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회수의 회와 황하의 하가 합쳐져 회하라 하는 물길
2월 24일 최부 일행은 우성 역에 도착을 했다. 우성역은 1천2백 여 개로 추정되는 역점 중에 지금까지 가장 잘 보존이 되어 있어서 정부가 개입을 하여 보존을 하고 박물관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2월25일에 그들은 우성역(盂城驛)을 떠나 고우주 즉 옛 한주(邗州)를 지났다. 한구(邗溝)는 일명 한강(寒江)이라고 하는데, 남북의 수로를 둘러싸고 있는 요충지였다. 주성은 큰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데, 바로 고우호(高郵湖)이며, 강호의 승경지이며 사람과 물산이 번성한 곳으로, 또한 강북의 제일 수향(수자원이 풍부함 지방)이라고 했다. 최부가 역사를 따져 나름 운하에 대해 판단한 사항은 이렇다.
< 하(夏)의 우공 때 양자강과 회수(淮水)는 아직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공이 강해(江海)를 따라 회수와 사수에 도달합니다. 오왕 부차 때에 오면 비로소 한구가 개통하였고, 수나라 사람들이 (한구를) 넓혀서, 선박이 다닐 수 있었습니다.>
2월27일 최부 일행은 회음역에서 노를 저어 회안부를 지나 북쪽으로 가니 회하(淮河)가 나왔다. 무릇 양자강과 회하와의 사이 4~5백 리의 땅에는 큰 못과 큰 호수가 많았는데, 소백호·고우호·계수호·백마호 등과 같은 큰 호수는 사방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날은 큰 비를 무릅쓰고 회하 일명 황하를 건넜다. 그러면서 최부는 운하에 대해 확실히 알자고 황하의 하류는 연주가 받고 회수의 하류는 서주가 받는다 하였는데 어찌 회수와 황하가 연원도 같지 않고 지류의 갈림도 같지 않고 바다에 들어가는 땅도 또한 같지 않은데 합하여 회하가 된 것은 무슨 이유냐고 묻는다. 이에 부영이 답을 했다.
< 우리 명나라 조정이 황하의 수로를 파서 회수에 유입시켜 합류해서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으므로 황하는 옛길을 잃게 되었으니 우공 때와는 아주 다릅니다. 회하는 실로 여러 강들이 모이는 곳인데, 황하는 회수와 합하여 서하(西河)가 되고 제수(濟水)·루수(漊水)·문수(汶水)·주수(洙水)·사수와 합류하고, 다시 변수(汴水)와 합류하고, 또 동쪽으로 기수와 합하여 동하(東河)가 됩니다. 서하의 물빛은 황색이므로 황하라 부르며, 동하의 물빛은 청색이므로 청하라고 부릅니다. 두 하(동하‧서하)는 이곳에서 합류함으로 모두를 회하라고 부르는데, 회하의 넓이는 거의 10여리 정도이며, 깊이는 알 수 없고, 물살이 매우 빠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말한 내용을 종합해보면 하의 우공 때 그러니까 태초에는 양자강과 회수(淮水)는 통하지 않다가 오나라 때 연결이 됐으며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황하의 물이 회수로 유입되도록 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경항 대운하는 수나라 때 단 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란 말이 된다. 대운하에 대해 기원전 5세기 오나라 때부터 보는 견해가 있다. 최부도 오나라 왕 부차 때에 한구가 개통하였다고 말을 하고 있다. (京抗)대운하가 첫 삽을 뜬 것은 춘추시대 말기인 기원전 486년. 오(吳)나라가 제(齊)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양저우(楊州) 부근의 수로를 관통시킨 것이 중국 최초의 운하로 추정된다.
특히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 월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전략적으로 운하를 뚫었고 이는 곧 천하통일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운하를 통해 험준한 구이린(桂林)지역을 통과해 월로 진격해 들어간 진의 군대는 손쉽게 도성을 함락시켰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수로와 관광지로 활용되는 링취(靈渠)다. 중국의 대운하가 오늘날의 거대한 모습을 갖춘 것은 아무래도 수(隋)나라 때다. 사실 이 대역사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측이 더 많다. 605년에 시작하여 6년 사이 통제거로 인해 황하와 회화를 연결하고 횡화와 장강을 연결하고 영제거라 하여 심하와 기수 위하를 연결하여 천진까지 연결하였다는데 대단한 역사이고 믿기도 어려운 일이다.
