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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시 지례면 교리에는 2002년 태풍 루사 당시 수해복구에 나선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적 노력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단석의 연꽃무늬는 자원봉사자들의 순수한 마음을 상징하며, 기둥석에는 지례면의 평안을 바라는 의미로 쌍거북을 새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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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자 기념비 옆 고인돌 모양의 석재조형물 아래에는 도자기로 만든 타임캡슐이 묻혀있다. 2102년 개봉 예정인 타임캡슐에는 2002년 태풍 루사 당시 지례면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김천시민의 젖줄’ 감천은 대지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하지만 감천은 때때로 성난 황룡의 모습으로 돌변, 민초의 삶에 엄청난 시련을 안기는 두 얼굴을 가진 하천이기도 하다.
실제로 감천 유역에서는 수십년 주기로 큰 수해가 발생해 민초들의 터전을 할퀴고 지나갔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
1936년 김천시민 53명의 목숨을 앗아간 병자년 수해가 그러했다. 2002년 여름, 김천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루사가 남긴 상처와 아픔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옛 말처럼 재난을 극복한 이들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유대감이 싹텄다. 특히 루사로 인한 피해로 몸서리를 쳤던 지례면 주민들이었지만, 갑작스러운 재난은 모두가 하나 되는 계기가 됐다. ‘감천 150리를 가다’ 22편은 2002년 태풍 루사가 몰아쳤던 당시, 자원봉사자의 아낌없는 도움으로 재난을 극복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지례면 사람들에 대한 스토리다.
‘성난 물길’, 삶의 터전을 할퀴다
2002년 8월23일 서태평양 해상에서 세력을 키운 열대성 저기압이 태풍 ‘루사(Rusa)’로 명명된다. 태풍의 이름은 말레이 반도의 사슴 이름을 따 정해졌다. 루사는 최대 순간풍속이 초당 39.7m로 중심 최저기압은 970hPa였다. 1959년의 ‘사라’나 2003년 ‘매미’보다 약했지만, 엄청난 폭우를 동반하면서 기록적인 피해를 남긴다. 총 5조1천억원대의 재산피해와 사망 124명, 실종 60명의 인명피해를 한반도에 남겼다.
당시 북진을 시작한 루사는 일본을 통과해 8월31일 오후, 전남 고흥반도에 상륙한다. 루사는 곧 김천을 비롯한 한반도 중부일대를 덮친다. 루사가 김천을 통과하던 31일, 지례면을 비롯한 김천 일원에는 엄청난 비가 쏟아진다.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오후 3시쯤에는 시간당 70㎜ 넘는 폭우로 돌변한다. 밤새 700㎜ 넘는 비가 지례면 일대에 쏟아졌다.
폭우로 감천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지례면 주민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1936년 병자년 수해 이후 큰 물난리가 없었기에 안심하고 지내온 세월이었지만, 일찍이 본 적 없는 폭우였기에 불안감은 점점 커졌다. 결국 31일 오후 3시50분께 지례면사무소에서 홍수 대피방송이 흘러나온다. ‘방천제방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 신속히 안전지대로 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지례면 교리와 상부리 주민들은 황급히 인근 지례초등학교로 대피한다.
대피방송이 나온 지 30분 만에 상부리 인근의 방천제방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둑을 넘어선 세찬 물살은 금세 250여m의 제방을 흔적도 없이 무너뜨렸고, 성난 감천의 물줄기는 면소재지로 들이닥친다. 조선시대 지례현감 이채(李采·1745~1820)가 쌓아 올린 이공제의 사이둑 덕분에 교리 일대의 피해는 비교적 적었지만, 면소재지와 농지는 물폭탄을 맞아 쑥대밭이 되고 만다.
그나마 경찰·소방관을 비롯한 공무원들의 대응이 빨랐기에 대규모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 노약자들은 대피하지 못한 채 고립되고 만다. 날은 점점 저물어가고 있었고, 오후 6시에는 전기마저 끊긴다. 구조를 요청할 유일한 수단인 휴대전화도 오후 7시30분이 되자 먹통이 됐다. 오후 8시에는 수도공급이 끊겼고, 지례면 주민들은 암흑천지 속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공포와 목마름에 허덕여야 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처 대피하지 못한 어르신들을 구출하려 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공무원과 마을 청년들은 스티로폼으로 배를 만들어 고립된 노약자들을 구하러 나선다. 다행히 장롱 위에서 간신히 물을 피하던 노인 두 명이 구조됐다. 중풍에 걸린 한 노인은 단지를 끌어안고 구조에 나선 청년 덕에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수재민의 아픔을 나누다
루사의 물폭탄을 맞은 지례면의 피해는 심각했다. 주민 4명이 숨지고 가옥 200여채가 무너지면서 6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한다. 농경지 270여㏊가 물에 잠겼고, 농민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태풍이 휩쓸고 간 이튿날인 9월1일에도 지례면을 덮친 물은 빠지지 않았다. 2일이 돼서야 간신히 자동차가 들어올 정도로 도로가 복구된다. 3일에는 전기도 다시 들어왔다. 이날 이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전국에서 수많은 자원봉사자 행렬이 지례면으로 향한 것이다.
