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요? 카작의 민속에 관심을 가지면서, 카작 가정에 들어가서 조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중계자가 없어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아침 9시 직전에 걸려온 김 장로님의 전화, 한국(충북대)에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가 있는 외대 학생(루슬란)의 가정에서 한턱을 낸다기에 오늘 가는데 함께 가자는 말씀이었습니다. 먹던 아침밥을 얼른 해치우고 9번 전기버스를 타고 만나기로 약속한 질료니 바자르로 향했습니다. 1년만에 전기버스를 타보니 안내양이 사라지고 요금수납기가 운전석 뒤에 버티고 있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구조라서 당황했으나 대충 훑어보다가 구멍에다 100텡게를 넣으니 왼쪽 화면에 50텡게라고 보입니다. 거스름돈 50텡게를 받으려고 아무리 살펴봐도 안보여서 이것저것 단추같이 생긴 것을 눌러보았으나 아니었습니다. 창피하기는 하지만 두리번거렸더니 왼쪽에 또하나의 기계가 붙어 있고 거기 50텡게 동전이 나와 있었습니다. 모든 시내버스가 기계화된 줄 알았더니만 우선은 전기버스만 바뀌었다고 합니다. 머지않아 다른 버스들도 그리되겠지요. 그 많은 안내양 안내군 안내옹 안내파들은 다 어디로 가게 될까요?
김 장로님을 만났더니, 우리를 데리러 학생이 나와 있다고 합니다. 아세트라는 학생인데 함께 교환학생으로 갔다가 경희대에서 6개월만 공부하고 돌아온 3학년 학생이라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사서 입었다는 티셔츠 가슴에 <뭘봐?>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우스웠습니다. 아세트가 안내하는 곳으로 갔더니 작은 시내버스 한 대에 외대의 박넬리 교수와 김율리야 교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에, 노선버스 한 대를 임대해 놓았던 것입니다. 자기 자식을 교환교수로 가게끔 추천해 준 데 대한 사례로 아주 마음먹고 대접하려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달가르 라이온이 루슬란의 집이라 했습니다. 루슬란의 아버지가 모는 그 임대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 도착했습니다. 집 앞 길 건너에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뒤로는 머지 않아 텐샨산맥이 솟아있었고, 넓직한 남새밭(40미터 길이)을 지닌 넉넉한 집이었습니다. 루슬란과 아세트는 집안간이었고, 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일이 다가와 “싸우볼릉으스” 또는 “즈드라스 브이쩨” 인사를 하거나 포옹을 하였습니다.
집안에서 회식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것저것 차에 싣더니 우리보고 다시 타랍니다. 산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좌우에 사과밭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산쪽으로 한참을 달려 수력발전소를 넘어 달가르강(우리 식으로는 계곡)을 끼고 계속해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회색빛 강물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메데우로 가는가 했더니, 다른 곳이었습니다. 우리 말로 사슴골(마랄사이)이라고 했습니다. 곳곳에 바리케이트나 문이 닫혀 있어서 검문을 하였습니다. 예약하여 허가받은 사람만 출입할 수 있다 했습니다. 사슴이며 호랑이며 곰이며 이런 야생동물들이 출몰하는 지역이라 했습니다. 우리로 하면 야생동물 보호구역인 듯했습니다.
가면서 아세트가 막내아들인데 결혼한 그 형은 나가서 살고 막내아들인 아세트가 부모님과 산다기에 물었습니다. “왜 형이 모시지 않지?” 그랬더니만, 카작에서는 막내아들이 부모를 모신다고 했습니다. 딸만 있으면 사위가 모신다고 했습니다. 좋겠다고 루슬란의 어머니한테 말했더니 고개를 흔듭니다. 왜 그러냐니까, ‘막내는 오냐오냐 사랑만 하며 키웠기에 나중에 부모를 제대로 섬기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법도 합니다. 사랑만 받아봐서 계속 응석만 부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루슬란의 어머니는 우리 한국의 제도가 더 맘에 든다고 했습니다.
함께 가는 가족 가운데 초등학교 6학년인 쟌사야가 아주 귀여운 얼굴로 붙임성있게 굴었습니다. 이름 뜻이 ‘마음의 쉼터’ 또는 ‘마음이 편안한 곳’이라고 했는데 정말 그런 인상이었습니다. 사진찍을 때마다 함께 찍거나 우리 사진을 열심히 찍어 주었습니다. 사진 찍을 때 우리는 ‘김치’나 ‘치즈’라고 하는데 여기 사람들은 뭐라느냐 했더니 ‘키슈미스(건포도)’라고 율리야 교수가 말해줍니다.
