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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카페 2023. 4월]
시의 발아(發芽)와 발화(發話)지점
김양숙
1]시의 발아
저의 체험적 시세계를 작품과 함께 소개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부끄럽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가 청소년기에 문학소년 문학소녀를 꿈꾸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렇듯 문학의 씨앗 은 오래전부터 우리 가슴속에서 알게 모르게 자라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문학의 씨앗은 우리들 가슴속에서 발아를 기다리며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 발아를 기다리는 씨앗을 가지고 문학의 문을 두드리고 한발 한발 내디디면서 시인, 소설가, 수필가로 발전해 나가듯이 저 또한 마음속에서 자라던 문학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문학인 또는 시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는 일이 녹록치는 않습니다. 더구나 생활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며 감정과의 싸움 등 여러 가지 조건들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장에서 문학인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해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온전히 글만을 쓰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들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세요?]사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돈도 되지 않는 글 또는 시를 왜 쓰는가? 라고 저에게 묻는다면 저도 처음에는 거창하게 누군가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면 한 편이라도 써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누군가를 위한 글을 썼다기보다 저를 위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즉 제가 써온 글들은 제 안에 있는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그래서 저에게 시는 온전히 치유입니다. 독자와의 공유(共有)적 치유이면서 스스로의 치유인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유적이라 함은 독자와의 소통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말입니다.
옥타비오파스는 “시란 소통을 통해서만 온전히 실현 되는 것이며, 독자가 없는 작품은 단지 절반만 실현되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시란 독자와의 교감이 이루어지고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시인과 독자가 서로 소통하게 됨으로써 완성 되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저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공유적 소통인 것입니다. 제 시의 경우는 삶의 그늘 또는 절망의 늪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써왔습니다. 그래서 저와 닮은꼴의 상처를 가진 분들이 읽으면서 공감하고 치유가 된다면 이 또한 공유적 치유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2]시의 발화지점
그렇다면 언제 시를 짓느냐?
문학은 삶의 반영이다라는 말처럼 일상생활 속에서의 경험이 시가 되는 경우는 대다수입니다ㆍ저는 어리석게도 시는 저를 감출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해서 시를 선택 했었습니다. 그러나 시 또한 짓다보면 작품 속에 내가 모두 드러났습니다. 즉 시인이 짓는 시는 그 시인의 생활환경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장사꾼입니다. 계절적으로 여름에 바쁜 계절 장사를 하고 있어서 저는 겨울에 많이 읽고 겨울에 많이 써 놓는 편입니다. 이 기간에는 제가 그동안 써 보고 싶었던 내용이나, 써 보고 싶었던 주제를 위주로 씁니다. 그리고 다른 시인의 시집을 많이 읽습니다. 다른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작품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꽂혀 패러디를 하게 됩니다. 제목을 패러디하거나 시 속에 있는 시적 상관물을 가지고 다른 관점 또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 패러디하기도 합니다. 이 지점이 나의 시적 발화지점이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패러디하기도 하지만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그 구절을 패러디해서 시어집*에 저장합니다. 패러디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현실에서 가능한 것을 상상하지 마라. 불가능한 것을 상상하라.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보여주’라고 했습니다. 저 또한 상상력을 가지고 패러디 하다보면 시의 스토리가 확장되고 시의 행간이 넓어지게 됩니다. 누군가는 영감이 올 때 시를 쓴다고 하지만 저한테는 그 영감이 바쁘셔서 그런지 자주 안 오시더라고요, 가끔 영감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단숨에 써내려가며 지은 시들도 있습니다. 그 작품들 중 하나인 「타클라마칸 사막」입니다.
「타클라마칸 사막」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사막이라지요
모래는 제 몸을 갈아 다시 모래를 만들고
바람은 허공을 흔들어 또 다른 바람을 낳는다지요
어쩌다 흘려 상처가 되는 말조차 하늘에 박혀 별이 되는
타클라마칸 사막에선
첫 이름을 불러준 이와 영원히 하나가 된다지요
살아있는 심장을 데워 지표 아래로 흘려보내면
뜨거워진 마그마는 또 하나의 심장을 만든다지요
타클라마칸 사막은
태어나는 사구마다 미로를 만들어
그 끝에 오아시스를 숨겨 놓았다지요
그곳에 가면 내 심장에 첫 심장을 얹어준
당신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모래바람 부는 가슴 한 켠에서 낙타 한 마리를 키우지요
*타클라마칸...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위구르어
위 시는 타클라마칸이라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단어의 뜻과 그 단어가 주는 이미지와 그리고 사막이 주는 상징성을 결합해서 지은 시입니다.
