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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정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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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방정환(方定煥)의 지도 아래 천도교 서울지부 소년회를 중심으로 5월 1일을 기념일로 정한 것으로 출발했다. 초기 어린이날의 취지에는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뜻이 들어 있었고, 1925년의 어린이날 기념행사에 전국의 소년·소녀들이 30만 명이나 참가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뒤 매년 다양한 행사를 거행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 총독부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1939년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8·15해방 이후, 1946년부터 날짜를 5월 5일로 바꾸어 어린이날 기념행사를 재개했는데, 1957년 제35회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내무부·법무부·문교부·보건사회부의 4개 부처 장관의 명의로 어린이헌장을 공포하여 어린이에 대한 기본사상을 재정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지식> |
최초의 어린이 선언문 (1923년 5월 1일 발표)
- 소파 방정환
▶소년운동의 기초 조건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다.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어른들에게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 보아 주시오.
·어린이를 가까이 하시어 자주 이야기하여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산보와 원족 같은 것을 가끔가끔 시켜 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 타일러 주시오.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와 기계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末梢)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어린 동무들에게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어른들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버리지 말기로 합시다.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들에게 자리를 사양하기로 합시다.
·입을 꼭 다물고 몸을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우리들의 희망은 오직 한 가지 어린이를 잘 키우는 데 있을 뿐입니다. 다 같이 내일을 살리기 위하여 이 몇 가지를 실행합시다.·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내 아들놈 내 딸년 하고 자기의 물건같이 여기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굴리려 하지 말고 반드시 어린 사람의 뜻을 존중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높게 대접하십시오. 어른은 뿌리라 하면 어린이는 싹입니다. 뿌리가 근본이라고 위에 올라 앉아 싹을 나려누르면 그 나무는 죽어버립니다. 뿌리가 원칙상 그 싹을 위해야 그 나무(그 집 운수)는 뻗쳐 나갈 것입니다.
<어린이배움터 / 천강희>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1.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길러져야 하며, 가정이 없는 어린이는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에서 길러져야 한다.
2. 어린이는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고, 질병의 어린이는 치료를 받으며 공해 없는 환경에서 길러져야 한다.
3. 어린이는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하며,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4. 어린이는 빛나는 문화유산을 이어받아 미래를 가꾸는 새로운 문화를 발전시키도록 이끌어야 한다.
5. 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환경을 제공받아야 한다.
6. 어린이는 예절과 질서를 지키며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민주 시민으로 길러져야 한다.
7. 어린이는 자연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도록 길러져야 한다.
8. 어린이는 위험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하고 안전을 지킬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9. 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 버림을 받아서는 안되고, 나쁜 일과 짐이 되는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다.
10. 몸이나 마음에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재활되어야 하고, 빗나간 어린이는 선도되어야 한다.
11.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의 소망이다. 겨레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또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키워야 한다.
<종이비행기> |
방정환과 어린이날
아동문학가. 호는 소파(小波).
서울 출생.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고 1917년 손병희(孫秉熙)의 딸 용화(溶*)와 결혼하고 청년운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이듬해 3·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20년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고, 21년 김기전(金起田)·이정호(李定鎬) 등과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22년 5월 1일 처음으로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23년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 장을 배포하였다.
25년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童話口演大會)를 개최하였고, 28년 세계 20여 개국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학운동가, 사회운동가로서 아동을 <어린이>라는 용어로 격상시키고 색동회를 조직하였으며 최초의 구연동화가로 활동하였다. 또한 《사랑의 선물(1922)》을 비롯한 개작번안·창작동화를 남겼으며 《어린이》지를 통해서 신인아동문학가를 발굴하였다.
