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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산림 대법회 66강-4 (2015. 8. 3.)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一
十無盡藏品 第二十二
三. 功德林菩薩의 說十藏法
6. 施藏
(10) 現在施 (11) 究竟施
7. 慧藏
(1) 如實知義 (2) 自利
(3) 利他 (4) 十種不可盡
(5) 慧藏의 利益
(10) 現在施
云何爲菩薩의 現在施오
此菩薩이 聞四天王衆天과 三十三天과夜摩天과
兜率陀天과 化樂天과 他化自在天과 梵天에
梵身天과 梵輔天과 梵衆天과 大梵天과 光天에
少光天과 無量光天과 光音天과 淨天에 少淨天과
無量淨天과 徧淨天과 廣天에 少廣天과
無量廣天과 廣果天과 無煩天과 無熱天과
善見天과 善現天과 色究竟天하며
乃至聞聲聞緣覺의 具足功德이라도 聞已에 其心이
不迷不沒하며 不聚不散하고 但觀諸行이
如夢不實하야 無有貪着이로대 爲令衆生으로
捨離惡趣하야 心無分別하며 修菩薩道하야
成就佛法하야 而爲開演하나니 是名現在施니라
現在施(현재시)
云何爲菩薩의
現在施오? 현재시냐?
此菩薩이, 이 보살이
聞(문), 들을 聞자를 저 밑에 가서 새깁니다.
四天王衆天(사천왕중천)과,
三十三天(삼십삼천)과 夜摩天(야마천)과
兜率陀天(도솔타천)과 化樂天(화락천)과
他化自在天(타화자재천)과 梵天(범천)에
梵身天(범신천)과 梵輔天(범보천)과 梵衆天(범중천)과
大梵天(대범천)과 光天(광천)에 少光天과
無量光天(무량광천)과 光音天(광음천)과 淨天(정천)에
少淨天과 無量淨天과 遍淨天(변정천)과 廣天(광천)에
少廣天과, 이것이 아마 정천에 소정천이 있고, 광천에 소광천이 있고, 그런가 봐요. 그래서 토를 이렇게 미세하게 달았습니다.
無量廣天과 廣果天(광과천)과 無煩天(무번천)과
無熱天(무열천)과 善見天(선견천)과
善現天(선현천)과 色究竟天(색구경천)을 들어서,
그런 데에 대한 이야기를, 예를 들어서 보살이 하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 하늘은, 화엄경에 근거하면 무수히 많은 하늘이 있고, 또 요즘은 다중우주라. 우주도 多重(다중)으로, 우리가 속해있는 우주 같은 것이 수없이 많다고 해서 다중우주론이 많이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데에 비춰 봐도 이런 하늘이 있다 없다 할 일이 아닙니다.
저는 늘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乃至聞聲聞緣覺(내지문성문연각)의
具足功德(구족공덕)이라도, 내지 성문ㆍ연각의 구족 공덕을 들을지라도, 천상의 이야기를 들으나 성문이나 연각들의 공덕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지라도,
聞已에 其心(문이기심)이 不迷不沒(불미불몰)하며,
듣고 나서는 그 마음이, 거기에 대한 = 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마음이 미혹하지도 않고 그것이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不聚不散(불취불산)하고,
굳이 이것을 모으려고 하지도 않고 흩으려고 하지도 아니해요. 그리고
但觀諸行(단관제행)이 如夢不實(여몽부실)하야,
다만 거기에 대해서 ‘아 그런가 보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럼 무엇을 관찰하느냐? 諸行이 如夢不實이라.
제행이 꿈과 같아서 실답지 않다. 우리 육신도, 또 내가 처해있는 확실한 이 지구도 如夢不實입니다. 똑 같습니다.
꿈과 같아서 실답지 아니함을 관찰해서
無有貪着(무유탐착)이로대, 탐착할 것이 없음이로되,
육신도 그렇고 우리 절도 그렇고 우리가 처해있는 이 지구도 그렇고 마찬가지다. 이 겁니다.
