사회에서 계속될 것이다.
이규호 / 일리노이대 어바나-샴페인 인류학과 박사과정
2014.12.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