57년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파상>이 제정되었고 78년 금관문화훈장, 80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저서에 《소파전집(1940)》 《소파동화독본(1947)》 《소파방정환아동문학전집(1974)》 등이 있다.▣
[ 어린이날 ]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어린이에 대한 애호정신을 앙양함으로써 이들을 바르고 아름답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기 위하여 지정한 기념일. 매년 5월 5일이다. 1923년 방정환(方定煥)·마해송(馬海松)·윤극영(尹克榮) 등이 주축이 된 <색동회>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가, 27년부터는 5월 5일로 날짜를 바꾸어 행사를 열었다. 당시의 <색동회> 활동은 가장 적극적인 항일운동의 하나로서 진행되었으며, 어린이를 위한 동요·동화의 창작 등을 병행하여 내실을 기하였다. 광복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61년 제정·공포된 <아동복지법>에 의해 국정기념일로 되었다가 75년부터 공휴일이 되었다. 이날은 모범어린이를 선발·표창하고 아동복지에 힘쓴 유공자를 발굴·표창하는 한편, 체육대회·웅변대회·글짓기대회·사생대회·가장행렬·연극공연 등 어린이들의 정서함양과 체력향상을 꾀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된다.▣
[ 어린이날을 만드신 방정환 선생님 ]
방정환은 서울 야주개(당주동)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 때 야주개는 중인 신분의 사람들이 주로 살았습니다. 그는 일곱 살에 부모의 허락도 없이 소성 소학교에 다녔으나 너무도 가난하여 소학교를 마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왕고모 집으로 옮겨 미동 보통 학교를 졸업했고 이어 선린 산업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2년만에 중퇴하고 조선 총독부 토지 조사국에 취업했습니다. 그곳은 우리의 국유지를 총독부 소유로 이관하는 일과 농민들의 생활 터전을 빼앗는 곳이기도 해서 그는 이를 박차고 나와 천도교 예배당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손병희의 사위가 된 뒤 어린이 운동에 열성을 보였고, 이어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 전문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3ㆍ1운동의 기세가 꺽일 무렵, 그는 짐을 싸들고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동양 대학 아동 미술과에 입학했습니다.
방정환은 2년 뒤 고국에 돌아와 천도교 안에 정식으로 소년회를 조직했습니다. 이는 문예, 체육 등의 활동을 통해 어린이에게 정서와 건강과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조직한 것입니다. 또 이 때 그는'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들어 냈고 어린이 동화집도 냈습니다. 더욱이 1923년 3월 1일에는 월간「어린이」라는 잡지를 창간했고, 이어 도쿄에서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인'색동회'도 조직하였으며, 이 해 5월1일 어린이 날로 지정하여 기념 식도 가졌습니다. 이 색동회에는 윤극영, 마해송, 윤석중 등이 가입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첫 어린이날 구호는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였습니다. 그는 뚱뚱한 몸집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어찌나 이야기를 잘했던지 어른들도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울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가 첫 번째 어린이날 뿌린 전단의 첫 구절에서 어른에게는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 보아 주시오."라고 했으며, 어린이에게는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라고 했다. 얼마나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표현입니까!
방정환이 어린이를 위해 글을 쓰고 강연할 때, 일제의 경찰은 그 내용을 꼬투리 잡아서 서대문 경찰서에 가두는 따위의 탄압을 했으나 그는 결코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눈물을 흘리며 쏘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런 동요를 남겼습니다.
겨울 밤에 오는 눈은 어머니 소식
혼자 누운 들창에 바아삭 바아삭
잘 자느냐 잘 크느냐 묻는 소리에
잠 못 자고 내다보면 눈물납니다.
방정환은 구연 동화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그가 우스운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고 슬픈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들은 눈물을 옷깃에 적셨다 합니다. 그를 감시하던 순사가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끝내 눈물을 흘려 그에게 "순사를 울린 사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린이만이 아니라 어디서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고, 감옥에 가서는 죄수들에게 병원에 들러서는 간호사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를 보아도 그는 타고난 어린이 운동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방정환은 서른 셋, 젊은 나이에 고혈압으로 입원했는데 돌아가시던 날 밤 "가야겠어. 문간에 검은 마차가 날 데리러 왔어."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하셨습니다. 이 말은 바로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그는 곧장 동화의 나라로 갔을 것입니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어느 누구보다 '어린이 사랑'이란 소중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신지식>
방정환과 문학
한국 사람 치고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을 모르는 이는 없을 듯하다. 흔히 안데르센을 가리켜 동화의 아버지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방정환은 '어린이'의 아버지다. 뿐만 아니라 방정환은 한국 근대아동문학의 첫머리에 놓인다. 이는 우리 아동문학이 좀 늦긴 했어도 매우 튼튼한 바탕에서 출발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어린이를 품에 안은' 방정환의 이미지 때문에 우리 아동문학은 그와 관련한 중요한 사실을 놓쳐왔다. 민족·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소년운동을 일으키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의 선구자적 면모에 가려서 그의 작품 활동이 매우 소홀하게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린이에게 알맞은 이야기와 노래를 지어주기 위해 벌인 활동을 민족·사회 운동에 종속된 것으로 보아 마치 본격 문학으로서는 미달인 것처럼 평가하는 관점이 우세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정작 그 현실주의적 성격을 무시하고 동심주의라는 말로 치부해버리기 일쑤다.
