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사 풋내기 기자와 발행인 고병완
보리장 권경희(菩提藏 權敬姬)| 소설가․심리상담가
당시 「불광」의 단골 필자가 여러 분 있었다. 한 분은 직장불교에 관해 오랜 기간 연재한 김경만 법사(불광법회 회장, 훗날 출가한 한탑스님)이고, 또 한 분은 청소년 법회의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동덕여고의 김재영 법사, 그리고 동국역경원의 박경훈 역경위원이었다. 또한 불광법회의 열성 신도이며 훗날 동국대 총장이 된 송석구 박사, 동국대에서 불교학을 가르치던 목정배 교수, 정병조 교수,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반영규 선생도 단골 필자였다.
이분들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불광에 원고 써 달라고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았다. 적은 원고료를 드리면서 부탁 말씀 드리기조차 어렵던 터라 이 필자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특히 박경훈 위원은 고정 연재 외에도 다른 필자가 원고를 펑크 내면 ‘대타’로 원고를 써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박 위원이 경전이나 불교학, 문장력 등 모든 분야에 학식이 깊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큰스님과의 우정 때문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큰스님, 어떤 필자가 마감에 임박해서 원고를 못 쓰겠대요. 어떻게 하죠?”
필자가 원고를 펑크 내면 나는 몸이 달아서 큰스님께 달려갔고, 큰스님은 어떤 주제인가를 물은 후 “그 분야라면 박경훈 거사한테 대신 부탁하면 돼”했다. 큰스님의 말씀대로 박 위원은 주제에 맞는 원고를 날짜에 맞추어 써주곤 했다.
당시 「불광」잡지에 ‘노사(老師)의 운수시절’이란 연재물이 있었다. 노스님들이 젊은 시절 운수행각을 하면서 보고 느낀바, 자신의 스승에 대한 회고록이었다. 주로 큰스님이 노스님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원고로 정리해 주었는데, 한번은 내게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어느 노스님을 찾 뵙고 해주시는 이야기를 녹음해 오라 하셨다. 큰스님이 그 노스님께 미리 부탁을 해두어서 나는 가서 이야기를 들으며 녹음만 하면 되는 쉬운 일이었다.
그 노스님 법명이 기억나진 않지만 인상은 뚜렷이 기억난다. 작은 체구에 얼굴이 작고, 연세가 우리 큰스님보다 20년은 위로 보였다. 경전 공부를 많이 하여 법주사 강사로 후학들에게 경을 가르치고 있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법주사로 가서 노스님을 찾았다. 노스님은 광덕 스님이 보내서 왔다고 하자 반색을 했다.
“손님이 왔는데 곡차라도 나누어야겠네.”
노스님은 방안에 있는 낡은 고철 같은 철제 캐비닛을 열었다. 그 안에는 책과 이런저런 물건들이 잔뜩 들어 있고, 양주 몇 병도 들어 있었다. 노스님은 양주를 꺼내 잔에 따라 주면서 “곡차 한 잔 하라”고 하였다. 옛 스님이 막걸리를 곡차라 하면서 먹었다는 말은 들어 봤지만, 양주를 곡차라고 하는 노스님을 대하자니 당황스러웠다. 노스님은 홀로 곡차 잔을 기울이며 신나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처음 스승을 만나던 이야기, 수행하던 이야기, 운수하던 이야기가 줄줄 쉴새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가 가끔,
“광덕스님, 참 훌륭한 분이지.”
노스님은 이야기 중간 중간에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큰스님을 찬탄했다.
“젊은 시절 죽을 각오를 하고 정진하는 바람에 몸이 약해지고 말았지만……”
말 그대로 경탄과 찬탄이었다. 그런 말투에선 뭔가 아쉬움 비슷한 것도 배어 나왔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서 녹음을 푼 뒤 큰스님께 보여 드리며 노스님에 관해 여쭈었다. 캐비닛에서 양주를 꺼내 드시더라는 말을 하자 큰스님은 어린애같이 웃었다.
“곡차를 좋아하시지.”
나는 노스님의 얼굴에 비치던 아쉬움이 너무도 궁금해서 그에 관해서도 여쭈었다.
“그 스님이 재주가 많으신데 오히려 그게 공부에 장애가 됐어.”
