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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있다.
너무 넓고 너무 깊고 너무 변화무쌍한 신비로...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에 저마다의 경험치를 드리우고 숱한 의미를 낚아 올리고 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터, 미지의 영토로 나아가기 위해 정복해야 할 장애, 자원의 보고이자 개발해야 할 미개지, 일상의 치졸함을 조롱하는 호쾌한 일탈, 혹은 찰나적 존재를 비추는 장구한 자연,.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운명처럼 압도하는 위험. 모비딕과 겨루는 인간 의지의 시험장. 노인의 바다, 혹은 돌고래와 사랑에 빠지는 그랑 블루, 아틸란티스에서 온 사나이와 마린 보이가 첩보요원으로 암약하는 냉전의 현장. 마도로스를 꿈꾸는 소년들의 원초적 동경...
내게 바다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를 양육해 준 아버지이며 삶이자 죽음이다. 내 생명의 원천이면서 죽음 너머다. 그랑 블루에 가까운가? 그러기엔... 돌고래와 아직 사귀지 못했다. 아직 돌고래와 사귀지도 못했으면서, 돌고래를 알고 이해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으면서 막연하게 감상적인 동경으로 글랑 블루를 소비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레이첼 카슨의 바다이야기들을 읽고서...
<침묵의 봄>을 읽으면서 레이첼 카슨이 해양생물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해양생물학에 관해 쓴 책들이 있다는 걸 알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도 어릴 적 해양생물학자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전집을 읽어보고자 책들을 대출해 왔다. 첫 저서인 <바닷바람을 맞으며>와 <우리를 둘러싼 바다>... 카슨에게 바다는 어떤 의미인가? “쉴 새 없이 분투하는 생명체의 흐름이 계속되는 경이로운 터전”이자 “영원히 흐르는 시간의 강처럼 모든 생명이 시작되고 흘러가는 처음이자 끝”이다.
“바다 가장자리에 서서 넓은 염습지 위를 움직이는 안개의 숨결을 느끼며, 수백만 년 동안 조용히 파도가 밀려왔다 밀려간 모래톱 위를 나는 새들의 비행을 지켜보는 것은 이 지구와 마찬가지로 영원히 존재하는 대상에 관한 지식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것은 인간이 바닷가에 나타나 경이에 가득한 눈으로 대양을 바라보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몇 세기와 몇 세대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왕국이 등장했다 사라지는 가운데 해가 가고 또 다른 해가 오면서 계속된 일이다.” 레이첼 카슨의 말, 즉 쉴 새 없이 분투하는 생명체의 계속되는 흐름을 지켜보며 발견한 영속성에 대한 차분한 인식은 죽음이 그저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은 생명의 흐름임을 다시금 확인해 준다. 카슨의 대답을 통해 우리 역시 그런 가능성과 관련해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문 중에서...
옛사람들이 생각한 바다의 개념은 좀 더 넓은 의미로 보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정말이지 바다는 우리를 온통 둘러싸고 있다, 육지 간 교역은 반드시 바다를 거쳐야만 가능하다. 육지 위에 부는 바람조차 드넓은 바다가 키운 것으로, 끊임없이 바다로 되돌아가려 한다. 대륙 자체도 서서히 해체되고 있다. 그렇게 침식한 대지는 작은 입자로 바다에 가라앉는다. 바다에서 비롯된 비는 강을 타고 다시 바다로 흘러든다. 신비로운 과거에 바다는 모든 흐릿한 생명의 기원을 감씨고 있었으며, 마침내 수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스러져간 뭇 생명의 잔해를 받아들인다. 모든 것은 영원히 흐르는 시간의 강처럼 종국에는 처음이자 끝인 바다로, 대양의 강인 오케아노스로 돌아간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 말미에서...