우리가 눈이 짧으니까 현재 내 몸과 내가 사는 이 주변 환경과 지구까지만 보이는 것이지, 여기에 수없이 소개된 이 많고 많은 하늘들을 우리 안목이 지금 부족해서 모르지 그것이 있다 없다 굳이 그렇게 따질 일은 아니다. 이 것이지요. 탐착할 것이 없음이로되,
爲令衆生(위령중생)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捨離惡趣(사리악취)하야, 악취를 떠나게 해서,
心無分別(심무분별)하며, 마음에 분별이 없게 하고,
修菩薩道(수보살도)하야, 보살도를 닦게 해서,
成就佛法(성취불법)하야, 불법을 성취하여,
而爲開演(이위개연)하나니, 열어서 이야기한다.
어떻게 하더라도 불법을 깨닫게 하고 보살도를 닦게 하는 그런 뜻에서 이런 이야기도 필요하면 무수한 화장장엄세계도 이야기도 한다. 이 것이지요.
是名現在施니라. 이것이 현재시다.
(11) 究竟施
云何爲菩薩의 究竟施오
佛子야 此菩薩이 假使有無量衆生이 或有無眼하며
或有無耳하며 或無鼻舌과 及以手足이라
來至其所하야 告菩薩言호대 我身이 薄祜하야
諸根殘缺이로소니 惟願仁慈는 以善方便으로
捨己所有하야 令我具足케하라하면
菩薩이 聞之하고 卽便施與호대 假使由此하야
經阿僧祗劫토록 諸根不具라도
亦不心生一念悔惜하고 但自觀身이 從初入胎로
不淨微形과 胞段諸根이 生老病死하며 又觀此身이
無有眞實하고 無有慚愧하야 非賢聖物이라
臭穢不潔이며 骨節相持요 血肉所塗며 九孔常流에
人所惡賤이라하야 作是觀已하고
不生一念愛着之心하며 復作是念호대
此身이 危脆하야 無有堅固하니
我今云何而生戀着이리오 應以施彼하야
充滿其願하고 如我所作하야 以此開導一切衆生하야
令於身心에 不生貪愛하야
悉得成就淸淨智身이라하나니 是名究竟施니
是爲菩薩摩訶薩의 第六 施藏이니라
究竟施(구경시), 마지막 최고의 시.
云何爲菩薩의
究竟施오? 구경 시냐?
佛子야
此菩薩이, 이 보살이
假使有無量衆生(가사유무량중생)이
或有無眼(혹유무안)하며, 혹 어떤 이는 눈이 없고
或有無耳(혹유무이)하며, 혹은 귀가 없고,
或無鼻舌(혹무비설)과, 혹은 코와 혀와,
及以手足(급이수족)이라. 그리고 수족이 없는데,
來至其所(내지기소)하야, 그곳에 와서
告菩薩言(고보살언)호대, 보살에게 고하되,
我身(아신)이, 내 몸이 지금
薄祜(박호)하야, 박복하고, 이것도 복 호자니까요. 박복해서, 諸根이 殘缺(제근잔결)이로소니,
모든 근이 구족하지 못하고, 손도 떨어져 나가고 눈도 멀고 귀도 어둡고 그렇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
惟願仁慈(유원인자)는,
오직 원하옵노니 어진 분께서는,
以善方便(이선방편)으로, 좋은 방편으로써
捨己所有(사기소유)하야, 당신 것을 버려서,
令我具足(영아구족)케하라하면, 나로 하여금 구족하게 하라. 그러니까 ‘장기기증 좀 하십시오.’ 이 말입니다.
장기기증 좀 하라. 그러면
菩薩이 聞之(보살문지)하고, 보살이 그 말을 듣고는
卽便施與(즉편시여)호대, 곧 보시를 하되,
假使由此(가사유차)하야, 가령 이것을 말미암아서,
經阿僧祗劫(경아승지겁)토록, 아승지겁을 지날 때까지,
諸根이 不具(제근불구)라도, 모든 근이 불구하더라도,
亦不心生一念悔惜(역불심생일념회석)하고,
한 생각도 뉘우치거나 아까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但自觀身(단자관신)이,
다만 스스로 관하기를 이 몸이,
從初入胎(종초입태)로, 처음 입태할 때로부터
不淨微形(부정미형)과, 아주 부정하고 아주 보잘 것 없는,
그것 핏덩어리지요? 不淨微形이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핏덩어리와
胞段諸根(포단제근)이, 세포지요.