여기엔 오해가 적지 않다. 아동문학이 성립하려면 어른에 종속되지 아니한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아동' 혹은 '아동성'(동심)이 새로 발견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아동의 순진무구함을 낭만적으로 강조하는 태도가 바로 동심주의인데, 방정환의 그것은 아동문학이 성립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소년 운동과 함께 일제의 엄혹한 탄압 속에서 아동문학을 전개한 방정환의 경우는 식민지 현실과 정직하게 마주하려는 현실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일본의 아동문학 성립기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그런 관념적인 동심주의와는 구별되어야 마땅하다.
이 글은 분단시대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 남북한 공히 일그러진 초상을 만드는 데 그친 방정환의 이미지를 그의 사상과 대표 작품을 통해 바로 잡아보려 한다.
2.방정환 문학의 뿌리
방정환에 대해서는 찬양이든 비판이든 협소한 일면만이 주로 강조되어 왔다. 방정환은 3·1운동 직후부터 소설을 발표하였고 《백조》 후기동인으로 참여하는 등 초창기 문학운동의 한 구성원이었다. 《백조》파의 주요 문인들이 신경향파 문학 운동을 주도하다가 염군사(焰群社)와 함께 프로문학 단체 카프(KAPF)로 합류해간 사실을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방정환이 소속한 개벽사에서 발행한 잡지 《개벽》은 1920년대 신경향파 문학 운동의 주요 기반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할 때 방정환의 사상과 활동을 사회주의와 대립하는 좁은 범위의 민족주의에만 가두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고, 어두운 속에서 우리처럼 또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들을 위하여, 그윽히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방정환, 사랑의 선물, 머리말, 개벽사, 1922)
이와 같은 방정환의 아동관은 동학과 천도교의 개혁사상에서 싹터 나온 것이다. 동학은 창시자 최제우와 2세 교주 최시형을 잇는 3세 교주 손병희에 와서 천도교로 개칭(1905)된다. '인시천(人是天:최제우), '사인여천'(事人如天:최시형), '인내천'(人乃天:손병희)으로 요약되는 동학과 천도교의 평등사상은 2세 교주 최시형에서부터 '어린이도 한울님'이라는 아동애호사상의 구체적인 표현을 얻고 있다. 동학에서 천도교로의 전환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농민봉기노선이 실패로 끝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근대적인 조처들을 수반하면서 이루어진다. 천도교는 아래로부터의 신생활운동과 위로부터의 교육·출판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식민지시대 최대의 항일투쟁인 3·1운동을 주도하고, 이후 1920년대 민족·사회운동의 한복판에 자리한다. 이 과정에서 신구파의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사회운동에 적극적인 천도교청년회가 신파의 전위대로 되면서 각 부문운동의 핵심을 담당한다. 손병희의 셋째 사위인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일본 유학(1920-23) 당시에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의 동경지회장이자 개벽사의 동경특파원으로 활약했다. 이 때, 식민지 백성의 한 사람이고 개혁운동에 동참한 방정환으로서 누구보다도 먼저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천도교가 표방한 평등사상과 지상천국의 이념은 사회주의와 그리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초기 공산주의자들도 천도교를 중요한 연합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방정환은 국내 문필가로서는 거의 최초로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작품을 발표한다. 비밀결사운동에 참여한 청년들을 등장시킨 〈유범(流帆)〉(《개벽》 창간호, 1920.6), 종살이를 하면서도 좋은 세상이나 만난 줄 알고 감지덕지하는 길들여진 개를 비판하는 내용의 〈낭견(狼犬)으로부터 가견(家犬)에게―삽사리전〉(《개벽》, 1920.7), 입심 좋은 '불령 파리'가 당대 세태를 강하게 풍자하는 내용의 〈풍자기〉(《개벽》, 1920.12-1921.4) 같은 것들은 이 시기 방정환의 의식을 살펴보기 좋은 작품들이다. 이중에서 〈풍자기〉는 일경의 감시를 받으면서 쓴 작품으로, 사회주의 의식을 적극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계급문학의 발전과정에서 차지하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아니하다. 방정환은 일본의 유명한 사회주의자 사카이 토시히코(堺利彦)가 유물사관에 입각해서 쓴 글을 〈깨어 가는 길〉(《개벽》, 1921.4)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해서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은 김기진이 국내에 계급문학의 씨를 뿌린 시기보다 많이 앞서는 것이다.