카슨이 바다와 바다 생명체에 관한 책을 쓰기 이전에도, 이후에도 해양학자와 해양생물학자들은 있었고 무수한 연구논문이나 책들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나는 그중 어떤 논문이나 책들도 탐독한 적이 없었으니 카슨의 작업이 성취한 새로움과 독특함을 감히 평할 처지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딱 나 같은 문외한이 흥미진진하게, 미학적 감흥에 달뜨면서 경외감에 차오르면서 책을 마칠 수 있게 하는 뭐라 장르를 구분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책인 건 분명하다. 섬세한 감각으로 묘사해내는 바다의 풍경과 오감의 느낌들, 그 묘사의 앵글이 흘러가는 구도에 포착되는 바다 생명체들의 생태에 관한 섬세한 관찰과 해박한 지식.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구성의 자연스러움과 치밀함, 꼼꼼하고 예민한 글쓰기 능력... 과학자가 이렇게 섬세한 감수성과 필력을 겸비할 수 있다니...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카슨은 흔히 과학자들은 마땅히 그러할 것이라고 짐작하는, 대상에 대한 이입을 차단하는 분석적이고 냉정한 태도, 혹은 도구적 태도와 완전히 다른 태도와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카슨은 첫 저작인 <바닷바람을 맞으며>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사는 생명체를 아우르는 3부로 되어 있다. 1부는 ‘바다의 가장자리’라는 제목으로 해안의 생태를 재창조하고 있는데 주로 새들이 주인공이다. 2부는 ‘갈매기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넓은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고등어가 주인공이다. 3부는 ‘강과 바다’라는 제목으로 대륙붕처럼 완만한 해저 경사면이나 대륙 사면처럼 가파른 낭떠러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깊은 바다의 심연에 대한 이야기로, 뱀장어의 여행을 다루고 있다. 카슨은 머리말에서 이 생명체들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자신이 취했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바다의 생명체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면 상상력을 적극 발휘해야 한다. 또 인간이 지닌 많은 특징과 인간 중심의 척도를 잠시라도 포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계나 달력으로 재는 시간과 세월은 해안의 새나 물고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빛과 암흑, 밀물과 썰물은 먹이를 먹을 시간과 굶주릴 시간, 적의 눈에 쉽게 띄는 시간과 비교적 안전한 시간을 의미한다. 우리 생각을 바꾸지 않은 한 바다에서의 삶이 지닌 특징을 알 수 없고, 우리 자신을 그 속에 투영할 수 없다.
다른 한편 물고기와 새우, 해파리, 새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그들을 실제 있는 그대로의 생명체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행동에 대한 비유에서 지나치게 멀리 벗어나서는 안된다. 이런 이유로 나는 공식적인 과학적 글쓰기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표현법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나는 물고기들이 적을 ‘두려워한다’고 썼는데, 이는 물고기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두려움을 경험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깜짝 놀랐을 때처럼 행동하므로 이렇게 묘사한 것이다. 기본적으로 물고기는 물리적으로, 인간은 심리적으로 반응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물고기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심리 상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머리글에서...
자신을 투영하면서도 인간적 언어로 재해석해내는 것이다. 그런 투영을 통해서 남극에서 북극 사이에 펼쳐져 있는 해안과 강에서 심해까지의 물길을 터전 삼아 태어나고 유영하고 날고 여행하고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면서 얽혀 살아가는 무수한 생명의 그물들을 짜들어 간다. 내 눈은 도요새의 눈을 통해 바다를 보고, 내 몸은 뱀장어의 촉각으로 수온을 느낀다. 많은 세부를 잊어버린 지금도 북극 바닷가 절벽의 짧은 여름, 알을 쪼아대는 아기새의 부리질 소리를 듣는다. 심해를 떠도는 투명한 몸체의 뱀장어 유생의 눈으로 오가는 다른 바다 생명들을 본다.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1951년 초판이 출간되었다. 이 책으로 카슨은 자연주의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힌다.이 시기엔 심해를 탐사할 수 있는 기술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다. 그 후 1961년 판에서는 초판 이후 10년 동안 이루어진 기술적 진보를 통해 더해진 발견들을 각주의 형태로 덧붙여 놓았다. 이 책은 엄청나게 방대한 바다 전반의 특성들을 망라하고 있어 읽고 있자면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 책의 글쓰기 방식은 바다 생명체를 주인공으로 삼은 <바닷바람을 맞으며>에서처럼 투영적 상상력을 동원하기보다는 거대한 바다의 이야기를 받아 성실하게 기술하는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엄청난 양의 과학적, 역사적, 문학적 자료들을 인용하고 해설하면서 치밀하게 사실을 엮어들어 간다. 놀라운 점은 주제와 관련해서 내게 어떤 질문이 일어날 때면 여지없이 카슨이 그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질문의 답을 탐색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집요함이 주는 힘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치밀한 책이다.