세포덩어리지요. 세포덩어리의 모든 근들이
生老病死(생로병사)하며, 생 노 병 사함을 관하며,
그런 것을 관찰한다. 이 말입니다.
又觀(우관), 또 관찰한다.
우리 몸이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지금 이 정도 늙었지요?
此身이 無有眞實(차신무유진실)하고,
이 몸이 또 진실이 없어요. 그리고
無有慚愧(무유참괴)하야,
진실한 것이 없으므로 慚愧할 것도 없어요. 그리고
非賢聖物(비현성물)이라.
賢聖의 물건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臭穢不潔(취예불결)이며,
아주 냄새 투성이고 불결해요. 그리고
骨節相持(골절상지)요.
뼈마디가 서로 서로 보고 서로 의지하고 있고요.
血肉所塗(혈육소도)며, 피와 고기 덩어리로써 발려서
얼기설기 묶여있는 것이 우리 육신이다. 이 말입니다.
九孔常流(구공상류)에,
아홉 구멍에서 항상 더러운 물이 흘러서
人所惡賤(인소오천)이라하야,
사람들이 아주 싫어하고 천하게 여기는 바다. 라고 이렇게 관해서
作是觀已(작시관이)하고, 이러한 관을 짓고 나서는,
不生一念愛着之心(불생일념애착지심)하며,
일념도 애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
復作是念(부작시념)호대, 또 다시 이런 생각을 하되,
此身이 危脆(차신위취)하야, 이 몸은 危脆하여
脆 = 연할 취 자입니다. 아주 위태롭고 연해서 조금만 칼끝에 찔리거나 바늘 끝에 찔려도 바로 피가 나고 상처를 입고 교통사고가 나면 사정없이 몸뚱이가 부서지고 그렇잖아요. 그야말로 危脆입니다. 위치해서,
無有堅固(무유견고)하니, 견고함이 없으니,
我今云何而生戀着(아금운하이생련착)이리오?
내가 지금 뭐하려고 이렇게 애착하느냐? 말입니다.
喫甘愛養(끽감애양)하여도 此身(차신)은 定壞(정괴)요
着柔守護(착유수호)하여도 命必有終(명필유종)이라.
귀에 못이 박히도록 우리가 외우고 듣던 이야기지요?
애착하고 그리워 할 것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我)應以施彼(응이시피)하야,
내가 응당히 저 사람에게 보시를 해서,
充滿其願(충만기원)하고, 그 원에 충만하고,
如我所作(여아소작)하야, 내가 지은 바와 같이해서
以此開導一切衆生(이차개도일체중생)하야,
일체 중생을 잘 가르쳐 개도해서,
令於身心(영어신심)에 不生貪愛(불생탐애)하야,
몸과 마음에 탐애를 누리지 않게 해서
悉得成就淸淨智身(실득성취청정지신)이라하나니,
모두가 청정한 지혜의 몸을 얻도록 한다. 이 말입니다.
이 값어치 없는 이 고기 덩어리, 보시하고 그 대신에 지혜의 몸, 아주 뛰어난 지혜의 몸. 淸淨智身 = 청정한 지혜의 몸을 얻을 것이다. 라고 이렇게 하노니
是名究竟施니, 이것의 이름이 구경시다.
是爲菩薩摩訶薩의 第六 施藏이니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제6 시장이니라.
10무진장 가운데 여섯 번째 시장 이야기까지 마쳤습니다.
7. 慧藏
(1) 如實知義
佛子야 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 慧藏고
此菩薩이 於色에 如實知하고 色集에 如實知하고
色滅에 如實知하고 色滅道에 如實知하며
於受想行識에 如實知하고
受想行識集에 如實知하고
受想行識滅에 如實知하고
受想行識滅道에 如實知하며
於無明에 如實知하고 無明集에 如實知하고
無明滅에 如實知하고 無明滅道에 如實知하며
於愛에 如實知하고 愛集에 如實知하고
愛滅에 如實知하고 愛滅道에 如實知하며
於聲聞에 如實知하고 聲聞法에 如實知하고
聲聞集에 如實知하고 聲聞涅槃에 如實知하며
於獨覺에 如實知하고 獨覺法에 如實知하고
獨覺集에 如實知하고 獨覺涅槃에 如實知하며
於菩薩에 如實知하고 菩薩法에 如實知하고
菩薩集에 如實知하고 菩薩涅槃에 如實知하나니라
慧藏(혜장). 지혜 혜ㆍ감출 장. 지혜의 무진장이지요.