저는 낭만주의적 시관인 광기 혹은 엑스터시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시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갈고닦는다는 고전주의식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퇴고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어떤 시제들은 내안의 항아리에 담아서 곰삭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몇 달이나 몇 년이 지난 후에 꺼내어 시를 짓기도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시를 창작함에 있어서 경험과 상상력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즉 시인의 경험과 상상력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얼마나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은 시인의 몫입니다. 본인이 살아온 현실과 환경 그리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의 씨줄과 날줄이 되어 짜여지며 본인만의 무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바로 본인만의 무늬가 오리지널리티가 되는 것입니다.
3]나만의 시어집 만들기
이충이선생님께서 강조하시던 시어집 여러분들도 들어서 알고 계실 겁니다. 저는 시어집에 충실한 편입니다. 오래전부터 만들어 놓은 시어집이 있어서 글을 쓸 때마다 꺼내어 읽곤 합니다. 미래에 꺼내서 쓸 수 있는 풍성한 시어집을 볼 때면 어떤 부자도 부럽지 않은 풍족함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시어집은 시에 대한 나의 시적 자세이며 시를 향한 나의 마음가짐을 보여 주는 거울인 셈입니다. 아직도 시어집이 없는 분들이 계시다면 활용해 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오래전 원로선생님들은 손바닥만 크기의 노트 속에 빼곡하게 적어 놓은 일수책 같은 것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그분들에게는 그것이 시어집인 셈이었습니다.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라고 말한 M.하이데거의 말처럼
이충이선생님께서는 집을 한 채 짓는다 생각하고 집을 지을 때 필요한 자재들을 미리 수집해서 나만의 창고에 모아두었다 필요할 때 가져다 쓰는 방법을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언어의 집 한 채를 짓기 위해선 많은 시어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어들을 모으고 또 모읍니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리고 시어집을 만들 땐 스마트폰을 많이 활용합니다. 전철을 타고 가다가 생각날 때, 또는 책을 읽을 때,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생각나면 스마트폰의 메시지에 적어둡니다. 심지어는 광고지를 보다가도 시어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메모를 제 메일로 보내어 컴퓨터에 저장하는 방식입니다.
제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고팡이라는 폴더가 있습니다. 고팡이라는 단어는 광 또는 창고라는 제주어로 어릴 때 집 안방 뒤에 있는 곳으로 방의 3분에 1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그 고팡 속에는 크고 작은 항아리들과 드럼통들이 가득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속에 일 년치 양식들인 보리 조 콩 깨 심지어는 꿀이나 참기름까지 모두 보관하고 우리를 먹여 키웠습니다. 이렇듯 우리들의 양식이 보관되어 있던 고팡을 어머니는 정성들여 닦고 단속을 했습니다. 가끔 들어가 보면 정화수를 떠 놓거나 작은 옹기그릇에 촛불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어머니가 고팡을 정성 드려 관리했던 것처럼 저 또한 시어집을 정성 드려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팡이라는 폴더를 바탕화면에 만들어놓고 스마트 폰에서 보내오는 시어들을 저장합니다. 시어집을 바탕화면에 저장하는 이유는 수시로 꺼내어 보기 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4] 시를 위한 성찰과정과 나의 체험적 시세계
*원고 청탁이 올 때 주제가 정해지거나 오브제를 정하고 원고청탁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그럴 경우는 백지를 받은 상태가 되어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막막해집니다. 그럴 때 저는 좋아하는 시집을 읽거나 시어집을 꺼내어 무작위로 읽습니다. 시어집을 자꾸 읽다보면 한라산에 내렸던 빗물이 섬을 돌아 나와 용천수가 되듯이 제 스스로가 겪은 경험들이 피 속을 흐르며 뼈 속에 자기만의 무늬를 새겨 두었다가 상상력과 만나면서 시적 모티브를 끌어내어 줍니다. 아래 시는 양주군에서 흙에 관한 주제로 원고 청탁이 와서 지은 시입니다. 흙과 어머니를 결합시켰고 어머니 마음을 달항아리로 이미지화 시킨 시입니다.