1부는 ‘어머니 바다’라는 제목으로 지구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바다의 변천사... 즉 옛 바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부는 ‘쉼 없이 움직이는 바다’라는 제목으로 바람과 물, 바람과 조석과 지구의 자전, 움직이는 조석 등을 다루고 있다. 3부는 ‘인간을 둘러싼 바다’라는 제목으로 해류의 흐름을 통해서 바다가 어떻게 지구의 온도조절장치로 기능하는지, 그리고 짠 바다가 선사하는 자원들, 마지막으로 고대 그리스인들에서부터 현재까지 인간이 바다를 어떻게 이해했으며 나아갔으며 탐색하고 있는가 하는 역사를 약술하고 있다. 책의 말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가 간직할 신비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짧게 피력한다. 그 내용은 위에서 인용하였다.
이 책을 읽고 있자면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깊고 어두운 심해로 떨어지는 아득함을 느끼게 된다. 심해... 인간은 달 표면을 걸었다. 그러나 인간이 심해를 유영하는 일은 가능할까? 해저를 걷는 일은 가능할까? 그러나 그곳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오늘날의 지구를 만들어 온 힘은 눈에 보이지 않은 작은 유기체부터 거대한 공룡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생명들의 각고의 분투 덕이라는 걸 새삼 느낀다. 앞서간 생명들의 분투를 통해 후대의 생명들은 육지에 상륙했고 적응했다. 하지만 육지 생명체의 시신들은 강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고 심해까지 이른다. 심해 생명체들은 그렇게 낙하하는 유기물을 먹는다. 우리 모두는 생명의 질서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또한 해류를 기술한 부분은 정말 웅장하다. 모든 바다는 1000년에 한 번 다 뒤섞인다. 책의 서문에서 카슨은 당시 비키니섬에서 횡행하던 핵실험과 무분별하게 바다에 폐기되는 핵 쓰레기 문제를 염려하고 비판한다. 바다는 고여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도 정권의 입맛에 따라 핵발전소가 늘어나는 세태를 보고 있자면 카슨의 혜안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이 거대한 대양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늘 꿈에서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바다의 흐름에 몸을 맡기곤 한다. 깨고 나면 기분이 상쾌하고 어떤 에너지가 내면에서 차오름을 느낀다. 이 현상은 바다에서 출발한 모든 생명체의 일원인 내 본능의 지향성일지 모른다. 바다는 유년 시절의 나와 결부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바닷가에서 살던 시간보다 서울에서 산 날이 곱절에 육박하고 있다. 내 몸이 바다를 잊고 있는가, 바다 꿈도 드문드문해지고 있다. 어느 날 장난삼아 사주를 봐주던 이가 나는 바닷가에 살아야 건강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
카슨의 바다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내게 던지게 되는 질문이 있다. 나는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헤엄치고 모래사장에서 놀고 식재료의 80%가 바다 단백질과 무기질인 밥상에 둘러앉은 어부의 딸로 자랐다. 나도 바다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카슨이 되지 못했는가? 즉, 왜 바다 생명체들이 궁금하지 않았을까? 물새 발자국을 좋아했으면서도 왜 물새의 생태를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해양생물학자가 되고자 했으면서도 왜 바다 생명체에 나를 투영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고래의 여정이 어떨까, 그 바다 여정의 감각을 상상으로 느껴보려 했던 적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단발적 충동에서 멈춘 채 알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 점이 카슨과 나를 가르는 지점이다.