당시 대운하의 북단은 북경이 아니라 창안(長安)이었다. 이후 수도가 카이펑(開封)과 항저우였던 북송과 남송 시대에는 수도로의 물자공급에 큰 문제가 없었으므로 대운하의 중요성 역시 높지 않았지만, 쿠빌라이가 수도로 선택했던 베이징의 상황은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송나라 때부터 경제 중심지로 자리를 굳혔던 강남의 곡창지대로부터 지속적으로 식량을 공급하지 않으면 제국의 수도를 지탱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원나라는 한동안 사용되지 않아서 곳곳이 막혀버린 대운하를 새롭게 개통하여 조량의 운송을 원활히 했을 뿐만 아니라 점차 해운을 통한 조량 수송량도 늘려갔다.
원나라에 이르러 동창과 임청을 잇는 회통운하라는 것이 건설되고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며 수리(水利)에 밝았던 곽수경郭守敬(1231-1316)이란 관리가 강남으로부터 다두(大都)로 들어오는 조량(漕粮)의 운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이곳에 "적수(積水)"했다고 한다. 당시 운하의 종점은 베이징의 동쪽인 퉁저우(通州)였다. 여기서부터는 수 십 리 떨어진 베이징까지 육로로 물자를 운반해야 했다. 육로 운송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운하를 베이징 성 안까지 연결해야 했지만 50m의 고도차와 수량의 부족이 문제였다. 몇 차례의 실패 끝에 곽수경은 고도차를 11개의 갑문으로 해결하고 베이징 주변의 하천수를 끌어들여 운하의 수량을 확보하여 1293년에 드디어 통혜하(通惠河)라는 운하를 개통함으로써 남쪽 지방에서 이송된 물자를 운하를 통해 베이징 성 안까지 배로 직접 운송할 수 있게 되었다. 적수담은 통혜하의 종착점이다. 원나라 때 베이징의 물류 집산지였던 셈이다.
운하가 중요하기는 명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곱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신하들로 가득 찬 난징보다 자신의 본거지인 베이징이 훨씬 편했던 영락제는 베이징이 몽골의 침입을 저지하는 전략적 위치에 있다는 이유를 더하여 난징에서 거의 1,000km 이상 멀리 떨어진 베이징으로의 천도를 감행했다. 근데 경제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베이징으로의 물자공급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 해결책으로 영락제는 쿠빌라이의 전철을 밟아 대운하를 다시 개통했다. 대운하를 통해 양자강 중류와 하류에서 생산되는 곡식과 물자를 베이징으로 운송함으로써 수도 베이징의 치명적인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다. 임청과 동창간에 회통하를 보완하고 희안과 회하에 새로운 운하를 신설했다고 했다.
아무튼 경항 운하는 통혜하 (북경~통현까지 82킬로), 북운하(통현~천진까지 186킬로),남운하(천진~임청까지 400킬로), 노운하(임청~대아장까지 500킬로),중운하(대아장~회음까지 186킬로), 이운하(회음~양주까지 180킬로, 중국 최초의 운하로 본다), 강남운하(장강을 지난 후 진강에서 항주까지 330킬로)로 해 7개구간으로 나누어 본다. 서주 북쪽 가까이 대아장, 회하로 황하의 물줄기를 틀어 회수와 합류하여 회안을 거쳐 바다로 향하도록 한 것이다.
영락제는 대운하를 개통한 직후 해운을 금지시켰다. 대운하가 개통되자 바닷길을 닫아버린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들은 중국의 위세를 세계에 떨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1433년에 정화鄭和의 해외원정을 중단하고 중앙아시아로 방향을 틀었다. 바다를 장악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로 방향을 돌린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는 악몽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나라는 몽골을 견제하는 데 모든 정력을 쏟아야 했다. 이를 위해 대운하를 복구하고, 중국 북부의 조림(造林)을 다시 시작하고, 농경을 복구하고, 만리장성을 다시 쌓고, 베이징을 재건해야 했다. 명나라에게는 몽골에 대한 불안을 해결하는 것이 바다를 포기할 만큼 중대했던 것이다.
