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이 개통돼 생활권이 수도권으로 확장된 천안시에 넉넉한 인심의 농촌마을이 있다. 벽화를 통해 소박한 변화를 꿈꾸는 양곡리는 마음 속 새겨둔 농촌 풍경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충청남도 서북부에 위치한 천안시는 수도권까지 생활영역이 확대된 도시지역이다. 천안의 인구는 1990년대 들어 꾸준히 증가해 2009년 11월 현재 55만명이다. 충청남도 도시 중 인구가 가장 많다. 수도권 여느 도시 못지않게 도시화가 진행된 천안이지만 아직 때 묻지 않은 곳이 있다. 천안시 동남구 북면에는 500여 가구의 농가가 있다. 최근 ‘이야기가 있는 벽화만들기’ 사업을 펼치고 있는 북면 양곡리는 산과 물이 어우러진 자연환경에 넉넉한 인심이 살아있는 도시 속 농촌 마을이다.
양지바른 골짜기, 천안 양곡리
양곡리 마을 앞에 세워진 돌거북이는 장수와 효를 의미한다. (이윤정기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목천IC를 빠져나왔다. 다시 왕복2차선 도로로 20여분, 산과 들이 고즈넉하게 펼쳐진다. 빌딩과 상점이 즐비한 천안시가지의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천안시 동남구 북면은 한가하고 차분하다. “특별히 자랑할 게 있을까요. 농촌이 다 똑같죠, 허허” 취재를 가기 전 북면 양곡리 이봉재이장과 통화를 했다. 예쁘게 꾸미고 있는 마을을 한없이 겸손하게 소개한다. “다섯 봉우리가 마을을 감싸고 있고 또 계곡물이 좋아서 여름이면 풍취가 좋죠”라며 뒤늦게 마을 자랑을 덧붙인다.
양곡리를 찾는 건 의외로 쉬웠다. 도로 옆으로 알록달록 칠해진 옹벽이 200여m 펼쳐지고 ‘이야기가 있는 벽화마을 만들기’ 플래카드가 손님을 맞기 때문이다. 마을에 들어서자 돌로 쌓은 탑과 거북이가 인사를 하듯 입구를 지키고 섰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펜션 인근은 공원으로 깔끔하게 정비돼 있다. 이봉재 이장은 “양곡리가 볕양(陽)에 골곡(谷)자를 쓰거든요. 여기가 산골이어도 햇빛이 드는 양지바른 곳이에요”라며 마을 유래를 설명한다. 마을 뒤로는 산봉우리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늠름하게 섰고 마을 한 가운데로 병천천 줄기가 흐르고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마을 논 위로는 까치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날아다닌다. 50년은 족히 됐을 방앗간 건물과 옛 세월을 짐작케 하는 한옥들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양곡리에 들어서자 어렴풋이 마음속에 새겨놓았던 ‘고향풍경’이 펼쳐진다.
돼지, 개, 닭, 염소. 시골 담장의 수줍은 변신
천안KYC 벽화동아리 ‘우리가 그리는 세상’ 회원들이 양곡리 마을 입구 옹벽에 벽화를 그리고 있다. (천안KYC 제공)
양곡리 이장과 마을길을 걷는다. 어느새 새마을지도자, 마을 총무, 주민들이 일행에 합류했다. 마을 소개를 해준다고 나왔지만 모두 함께 길을 걷는 정도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순박한 인심이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새롭게 칠한 담장과 벽화다. 쓰지 않는 축사와 컨테이너 박스를 캔버스 삼아 돼지, 닭, 개, 염소 등이 벽화의 주인공이 됐다. 주민 홍은서(57)씨는 “자원봉사단체가 여름부터 칠하기 시작했어요. 요즘에도 그리러 오는데, 희한하게 그림 그리는 날 추위가 몰려와서 고생들 하대요. 그래도 깔끔하고 예쁘니 얼마나 좋아요”라고 말한다. 주민 채옥순(61)씨는 “자연환경이 좋아서 2년 전 양곡리로 이사왔는데 벽화가 그려지고 난 뒤에는 더 깔끔해져서 참 좋네요”라고 말한다.