어쩌면 우리의 교육과정과 입시제도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과학 과목 중에서 ‘생물 ’과목을 무척 좋아했고 늘 100점을 받았다. 왜냐하면 수치인 내가 수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되는 상상력으로 충분히 이해 가능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보면 그 ‘생물’과목에서 가르치던 사실은 주로 해부학적인 것이었다. 현미경을 들이대고 조직을 분해하고 분비물을 외우고 작동원리를 배웠으나 생태적 접근은 미약했다. 그리고 내 주변의 생명체에 주목하고 관심을 가질 활동도 없었다. 주로 외웠다.
입시는 어떠한가? 문이과 전형이 구분되어 있던 시절, 생물학은 이과 계열 전공이었고 수학은 이과 계열의 기초학문이었다. 나는 태생적 수치다. 어떨 땐 장애등급에 이를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닌가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그런 내게 해양생물학 전공은 막연히 바다와 바다 생명체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접근 가능한 세계가 아니었다. 그러니 입시제도의 장벽 앞에서 막연한 동경은 시들어 버릴 밖에...
더 근원적인 원인도 있을 것이다. 내가 보는 바다 생명체는 식재료나 돈벌이인 생선 그 이상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겨울이면 가장 바쁜 어촌, 선착장에 막 끌어올린 그물 사이에 촘촘하게 포획되어 퍼덕이는 물고기들... 그 고통스런 몸짓 앞에서 환하게 들뜨는 어른들. 나 역시 그들의 생명을 팔아 생존할 수 있다는 걸 어린 내가 부지불식간에 깨닫고 있었던 것일까? 나와 동등하게 연결되어 있는 생명으로 이입하고 나를 투영하는 일은 죄의식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걸 예감했던 것일까? 상상력은 위축되었던 것일까? 어부의 딸의 상상력은 더 이상 나아가면 위험했다. 우리 모두는 공범이었으니까...고기집 딸인 후배 앞에서 채식주의 운운하기 조심스러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도 일종의 실용적인 태도, 도구적 태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바닷가 마을 아버지들은 빠르든 늦든 바다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모든 바닷바람을 맞는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함께 엮여있었다. 먹고 먹히면서 서로를 부양하면서 궁극엔 바다로 흘러가는... 그리고 이제 나는 단백질을 만만하게 소화시킬 수 있는 위장이 아니다. 생선도 마찬가지다. 연체동물이 아니면 소화시키기 어렵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채식주의자가 되어 간다. 그리고 이제 생존경쟁에서 한발 물러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다른 생명체가 궁금하다. 이젠 큰 죄의식 없이 다른 생명을 대면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좀 더 구조적이다.
포털과 유투브에서 해양생물학을 검색해보았다. ‘해양생물자원과’라는 명칭. 한때 ‘교육인적자원부’... 사람도 자원이었으니. 지금도 노동자들의 생명을 갈아 넣어 자본의 배를 불리고 있으니 뭐 그닥 실망스러운 명칭도 아니지만... 이런 명칭들은 우리의 상상력을 옥죈다. 언어가 의식을 규정한다. 한편 생태적 시선은 고통스럽다. 고통에 공감하는 시선이다. 모든 생명에게 동등하게 주어지는 생로병사의 고통말고 인간이 무고한 생명에게 가하는 필요 이상의 고통에 감히 이입하고 자신을 투영해야 하는 시선이다. 카슨의 시선은 생태적 시선이었다.