바다에서 중앙아시아로 관심을 선회함으로써 명나라는 대양탐험과 교역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중국의 근대화와 개화보다는 중국 서북부의 보존을 선택했다. 결국 중국은 바다를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에 양보했다. 아무튼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운하인 경항운하는 베이징과 저장(浙江)성 항저우 간의 남북 총연장이 1794㎞에 이른다. 베이징과 톈진(天津)시, 허베이(河北)·산둥(山東)·장쑤(江蘇)·저장성 등 6개성과 시를 지나고 황하(黃河)와 장강(長江) 등 5개 수계를 관통한다. 얼마 전 항저우와 닝보(寧波)를 연결하는 항융(杭甬)운하도 확장공사를 마치고 공식 개통됐다.
대운하의 연장인 항융운하는 총 길이가 239㎞에 달한다. 중국은 ‘11·5계획’ 기간(2006~2010년) 동안 2000억 위안을 투입해 운하를 보수하였다. 특히 2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징항대운하의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통해 수상운송 능력을 40% 이상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구간 구간 물길이 좁아져서 발생하는 ‘체선현상’을 없애고 통항능력을 대폭 확대해 명실공이 수상운송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중국 정부의 구상이다.
그런데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서주에서 회안에 이르는 구간은 황하와 회수가 합쳐져 회하라 할 것인데 합류되는 지점에 대아장, 고우주의 한구라는 곳은 한 때 금나라와 송나라가 대치할 때는 지금 우리 임진강변 비무장 지대와도 같이 경계를 이루어 회안이나 서주는 한 결 같이 한가로이 침묵 속에서 세월을 버텼던 곳이다. 그곳이 원나라 명나라에 들어서 비로소 각광을 받더니만 때 늦은 1938년 전선의 한복판에서 그 이름을 알린다.
얼마 전 중국의 한 영화제작사가 1937년부터 1945년 사이 일제의 침략에 맞서 투쟁한 국민당 군인들의 영웅적인 업적을 소재로 한 두 편의 영화를 공동으로 제작하자고 대만의 영화사측에 제의했다고 대만과 홍콩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중국의 영화사가 대만 측에 공동제작을 제의한 두 편의 영화는 과거 항일투쟁 당시 국민당 군대의 실제 활약상을 다루게 된다. 한 편은 몇 주에 걸친 상하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침략을 막아냄으로써 상하이 시민들이 피신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국민당 524연대 장병 800여명에 관한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또 다른 한 편은 중국인들 사이에 항일전쟁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국민당의 장즈중(張自忠) 장군에 관한 스토리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항상 국민당 군인들이 겁쟁이나 악당으로 등장했다. 특히 정부의 통제 아래 있는 영화는 대부분 항일전쟁 당시 국민당의 역할에 대해선 거의 언급을 하지 않고 공산당 군대나 무장 게릴라의 활약상만을 부각시켜 왔다. 중국 영화에서는 국민당을 상징하는 깃발이나 로고를 사용하는 것이 금기시 돼왔다. 이 같은 상황에 비춰볼 때 중국이 국민당 군인의 영웅담을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하기로 한 것은 엄청난 파격이다.
1937년 일제는 북경에서 노구교사건을 일으키고 전면적인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반년 만에 일본은 북경, 천진, 상해, 남경 등의 대도시를 점령했으며 이듬해 봄에는 천진과 남경에서 밀고나와 서주를 점령하려 했다. 일본전방부대는 협공을 펴며 서둘러 대아장으로 진격했다. 끝까지 버틴 국민군은 후원군까지 가세하여 처음으로 일본군을 격파를 했다. 천진이나 남경에서 당하기만 한 패배라 의미가 컸다. 대아장의 승리는 속전속결로 중국을 멸망시키려는 일제의 백일몽을 산산조각 냈으며 국민들의 항일 의지를 고무시켰다.
하지만 막대한 화력을 자랑하는 일본군은 서주를 5월30일 함락시키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국민당 군의 총사령관 이종민은 황하의 제방을 무너트려 강소성 일대를 범람시켜 큰 습지대를 만들어 버렸다. 이 때문에 일본군의 남진은 한구에서 막혀 버렸다. 앞서 최부가 ‘오왕 부차 때에 오면 비로소 한구가 개통하였고’ 라 쓴 한구가 마치 민통선이나 판문점 같은 꼴이 된 것이다. 그로 중일 양군의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져 버렸다. 최부의 표해록에서 나오는 운하의 합류점인 한구, 대아장, 서주, 회안이 전쟁 방파제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