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정관념인가
게릴라걸스gellilar girls는 ‘1985년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뉴욕에서 ‘페미니스트 행동주의 그룹으로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활동 중이다. 그들은 여성이 뒤집어 쓴 “고정관념들을 면밀히 관찰하고 허점을 찾아내 부정인 고정관념들을 기각하며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제안”한다.(Bitches, Bimbos and Ballbreakers, Geriilar girls, New York Corporation, 2003, 『그런 여자는 없다: 국민여동생에서 페미나치까지』, 우호경옮김, 후마니타스,2017,P.18)
게릴라걸스에 따르면, 고정관념은 여성들을 집어넣는 작은 상자이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따르면 ‘고정관념’stereotype이란 ‘어떤 특정 유형의 사람들에 대해, 일군의 사람들이 부여한 대체로 고정화되고 과잉 단순한 이미지나 생각’이다. 반면 ‘전형’archetype은 복제본의 기반이 되는 모델이나 이상을 뜻한다는 점에서 고정관념과 좀 다르다........고정관념이란 일종의 상자와 같다. 보통 이 상자는 너무 작아서 그 안에서........옴짝달싹할 수가 없다.”(12)
게릴라 걸스에 따르면, 이 고정관념은 여성들을 꼼짝 못하게 옥죈다. 여성에게 뒤집어 쓰인 고정관념은 특히 악랄하다. 그 고정관념들은 여성들이 살아가는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고정관념들은 이름을 바꿔가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18)
제일 먼저 등장한는 고정관념은 ‘파파걸’papa girl이다. 이 고정관념은 여성이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저 오래된 편견을 드러낸다. 그 기원은 그리스 신화다. 기원전 1200년 전 트로이 전쟁에서 아가멤논은 승리를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바쳤다. 이에 분노한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정부 아이기스토스와 공모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남편 아가멤논을 죽인다. 이에 격분한 둘째 딸 엘렉트라는 남동생 오레스테스와 함께 어머니와 어머니 정부에게 복수한다. 그 후 3000년이 지난 후 프로이트는,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딸들의 경우 어머니에게 적대적이며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에 시달린다고 생각했다”(30) 엘렉트라가 파파걸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말괄량이’tomboy는 16세기에 만들어진 고정관념이다. 본래 ‘술을 고주망태로 마시고 젊은 여자들과 놀아나는 젊은 남자’가 그 기원이다. 그렇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이 외설적인 딱지가 여성에게 붙기 시작해, 무례하고, 막돼먹은 조신하지 못한 여성, 즉 슬럿slut, 걸레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34)
‘이웃집 소녀’the girl next door도 뭇 여성이 감내해야 하는 고정관념이다. 이 고정관념이 가진 메시지는, “결혼 전에 아무리 방황하고 방탕한 삶을 살던 남자라 해도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와 정숙한 여성과 결혼한다는 메시지이다.” 여기서 정숙한 여성이 곧 ‘이웃집 소녀’이다. “이웃집 소녀는......얌전히 미래의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이다.(46)
모든 여성을 ‘옴짝달싹 할’ 수 없게 하는 고정관념 중 단연 으뜸은 ‘잡년’/‘남자 기죽이는 년’bitch/ballbreaker이다. 영어권에서는 ‘잡년’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욕이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잡년 만났네”There’s bitch라고, 화가 날 때 “잡년 되게 만드네”to bitch off라고, 폭력을 일삼고 성질이 더러울 사람을 가리켜 ‘잡년스럽네’bitching라고, 가장 심한 욕으로 “잡년 새끼”the son of a bitch라고 내뱉는다. (78) ‘잡년’은 세상 살면서 겪는 온갖 재수 없는 일을 가리키는 대명사이다. 여성이 왜 ‘재수 없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야 하는가. 그건 여성을 비하하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노처녀old maid는 어떤가. 남성들이 늦게 결혼하는 것은 흠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들이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지 않았음이란 정말 심각하다는 고정관념을 ‘노처녀’는 반영한다. “게릴라걸스는 노처녀에 대한 고정관념이야말로 곧 지어질 멸종된 고정관념 박물관에 첫 번째로 전시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113)
남성이 나이가 든다는 것과 여성이 나이가 든다는 것이 확연히 다를까. 확연히 다르다는 고정관념을 반영하는 것이 ‘할망구’hag/crone이다. 사람이란 남녀노소 누구나 나이가 들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여성에게 나이는 특별하다. 그래서 나이 많은 여성은 특별한 고정관념에 시달린다. 할망구는 “그리스 신화 퓨리에스Furies(머리카락은 뱀이고 날개를 가진 세 자매로 복수, 분노를 상징)와 하르피에스Harpies(여자의 머리를 하고 몸에는 새 날개와 발을 가진 괴물로 잔인한 여자를 상징)에서 시작되어” 온갖 희곡과 소설에서 사악한 이미지를 드러낸다.(119) “여성은 나이가 들수록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서양문화에서 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나이를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숨기기 급급하다.”(120) 그것은 ‘할망구’라는 고정관념 탓이다.
