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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헌황귀비 엄씨 (純獻皇貴妃 嚴氏, 1854년 2월 2일 /음력 1월 5일 ~ 1911년 7월 20일 )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 대한제국 을미사변 직후 고종 의 시중을 들다 총애를 받아 영친왕 은 을 출산하고 이후 상궁에서 귀인으로, 순빈을 거쳐 순비가 되었다가 1903년
일설에는 계비란 말을 쓰기도 하는데[1] 계비란 정식으로 책봉된 두 번째 정궁(正宮)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황후가 아닌 황귀비 영월 이며 1854년 1월 5일 서울 1905년 양정의숙 (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1854년 음력 1월 5일 / 양력 2월 2일 한성부 서소문방 서소문 에서 평민인 엄진삼 엄준원 의 출세로 추증된 직위이고, 아버지 엄진삼의 직책인 의정부 찬정은 사후 증직 엄진일 은 고종 초에 무관으로 창덕궁
윤효정 [2] 집안이 빈한하였던 그녀는 1861년 1월, 나이 8세 때에 궁녀가 되어 입궐하였고, 경복궁
아버지 엄진삼에게는 오빠 엄봉원, 엄학원이 일찍 죽은 뒤 아들이 없었으므로 큰아버지 엄진일의 아들이자 그의 사촌남동생인 엄준원 이 아버지의 양자가 되었기에 진명학원 (진명여자고등학교 )의 창립자인 엄준원
입궐 초기 [ 편집 ]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가 실종되자 그는 고종을 지극 정성으로 보필하여 그 공으로 지밀상궁 [2] 이후 명성황후 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있었으며, 명성황후 생전인 1885년 32세에 고종 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
명성황후 에 의해 대궐에서 쫓겨날 당시 엄귀비는 상궁 직을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게 하였으나 당시 대신 윤용선 [2] 후에 엄귀비는 윤용선의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있다가 순종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이후 다시 입궐하여 고종 아관파천 때는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하였으며, 1897년 황자 은(垠, 의민태자
이준용 은 일본 고종 은 명성황후
이준용과의 갈등과 빈 책봉 [ 편집 ] 1899년 4월 이준용 은 일본 [3] 그는 유길준 , 권동진 , 조중응 궁내부 대신 이재순 [3] 이준용은 엄상궁의 출신 성분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왕실의 위신에 관련된 문제라며 엄상궁의 황후 책봉을 반대하였다.
영선군 이준용 (잠재적 왕위계승권자였던 그는 영친왕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다.)
또한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 [3]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황자 이은 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 에 망명중인 이준용과 이강 [4]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 이준용의 엄상궁 [4]
엄상궁과 그의 측근들은 고종 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했고, 명성황후
이준용 의 강한 반대와 국내 종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 은의 출산 직후 상궁에서 귀인 (貴人)이 되고 1900년 1901년 에 비(妃)로 진봉되고, 1903년
아들 은의 황태자 추대 노력 [ 편집 ] 순종 에게 아들이 없었고 그가 심하게 병약했다는 점 때문에 엄귀비는 자신의 아들 황자 은 을 황태자 의친왕 이 반발하면서 의친왕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 은 후사가 없는 순종 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 [5] [6]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 과[7]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 [8]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 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 의 동생이자 황태자 [8]
생애 후반 [ 편집 ] 아들 영친왕 을 순종 의 태자로 만드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영친왕 은 이토 히로부미 가 자신이 황태자 사부(師父)라는 명목 하에 일본 영친왕 이 일본 의 사관학교
1910년 경술국치
1905년 양정의숙 (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진명여학교 (현 진명여자고등학교 )와 명신여학교 (현 숙명여자대학교 1911년 7월 장티푸스 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 7월 20일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향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9] . 당시 그의 아들 영친왕
사망 후 순종 에게 사시
양주 천수산(天秀山)에 안장되었고 묘호는 영휘원 이진
위패는 칠궁에 추가로 봉안되었다.
가족 관계 [ 편집 ] 증조부 : 엄성복(嚴性復) 할아버지 : 엄재우(嚴載祐) 할머니 : 곡산 연씨 7촌 조카 : 엄주익 (嚴柱益, 1872년 ~ 1931년 ) 순헌황귀비 엄씨를 연기한 배우 [ 편집 ] TV 드라마 [ 편집 ] 관련 문화재 [ 편집 ] 여성 의 교육 과 문맹 탈출을 주장하던 개신교 선교사 들의 견해에 깊이 공감한 그는 1905년 양정의숙 (현 양정고등학교 )을,1906년 진명여학교 (현 진명여자고등학교 )와 명신여학교 (현 숙명여자대학교 이화학당 과 배재학당 에도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내 학생들에게 장학금
같이 보기 [ 편집 ]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02/2010040201899.html ↑ 이동: 가 나 다 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박광희 국역, 다산초당, 2010) 337페이지 ↑ 이동: 가 나 다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7쪽. ↑ 이동: 가 나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28쪽.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35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41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3쪽 ↑ 이동: 가 나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4쪽 ↑ 사흘 후인 7월 23일 상을 치르기 위해 아들 은(垠)이 귀국하였을 때, 일제는 위생상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그의 함녕전 접근을 막았다. ↑ “진명학원이사장 嚴柱明씨 별세”. 조선일보. 1976년 2월 8일. 7면면. <img src="//ko.wikipedia.org/wiki/Special:CentralAutoLogin/start?type=1x1" alt="" title="" width="1" height="1" style="border: none; position: absolu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