如實知義(여실지의). 여실하게 안다는 뜻. 이 말입니다.
여실하게 안다는 뜻. 사실과 같이, 존재의 실상과 같이 안다. 이 말입니다.
佛子야 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
慧藏고? 지혜의 무진장이냐?
此菩薩이, 이 보살이
於色(어색)에 如實知하고, 色 = 물질, 이 몸뚱이를 여실하게 안다. 실상과 같이 안다. 사실대로 안다. 이 말입니다.
아주 허망하지만 또 이렇게 분명히 있고, 분명히 있으면서도 사실 순식간에 사라질 그런 허망한 몸뚱이다.
그 양쪽을 어디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제대로 아는 것이 여실히 아는 것, 중도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아까도 중도 이야기를 했지만 여실히 안다는 것이 중도적으로ㆍ사실대로ㆍ실상대로 안다는 것입니다.
몸에 너무 집착할 것도 아니고, 또 그렇다고 몸뚱이를 너무 함부로 할 것도 아니고요. 그것이 중도입니다.
몸에 대한 中道적 觀念. 이것이 중도한 겁니다. 사실 몸을 막 함부로... 제가 그전에 봉암사 선방에 있을 때 어떤 수좌가 대중들이 공양할 때는 공양을 안 하고 있다가, 나중에야 꼭 설거지 할 때 가서 공양하는 겁니다. 다 남은 것만 먹고요. 또 지난 음식, 어제 먹던 것만 거둬서 먹는 겁니다.
마음이야 참~ 오죽 좋습니까? 막 그냥 천하게 먹고 입고하는 것을 자기 몸을 아주 생각하는 겁니다. 몸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좋은 일만 한다고 그렇게 하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또 송광사 선방에서 같이 또 있었는데 화두가 제대로 안되니까, 제가 관음전 부전을 했는데 거기에 와서 법당 마루에다 대고 머리를 쾅쾅 찧어서 머리에서 막 피가 나고, 그렇게 성의를 다해서 아주 열심히 정진하고 그러더라고요. 요즘도 그런 사람들이 더러 있는가 모르겠네요.
이 육신에 대해서, 색에 대해서 여실히 알고,
色集(색집)에, 이 육신이 모인 그 원인이지요.
集은 육신의 원인이니까요. 거기도
如實知하고, 여실히 알고,
色滅(색멸)에, 이 육신이 소멸하는 데 대해서도
如實知하고, 여실히 알고,
色滅道(색멸도)에,
색이 소멸하는 데 대한 그런 道. 여기에 대해서도
如實知하며, 여실히 알고,
於受想行識(어수상행식)에,
색수상행식을 쭉~ 이야기합니다. 수상행식에 대해서도
如實知하고, 여실히 알고,
受想行識集에 如實知하고,
수집에 대해서도 여실히 알고.
受想行識滅에 如實知하고,
수멸에 대해서도 여실히 알고,
受想行識滅道에 如實知하며,
수멸도에 대해서도 여실히 안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에 나오네요.
受想行識集에 如實知하고
受想行識滅에 대해서도 如實知하고
受想行識의 滅道, 색수상행식을 소멸하는 도.
팔정도라고 할까요? 거기에 대해서도 如實히 알며,
於無明(어무명)에 如實知하고,
無明集에 如實知하고,
無明滅에 如實知하고,
無明滅道에 如實知하며,
於愛(어애)에 대해서 如實知하고,
愛의 集에 대해서 如實知하고,
愛의 滅에 대해서 如實知하고,
愛의 滅道에 如實知하며,
於聲聞(어성문)에 如實知하고,
聲聞法에 대해서
如實知하고, 여실히 알고,
聲聞集에 대해서
如實知하고, 여실히 알고,
聲聞의 涅槃(열반)에 대해서 如實知하며,
於獨覺(어독각)에, 연각에 如實知하고,
獨覺法에, 연각법에 如實知하고,
獨覺集에, 연각집에 如實知하고,
獨覺涅槃에, 연각 열반에 如實知하며,
於菩薩에, 보살에 대해서도
如實知하고, 여실하게 알고,
菩薩의 法에 대해서도
如實知하고, 여실히 알고,
菩薩集에, 보살이, 보살이 되게 된 원인.