계급문학의 발흥단계에서 방정환이 차지하는 몫을 짐작할 수 있는 글로, 민중 지향의 문학관을 뚜렷이 드러낸 〈작가로서의 포부〉(《동아일보》, 1922.1.6)라는 글도 주목된다.
그리하여 일시의 개조나 한때만의 창조가 아니고, 늘 시시각각으로 창조되는 새로운 생(生)―그걸로 하여 우리는 자꾸 참된 세상으로 나가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 그리고, 나 자신이 민중의 일인인 이상 거짓 없는 진실한 나의 요구는 그것이 많은 민중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아니할 것이며, 그것은 의심할 것도 없는 당연한 것입니다. (…) 비참히 학대받는 민중의 속에서 소수 사람에게나마 피어 일어나는 절실한 필요의 요구의 발로, 그것에 의하여 창조되는 새 생은, 이윽고 오랜 지상의 속박에서 해방될 날개를 민중에게 주고, 민중은 그 날개를 펴서 참된 생활을 향하여 날게 되는 것이니, 거기에 비로소 인간 생활의 신국면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항상 쉬지 않고 새로 창조되는 신생은 민중과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방정환, 작가로서의 포부, 동아일보, 1922.1.6)
천도교 사회운동과 개혁사상은 방정환의 모든 활동을 뒷받침하는 기본 바탕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문학관과 아동관을 살피고자 할 때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한국 근대아동문학의 새로운 기폭제가 되었던 《어린이》도 이와 연속선상에 있음은 물론이다. 방정환은 천도교청년회 안에서 발전되어 나온 천도교소년회의 창립(1921.5)에 관여하고, 이후로는 전국 각지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소년 단체들의 연합회를 이끌며 소년운동의 지도자로 떠오른다. 이 과정에서 아동문제연구단체인 '색동회'(1923.5)가 조직되고, 이를 통해서 아동문예잡지 《어린이》(1923-34)를 편집하는 한편, '어린이날' 행사를 비롯한 동화구연, 동시낭송, 동극공연, 토론회, 연설회, 강연회, 전시회 등 각종 어린이문화운동을 벌여나간다. 한국 아동문학은 바로 이곳에서 신기원을 이루었던 것이다.
3.방정환 문학의 성격
《어린이》 창간호(1923.3.20)에는 동학농민전쟁 때 나온 전래 동요 〈파랑새〉를 제일 앞에 싣고 있으니 이것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창간호의 산문 작품은 안데르센 동화를 번안한 〈성냥팔이 소녀〉와 우리 옛이야기를 동극(童劇)으로 각색한 〈노래 주머니〉(2호까지 연재)가 차지하고 있다. 2호(1923.4.1)에 이르면 손수 창작을 시험해본 〈순희의 설움〉이 나오고, 3호(1923.4.23)에는 〈영길이의 슬픔〉이 나온다. 이로써 아동문학의 하위장르들이 그의 손으로 하나씩 자리잡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다가서려는 그의 의식이 아울러 드러나고 있다.
방정환은 동요 운동의 개척기에 명편의 노래를 남긴다.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님도 추워서 파랗습니다.
울 밑에 과꽃이 네 밤만 자면,
눈 오는 겨울이 찾아온다고.
귀뚜라미 귀뚜르르 가느단 소리,
달밤에 오동잎이 떨어집니다.