달가르강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 공터에 자리를 폈습니다. 우선 목을 축이라며 말젖을 주었습니다. 아주 시큼하였습니다. 자기네 집에서 키우는 말에서 짜서 발효한 것이라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마시기는 뭐해서 설탕을 넣어서 다 마셨습니다. 갖가지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우리보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말고기순대가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귀한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먹어보니 괜찮습니다. 냄새도 안 나고 좋아서 너덧 개나 먹었습니다. 쇠고기찜 요리도 먹었습니다. 이윽고 샤슬릭이 나왔습니다. 닭고기 샤슬릭에 이어 쇠고기 샤스릭이 푸짐하게 나왔습니다. 우리같으면 여자들만 요리하기 쉬운데 남자도 거들고 있었습니다. 물었더니, 원래는 남자들이 샤슬릭을 다 구워오는데, 요즘들어서 여자들이 도와주고 있답니다. 인접국인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지금도 남성중심이라 했습니다. 이슬람국가 중에서 카자흐스탄만 여성이 존중받는 나라가 없다고 했습니다. 함께 앉아서 식사도 하는 것, 카작에서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루슬란의 어머니와 사촌형이 자꾸만 보드카를 권해 김 장로님과 마셔주었더니 계속 잔을 채워 혼이 났습니다. 이것 다 먹었다가는 죽는다고 했더니 책임지겠다며 권하였습니다. 샤슬릭을 많이 먹으며 술 취하지 않으니 괜찮다고 하면서. 다행히도 금세 깨었습니다. 공기도 좋고 음식에 분위기까지 좋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그야말로 배 터지게 먹었습니다. 그래야만 주인이 좋아한다고 아세트가 귓띔하는 바람에 약간 과식하였습니다. 정말 융숭한 대접이었습니다. 먹는 대로 마시는 대로 접시와 잔을 채워주었습니다. 요리가 끝나자 수박이 나왔습니다. 집에서 따왔다는 작은 사과도 베어물었더니 아주 신 맛이 어릴 때 먹던 홍옥 맛이었습니다. 루슬란의 아버지가 중동과 유대인의 전통적인 식사자세를 취해 자세히 보았습니다. 오른쪽으로 비스듬이 기대듯 누워 왼손으로 차를 마셨습니다. 심장이 왼쪽에 있어 그렇게 눕는다고 했습니다. 고기 요리 나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 그렇게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지간히 먹고 나자, 아주 중요한 의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집안 아기의 걸음마 의식이었습니다. 2007년 5월 17일생이라는 티무르란(쇠의 대장, 대장 쇠)이 돌 지나 40일째 되는 날, 그 발을 끈으로 묶은 후, 덕있는 사람에게 가위로 그 끈을 자르게 한 다음 아이를 걷게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나는 책으로만 그 사실을 알았는데 오늘은 김장로님과 함께 좌우의 끈을 가위로 잘라주는 역할도 하고 가족들의 반응까지 자세히 살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위로 끈을 완전히 자르자마자 가족들이 일제히 외쳤습니다. “주그르”, “주그르” 그 말은 카작말로 ‘달려라’ ‘달려라’입니다. 2006년에 3개월간 배운 카작말 실력이지만 그 말은 얼른 내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 의식을 해서 그런지 아이는 그 뒤로 자꾸만 걸으려고 하여 가족을 즐겁게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이미 걸을 줄 아는 아이인데 이런 의식을 하는 것입니다만.)
다시 둘러앉아서 덕담을 하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노래하래서 아리랑을 합창하니 자기네 민요를 합창하여 화답합니다. 카작말 배울 때 가니 선생이 알려준 <눈동자노래(?)>를 내가 흥얼거렸더니 일제히 따라서 합니다. 아바이가 지은 노래라며, 사랑은 우리들의 눈동자처럼 소중하다는 노래라고 풀이해 주어 그 노래의 성격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애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자기네끼리 모일 때는 먹고 나서 어른이 감사와 축원의 기도를 하면, 일제히 “아민”하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훑어내린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박넬리 교수가 먼저 덕담을 하고 이어서 김장로님, 나, 율리야 교수 차례로 한마디씩 덕담을 해주었습니다. 좋은 전통입니다. 밥만 먹고 마는 우리보다 의미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집으로> 등의 영화를 비롯하여 한국의 영상물을 계속 보고 있다면서, “한국사람들은 지금도 그 영화나 드라마처럼 살고 있나요?” 하는 걸 보면 카작인들은 우리의 전통문화나 생활풍습을 좋게 생각하는 눈치입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피차 그런 자세로 살아가면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져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점심 먹고 나서 계곡물을 따라 한참 올라갔습니다. 식수로 이용하기 위해 산의 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 커다란 송수관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소련시절에 만들었는지 겉면이 아주 많이 녹슬어 있었습니다. 손을 대보니 눈녹은 물이라 그런지 아주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아주 맑은 자연수가 흘러내려 옵니다. 먹어도 좋은 물이라 해서 한움큼 마셨습니다. 모두가 석회수인 줄 알았더니 우리의 생수도 흐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송수관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 지점에서는 걸러주는 장치가 있어서, 돌가루며 나쁜 성분을 제거하여 옆 강물로 흘려보내고 걸러진 물로 송수관으로 내려보내고 있었습니다. 강가로 내려가서 물에 손을 대니 어찌나 차가운지 이내 꺼내야 했습니다. 빛깔도 회색이거니와 돌가루가 잡혀서 도저히 그냥 먹을 수 없다는 게 느껴집니다. 시골 사람들은 이런 물을 그냥 먹어 단명하고 병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녀온 곳이 2500미터 고지랍니다.