생태적 시선과 도구적 시선을 가르는 근원적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욕망의 문제겠지. 그렇다면 도구적 관점을 생태적 관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카슨은 부모의 역할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는 카슨의 시적 산문 모음집이다. 이 책에는 어린이들이 일상에서 자연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감을 어떻게 하면 잃지 않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전해주는 글들이 실려있다. 카슨은 착한 요정이 되고자 하는 부모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강조하고 있는 비결은 정보나 지식이 아니다. 오감을 열고 받아들이며 느끼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외감을 배운다면 우리는 좀 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밑바탕을 다질 수 있을 것이다.
... 유령게는 주로 밤에 활동한다. 녀석들은 밤바다를 거닐지 않는 동안에는 해변에 작은 구멍을 파고 숨어 있다. 마치 바다가 가져다줄 그 무엇인가를 조용히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이 작고 빠른 녀석들을 볼 때마다, 나는 바다의 무자비한 힘에 맞서는 어떤 고귀한 고독 같은 것을 느낀다. 녀석들 덕분에 나는 잠시나마 삶과 우주의 무한한 신비를 명상하는 철학자가 되곤 한다. 물론 녀석들을 본 로저(카슨의 조카) 역시 철학자의 기분을 느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틀림없다. 바람이 부르는 성난 노래도, 칠흙 같은 어둠도, 산처럼 높게 넘실대는 물결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 로저는 두 눈을 반짝이며 유령게를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아이는 무한하고 위대한 세계 속에 숨어 있는 지극히 작고 소박한 것을 찾았던 것이다.
…바람은 도대체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가? 바람의 고향은 어디이며, 바람의 안식처는 어디인가? 비오는 날이라면 우산을 접고 아이와 함께 얼굴로 비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은가? 비의 기나긴 여행을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은가? 저 하늘에서 이 땅으로, 이 땅에서 저 바다로, 다시 저 하늘로... 긴 여정의 한순간 내 얼굴과 만나게 된 빗방울과 나의 깊은 인연, 영겁의 세월을 아우르고 있는 그 깊은 인연.…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이 내가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라면? 지금 보고 있는 이것을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다면?”
나는 어느 여름 밤, 그런 물음을 나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을 경험했다. 무척 맑은 날이었고, 눈썹보다 가느다란 달이 떠 있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바다 쪽으로 길게 뻗은 평평한 땅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넓고 둥글게 펼쳐진 만 가운데로 뻗어 있는, 아주 조그맣고 가느다란 섬 같은 땅이었다. 육지였지만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것 같은 그런 땅이었다.
우리는 광대한 우주의 언저리에서, 저 먼 곳 다른 언저리를 바라보는 외로운 두 별이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무수한 별들 역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방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저 멀리 만의 입구에 떠 있는 부표가 출렁이는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정적이었다. 또한 해변 어디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맑은 공기를 타고 아련히 들리는 그런 고요함이었다. 바닷가에 늘어선 몇몇 오두막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 불빛만이, 우리가 사람이 살지 않은 이름 모를 행성에 불시착한 것이 아님을 겨우 알려주었다.
그 순간 우리는 다만 별들의 친구일 뿐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처음이었다. 약간 흐릿한 은빛으로 넘실대는 하늘의 강은 쉼 없이 흘렀고, 별자리는 더 없이 밝고 뚜렷했다. 뿐만 아니라 수평선 가까이 빛나는 별들 사이로, 유성이 자신의 대기 속에 안기면서 그리는 자취가 계속 이어졌다.
나에게 그날, 그 자리, 그 광경은 한 세기에 한 번 밖에 보지 못할, 아니 인간이 대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후 단 한번밖에 볼 수 없는 그런 광경이었다. …
부모라는 이름의 외로운 별들이여!
아이와 함께 다만 아름다움에 취하라.
부모라는 이름의 외로운 별들이여!
아이와 함께 놀라워하고 느껴라.
부모라는 이름의 외로운 별들이여!
그대가 보는 모든 것들의 의미, 신비, 아름다움에 다만 놀라워하라.
“아름다운 요정(부모)이 있다면 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한 가지.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이 지닌 자연에 대한 경이의 감정을 언제까지라도 계속되게 해주소서.”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The Sense of Wonder)>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