(〈귀뚜라미 소리〉 전문, 《어린이》, 1924.10)
1920년대는 '동요의 황금시대'라 일컬어질 만큼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이 작품이 씌어진 훨씬 뒤에까지도 창작동요들은 고작 혀짤배기 유아어를 흉내내면서 단순히 글자 맞추기 놀음을 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방정환은 달랐다. 〈귀뚜라미 소리〉는 계절의 바뀜을 알리는 자연현상을 차분한 어조로 붙들어내었다. 추위를 동반하는 겨울이 자연의 생명에게 하나의 시련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정조를 띠고 있다. 이는 동양인의 추이(推移)의 감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값싼 감상주의에서는 벗어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늙은 잠자리〉(《어린이》, 1924.12)에서도 추위나 겨울은 혹독한 시련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들 시련 속에 놓인 생명한테 다가서는 동정과 연민의 감정은 불행한 시대의 공기를 숨쉬고 살아가는 어린 민중한테로 향한 작가의 마음일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방정환의 초기 창작동화 가운데 비교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4월 그믐날 밤〉(《어린이》, 1924.5)이다. 이 작품은 4월 그믐날 밤 풀밭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소리들이 오월 초하루 새 세상을 여는 소리임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는 지금과 달리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삼았던 당시 사정을 떠올릴 때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이 작품이 발표된 시점은 어린이날 행사를 두 번째로 맞이하는 해이다. 이 해의 어린이날 행사가 전국 동시다발로 사나흘간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기록에 비추어, 행사를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작가의 포부와 자세가 이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방정환은 이 작품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인칭 서술자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풀밭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은 환상의 세계 곧 판타지로 처리되었다. 진달래, 개나리, 복사꽃, 할미꽃, 개구리, 참새, 제비, 종달새, 꾀꼬리 따위 토종 동식물들이 힘을 모아 음악회를 준비한다. 이들의 이야기를 나즈막히 전하는 '나'는 어린이와 마음을 나누는 작가 방정환의 모습이고, 천지만물이 약동하는 봄의 이미지는 겨레의 앞날을 밝혀갈 어린이의 이미지다. 이로 보아서 〈4월 그믐날 밤〉은 어린이날과 더불어 새 세상이 열리기를 소망하는 작가의 마음이 가득 스며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방정환은 소년운동의 실천으로서 아동문학을 개척했고, 다른 무엇보다도 어린이들 앞에서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꾼으로서 명성이 매우 높았다. 그가 전래동화의 형식을 빌어 창작한 작품 가운데 옛이야기의 짜임과 묘미를 잘 살려낸 작품은 〈양초 귀신〉(《어린이》, 1925.8)이다. 이 작품은 근대의 충격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를 해학과 풍자의 맛을 곁들여 재미있게 형상화한 것이다. '양초' 말고 '거울'을 소재로 하는 비슷한 이야기가 전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작품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겪는 곤란을 해학과 풍자의 웃음으로 깨우치고자 만들어진 것이다. 전래 동화를 살피면, 백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에도 '슬기로운 면'을 다룬 것과 '어리석은 면'을 다룬 것이 나란히 공존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백성에 대한 '애정'의 동일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두 얼굴이라 할 수 있다. 어리석은 면은 어떻게든 깨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초 귀신〉은 바로 근대와의 충돌 과정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어리석음'에 초점을 둔 이야기이다. 그러하기에 이 작품은 풍자보다 해학의 정서가 더 지배적이다. 그런데 '양초'를 '귀신'이라고 이름 붙인 제목부터가 '근대 비판'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양초는 잘 알고 쓰면 약이요, 모르면 귀신이 되는 것일 테다.
방정환의 창작동화 가운데 아이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작품은 〈만년 샤쓰〉(《어린이》, 1927.3)이다. 이 작품은 생기발랄하면서도 속이 깊은 창남이란 아이의 캐릭터가 주목된다. 속옷이 없어 체육시간에 맨살을 드러내고는 '만년샤쓰'를 입었다면서 재치 있게 위기를 모면하려 드는 말썽꾸러기 주인공. 이는 당시에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흔해빠진, 동화의 이름으로 수신교양담을 들려주고자 만들어낸 수많은 천사표 주인공들 속에서 단연 빼어나다. 작가는 시대의 중압 때문에 주눅들기 쉬운 식민지 아이들에게 가난하지만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씩씩한 어린이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국 아동문학사상 '최초의 정신적 동시대인'을 창조해냈다.