「빙렬氷裂」
까치발로 걸어서 닿고 싶은 골목 안
고향집 돌담 위
원죄로 빚어낸 달항아리 하나 있네
몸의 수식어는 닳고 닳아 벙그는 미소만 남은
그 미소를 따라가면 부레위에 저울을 올려놓고
부역꾼을 따라다닌 한 생애가 출렁거리네
녹슨 바늘귀에 색실을 꿰어 젖은 영혼을 길어 올리는 계절은
창백한 빗방울을 흔들며 가고
발끝에서 우는 까마귀 울음소리
골목 밖으로 밀어내며
꿈과 현실의 간극을 손금에 새겨 넣어
길을 만들어 준 이가 있네
누군가의 달항아리가 되고 싶었던 어머니
달을 보며 가슴에 우물을 파네
우물 속에도 달이 뜨네
사다리를 타고 오르며 됫박으로 퍼 나르던 달빛은
갈기갈기 찢어진 채 몸밖에 엎드려 빙렬이 되네
동네 어귀까지 맨발로 마중 나오시던 어머니
귀속에 담아두었던 목소리가 번지는 밤
어머니의 늙은 언어가 바람에 실려 가고
모서리 해진 문장이 달항아리 속으로 투신하는 시간이면
어머니의 주문呪文에 금이 가네
*2019년 삼일절100주년 특집으로 원고 청탁이 와서 지은 시입니다. 이시는 독일과 일본이 종전 후 침략했던 나라들에게 행하는 자세에 대한 두 나라의 차이점을 보면서 느낀 점을 시로 지은 것입니다.
「삼월에 걸려 넘어지다」
독일의 한 예술가는 나치정권에 희생된 사람들이 살았던 장소의 멀쩡한 길바닥을 파내어 희생된 이들의 이름과 희생된 날자가 새겨진 동판을 박아놓아 걸림돌을 만들었다는데
그리하여 조상들이 저지른 비극적 역사를 숨기기보다 부끄러워하며 과거의 잘못을 일상처럼 마주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며 반성한다는데
그렇다
너희들은 침략한 것이다
아름답게 뻗어 내린 백두대간의 등줄기에 쇠못 박으며 능욕하였다
굽이굽이 흐르는 성스러운 물줄기를 강점하여 피로 더럽혔다 그러나
어디에도 슈돌퍼슈타인* 같은 것은 없고
목숨을 내 놓고, 손가락을 자르고 맹세하며, 끓는 피로 지켜낸 이 나라
오천년의 역사를 간사한 혀로 왜곡하느냐
등줄기 곧추세운 백두대간이 뻗어나간 만주벌판
동해라는 이름으로 품어 안은 독도
남쪽을 지키는 이어도 모두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내 수족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 톨의 흙 한 방울의 물도 가슴에 낱낱이 새기고
날마다 넘보는 승냥이의 눈빛에서 지켜내어
후대에게 물려 줘야 할 이유인 것이다
상처투성이의 역사에 걸려 넘어져도
무릎보다 먼저 일어서는 정신을 가진 족속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다만 캐리어를 끌고 현해탄을 건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몸을 던져 나라 지켜낸 이들 앞에서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가슴에 걸림돌 하나 만들어 놓고 삼월이면 한 번씩 걸려 넘어지는
*슈톨퍼슈타인(stolper stein) (걸려넘어지다stolpern)+돌(stein)합성어 : 독일의 길바닥을 파내어 도드라지게 설치된 동판 독일은 물론 폴란드ㆍ헝가리등 나치에게 희생된 사람이 살았던 장소에 설치된 추모비
위 시처럼 저는 아직도 일본으로 여행을 가지 못하고 주저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어떤 시를 지을 때는 그림으로 그릴 것인가 아니면 깃발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개인의 감정이 집단감정으로 모아지거나 또는 개인감정이 사회적 감정으로 뭉쳐질 때 저는 깃발을 드는 대신 시를 짓습니다. 예를 들면 2015년 농부 백남기씨가 물대포를 맞아 쓰러질 때 그 상황을 뉴스로 보면서 분노로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시로 지었습니다. 물대포를 맞고 꿈틀거리며 죽어가는 농부 백남기씨와 밟히면 꿈틀거리는 지렁이라는 시적 상관물을 매치 시켜서 쓴 시입니다. 저는 시적상관물을 가져올 때 시적상관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무게를 두는 편입니다.