‘벨리걸’valley girl은 “소비주의에 물든 멍청한 사춘기 소녀들을 가리키는 고정관념이다.”(264-5) 그렇지만 사춘기를 겪는 소년과 소녀는 특별히 다르지 않다. 거의 모두가 새로운 물건을 갖고 싶어하는 호기심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벨리걸’은 유독 여성이 그렇다는 고정관념을 반영한다. ‘뎁’debutante/socialite은 “유명가문 출신의 이제 막 성인이 된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276) 이 말은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들, 특히 다른 계층의 남자들과는 어울려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반영한다.(278) 그렇지만 고정관념은 여성은 특별한 남자와 어울리려는 경향이 있다는 비아냥거림이다.
‘골드 디거(꽃뱀)gold digger는 “부자 남편을 찾겠다는 열망에 불타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282) 이 말은 여성에게는 언제나 돈 많은 배우자가 전부라는 고정관념을 드러낸다. 또 ‘트로피 와이프’trophy wife는 여성들이 “자기 일에 충분히 성공했음에도 자신들보다 더 성공한 남자를 원하는 현대여성”을 가리킨다.(286) 이 고정관념은 여성에게 배우자는 언제나 자기보다 더 뛰어나야 한다는 여성 스스로 자기를 비하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이 밖에도 ‘카르멘 미란다’Carmen Miranda, ‘도쿄 로즈’Tokyo Rose, 등등 여성을 왜곡하는 고정관념은 무수하다. 여성은 거의 모두가 왜곡된 고정관념에 시달린다. 남성은 ‘남성 예술가’로 불리지 않으면서, 여성은 ‘여성 예술가’로 불린다. (330) 여성은 직업과 직책에 따라 특별히 ‘여사장’, ‘여자 아나운서’ 등으로 불린다. 여성을 남성과 다르게 불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일찍이 1922년 여성에게 뒤집어씌운 고정관념들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현대적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운동을 시작한 여성들은 스스로 ‘플레퍼’flapper로 불렀다.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자 세상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스스로 플레퍼라고 칭하는 젊은 여성들이 대거 등장해 사회가 신성불가침이라고 여기던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과감히 폐기해” 버렸다.(214) 플레퍼들은 “반대세력에게는 ‘슬래퍼’slapper(난잡한 여자)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 아니 어쩌면 1776년 미국독립혁명보다 더 중요한 혁명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 우리 플레퍼들이 들고일어났고, 이로써 우리의 존재를 정당화했을 뿐만 아니라 생존을 보장받았다.”(216)
그 후 플레퍼 운동은 ‘페미나치’feminach/bra burner로 이어졌다. 1968년 한 페미니스트 그룹은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판단한다”는 현수막을 들고서, “화장품, 하이힐, 거들과 같은 온갖 여성용품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장면을 연출했다.” 여기에 그들 그룹 리더는 브레지어까지 던졌다.(256) 오늘 날 게릴라걸스는 플레퍼들처럼 또 페미나치처럼 여성들이 뒤집어 쓴 온갖 고정관념을 넘어서려고 행동한다. 게릴라걸스는 여성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그런 고정관념을 찾아내서 내던져 버리는 작업에 열심이다. “게릴라걸스는 모든 사람이 페미니스트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될 그날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