물론 창남이가 자기 속옷을 이재민에게 벗어주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결말에 이르러 다소 통속적인 교훈성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년 샤쓰〉는 방정환의 활달한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된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살아 있는 인물은 줄거리나 주제에서 설사 그 시대의 한계가 나타날지라도 그것을 뛰어넘는 오랜 생명력을 지닌다. 독자는 선생님과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으며 위기를 잘 넘기는 이 '유쾌한 말썽쟁이'에게도 예상을 뒤엎는 뜻밖의 헌신성이 있다는 걸 알고는 마음속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그런데 속 깊은 긍정의 주인공으로 실감나게 형상화된 창남이의 성격은, 뜻밖의 선행을 자연스러운 결과로 수긍하게끔 이끌어주는 정서의 바탕이 된다. 성격 창조가 지니는 힘은 바로 이런 데에 있다.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의도가 지나쳐 통속적인 결말을 보이는 작품으로 〈금시계〉(《어린이》, 1929.1-2)를 하나 더 살펴볼 수 있다. 농장에서 일하면서 야학교에 다니는 고학생 효남이는 주인집 금시계를 훔쳤다는 억울한 누명을 썼다가 그로부터 벗어나면서 오히려 목장 주인의 도움을 받게 된다. 내용이 이러하니 마지막 해피엔딩을 위해서 이야기를 짜 맞춘 혐의가 짙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도 도둑 누명과 관련한 사건을 탄탄하게 엮어 가는 방정환의 솜씨라든가, "가난이 죄"가 되는 부당한 현실에 작가의 관심이 놓여 있는 점을 놓칠 수 없다. 효남이가 눈물겨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공부를 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입지전적'이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불행한 나라에서 꿋꿋한 의지를 갖고 열심히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떤 뜻을 가질까? 효남이와 같은 고학생의 성공담에는, '제도와의 화해'라든지 단순히 '근대주의'로 몰고갈 수 없는 곤핍한 시대의 꿈과 희망이 서려 있다. 더욱이 방정환은 누구보다도 제도교육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꿰뚫어 보고 줄기차게 비판한 드문 선각자였다. 이 작품에서 효남이는 자기만큼이나 어렵고 급박한 사정 때문에 금시계를 훔친 수득이를 생각해서 고민 끝에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채 한 가닥 희망이었던 야학조차 포기하려 하지만, 이를 보고 마음이 아파진 수득이가 역시 고민 끝에 주인에게 자백을 하면서 마지막 구원이 이루어진다. 주인의 도움도 야학 급우들이 먼저 나서서 효남이를 도우려 했기에 가능해진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작가의 '브 나로드' 지향과 맥락을 같이 하는 '어린 민중에 대한 격려'의 뜻으로 읽는 것이 옳으리란 점이다. 물론 결말의 구원을 외부 조력자에 의존해서 해결한 것까지 무작정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어디까지나 부당한 계급 현실 때문에 가난한 아이들이 뜻을 펼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고단한 노동과 비인간적인 대우였다.
이 비슷한 사례는 소년소설의 일인자로 평가되는 1930년대 현덕(玄德)의 작품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으니, 한국 근대아동문학은 즐거운 해방감을 만끽하게 하는 '피노키오'식 유열담(愉悅談)보다는 고난 극복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꾸오레'식 격려담에서 그 전형을 얻고 있다는 파악이 가능하다.
방정환은 현실을 자각케 할 방편으로 탐정소설을 개척한 공로도 크다. 방정환은 통속물로 떨어지기 쉬운 탐정소설의 형식을 두고서도 다른 누구보다 옳은 의식으로 작품을 써나갔다.
탐정소설은 퍽 재미있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들과 달라서 어린 사람들에게는 자칫하면 해롭기 쉬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나쁜 활동 사진을 보고 나쁜 버릇이 생겨져서 위험하다는 것과 똑같이 자칫하면 탐정소설이 잘못되어 그것을 읽은 어린 사람의 머리가 거칠고 나빠지기 쉬운 까닭입니다. 그런데 우리 《어린이》에 탐정소설을 내어서 대단히 호평을 받기 시작한 후부터 다른 잡지에도 여러 가지의 탐정소설이 생기게 된 것은 퍽 기쁜 일이나, 가만히 보면 억지로 탐정소설을 만드느라고 나쁜 활동 사진보다도 더 나쁜 탐정소설을 내이는 고로, 그런 것을 읽혀서는 큰일이 나겠다고 염려하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방정환, 신탐정소설-소년사천왕, 어린이, 1929.9)
방정환의 탐정소설은 장편 《동생을 찾으러》(《어린이》, 1925.1-10) 《칠칠단의 비밀》(《어린이》, 1926.4-12) 《소년 삼태성》(《어린이》, 1929.1) 《소년 사천왕》(《어린이》, 1929.12-1930.12) 등 모두 네 편인데, 이중에서 뒤의 두 편은 사정 때문에 중단되었다. 《동생을 찾으러》와 《칠칠단의 비밀》은 탐정소설이 대개 그러하듯이 아슬아슬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줄거리다.