「꿈틀」
흙 속이 세상 전부라고 믿었던 지렁이 한 마리
일기예보 보다 먼저 아스팔트 위까지 나와 버렸다
세상은 소란 속으로 흘러가고
가까스로 짐승의 발자국을 피해 기어 다녔다
아버지라면 아버지의 시대
나라면 나의 시대
흙이 전부라고 믿었던 농투성이들
사내의 유전자도 농투성이에 가까웠다
소방호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사내가 지고 온 야생의 흙냄새를 씻어냈다
사내는 물줄기를 찢어내어 안개로 날렸다
안개보다 더 안개 같은 광장의 꿈들이 서서히 젖어들었다
사내는 오랫동안 해석되지 않는 안개를 도면 밖으로 밀어내어
심장과 가장 먼 거리에 두었다
직선으로 찢겨나간 흉터가 비명을 질렀다
절망이라고 말하기엔 단어가 너무 가벼웠다
아들딸을 가진 사내
사내에게도 자신을 담아낸 인생 도면 같은 것이 있었을까
인생의 도면은 누구나 가슴 한켠에 숨겨 놓은 몽돌 같은 것
감당 할 수 없는 무게가 밑그림이 되어도
혼자 지고 가야 하는 시지프스의 바위 같은 것
지렁이 한 마리 광화문 소방호수 앞에 섰을 때 누구의 손도 잡지 못했다
빌딩은 껌벅이는 눈을 들어 물줄기의 횡포를 기록하고
제 몸에 새겨진 슬픔의 능선을 미래로 송부했다
마지막 수렵지가 된 광화문
마지막 수렵물인 외로움이 굳어져 제단이 되었다
제단위에 놓인 사내의 자세가 흔들렸다
자궁 속에서 헤엄치던 자세를 기억했다
사내의 내장 속으로 따뜻한 비가 내렸다
한 생애를 흥건히 적신 사내가 단어를 전송했다
꿈틀
아들딸들에게 보여준 마지막 언어였다
*농부 백남기 2015년 11월 14일 1차 민중총궐기 투쟁대회에 참석, 시위 중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2016년 9월 25일 향년 68세의 일기로 사망하였다.
「날 것의 시詩」
한 편의 그림을 보며 시 같다는 말
음악 한 곡조를 들으며 시 같다는 말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시 같다는 말
이제 시 같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말자
시란 날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적어도
촛불로 켜진 광화문역입니다 이번 역에서 내리시는 분들은
몸조심하시고 대한민국을 위해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5호선 기관사님의 말처럼
오늘 집회에 참석하신 여러분 수고 하셨습니다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듭시다
집회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승객여러분들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3호선 안국역의 기관사님의 말처럼
[2016년] 초겨울 바람에도 100일은 꺼지지 않는 촛불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위의 시들은 깃발 같은 시들이지요. 세월호 사건이 탄핵으로 이어지던 때 저도 가끔씩 광화문광장으로 나왔었습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은 대부분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 속에는 역사성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이 시는 지금도 4월이면 회자되는 시입니다.
지금의 역은 핫플레이스지만 예전 역의 뒷골목은 대부분 사창가였습니다. 서울역이 그랬고, 영등포역이 그랬고, 청량리역이 그랬습니다. 어느 날 청량리역을 지나다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본 사창가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아름답게 화장을 하고 유리관 속에 앉아 호객을 하는 여자들.. 몇 년이 지나고 난 뒤 동네 담장에 피어 고개를 밖으로 내밀고 있는 줄장미를 보면서 오래전에 봤던 사창가 유리관 속에 앉아 호객을 하던 여자들이 떠올랐고 그 여자들에게도 사랑했던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라 상상하며 지은 시입니다. 이 시는 2017년 [시와 산문 작품상]을 받은 시입니다.
「호객 행위」
-장미
늑대들의 척추에서 원죄가 익어가는 시간
역전 뒷골목으로 숨어들어 스스로 몸에 불을 밝히는 꽃이 있다
몇 번의 건기를 관통하고서야 몸에 핀 꽃이 가시가 된다는 것을 안 사내
가시에 찔린 사내의 행성은 전신주에 매달려 밤새 별빛을 토해냈다
꽃송이 대신 마른 눈물이 배달되는 시간
몸에 두른 가시를 열면 쏟아지는 새끼손가락들
“머리 올려 줄게 오빠랑 살자”
“오빠랑 도망가자”
설탕과 분자구조가 같은 말이
켜지 못한 촛불이 되어 유리창살 안에 갇혀있는 저녁
짐승의 피를 깨우는 여자의 웃음이 담장 아래로 쌓였다
물컹거리며 제일 먼저 썩어가는 심장은
사내의 식민지와 여자의 식민지가 만나는 지점
여자가 더듬이를 갖다 대고
사내의 속을 읽어 내는 방식을 고집했다
꽃잎은 서서히 낡아가며
열여덟 살의 이력을 한 움큼의 비린내로 뿌렸다
눈물로 정조준 된 사내는 다시 벼랑에서 추락하였다
누군가를 보내고 돌아선 새벽
수명이 다한 피의 비늘들이 떨어져 역전 뒷골목을 구르고
상처에 비린내가 차오르면 장미의 시간에 옹이가 박혔다
헐거워진 창살 사이로 고개를 내민 여자
깨어진 골목 안을 기웃거리는 늑대의 담벼락에
다시 뜨거워진 촉수를 올렸다
스스로의 죄를 창살 밖으로 꺼내 놓고 수선 중인 장미
아직도 사내의 식민지 일까
언어의 유희와 상상력의 대화로 인간의 고통스러운 상처와 절망을 유희적으로 풀어내는 오탁번선생님의 시를 좋아 합니다. 다음 시는 오탁번 선생님의 시풍을 패러디 한 시입니다.
