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물론, 나만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대개 그를 존중하는 것도 아니다. 돌아보니,
<강원도의 힘>을 보면서, 그의 영화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의 영화는, 영화에 관한
나의 편견을 견고하게 다져주는 계기도 되었다. 눈이 먼 치명적인 사랑처럼.
처음에는 찌질한 지식인들의 내면을 가감없이 외면화하는 방식에 흥분했지만, 그의
영화가 여러 편 개봉되고, 홍상수 자신의 작가적 내면이 어떤 동어반복을 노출하면서부터,
그의 영화는 내게 돌이킬 수 없는 부동의 문학 텍스트로 작용했다.
문학이 무엇이라고, 정의하지 않겠다. 영화가 무엇이라고도 말하지 않겠다.
언어가 그렇듯이, 대개의 그 정의라는 것들이 또는 개론적 확정들이 실물에 닿지 못하고
겉도는 외로운 질주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홍상수 영화 가운데, 어느 것이 결정본인지
나는 모르겠다. <북촌방향>은 그런 점에서, 홍의 세계를 최종적으로 수렴하는 매력이
있다고 나는 본다. 우연과 반복, 반복과 우연, 그리고 차이.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는
부스러기 이야기들이 저절로 굴러가면서, 우충좌돌하는 계기성들은 그야말로, 삶의 순진성을
악착같이 보여준다. 삶이 완성된 대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그때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은 사랑스러운 쪽대본이 된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문법을 그의 영화 제목에서 고른다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에 대한 현실적 판본이다. 놀라워라, 홍상수식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김수영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에 비벼 곁들여도 궁합이 잘 맞는다니.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시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는 것은 남들이고, 소재이고, 현실이고, 신문이다. 그것이 그의 의식이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이 의식이 더욱 더 정예화精銳化 --때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까지--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수면 중에 있는 시인이 우리들 주변에는
허다하게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는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게만이겠지만, 홍상수 영화가 내게 영감을 준다는 점이다.
삶에 관한 정답지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홍상수 영화를 질기게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히스테리칼한
장면이다. 영화가 소설에게 하는 말이 있을 것이다. 너는 이런 거 못하지? 아마 홍상수 영화 말고
또 그런 예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언어에 담을 수 없는 무의식의 결들, 살들, 피들, 침들.
무의식이 뭐지? 그러게. 그런 걸 아는 사람도 있기는 있더군. 오늘은 이렇게 명명한다.
무의식은, 에, 또, 뜨겁고, 절절하고, 쪽팔리고, 선망하는 것들의 오롯한 피난처.
무의식이 드러나면, 의식은 도망가고, 의식이 나타나면, 무의식은 숨어준다.
그러니,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는, 대충, 본처와 애첩의 관계와 유사한가.
그들이 자리를 같이하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신분석학의 대전제다.
'그렇지만'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서'라고 해야 할지, 나는 여전히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홍상수의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이미 잘 안다고 믿는 잘 알지도 못하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