3일 오후부터는 본격적인 복구작업과 구호활동이 시작된다. 해병대 1사단 소속 장병 300여명이 지례초등학교에 본부를 차리고 복구작업에 투입된다. 당시 해병대원들의 열정과 노력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지례면 주민들은 당시 해병대원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장병들은 삽과 곡괭이로 파낸 흙을 마대자루에 채워넣으며 방천제방을 복구했다. 중장비가 동원됐지만 해병대원들이 쌓은 둑이 훨씬 견고했다. 수해복구가 끝난 뒤 지례면민 70여명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해병 1사단을 방문했을 정도로 해병대의 수해복구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전국 각지에서 온 자원봉사자는 지례면 주민들의 은인이었다. 일부 자원봉사자의 경우 도로복구 이전에 지례면에 도착했다. 이들은 생수를 직접 등에 지고 10㎞ 넘는 거리를 걸어와 이재민들의 목마름을 달래주었다.
당시 자원봉사자 중에는 개인자격의 참여자가 많았다. 김천과 연고가 전혀 없는 서울시민 30여명이 복구활동에 동참하는 등 수많은 자원봉사자가 출신지역을 가리지 않고 봉사에 나섰다. 전국 곳곳에서 성금이 답지하는 등 온정의 손길도 이어졌다. 한 독지가는 사비를 들여 포클레인 5대를 제공하며 신속한 복구를 돕기도 했다.
기업을 비롯한 여러 단체도 복구작업에 동참한다.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의 직원들은 20여일 동안 마을주민과 자원봉사자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했고, 현대를 비롯한 여러 기업의 직원들도 수해복구를 위해 땀방울을 흘렸다.
그 결과 2002년 9월 한 달여 동안 진행된 지례면의 수해복구작업에는 연인원 5천112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집계되지 않은 봉사자와 군인 6천300명까지 합하면, 연인원 2만명이 넘는 대한민국 국민이 지례면민의 아픔을 함께 나눴다.
‘보은의 碑’ 우뚝 서다
루사가 김천에 들이닥친 지 1년 만인 2003년 9월1일, 지례면에는 자원봉사자의 헌신적 활동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 제막식이 열린다. 면소재지 입구에 세워진 가로 3m70㎝ 세로 3m 규모의 비에는 ‘그대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비는 농민 문홍연씨 등 주민 5명과 지례면민 전체가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마련해 세워진 것이다. 지례면 주민들은 2003년 6월21일부터 기념비 건립을 위한 기금모금을 시작, 돼지 등 현물까지 내가며 총 2천480만원의 제작비용을 마련했다. 비문은 김천 향토사학자 문재원씨가 작성했고, 글씨는 김천 향토 서예가 이홍화씨가 썼다.
지역민의 안전을 기원하는 타임캡슐도 제작돼 기념비 제막식날 함께 땅에 묻혔다. ‘태풍 루사 여기에 묻히다’라는 문구가 적힌 고인돌 모양의 석재 조형물 아래 타임캡슐이 잠들어 있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타임캡슐에는 지례면의 현황이 담긴 각종 서류와 지례 규석광산의 차돌, 해병대원의 위문편지, 봉사활동에 참가한 단체의 명단 등이 들어있다. 타임캡슐은 루사 상륙 100년 후인 2102년 8월31일 개봉될 예정이다.
이름 없는 자원봉사자의 헌신적 활동에 감격한 지례면 주민들은 이후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2003년 태풍 ‘매미’ 때는 경남 거창 일대의 수재민들을 도왔고, 2007년 태안 기름유출 사건 때도 봉사활동에 나섰다. 2011년에는 구제역으로 피해를 입은 안동과 강원도의 축산농가를 돕기도 했다. 남을 돕는 행동이 지례면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지금도 지례면소재지 입구의 자원봉사자 기념비에 자원봉사자들이 종종 들러 옛 추억을 되새기고 있다. 이들은 잘 정비된 마을을 둘러보며 흐뭇한 웃음을 짓고서는 다시 제 갈 길을 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