「불온한 오독誤讀」
퇴근길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로 접어들어 얼마나 걸었을까
같이가 처녀 같이가 처녀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발자국을 잡아 당겼다
등뼈를 뻣뻣이 세우고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다시 부르는 소리
같이가 처녀 같이가 처녀
길바닥에 발자국을 꾹꾹 눌러 찍으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걷는데
다시 애절하게 부르는 소리
같이가 처녀 같이가 처녀
마지못해 돌아본다는 느낌으로 돌아서 사내의 목소리를 찾았다
들어올 때까지 보이지 않던
골목 어귀에 세워진 생선트럭
순간 사내의 목소리에서 오래된 비린내가 확 풍겼다
화끈 거리는 얼굴을 숙이고 돌아서는데
다시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행간은 지워지고 음절로 끊겨 뚜렷하게 들리는 단어
여행을 다니다 여행지의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듣거나 경치를 보다가 감흥이 와서 순간적으로 현장에서 쓴 시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도의 자이푸르라는 지방에 갔을 때 도시 한가운데 핑크빛으로 빛나는 바람의 궁전*이라는 아름다운 궁전이었습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올라가보니 창의 구조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만들어졌고 다만 안에서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창 앞에 서서 그 당시 이 창 앞에 섰을 여인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에 살지만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여인들의 눈이 되었을 창을 생각하며 그 곳에서 쓴 시입니다.
「하와마할*」
여기쯤에서 돌아서야 한다면
바람으로 뼈를 세우고
그리움의 피를 쌓아
이곳에 너를 위한 궁전 하나 짓고 싶다
어디든 떠나고 싶을 때
바람을 따라
그리움을 따라
떠날 수 있는 곳
가두어 놓을 것이라곤 바람뿐이지만
마지막 풀어줄 것 또한 바람뿐임을 안다
바람으로 왔다
바람으로 떠나는 당신을
쉽게 놓아 줄 수 있는 곳
그리움마저 놓아줄 수 있는 곳
떠나는 당신의 뒷모습을 일몰에 새기고
따라가다 돌아서서 여자의 눈*이 되어
천년이나 이천년은 기다려도 좋을 곳
여기서 바람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싶다
*인도의 자이푸르 시에 있는 궁전. 바람의 궁전이라고도 함
*바깥출입이 쉽지 않았던 여성들을 위해 안에서 밖의 모습을 볼 수 있게 설계
시는 시인의 삶의 절절한 체험 속에서 탄생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리 절절한 삶의 체험이라도 그것이 상상력을 통한 시적 체험으로 올라서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러한 시들에서 삶의 의미와 꿈은커녕 일상의 지루한 설명만 듣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베끼고 훔치고 창조하라는 창작의 방법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은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한다]. 이때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한다는 것은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목적과 과정을 모방한다는 뜻이다. 즉 문학에서 모방의 대상은 인간 또는 인간의 삶이며 행동의 모방은 플롯이라고 했다. 여기서 모방이라 함은 있는 그대로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짜내는 것이며, 구조화한다는 뜻을 숨기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새것은 없다고 했다. 이는 모방을 거치지 않는 새것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단순 복제를 지향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차별적이고 창조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전 것들과 내가 쓰고자 하는 주제나 제제(내 문제)와의 연결적 모방이 새로운 창조를 낳는다. 고수는 원래 있는 것을 치밀하게 베끼고 하수는 백지상태에서 완전한 창조를 하겠다고 덤빈다. 그 결과 고수는 창조하고 하수는 제자리걸음을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창조주의 영역이다. 인간은 유에서 유를 모방하고 창조한다. 이는 기존의 사항에 사소한 변화만 가하여도 창조는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기존의 사항에 더하든지, 빼든지, 섞든지 하는 어떤 변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가 발생하면 창조가 되는 것이다. 요즘의 하이브리드 같은 것이다. 그래서 창조자들은 미래에 집착하기보다 오히려 과거에 몰두한다. 과거에서 미래의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단절된 미래는 없다. 과거에 새 것이 덧입혀지면 미래가 되는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모방이라는 단어를 일차원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모방을 하되 창조적인 모방을 해야 한다. 시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