그것이 集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도
如實知하고, 여실히 알고, 결국
菩薩의 涅槃에 대해서도 如實知한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지혜의 藏. 모든 것을 꿰뚫어 아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自利를 이야기하는데요.
(2) 自利
云何知오 知從業報諸行因緣之所造作은
一切虛假하야 空無有實하야 非我非堅固며
無有少法可得成立이니라
自利(자리).
云何知오? 어떻게 그럼 여실히 안다고 하는 것이냐?
아는 것을 여기 이야기 해놓았습니다. 이 두 줄이 중요합니다.
知從業報諸行因緣之所造作(지종업보제행인연지소조작)은, 업보와 모든 행위의 인연으로 조작 한 바 지은 바는,
一切虛假(일체허가)하야, 일체가 다 헛것입니다.
일체가 다 거짓입니다. 그리고
空無有實(공무유실)하야,
空無해서 실다운 것이 없습니다.
텅 비고 없어서 실다운 것이 없다. 왜냐? 업보이고, 모든 행위이고, 그리고 인연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ㆍ인연으로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一切虛假다. 空無有實이다.
실다움이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非我非堅固(비아비견고)며, 아도 아니고, 견고함도 아니며
無有少法可得成立(무유소법가득성립)이니라.
조그만 법도 가히 성립될 것이 없다. 이 말입니다.
뭐 하나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
그러면 뭐가 제대로 된 것이냐?
제가 늘 이야기를 하지요? 이런 이야기를 듣는 當體.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ㆍ僧도 아니고 俗도 아니고, 그런 모든 것을 초월하면서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있는 참사람ㆍ차별이 없는 참사람. 승이다 속이다. 남자다 여자다.
그런 차별이 전혀 없는 당체! 그것이 차별 없는 참사람,
無位眞人(무위진인). 제가 늘 이야기를 하지요.
그것이 주체입니다. 그것이 주인공입니다. 그것은 조작이 아닙니다.
그것을 참나 라고 하고, 참사람이라고도 하고 참마음이라고도 하고 진여자성이라고도 하고요. 이것은 조작한 것이 아닙니다. 인연으로 생긴 것도 아니라고요. 인연으로 생긴 것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연으로 생긴 것은, 어차피 인연의 힘이 다하면 없어집니다. 하늘을 향해서 화살을 되게 힘을 줘서 당겨서 쏘았어요. 10미터 올라가고 20미터 올라가고 30미터 내지 100미터를 올라간다 하더라도 여기서 화살을 당겼던 그 인연의 힘이 끝나면 저절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 가지고는 답이 없다니까요.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 무슨 일을 해서 쌓는 것은 답이 없고, 그야말로 조작을 떠나고 인연을 떠나고 업보를 떠난 참사람, 차별 없는 참사람, 지금 아무 조건과 차별 없이 이 말을 듣고 있는 그 當體ㆍ實體. 불교는 이것 하나가지고 큰소리치는 겁니다. 특히 선불교는 이것 하나가지고 큰소리치는 겁니다. 이것 하나 가지고요. 어느 종교 어느 철학도 이것 가지고 그렇게 큰소리치는 종교나 철학은 없습니다.
당장에 눈앞에 있잖아요. 어디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서방정토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우리 눈앞에서 이렇게 역력하잖아요. 그야말로 歷歷孤明(역력고명)한 겁니다.
여러분, 이제 49재 지내는 철인데요. 49재 왜 지내느냐?
바로 歷歷孤明한 그 한 물건 때문에 지내는 겁니다.
그 나머지는 전부 허망한 겁니다. 그렇습니다.
因緣ㆍ業報, 온갖 修行. 그리고 모든 행의 인연으로 조작된 것은 一切가 虛假다. 空無有實이다. 공해서 실다운 것이 없다. 非我非堅固 無有少法可得成立이라.
