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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과 도덕경 (5) | ||||
간사함 없는 것이 참 이스라엘, 참 신앙인의 표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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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스라엘의 핵심으로서 ‘간사함이 없음’과 도덕경에서 복귀어박(復歸於樸) 오늘의 말씀공부 본문은 요한복음 1: 43-51절에 나타나 있는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이다. 특히 묵상할 요절로서 47절 말씀이다. 그리고 연관시켜 음미할 도덕경의 말씀은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 28장에 나오는 몇구절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화를 보도한다. 갈릴리 어부 베드로, 안드레, 빌립을 부르시고 빌립의 적극 권유를 받아 “갈릴리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체념과 일반상식에 주저하던 나다나엘과의 면담 장면을 부각시킨다. 초대교회 12사도중 이름있는 사도들 예를 들면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의 이름을 거명하면서(마4:18-22, 막 1:16-20, 눅 5:1-11) 12제자들 중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형성된 권위있는 제자들의 이름을 넌지시 알려주려는 공관복음서 저자들의 관심은 요한복음엔 없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았던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장면을 소개하면서 독특한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나다나엘은 열두 사도명단 중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좋은 친구 빌립의 강한 권고를 받고 나사렛같은 시골에서 유명한 랍비 한 분 어쩌면 메시야일런지도 모르는 기이한 분을 한번 만나보라고 소매를 이끌리며 다가오는 나다나엘에 대하여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 예수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 간직하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인간성으로서 ‘간사함이 없을 것’을 꼽은 것이다. 율법을 잘 알고 있다거나, 지성과 감성과 영성이 얼마나 발달되어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가 만났던 당대 사람들이, 특히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영악해지고 강팍해지고 비굴해지고 탐욕과 권력욕에 물들어 있었으면 시골뜨기 청년 나다나엘의 순박함 속에서 그렇게 감탄의 말씀을 예수님은 발하는 것일가? 나다나엘이 예수에게 걸어오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기쁨에 찬 말씀을 영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Jesus saw Nathanael coming to him, and said of him, "Behold, an Israelite indeed, in whom is no guile!" (1:47b) “그 사람 안에 간사함이 없구나!” 라고 말하시는 때 ‘간사함’(guile/ 헬 dolos)이란 도덕적 의미에서의 악함보다는 다른 뉴앙스를 더 많이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간사함’(guile)이라는 단어는 교활, 음흉함, 간교, 책략을 부림등을 내포한 인간 마음상태의 변질된 품성을 뜻한다. 나다나엘은 무식할 수 있다. 많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갈릴리 나사렛 시골마을에 갇혀 살았기 때문에 식견도 부족하고 세상 돌아가는 형편도 모르는 그저 보통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나다나엘은 그의 인간 본래 품성을 변질시키고도 남을 만한 온갖 세상 시련, 유혹, 가난, 권력자들의 협박과 회유, 종교지도자들 감언이설과 세상풍조의 지조없는 변심에도 불구하고 그 귀중한 인간품성을 꼭 지키고 있었다. 생물세포 안에 들어있는 DNA 형질은 맷돌에 밀알을 넣고 가루로 만들어도 부셔지지 않듯이,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켜가고 있었다. 그는 말하자면 함석헌이 말하는 맨사람 ‘씨알’이었다.
심안과 영안으로써 사람의 속을 꿰뚫어 읽으시는 능력을 지닌 예수는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에 앉아 있을 때부터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안에 때묻지 않는 ‘간사함이 없는 순수 인간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예수를 팔아먹고, 로마총독에 넘겨주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고 민중을 선동했던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이름과 명예를 보위하는 ‘하나님의 친위부대’라고 자처하는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로마정치 권력에 아부하고 협력하고 타협하면서 이권을 얻고 실속을 차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인간품성 속에서는 영악함, 음흉스러움, 간지, 책략, 자기합리화의 자기변호, 자기 밥그릇 먼저 챙기기, 양심에 화인을 맞은 듯한 도덕적 불감증을 본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세상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대상으로 만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그러나, 번쩍이는 금속이라고 모두 금이 아니듯이, 그들이 말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고 그들이 주장하는 ‘선교’는 선교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교권주의자들이 되어 있어서 기독교라는 종교조직 단체가 곧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수호하는 전진기지라고 착각한다. 세상은 모두 변하는데, 중세기 봉건영주처럼 변할줄 모르는 돈키호테적 작은 교황들이 되어 그 권력과 명예욕을 즐긴다. 복귀어영아 복귀어박(復歸於嬰兒 復歸於樸)
노자 도덕경엔 인간의 꾸밈, 허위의식, 겉치례, 사회적 페르소나, 문명의 인위적 조작이 결국 인간과 사회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통찰하고 ‘어린아이로 돌아가고, 소박한 통나무 원목에로 돌아가라!’고 강조한다. 그것이 ‘복귀어영아, 복귀어어박’이라는 유명한 도덕경의 구절이다. 생물체에 나타나는 남성과 여성의 특징이 생물학적 유전자 특성의 발현이든 전통의 관습이든 양성엔 특성이 있는 것으로 노자는 보았다. 그래서 자웅(雌雄)은 칼 융 박사의 아니무스/아니마 라고 명명한 두가지 심리적 생리적 속성처럼 특징을 갖는다. 도덕경은 수컷의 성격(雄)과 암컷의 성격(雌)를 미리 어느 한 쪽이 다른 것보다 더 위대하고 훌륭하다고 보는 성차별을 말하는 고전이 아니다. 생물체의 행동에서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관찰할 때, 남성적인 것 웅(雄)은 굳세게 움직이고, 성급하게 나아가고, 어떤 때는 공격적이고, 물리적 힘으로 승부를 보려는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하여 여성적인 것 자(雌)는 태어난 어린것들을 보살피고 길러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유연하고, 조용하며, 겸허하고, 부드러우며, 인내하고, 보다 자기희생적이라는 것이다. ‘知其雄 守其雌 復歸於嬰兒’라는 짧은 구절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성숙한 사람, 진정한 영성적 사람, 진정한 신앙인 이스라엘 사람은 생명이 지닌 굳셈과 강함을 알면서도 유약함과 부드러움과 겸허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면서도 어린애다움의 순진무구함을 간직하라는 것이다. ‘知其白 守其黑 復歸於樸’라는 짧은 구절도 기독교인들이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밝은 것을 알고 어두움 것을 지키면서 원목의 소박함에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밝고 흰 것을 안다’(知其白)는 말은 이성, 지성, 지식, 논리, 이론, 교리, 경전을 잘 안다는 뜻이다. 이와 대조하여 ‘어두운것 검은 것을 지킨다’(守其黑)이란 말은 이성과 지식으로 혹은 이론과 교리로 다 알수 없기에 깊은 침묵과 묵상과 골방의 기도를 통해서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움과 현묘하심 앞에 겸손과 침묵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다듬어진 각목같은 가구 만드는 재료가 아니라 산에서 막 잘라낸 원목처럼 목질이 아직 흐트러지지 않은 나무 본래의 질박한 특성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박(樸)이란 용도에 따라 재제소에서 기계로 규격대로 잘려지거나 다듬어지기 전의 나무껍질도 벗겨지지 않은 채 있는 질박한 나무의 특성을 말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서 본 인간 품성 “그 안에 간사함이 없도다!” 한 것이 바로 ‘복귀영아, 복귀어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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