독자는 계략과 반전이 거듭되는 선과 악의 대결 속에서 손에 땀을 쥐는 팽팽한 긴장감을 맛본다. 그런데 작가는 그저 흥미성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어린이 인신매매 사건과 관련하여 사회의식과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있다. 《동생을 찾으러》에는 사건 해결 과정에서 소년회의 활약상이 나타나고, 《칠칠단의 비밀》에는 중국내 한인협회와의 연계가 나타난다. 물론 탐정소설의 한계상 이들 작품은 우연성의 문제점을 많이 끌어안고 있다. 그러나 방정환의 탐정소설은 그 파급 효과를 경계한 일제당국의 탄압으로 계속해서 발전해갈 수가 없었다.
'탐정소설의 아슬아슬하고 재미있는 그것을 이용하여 어린 사람들에게 주는 유익을 더 힘있게 주어야 한다.' 이런 생각으로 주의하여 쓴 것이라야 된다고 나는 언제든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전번에 쓰기 시작한 《소년 삼태성》은 그러한 생각으로 전에 썼던 것보다 더 재미 있고 더 유익한 것을 쓰려고 한 것인데 불행히 그 2회의 것이 전부 삭제를 당하여 책에 내지 못하게 된고로 이내 더 계속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고쳐서 써 가지고는 그 본래 목적하던 것을 묘하게 써나갈 수 없는 까닭입니다.(같은 글)
이처럼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속에 방정환 문학의 본질을 이루는 현실주의가 숨쉬고 있다. 나름대로 한계가 없지는 않았지만, 기본 성격만큼은 아주 뚜렷했다는 사실이다. 방정환 문학은 '잔물(소파:小波)'이라는 그의 호 때문에 일부 오해되기도 하는 일본의 이와야 사자나미(巖谷小波) 문학 또는 대정기(大正期) 일본 동심주의 문학의 복제가 아니라, 민족과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올바른 응답이었다. 한국 근대아동문학의 주류는 바로 이곳에서 명예로운 전통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던 것이다.
4.방정환과 한국아동문학
방정환에서 비롯된 20세기의 한국 아동문학은 한마디로 현실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서 한국은 불구의 근대를 살아야 했고, 바로 그 때문에 한국 아동문학은 출발부터가 다른 나라와 달랐다. 한국 아동문학은 미완의 근대혁명 곧 동학을 잇는 천도교의 개혁사상에 뿌리가 닿아 있으며, 민족·사회운동의 일환이었던 소년운동과 함께 줄기를 뻗었다. 경향과 색채를 불문하고 일제시대의 아동문학은 전국 각지의 소년운동과 굳게 맺어졌다. 한국 아동문학의 출발점이 어른의 도피관념으로서의 퇴행심리와 거의 무관했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아동문학이라고 하면 우선 '무지개 빛 환상'부터 떠올리기 십상이다. 이런 동심천사주의의 통념은 교과서나 신춘문예를 주도한 분단시대의 제도권 아동문학이 낳은 것인데도 우리는 이 통념이 애초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줄로 착각하기 쉽다. 방정환 시대에 어느 정도 불가피했던 '역사적 동심주의'가 한층 천박하고 타락한 형태를 띠게 된 데에는 바로 방정환의 현실주의 문학정신을 옳게 계승하지 못한 데에 원인이 있다.
지금까지 나온 유일한 아동문학 통사인 이재철의 《한국현대아동문학사》(일지사, 1978)는 시대구분에서 해방 이전을 '문화운동시기'로, 해방 이후를 '문학운동시기'로 크게 나누고 있다. 이 구분은 본격 문학으로서의 아동문학은 해방 이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평가하는 관점이다. 말하자면 일제시대의 아동문학은 민족·사회운동과 결부되었기 때문에 본격 문학으로서는 미달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순수파에 의한 사회파 배제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재철은 좁게 측량한 '순수' 문학의 이름으로 일제시대 아동문학의 현실주의적 성격을 지우고 해방 후를 한국 아동문학의 새로운 기원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출처:방정환-원종찬선생님 글/ 애린>
한때 북한에서 방정환을 일제의 주구인양 매도했던 것과는 뒤집어진 자리라 할 수 있지만, 이재철의 논리 역시 진실을 은폐하고 통념을 재생산하는 노릇을 할 뿐이다. 분단시대의 냉전논리가 이를 뒷받침하였다. 21세기 통일시대를 바라보며 20세기 한국아동문학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이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다.(*)
'방정환 도서관' 건립 행사
- "이제 '이놈' '저놈' '애자식'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이들도 한울님(天)이므로 '어린이'로 높여 부릅시다."