마을 옹벽과 담에 벽화를 그린 사람은 시민단체 ‘천안KYC’와 ‘푸른천안21실천협의회’의 자원봉사자들이다. 천안KYC 벽화동아리 ‘우리가 그리는 세상’이 북면과 인연을 맺게 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천안KYC 강윤정사무장이 대학 시절 양곡리로 농촌봉사활동을 나왔다가 수려한 풍광과 넉넉한 인심에 반해 지금까지의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강사무장은 “꾸준히 벽화 그리기 사업을 해왔지만 마을 전체를 꾸민 프로젝트는 양곡리가 처음이에요. 농촌 분위기에 어울리는 소박한 디자인을 선택했는데 12월까지 최종작업이 끝나면 더 예쁠 겁니다”라고 말한다.
도시 속 농촌마을, 넉넉하고 여유로운 인심
양곡리에는 모두 53가구가 산다. 마을 중심부에는 주민이 공동으로 쓰던 방앗간 건물이 남아있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따로 방아시설이 있지만 15년 전만 해도 주민 모두 이곳을 이용했다. 여전히 대부분의 주민들은 농사를 짓는다. 그래도 다른 농촌지역에 비해 청년회 활동이 활발하다. 40~60세인 청년회 회원이 13명이나 된다. 마을 청년회는 개천 둑을 쌓고 오래된 시설을 손보는 등 마을 궂은일을 도맡는다. 올해에는 천안시 희망근로프로젝트를 신청해 돌탑쌓기 등 마을 꾸미기 사업을 일궈나갔다. 동남구 북면 오동균 면장은 “천안시 희망근로프로젝트를 농촌지역에서 진행한 건 양곡리가 처음이에요. 주민도 적극적이고 마을도 워낙 예쁘고요”라고 말한다.
양곡리 새마을지도자 김승진씨는 “청년회에서 마을을 위해 무엇을 할까 오랫동안 고심해왔거든요. 하나하나 실천해나가는 중이에요. 아, 참. 마을 뒷산인 개죽산의 혈을 받아 우리 마을에서 왕이 난다고 하대요. 허허”라며 마을 자랑을 한다. 수려한 자연환경만큼이나 마을이 좋은 터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저물자 노인회관에서 어르신들이 나온다. “벽화가 그려져서 깔끔해졌다”며 서로 “우리 집 담장도 그려주면 좋겠다”고 수다를 이어간다. 어느 집이 어떤 농사를 지었는지, 또 어느 집의 어려운 점은 무엇인지 소상히 알고 함께 걱정하는 이야기도 오간다. 도시에서 상상할 수 없는 친근함이 묻어난다. 양곡리의 시계는 도시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우리네 마을에 맞춰진 듯 여유롭고 넉넉하게 흐르고 있었다.
가는길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목천IC에서 나온다. 북면 방면으로 지방도 57호선을 타고 올라오다가 양곡리 표지판을 보고 들어오면 된다. 대중교통으로는 천안버스터미널에서 독립기념관을 거쳐 곡대까지 오는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380, 381, 382번 버스는 7시, 11시 45분, 16시 30분, 18시 55분, 20시 20분, 총 5번만 양곡리 마을 안까지 들어오고 나머지 시간에는 마을에서 2km떨어진 입구까지만 운행된다.
