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밤 MBC 방송국 앞에서 부상
증 언 자 : 나인기(남)
생년월일 : 1936(당시 나이 44세)
직 업 : 기원사범(현재 부동산 소개업)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20일 저녁 MBC방송국이 불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가 노동청 쪽에서 밀고 들어오는 계엄군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이후로 3주일간 입원, 치료를 했으나 머리의 후유증과 신경성 위장병으로 현재까지도 고생하고 있다.
MBC 방송국 방화
도청 부근의 '도심기원'에서 바둑 사범으로 있던 나는 1980년 5월 20일 저녁 10시가 다 되어서야 퇴근을 서둘렀다.
그때 마침 작은부인이 '김화중정형외과'에 입원해 있던 터라 곧장 MBC방송국 건너편에 위치한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시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부쩍 학생들의 시위가 빈번해졌고 계엄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 외에 나에겐 그저 평범한 날의 연속일 뿐이었다. 기원 안에서만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로서는 18일 이후부터의 소식들을 그저 유언비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너무나 엄청난 소리들이었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날 밤 MBC방송국이 화염에 휩싸여 온 도시를 불태우는 듯했다. 이를 구경하고 나는 병원을 나와 전남여고 후문을 통해 운동장에 들어갔다. 구경하기 좋은 연단에 이미 또 다른 구경꾼들이 올라가 있었다. 불타는 방송국을 보고 있자니 묘한 흥분이 일었지만 불길이 인근 주택가로 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몇 명의 청년들이 전선줄을 따라 번지는 불길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더니 결국은 전선줄을 끊었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다시 병원으로 가려고 전남여고 후문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갑자기 '와' 하는 함성이 들렸다. 얼떨결에 나는 돌을 던지면서 쫓기는 학생들의 무리에 휩쓸려 골목으로 숨었다. 그러나 그 골목이 막혀 있어 더 이상 내달릴 수가 없었다. 계엄군들이 붸아왔다. 그들은 무조건 몽둥이를 휘둘렀다. 순간 눈앞이 번뜩 번뜩 하더니 정신이 몽롱해졌다. 거의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일단 이 자리를 빠져 나와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그래서 무조건 앞을 보고 뛰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나도 모르게 그만 탱크를 앞세우고 대열을 지어가는 계엄군들 사이로 뛰어들어간 것이다.
'아차' 하고 실수를 깨닫기도 전에 그들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천근만근으로 느껴지는 고개를 간신히 들어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길로 인해 훤했던 주위가 어느새 캄캄해져 있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일어나서 그들의 포위망을 벗어나야 되는데'라는 생각뿐이었다.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차츰 정신이 들어 주위를 보니 내가 도로 한가운데 나자빠져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구경꾼들도, 계엄군들도 모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군화발과 몽둥이로 구타당해 몸을 일으킬 수 없었으나 일초라도 빨리 이 생지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미친 듯이 온몸으로 땅바닥을 기었다.
전남여고 체육관 앞까지 가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척이나 멀리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불과 몇 미터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다. 눈이 아파왔다. 손으로 만져보니 오른쪽 눈이 내 주먹만한 크기로 심하게 부어 있었다. 몽둥이에 맞은 머리는 다행히도 터지지 않았으나 대신 눈 윗부분이 찢어지고 아랫니 한 대가 부러져 나갔다. 아직까지 눈주위의 흉터가 남아 있다.
계속해서 피가 흘러 입고 있던 신사복을 흉칙하게 만들어놨다. 기운이 빠져 체육관 앞 화단 벽에 기대고 있는데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겁이났다.
"누구야!"
"누구요?"
경계태세를 취했더니 그쪽에서도 놀랐던지 반문해 왔다.
"학생이오."
학생이라는 말에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어두워서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터라 그 학생은 내 부상 정도를 물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아 학생의 손을 잡아 내 오른쪽 눈에 대어주었다. 그제야 학생은 큰일났다면서 잠깐 기다리라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학생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을 때는 12살 정도의 어린 꼬마와 함께였다. 학생과 어린 아이는 나를 부축해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다시 밖에 나갔다 오더니 학생은 스무 살 안팎의 아가씨 둘을 데리고 왔다 .
피로 범벅이 된 얼굴과 옷을 보고 놀란 아가씨들이 체육관 안의 커튼을 찢어 지혈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피는 멈춘 상태였다. 응급치료보다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안 이들은 나를 부축하고 장동 동장집으로 데려갔다.
동장 부부는 갈아입을 옷을 내주고 이불을 손수 깔아주었다. 우리 집은 전화가 없는 처지여서 대신 동생집에 연락을 했다. 전화를 받은 동생이 당장에 오겠다는 것을 억지로 말리고 다음날 아침에 오라고 했다. 오는 도중에 동생마저 계엄군에 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들어서였다. 이불을 덮고 방에 누워 있자니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오한은 차츰 심해졌다. 보다못한 동장 부부가 그 집의 이불을 다 꺼내 겹겹이 덮어주었다. 그래도 온몸이 떨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 부상은 가벼운 편
새벽 5시경 친구(박재현)와 동생이 찾아왔다. 이들의 도움으로 김화중 정형외과에 입원했다. 치료받을 때 병원 원장은 내 상처보다도 더 심한 환자들(총에 맞아 눈이 빠지거나 척추, 팔 등이 부러진 사람들)을 여러 명 치료한 적이 있다며 내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신체의 일부가 없어져버린 그 사람들에 비해 나는 다행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때는 고통이 심해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오른쪽 눈 윗부위를 15센티미터 정도 꿰맸다. 그 후 작은부인이 입원해 있던 병실에 같이 입원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수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나한테까지 입원실이 돌아올 수 없는 실정이었다. 2층의 입원실 창문은 도로변으로 나 있어 방송국 앞 도로가 훤히 내다보였다.
다시 거동하게 되어 20일 저녁 내가 참담하게 당했던 현장을 찾았을 때는 이미 광주가 재진압된 지 2주일이 지나 있었다.
나는 3남 2녀의 가장으로서 막중한 책임을 걸머지고 공업소와 직장생활에서부터 연탄 직매소, 잡화상 등 이것저것 안 해 본 것 없이 살아왔다. 생활에 치여 세상 돌아가는 것 모르고 살았지만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국민을 죽이고 국민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할 대통령이란 자가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지금은 비록 늙어서 부동산 소개업을 하고 있지만 세상 이치 돌아가는 것, 옳고 그름 정도는 판별할 수 있다.
무고한 시민을 죽이고도 9년이 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그때의 상처는 아물 줄을 모르고 깊이 병들어가고만 있다. 나는 그때 다친 머리의 후유증으로 오늘날까지 두통약을 복용하고 있으며 신경성 위장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적어도 5·18 부상자들에게 무료로 치료할 수 있는 보상책이라도 마련 해야 되지 않겠는가! (조사.정리 최경옥)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