'어린이'는 천도교(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한울임) 사상을 모태로 한 천도교인 소파 방정환(1899~1931ㆍ사진) 선생의 주창으로 태어난 말이다.
방정환이 1923년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열었던 서울 종로구 경운동 88번지 천도교중앙총부(수운회관) 앞마당에서 오는 5월5일 제87회 어린이날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방정환어린이도서관 건립을 위한 도서전시회 및 어린이날 행사'가 열린다.
서울 종로에서 태어나 천도교에 입교했던 소파는 천도교 3세 교조이자 삼일운동 당시 민족대표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의 3녀 용화씨와 결혼해 일본 도쿄대학 철학과에서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했다.
이어 1923년 3월20일 최초의 어린이 잡지인 < 어린이 > 를 창간했고, 진장섭·조재호·윤극영·손진태·이헌구·마해송씨 등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색동회란 단체를 만들어 어린이 운동을 주도했다.
어린이들을 '민족 독립과 해방'의 새싹이자 희망으로 키우려 했던 소파는 32살의 짧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천도교는 소파의 뜻을 기리는 '방정환어린이도서관'을 수운회관에 건립하기 위해 올 어린이날 '제1회 어린이 도서 전시회'와 먹거리 장터, 문화마당, 전시마당 등을 펼친다.
<조현 기자>
방정환선생의 일화
어린이날을 제정하신 소파 방정환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밤 소파선생댁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강도는 칼을 들이대면서 돈을 내놓으라고 위협했습니다. 소파선생이 말합니다. “그냥 달라고 하면 되지 무슨 칼을 들고 그러냐 나는 많은 돈은 없어도 돈이 필요하면 줄 터이니 달라고 하면 되지 칼은 치우라”고 하며 주머니의 돈과 옷장에 넣어둔 돈을 찾아 내놓고 가져가서 좋은데 쓰라고 말했습니다. 너무 친절하게 하니 강도가 양심이 있는지 이것 다 가져가도 되냐 하며 주섬주섬 챙겨갑니다. 그 때 소파선생이 그를 부르며 "이 보시오. 달라고 해서 줬으면 고맙다고 해야 되지 않소?"하니 강도가 별사람 다 보겠다 하고 "고맙수다!" 하고 나갔습니다.
때 마침 그곳을 나가던 경찰이 강도의 형색과 거동이 수상하게 생각되어 그를 잡아 조사하니 몸에서 칼이 나왔습니다. 강도는 자백을 했습니다. 경찰이 강도를 데리고 소파 선생댁으로 왔습니다. 소파 선생댁으로 간 경찰과 강도를 본 소파선생은 "자네, 왜 왔어? 준 돈 벌써 다 썼느냐!"며 먼저 말을 꺼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강도는 어리둥절해 하고 경찰은 당황해 합니다. 경찰이 "이 강도가 여기서 도둑, 강도질을 했다고 자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소파 선생은 “저 사람은 강도가 아닙니다. 사정이 딱한 것 같아서 내가 돈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준 돈을 받고서 고맙다는 말까지 했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강도입니까?"
경찰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강도를 풀어주고 갔습니다. 그제야 강도는 무릎을 꿇고서 소파 선생 앞에 백배 사죄했습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나쁜 짓 하지 않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창골산봉서방>
방정환선생 묘
어린이문학의 개척자이고 소년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 묘가 망우공원에 있습니다.
구리로 넘어가는 고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사람들이 산책하고 조깅도 하는 망우리 묘지--
'동심은 신선과 같다" - 소파 방정환의 묘
빗돌이 있지만 봉분이 없습니다.
다른 데에 묻힌 유해를 3년 뒤엔가 몇년 뒤에 거두어 유골을 이곳에 묻었다 합니다.
누군가 상석을 마렸했고, 오른편에는 '소파 방정환 선생의 묘'라고 한글로 새긴 높은 비석이
서 있습니다.
<어린이문학 / 보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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