조그마한 것도, 먼지만한 것도 성립될 것이 없다. 그런 말입니다. 그러나 歷歷孤明한 그 한 물건은 이 우주를 꽉 채우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주를 꽉 채우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3) 利他
欲令衆生으로 知其實性하야 廣爲宣說하나니
爲說何等고 說諸法不可壞니라
何等法이 不可壞오 色不可壞며
受想行識이 不可壞며 無明이 不可壞며
聲聞法獨覺法菩薩法이 不可壞니라
何以故오 一切法이 無作無作者며 無言說無處所며
不生不起며 不與不取며 無動轉無作用이니라
菩薩이 成就如是等無量慧藏하야 以少方便으로
了一切法호대 自然明達이요 不由他悟니라
利他(이타).
欲令衆生(욕영중생)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知其實性(지기실성)하야, 여기 實性이 나오네요.
실다운 성품을 알아서,
廣爲宣說(광위선설)하나니,
널리 宣說 = 설명한다. 이 말입니다.
제가 늘 걸핏하면 無位眞人 = 차별 없는 참사람 가지고 이야기 하듯이 참마음ㆍ참나ㆍ참사람ㆍ진여자성ㆍ법성ㆍ불성. 같은 의미지요. 쉽게 말하면 한마음. 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 實性을 가지고, 실성을 알아서 廣爲宣說. 널리 설명하나니,
爲說何等(위설하등)고?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說諸法不可壞(설제법불가괴)니라.
제법은 가히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이다.
何等法이 不可壞오?
무슨 법이 무너뜨리지 못하는 것이냐?
色不可壞며,受想行識이 不可壞며, 無明이 不可壞며,
聲聞法ㆍ獨覺法ㆍ菩薩法이 不可壞니라.
이것은 또 어떻게 알아야 되느냐? 바람이 불어서 바다에 무수한 물결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물결의 모양은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리고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물을 떠서 보면 물이라고 하는 그 실체는 변함이 없습니다. 不可壞입니다.
물결은 순간순간 변해서 무상하기 이를 데 없지만, 물이라고 하는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하는 그것이 不可壞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색수상행식이니, 성문ㆍ연각ㆍ보살법이니 하는 것이 불가괴라고 하는 것은 그 실체,
그 실상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물이 어떻게 생겼다.
파도가 크다 작다 세수 대야에 떠있는 물이다. 컵에 떠있는 물이다. 이것을 가지고 논할 것이 아니고, 컵의 물이나 세수 대야의 물이나 양동이의 물이나 전부 물이라고 하는 실체에 대해서는 이것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영원한 것이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다.
何以故오 一切法이
無作無作者며, 지음도 없고 짓는 자도 없으며,
無言說無處所며,
不生不起며, 생기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아니하며,
不與不取며, 주는 것도 아니며 취하는 것도 아니며,
無動轉無作用(무동전무작용)이니라.
菩薩이
成就如是等無量慧藏(성취여시등무량혜장)하야,
이와 같은 한량없는 지혜의 무진장을 성취해서,
以少方便(이소방편)으로, 작은 방편으로써
了一切法(요일체법)호대, 일체 법을 요달하되,
自然明達(자연명달)이요.
일체 법을 알되 자연히 저절로 깨달아 아는 것이고,
不由他悟(불유타오)니라. 이것 중요한 말입니다.
了一切法호대, 일체 법을 요달하되,
自然明達이다.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고, 자기 속에서 알아지는 것이다. 남이 아무리 귀가 닳도록 천번 만번 억 만 번을 이야기해줘도 그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인연은 될 수가 있어도,
결국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 속에서 느끼고 알고 깨닫는데 있다. 이 말입니다. 不由他悟다. 다른 이의 깨달음을 말미암지 않는다. 다른 이를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말입니다. 자기 속에 답이 다 있습니다. 자기 속에 답이 다 있어요.
야~~ 불교 가르침 참 위대합니다. 이런 것이 위대한 겁니다. 了一切法호대 自然明達이요 不由他悟라.
