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택한 삶
최 양 귀
운동 후 전화를 확인하니 지인 전화가 와 있었다. 일이 있으면 가끔 문자로 연락하는 사이이다. 그녀 아이콘은 음악이다. 은퇴 후에도 여전하였다. ‘무슨 일이 있나!’ 그녀에게 전화했다. 최근에 악기를 정리했는데 부산교회에는 악기를 가르칠 아이가 없다면서 대전교회로 악기를 보내겠다고 한다. 어린아이처럼 쾌활했던 목소리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가르칠 아이가 없다는 걸 보면 일을 마무리하려는 것 같다.
“몸이 불편하세요.”
그녀 어머니같이 심장이 계속 커졌는데 좌우 크기가 달라 호흡할 때마다 불편하다고 한다. 어머니는 예배에 결석한 찬양자를 대신해 처음으로 찬양하였다. 귀가하여 쓰러져 여든셋에 소천하셨다고 한다. 어머니의 마지막 삶을 회상하며 자신의 미래를 짐작하는 걸까. 마음이 숙연해진다.
부산교회는 6·25 때 피난민 약속장소로 애환이 서린 영도대교 옆에 있다. 55년 전 선교사가 세운 아담한 정원이 있는 3층 건물이다. 그녀는 사무실에 출근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악기를 배웠다. 피아노, 플루트, 바이올린, 하모니카, 오카리나, 우쿨렐레 등 여러 악기를 다루었다. 남녀노소 많은 이에게 자비량(自比量)으로 악기를 가르쳤다. 교회 주변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 어부가 많았다. 그들은 자기 소질에 따라 악기를 배우며 한두 개의 악기를 연주하였다. 그녀는 이웃을 윤택하게 하는 사랑의 디딤목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천사 전도사라 불렀다.
열정이 넘치던 음악가의 조용한 마무리를 들으며 나의 어린이집 활동을 회상해 보았다. 남편 직장 따라 대전으로 이사 왔다. 아들 유치원을 알아보다 어린이집을 개원하게 되었다. 산업화로 직장여성이 증가하여 다양한 아이가 등원하였다. 어느 날 한 아이가 화장실에서 변비로 답답함을 호소하며 울고 있었다. 담임교사도 난감해하였다. 배를 살살 만져주고 등은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우는 아이를 달래었다. 불현듯 하늘로 간 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첫 출산은 체중 미달 쌍둥이였다. 두 아이는 인큐베이터에 한 달 정도 있었다. 하루에 몸무게가 20g씩 증가하여 애간장을 태웠다. 학생인 남편과 직장생활로 가까이 사는 큰언니 도움을 많이 받았다. 외출은 한 아이씩 안았고, 독감 때는 온 가족이 입원하였다. 첫째는 몸이 약하여 번번이 동생에게 장난감과 먹거리를 빼앗겼다.
첫돌 잔치 후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첫째 아이 입술이 새파래지고, 호흡이 고르지 않아 혈액순환이 의심되었다. 진료 결과는 심장판막증이었다. 날벼락을 맞은 기분이다. 마음을 진정하고 서울 모 병원에서 수술하였다. 겨드랑이 아래 긴 자국을 보며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대수술이었다. 아이는 2차 수술을 앞두고 눈을 거의 감은 채 호흡마저 힘겨워했다. 약 기운인 줄 알았다. 2차 수술을 받으면 완쾌되리라 믿었다. 어느 날 아침 아이는 큰 눈을 뜨고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아이는 방안에 무엇이 보이는 듯 눈을 반짝이며 그것을 보라고 손가락질을 계속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뭐가 있어, 무엇이 보여?”
아이 얼굴엔 눈웃음도 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데리러 온 빛나고 예쁜 천사를 본 것 같다. 얼마 후 아이는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마음이 착잡하고 슬펐다. 방안에 흩어진 장난감과 옷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동생이 사용하면 된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눈물을 삼켰다. 심장병 진단 후 밤잠을 설쳤을 때 ‘아이가 날개를 펼치고 하늘 높이 날아가는 꿈’을 꾼 생각이 났다.
어린이집 운영이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나는 하늘에 있는 아이를 돌본다 생각하면 새 힘이 났다. 어린이집은 국방부만 관여하지 않는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국가 대부분 부처와 연계되어 서류와 요구사항이 많다. 어린이와 학부모, 교직원에게 신경 쓸 일이 자주 발생한다. 첫 직장 은행 업무로 몸에 밴 친절과 틈틈이 공부한 경영학과 교육학은 길잡이가 되었다. 매월 수입과 지출은 손익분기점을 넘어야만 했다. 최고의 어린이집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국가 정책에 발맞추어 선구자처럼 일했다. 쉼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일이 즐거웠다.
원장 겸직으로 보육 전문가 활동도 했다. 어린이집 평가인증 조력자와 현장관찰자를 하였다. 전국 어린이집을 방문하여 항목별로 관찰한 경험은 영유아 발달 수준을 높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학위논문으로 완성되었다. 마침내 대학 강의 문이 열렸다. 고진감래! 산악인이 정상에 태극기를 꽂고 두 팔을 높이 들고 환호하듯 자아실현의 열매는 기쁨이었다.
천사 전도사도 처음에는 악기를 자비량으로 가르쳤다. 남편이 부도로 집안이 어려웠을 때는 생계 수단이 되었다고 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 나도 어린이집 근무 십여 년은 무료봉사였다. 교회 부설 어린이집은 대출을 갚아야 했다. 운영이 안정된 후 노후 연금을 저축할 수 있었다. 무심코 하늘을 보면 그때마다 아이가 구름 위에서 미소 지었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지만 내게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다. 하늘에서 기다릴 아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동생은 미국에서 교직에 있다. 막내아들은 수호천사다. 행복하다. 사회 첫발을 디딘 은행근무가 복스러운 공주였다면 이모작 어린이집은 가시밭에 핀 백합화였다. 삶의 여정에 걸림돌이 있어도 오뚝이같이 일어났다. 주어진 일에 충성하면 꽃길이 열린다.
삼모작은 크리스마스 꽃 포인세티아로 모두의 축복을 받고 싶다. 남의 삶을 윤택하게 하면 자신의 삶도 윤택하게 된다. 이 진리를 되뇌며 한 발 한 발 전진할 것을 다짐해 본다. 은퇴를 했지만 갈구하면 하느님께서 다시 나에게 사명을 주실 것만 같다.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여전히 내 아이가 구름 위에서 미소를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