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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ream Phil 원문보기 글쓴이: Dream Phil
2016년 9월 23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았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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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루가 9,18-22)
Who do you say that I am?”
말씀의 초대
코헬렛은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데,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자,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라고 베드로가 답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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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처럼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메시아 고백은 여러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치적인 메시아가 되실 수도 있고, 훌륭한 ‘멘토’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출세를 보장하는 ‘현자’가 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명확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주님께서는 참된 메시아가 어떠한 길을 걷게 되는지 알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피에트렐치나의 비오 성인은 예수님의 오상을 받으신 분입니다. 1911년 비오 신부의 오상은 시작되었고, 1918년 9월 20일 비오 신부가 고해성사를 집전하던 중에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오상에서 흘러나온 피에서 꽃향기가 났다고 합니다.
비오 성인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예수 그리스도처럼 가시관과 채찍질의 고통을 실제로 느꼈습니다. 1968년 성인은 오상을 받은 50주년 기념 미사를 장엄하게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9월 23일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선종하였습니다. 우리도 성인처럼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 안에 지니는 영광을 소망해 봅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출처] 2014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작성자 진주
예수님에 대한 생각
-반영억신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옛 예언자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여러 활동을 통해 하느님나라에 관해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침을 받은 것에 상응하는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9,20) 하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으신 이’ 라는 이 말은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야61,1) 베드로의 고백은 완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 고백은 힘을 잃고 말 것입니다.
낚싯바늘만 있고 미끼가 없는 낚싯대, 아무리 낚싯바늘이 좋아도 고기가 물지 않습니다. 말만 있고 행동이 없으면 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면 그에 걸 맞는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 받은 이’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어야 합니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나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수녀님은 연필을 잡은 주님 안에서 기뻐했습니다. 과연 우리는 주님의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어서 주님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다른 사람의 신앙을 고백하지 말고 내 신앙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53,4).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받은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이사야 53,3). ‘그는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이사 53,8). 그러나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이사53,11-12) 라고 선언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이 주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주님, 속죄의 제물이 되시고 부활의 기쁨으로 다시 오신 주님, 그분을 우리의 주님으로, 저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기쁨이 더욱 커지시기를 기도합니다.
일상 안에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내 할 일 다 하고 짬이 나서야 그분을 생각하는 처지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도구삼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먼저 감사하고, 다른 무엇에 앞서 주님의 거처를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묵시21,3). 주님께서는 나의 삶의 자리에서 나를 찾고 계십니다. 내가 그분을 찾기 훨씬 전부터.....사랑합니다.
-이수철신부-
< 불안하면 조급해진다 >
-전삼용신부-
제2차 세계대전 유태인의 과월절에 꼭 등장하는 노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노래 제목은 ‘아니마민’인데, 히브리어로‘나는 믿는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노래가 작곡된 곳은 놀랍게도 공포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였습니다. 이 노래의 시작은 이렇게 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리란 걸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늦게’ 오십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모든 인간은 ‘의미’를 찾는다는 내용의 책을 저술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유태인 의사 빅터 프랭클은 당시 죽음이라는 엄청난 공포를 잘 이겨냈습니다. 바로 한 시간 전까지 자신과 이야기하던 사람이 가스실에 들어갔다가 동태눈을 하고 들려나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음식을 입으로 떠 넣었습니다. 그런 자신이 감정결핍자로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야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깨진 유리조각으로 수염을 깎았습니다. 피가 날 정도로 붉고 푸르게 턱이 변했습니다. 그리고는 반잔의 커피를 옷에 찍어 얼굴을 닦았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치 군인들은 그렇게 얼굴을 말끔하게 하고 있는 프랭클을 가스실로 집어넣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포기할 때 남들도 나를 포기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고 희망이 있는 사람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때’를 자신이 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느님이 정해주시는 때를 끈기 있게 기다릴 뿐입니다.
저는 낚시를 할 줄은 모르지만 낚시에는 참 좋은 철학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마치고서 무작정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렁이를 매달고 멀리 던져놓습니다. 그리고는 찌가 흔들리기만을 기다립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하는 것은 오히려 물고기를 잡는데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찌가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해서 바로 낚아채면 안 됩니다. 물고기가 확실하게 바늘에 걸리는 순간을 느껴야합니다. 그 때가 아니면 바늘이 물고기 입에서 빠져나가 허탕을 칠 수가 있습니다.
이 정확한 때를 물속에 들어가서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표징에 집중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설교자는 말합니다. 모든 일에 때가 있지만 우리는 그 때를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하느님이 정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그렇습니다. 가장 적당한 때를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면 그저 그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멍하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 길을 다녀오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내처럼 바람소리 속에서도 남편의 발자국 소리를 분간할 수 있는 마음으로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돌아오는 작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러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또한 하느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분도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이렇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입니다. 오면 오고 안 오면 마는 것이지만 올 때 스쳐가게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종말이 곧 오느니 마느니 하면서 불안함을 조장하는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어차피 가야 하는 인생인데 왜 그 불안함이 벌써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해 버리는 것일까요? 불안하면 서두르게 됩니다. 그들은 이것을 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분이 정하시는 것이고 그 때가 오기 전까지는 아직 오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조급함으로 얼마나 많은 일을 망치는지 모릅니다. 경영학에서는 구매자와 가격을 흥정할 때 먼저 내가 원하는 가격을 제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상대가 내가 원하는 가격보다 더 많이 쳐 주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말해버렸다가는 그만큼 손해를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서두르면 손해 봅니다. 모든 것을 정하시는 것은 주님이십니다. 모른다면 기다릴 줄 알면 됩니다. 그러나 희망을 가지고 깨어 기다려야합니다.
[출처] 2014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작성자 진주
[출처] 2016년 9월 23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작성자 진주
[출처] 진주의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