다른 이를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4) 十種不可盡
此慧無盡藏이 有十種不可盡일새
故說爲無盡이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多聞善巧가 不可盡故며
親近善知識이 不可盡故며
善分別句義가 不可盡故며
入深法界가 不可盡故며
以一味智莊嚴이 不可盡故며
集一切福德에 心無疲倦이 不可盡故며
入一切陀羅尼門이 不可盡故며
能分別一切衆生語言音聲이 不可盡故며
能斷一切衆生疑惑이 不可盡故며
爲一切衆生하야 現一切佛神力하야 敎化調伏하야
令修行不斷이 不可盡故니 是爲十이니라
十種不可盡(십종불가진). 열 가지 다함이 없는 내용.
此慧無盡藏이, 이 지혜의 무진장이
有十種不可盡일새,
열 가지 가히 다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故說爲無盡이니, 그래서 無盡이라고 말한다.
何等이 爲十고?
所謂多聞善巧(소위다문선교)가 不可盡故며,
많이 듣는 능력, 많이 듣는 기술, 많이 듣는 善巧방편,
많이 듣는 어떤 능력이라고 보면 됩니다. 많이 듣는 능력이 不可盡이다. 우리가 들으려면 얼마든지 듣지요.
多聞이 참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다문이 첫 째 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더운 날에 뭘 한마디라도 주어 들으려고 꾸역꾸역 먼 길을 이렇게 오시는 것 아닙니까?
다문이 제일 중요하다고요. 三慧가 聞ㆍ思ㆍ修잖아요.
듣고, 사유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 修는 반복하는 겁니다. 그래 문ㆍ사ㆍ수입니다.
親近善知識(친근선지식)이 不可盡故며,
선지식을 친근 하는 것이 不可盡이다. 선지식도 궁극의 선지식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이 화엄경 같은 것이 참 중요한 선지식이고요. 자기 자신 다음으로는 화엄경 같은 이런 가르침이 훌륭한 선지식이고요.
善分別句義(선분별구의)가 不可盡故며,
句義를, 경전의 한 구절ㆍ그 구절에 담겨 있는 뜻.
이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 不可盡이다.
入深法界(입심법계)가, 깊은 법계에 들어가는 것이
不可盡故며,
以一味智莊嚴(이일미지장엄)이,
한 맛의 지혜로 장엄한다. 전부 지혜로 장엄한 것. 좋지요.
뭐 다른 것, 복덕이니 유루복 그까짓 것, 복이 좀 있다한들 몇 푼어치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간혹, 생활하는데ㆍ사는데 약간 편리해요. 호텔에서 잘 것을 여관에서 자면 됩니다. 아주 좋고 비싼 차타지 말고 중고차 그저 1500cc쯤 타면 되고,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됩니다.
거기에 찔리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지혜로 무장해야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이 지혜로 무장해놓으면, 지혜로 장엄. 저는 무장이라는 말을 가끔 쓰는데요. 무장했다기 보다는 장엄이 더 좋네요.
지혜로써 장엄해 놓으면 그것은 참 아름답기 이를 데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하고요. 以一味智莊嚴이 不可盡故며,
集一切福德(집일체복덕)에 心無疲倦(심무피권)이,
일체 복덕을 모으는데 있어서 마음에 전혀 피로함이 없는 것이 不可盡故며,
入一切陀羅尼門(입일체다라니문)이,
일체 다라니 문에 들어가는 것이 不可盡故며,
能分別一切衆生語言音聲(능분별일체중생어언음성)이,
중생의 일체 語言音聲을 분별하는 것이 不可盡故며,
중생의 온갖 음성을 다 분별하는 것. 무슨 4개 국어, 5개 국어가 문제가 아니고, 닭소리ㆍ새소리ㆍ개소리도 다 알아듣는다. 이 겁니다. 뭣 때문에 정오에는 닭이 울고 저녁에는 왜 울고, 닭은 닭대로 뜻이 있을 테니까 그것까지도 다 알아듣는... 그런 소리를 하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벌써 눈치 챘겠지요?
能斷一切衆生疑惑(능단일체중생의혹)이
일체 중생들의 의혹을 능히 끊는 것이 不可盡故며,
爲一切衆生하야, 일체 중생을 위해서
現一切佛神力하야, 일체 불신력을 나타내서
敎化調伏(교화조복)하야, 교화하고 조복해서
令修行不斷(령수행부단)이,
하여금 수행을 끊지 않게 하는 것이 不可盡故니
是爲十이니라. 이것이 열 가지다.