큰스님의 말씀 속에는 뭔가 함축된 부분이 많은 것 같았다. 머리가 좋고 아는 게 많다 보니 정진을 게을리 하게 되어 그저 학식이 높아지는 경지만 이루었을 뿐이었다는 말씀으로 나는 해석했다. 꾀가 많고 먹물이 많이 들면, 미욱하더라도 분발심을 내어 맹렬하게 뛰어드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역시 큰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번은 우리 큰스님이 텔레비전 심야 대담 프로그램에 나갔다.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보니 큰스님 모습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요즘 표현으로 치면 ‘꽃미남’이라고나 할까? 정갈하게 밀어 올린 두상도 예쁠뿐더러 이목구비의 선이 뚜렷하면서도 여린데다 마른 편이어서 텔레비전 화면에 썩 잘 어울렸다. 피부가 곱고 티 하나 없어서 마치 투명한 구슬처럼 느껴졌다. 청아하다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텔레비전에 비친 큰스님 모습을 내게만 그렇게 보인 게 아닌 듯했다. 방송에 나가고 난 뒤 우리 큰스님의 인기가 대단해졌다. 큰스님이 방송에서 한 말씀보다 모습 그 자체가 사람들을 감동시킨 듯했다. 불광법회와 잡지사로 연신 큰스님을 한번 뵙고 싶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실제로 친견을 오는 사람도 있었다. 큰스님을 적극 뵙고 싶어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천주교 수녀들도 여럿 있었다.
한번은 큰스님이 어떤 비구니 노스님께 원고를 부탁드리라면서 전화번호와 법명을 적어 주었다. 명문 여대 출신의 스님으로, 늦게 머리를 깎았다고 했다. 그 비구니 스님은 절에 기거하지 않고 삼선교 근처의 허름한 아파트에 홀로 살고 있었다. 사는 곳은 누추했지만, 70이 넘은 얼굴에도 기품이 서려 있었다. 속가에 있을 때 귀한 대접을 받고 살았던 분 같았다. 그러나 이런 속가의 삶이 오히려 장애가 됐는지 머리를 깎고 나서도 절에서 대중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은거하다시피 살고 있었다. 원고를 받아다 보여 드리자 큰스님은 내게 이렇게 일렀다.
“원고료 잘 챙겨 드려요.”
아마 홀로 살아가는 비구니 노스님이 생활비가 궁할까봐 적은 원고료로나마 도와 드리고 싶었던 마음인 듯했다.
큰스님은 가까이서 일하던 우리들을 아들이나 딸처럼 대했다. 나 역시 큰스님을 딸 같은 심정으로 모셨다. 직장을 옮기면서 자주 못 뵙게 될 때에는 마치 친정을 떠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주 찾아뵙지를 못했다. 자주 찾아뵙지 않는 게 늘 불자들에게 ‘시달리는’ 몸 약한 큰스님을 돕는 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면서도 불광법회 식구들은 통해 큰스님이 많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전해 듣는 날이면 나는 꼭 큰스님 꿈을 꾸었다. 돌아가실까봐 애타 하는 꿈이었다.
보육원 사건으로 돌아가실 뻔 했다는 말을 들은 직후 찾아뵈었을 때였다. 큰스님은 나를 부를 때 당신이 지어 준 ‘보리장’이란 법명으로 늘 불렀다. 그런데 그날은 나를 보더니 고개를 기웃했다.
“내가 호되게 앓고 나서는 기억이 흐려졌어. 가만 있자, 누구라?”
내가 삼배를 하고 나자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큰스님은 “그렇지 보리장이지”하며 반가워했다. 그때 늙고 허약해진 큰스님을 뵈며 가슴이 미어졌다.
다시 초창기로 돌아가 본다. 「불광」잡지에 들어가 한 달이 지나 월급을 받아보니, 술집 바텐더로 일할 때의 삼분의 일도 채 안 되는 적은 금액이었다. 당시 나는 여섯 명이나 되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처지였으므로 그 수입만 갖고는 도저히 생활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간스님께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다시 바텐더로 취업을 했다. 그래서 주간스님이 큰스님께 그런 사실을 여쭙자 큰스님은 “잡지사 형편이 어렵더라도 급여를 올려 줘라. 어떻게 술집에 다니게 할 수 있느냐”고 하며 도로 데려오라고 하셨다 한다. 그래서 그만둔 지 사흘 만에 다시 「불광」잡지사로 복귀했다. 올려준 급여도 여전히 적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생활은 가능했다. 그러나 대학 등록금까지 모으기엔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잡지 만들면서 큰스님께 배우는 게 많으니 대학 공부는 하지 말자고 자위하며 기자 생활에 전념했다. 훗날 직장 다니면서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 방송통신대학을 다니는 것으로 대학 공부를 마쳤다.