어둑어둑해져,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댐 근처에 왔을 때 아주 굵은 우박이 한참을 쏟아부어 놀랐습니다. 그렇게 큰 우박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내려서 보니 손톱 크기의 얼음덩어리가 수북하게 쌓여있었습니다. 이곳에서도 드문 일이라 했습니다. 우박 때문은 아니겠지만 거대한 가로수 하나가 뿌리가 뽑힌 채 도로를 가로질러 쓰러져 있어 차량이 지나갈 수 없어 빙 돌아왔습니다. 뿌리깊은 나무도 나이가 들면 그 뿌리가 썩어 버려서 바람에 맥없이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나무의 수명이 있나봅니다. 고목 옆 지날 때 조심할 일입니다. 돌아오다 이번에는 더 끔찍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여성이 모는 승용차 한 대가 커브길에서 직진으로 달리는 바람에 계곡물에 쳐박혀 물살에 떠내려 가다 천행으로 멈춰서 살아난 장면이었습니다.
루슬란 집에 들어가니 여름철을 지내기 위해 꾸며 놓은 열린 거실에 차를 마련해 놓고는 마시랍니다. 우유(말라꼬)를 탄 홍차였습니다. 다과와 빵과 채소를 먹으면서 담소하였습니다. 파리는 있어도 모기는 없다고 했습니다. 카작인은 우리처럼 절하지 않는답니다. 과거에는(지금도 일부) 웃어른 앞에서 자기 오른손을 대각선으로 가슴에 대며 눈 보지 않은 채 머리 약간 숙여서 예를 표했으며, 지금은 대부분 악수하되 두 손으로 한다고 했습니다. 포옹도 하는데 두 번 이쪽 저쪽 번갈아 한다고 했습니다. 형이나 누이를 부를 때, 우리는 “형”, “누나”라 부르고 절대 이름을 못 부르는데, 카작인은 “아무개 형(언니)”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우리와 서양식을 절충한 형태였습니다. 모스크에 가서 예배(기도)하는 것은 금요일 오후 1시-2시뿐이라 했습니다. 직장이나 집에서 가까운 모스코에 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헌금 의무도 없다 했습니다. 부자나 국가에서 성직자인 이맘을 먹여 살린답니다.
아침에 모였던 질료니 바자르까지 태워다 주어 내렸습니다. 집에 오는 98번 버스에 타고 보니 너무 많이 먹었는지 화장실이 급해 내려서 무조건 어느 가게 들어가 화장실을 물어야 하는데 갑자기 화장실의 러시아어도 카작어도 생각나지 않아, 우리 원로 목사님처럼 ‘쉬이’ 했더니만 금세 알아듣고 열쇠로 열어줍니다. 너무도 고마워 카작집에서 싸준 봉지에 든 보드카를 주었더니 정색을 하며 안 받습니다. 착한 청년이었습니다. 오늘 친절하게 대해준 루슬란과 아세트 가족, 화장실을 열어준 그 카작 청년, 그 친절로, 1937년 강제이주 때 불쌍한 우리 고려인들을 맞이해주고 도와주어 오늘날 우리 고려인이 건재한 것이겠지요?
헤어질 때 루슬란 어머니가 음식을 싸주어 가지고 왔는데, 하숙집에서 못 먹겠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하나의 봉지 속에 이것적것 함께 넣어주어 완전히 개밥이라 도저히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곳 고려인들도 그렇다고 하네요. 물기 없는 음식이 많아서 그렇게 싼다고 한다는데 우리와 많이 다른 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