(5) 慧藏의 利益
是爲菩薩摩訶薩의 第七慧藏이니 住此藏者는
得無盡智慧하야 普能開悟一切衆生이니라
是爲菩薩摩訶薩의 第七 慧藏이니,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제7 혜장이니
住此藏者는, 이 慧藏. 지혜의 장에 머무는 자는,
得無盡智慧하야, 다함이 없는 지혜를 얻어서
普能開悟一切衆生(보능개오일체중생)이니라.
결국은 내가 얻자고 하는 것은 일체 중생을 능히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선행을 했다든지, 깨달음을 얻었다든지 이것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 동참하게 하고, 이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108자재어의 제일 뒤에 보면 “선행을 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은,ㆍ 알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相낸다고 자꾸 그런 오해를 해서 그러는데,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알리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과보를 받는 것은, 보상을 받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말입니다. 그 대신 널리 알려라. 알려서 동참하게 하고, 널리 알려서... 우리가 여기 공양 들어온 것을 자꾸 알리잖아요. 알리는 것은 좋은 겁니다.
극구 못 알리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알리는 것은 좋은 겁니다. 알려서 다른 사람들 동참하게 해야지요. 다른 사람들도 환희심을 내게 하고요. ‘아~ 그것 참 참 훌륭한 일이다.’ 하고, 환희심을 내게 하는 것. 그렇다고 그 사람에게 ‘내가 공양 얼마 냈으니까 나를 대접해주세요’ 이것이 아니거든요. 절대 그것이 아니라고요. 그런 말이 끝에 있습니다. 그래서 ‘야~ 이것 참, 우리가 너무 잘못 알고 있었구나.
알리는 것을 相낸다. 라고만 편협하게 알고 있었는데,
결코 상내는 것이 아니고,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안 된다고 그랬습니다. 보상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 대신에 여러 사람에게 알려서 같이 환희심을 일으키게 해주는 것, 같이 동참을 불러일으키는 것, 이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라고 권했습니다. 알리라고... 그러니 소문을 많이 내세요. 좋은 일하면 “아~ 내가 이번에 이것을 했다.” 하고 꼭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이고 좋은 일 조금 해놓고 상냈다.’ 라고 이렇게 볼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좋은 일 해놓고 대가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그냥 알릴뿐입니다. 그런 내용입니다. 날씨도 더운데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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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 _()()()_
不由他悟. 다른 이를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답이 다 있다.
보살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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了一切法호대 自然明達이요 不由他悟니라...고맙습니다._()()()_
_()()()_ 고맙습니다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_()()()_
_()()()_이제서야 노트정리가 끝났습니다. 고맙습니다._()_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了一切法호대 自然明達이요 不由他悟라...고맙습니다. _()()()_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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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喫甘愛養(끽감애양)하여도 此身(차신)은 定壞(정괴)요 着柔守護(착유수호)하여도 命必有終(명필유종)이라.
· 無位眞人 = 차별 없는 참사람 가지고 이야기 하듯이 참마음ㆍ참나ㆍ참사람ㆍ진여자성ㆍ법성ㆍ불성. 實性, 쉽게 말하면 한마음. 다 같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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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와 모든 행위의 인연으로 조작 한 바 지은 바는,
一切虛假(일체허가)하야, 일체가 다 헛것입니다.
일체가 다 거짓입니다. 그리고 空無有實(공무유실)하야,
空無해서 실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뭐가 제대로 된 것이냐?
無位眞人(무위진인). 제가 늘 이야기를 하지요.
그것이 주체입니다. 그것이 주인공입니다. 그것은 조작이 아닙니다.
그것을 참나 라고 하고, 참사람이라고도 하고 참마음이라고도 하고 진여자성이라고도 하고요.
이것은 조작한 것이 아닙니다. 인연으로 생긴 것도 아니라고요.
자기 속에 답이 다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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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無大方廣佛華嚴經 南無大方廣佛華嚴經 南無大方廣佛華嚴經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
결국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 속에서 느끼고 알고 깨닫는데 있다.
자기 자신 다음으로는 화엄경 같은 이런 가르침이 훌륭한 선지식이고요.
결국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 속에서 느끼고 알고 깨닫는데 있다.
자기 자신 다음으로는 화엄경 같은 이런 가르침이 훌륭한 선지식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