벽화가 그려진 축사 양곡리 마을 벽화는 화려한 그림이 아니다.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디자인이 대부분이다. 마을 축사였던 오래된 건물 벽은 깔끔하게 새옷을 입고 강아지들이 뛰어노는 공간으로 변신했다. 양곡리 벽화 프로젝트는 천안KYC와 푸른천안21실천협의회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진행됐다. (이윤정기자)
동물이 노니는 풍경 마을 벽화를 한창 촬영하고 있는데 주민 채옥순(61)씨가 강아지들과 함께 산책을 나왔다. 채씨는 천안시가지에서 살면서 양곡리에 주말주택을 얻어 사는 도시민이었다. 그러다가 양곡리의 자연환경에 반해 2년전 아예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화가이기도 한 채씨는 “어느 날부터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는데 보기가 좋더라고요. 저도 벽화사업에 참여하고 싶네요”라며 포부를 밝힌다. 산책을 하다말고 그림 앞에서 강아지들과 함께 포즈를 취해주었다. (이윤정기자)
벽화의 완성 양곡리 벽화에는 주로 염소, 돼지, 닭, 오리 등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축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인 양곡리의 풍광을 해치지 말자는 의도일 것이다. 벽화 앞 공터에는 어김없이 농기계와 농기구가 놓인다. 그래도 벽화의 아름다움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농가의 여과 없는 풍경들이 벽화를 완성하는 느낌이 든다. (이윤정기자)
벽화 밑작업 취재를 갔던 날 때마침 벽화 밑작업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얼핏 보면 벽화를 그리는 것이 쉬운 작업으로 보이지만 저렇게 벽에 모두 페인트로 밑작업을 한 뒤 스케치를 하고 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 양곡리의 벽화 만들기는 아직 작업 중에 있다. 아마 작업이 모두 끝나면 더욱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변해있을 것이다. (이윤정기자)
오래된 집의 변화 양곡리에는 새로 지어진 주택도 있지만 몇십년 된 한옥에서 그대로 생활하는 집들도 꽤 된다. 흙벽에 시멘트를 덧댄 공간에 밑칠을 하고 오리 가족을 그려넣었다. 소박한 그림들이 푸근한 마을 분위기와 어우러져 여유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윤정기자)
흙벽 50년은 족히 됐을 방앗간 건물의 벽을 찍었다. 나무, 짚, 돌을 섞어 전통방식으로 만든 흙벽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현재 양곡리 새마을지도자 김승진씨의 부친이 직접 방앗간을 지었다고 한다. 양곡리 이봉재이장은 “그 분이 어찌나 손재주가 좋았던지 이렇게 손으로 집을 지었었죠”라고 회상한다. 방앗간이 문을 닫은 지 15년이나 됐지만 건물만은 여전히 옛 향취를 풍기고 있다. (이윤정기자)
취재 노하우 전국 각지로 ‘아름다운 한국’을 찾아 취재를 다닌 지 어언 1년째다. 나름 터득한 취재 노하우가 있다면 바로 ‘노인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대부분 마을 토박이거나 시집와서 평생을 사신 분들이다. 그래서 마을 역사부터 변천사, 심지어 이웃의 시시콜콜한 가정사까지 모르는 게 없다. 사진을 찍자고 하면 대부분 “쭈글쭈글한 노인네 찍어서 뭐해”하면서도 옷매무새를 매만지고 머리를 정돈하신다. 그리고 저렇게 예쁜 미소를 지어주신다. (이윤정기자)
마을 입구 옹벽 양곡리는 천안시에 속해있지만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지방도 57호선을 타고 오다가 양곡리 방면으로 방향을 틀어 좁은 길을 따라 2km를 더 들어와야 한다. 하지만 양곡리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좁은 시골길을 달리다가 아기자기한 그림이 그려진 옹벽이 나타나고 ‘이야기가 있는 벽화마을 만들기’ 플래카드를 만나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들이 그려준 벽화가 마을 입구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이윤정기자)
고드름이 얼어도 벽화작업은 계속됩니다 마을 어르신의 증언(?)에 따르면 첫눈이 내린 날 벽화동호회 자원봉사자들이 작업을 하러 왔단다. “희한하게 작업하러 오는 날 바람도 많이 불고 춥더라고. 얼마나 고생했을꼬”라는 주민의 말을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벽화를 그릴 담 지붕에 고드름이 얼어있다. 추운 날 고생했을 자원봉사자들의 노고가 절로 느껴진다. (천안KYC 제공)
개죽산의 혈을 받은 터 마을 뒤편으로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가 개죽산이다. 새마을지도자 김승진씨는 “개죽산의 혈을 받아 우리 마을에서 왕이 난다고 하대요. 앞으로 위대한 인물이 날 땅입니다”라고 자랑한다. 양곡리의 풍광이 수려한 만큼 좋은 터에 있다는 뜻일 게다. 마을이름도 ‘골짜기의 양지바른 곳’이니 말이다. (이윤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