불광 사무실은 대각사 근처, 단성사 극장 뒤의 대림빌딩 2층에 있었다. 그때 현재의 송암지원스님을 만났다. 잡지사 사무실은 마치 사랑방 같아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큰스님의 제자들이 수시로 찾아오곤 했다. 지원스님은 그 당시 나이가 많았지만 동국대를 들어가지 위해 시내 입시전문 학원엘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었는지 불광출판부 사무실 책상 위에서 잠을 자며 학원엘 다녔다. 아침 일찍 나가기 때문에 우리가 출근하고 보면 이미 떠난 뒤였고, 저녁에는 우리가 모두 퇴근한 뒤에 학원에서 돌아오곤 했다. 잘 만나기가 어려웠지만 가끔 부닥뜨릴 때가 있었는데, 그때 보면 20세 후반의 건강한 청년 스님이었다. 어쩌다가 사무실에서 만나면 남다른 친밀감이 들었고, 스님 스스로도 스님이라는 권위를 별로 내세우지 않아 대하기가 편했다.
그때 절 집안의 사형인 주간스님이 사무실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사제인 지원스님을 가끔 구박(?)도 하여 괜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큰형이 동생을 대하듯 하는 친근감의 표현이었으나, 그때는 안됐다는 생각에 맛난 음식이 있으면 남겨 두었다가 저녁 때 학원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지원스님이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스님들과 일반 음식점(고깃집이나 술집) 가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스님들이 고기를 먹거나 술을 먹는 모습을 불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시중에서 활동하는 스님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술이나 고기를 파는 음식점에 부득이 가게도 된다. 그럴 때면 함께 간 내가 괜히 남들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마음이 불편하다.
불광에 근무하던 어느 날, 지원스님과 뭔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어 사무실 부근 지금의 호프집 비슷한 장소에서 만나게 됐다. 약속 시간에 나타난 지원스님, 예비군복을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예비군 훈련이 있었느냐고 묻자 스님은 “이런 데 승복 입고 올 수 있나요? 이렇게 차림이라도 바꾸는 게 불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해요.”하고 대답했다. 스님은 피치 못해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가게 되더라도 불자나 불자 아닌 사람들을 위해 옷을 바꾸어 입어주는 배려를 한 것이다. 남이 보든 말든, 불자들에게 반감을 사든 말든 아랑곳없이 유흥음식점을 드나드는 일부 스님들에 비하면 얼마나 ‘고마운’ 태도인지, 그때 지원스님의 예비군복 차림이 늠름하고 상큼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느 날, 사무실로 지원스님의 속가 부친이 찾아왔다. 부친은 “지원스님이 가문을 이어갈 독자인데 출가를 했다”며 무척 안타까워했다. 지원스님은 부친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어디론가 피해 갔다. 큰 스님께서도 제자인 지원스님에게 속가로 돌아가라고 여러 번 타일렀으나 지원스님이 출가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며 사무실 식구들이 내게 말을 해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친아버지의 간청도 뿌리칠 만큼 스님들은 그렇게 ‘매정’한 사람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출가란 것이 그만큼 어려운 결단이로구나 하는 걸 다시 깨달았다.
그런 어려운 출가를 한 분이기에 큰스님은 그다지도 병약한 몸을 지탱하면서 그렇게 위대한 삶을 살다 가신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통 사람이 그런 몸을 가졌다면 아마 골방에 틀어박혀 골골하다가 허무하게 인생을 끝마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큰스님의 위법망구, 멸사봉공의 헌신, 이 어려운 세태를 당하여 이리저리 부대끼면서 큰스님의 그런 숭고한 마음과 고고한 자태가 새삼 그립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8권-인천(人天)의 안목, 글-송암지원
첫댓글 보리장 권경희 보살님의 글을 오늘 마칩니다. 3주에 걸쳐 올리려고 했으나 길어서 1주일 더 걸렸습니다.
앞의 글에서의 일화 보육원 사건 때문에 큰스님께서 돌아가실 뻔 할 정도로 마음을 상하셨다는 말씀에 더 찡합니다.
작은 일화들 속에 묻어있는 큰스님의 자비심이 가득합니다.
화엄학의 대가이신 도업스님께서 일본에 가서 유학을 할 때 여러 스님들께서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을 다니시거나 다른 일로 다니실 때 때론 승복 입기가 어려울때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다니는 분들이 많았지만 한 번도 승복을 벗지 않고 다른 절에가서 기도하고 염불하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공부를 하셨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승복을 벗지 않음으로 계를 더 지킬 수 있지 않나 생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