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은 시인의 시 줍는 법, 시 먹는 법 59
디자인된 말의 힘은 공감에 있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줍는 것이다.
창작은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다르게 적용하여 의미를 재발견하는 일이다.
언젠가 교육장으로 발령받은 친구에게 축하전화를 했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나의 본 목소리를 감추면서 교육장 영전을 축하한다고 전하니 친구는 감사하다며 누구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 여수 병은이네‘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대뜸한다는 말이 “염병하네”였다.
친한 친구가 목소리를 감추고 속였으니 그럴 만도 했고 이 상황에 가장 맞는 한마디였다.
그 비속어를 들으면서 기분이 더 좋았던 것은 격의없이 친구를 대하는 친근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한바탕 함께 웃으면서 통화를 끝내었지만 저도 나도 함께 기분좋은 한마디가 아니였을까 싶다.
‘염병하네’
이 순간, 이 상황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디자인된 말이었다.
그 비속어를 아무 망설임없이 대뜸 나에게 할 수 있다는 것, 그 말에는 너는 나의 둘도 없는 친구라는 정겹고 격의 없다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다른 심각한 상황에서 하게 되면 그 후의 파장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이처럼 말은 그 순간, 그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전혀 색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말을 디자인하는 것은 그 순간, 그 상황에 맞는 한마디를 골라 쓰는 일이다. 이는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말 중에서 선택하는 일이다. 그러면 듣는 사람도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공감’이다.
창작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수천수만 마리의 점점들이 선이 되고 하늘이 된, 마치 거대한 싸이클론처럼 하늘을 휘감아 그려낸 수묵의
새떼를 본다 까마득하게 허공을 넓혀놓은 작은 것들의 위대함을 보면서 혼란이니 질서니 하는 말에 앞서
함께 더불어 라는 말을 앞세우는 나는 얼마나 위선적이냐 일상의 작은 무게도 버거운 나는 얼마나 또 초라한
것이냐 생존보다 더 간절한 거대한 합집합의 절규가 어떻게 꽃이 되어 피는가를 올려보다 새대가리란 비유는
또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가 나는 회오리 도는 새들의 틈새 한 점이 되어 생존의 무게중심을 허공에 가뭇없이
날리고 있다. - 신병은 <군무群舞>
이 시의 핵심은 ‘새대가리란 비유는 얼마나 죄스러운 일인가’이다.
해거름 해창만에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수천, 수만 마리가 서서히 날아올라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시속 100키로의 속력으로 일사분란하게 나는 광경을 보면서 만약 저 많은 수만큼의 인간이 저 속력으로 달린다면 아비규환도 그런 아비규환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의 끝에 나온 말이다.
그래서 절대로 ‘새대가리’란 비유어를 쓰면 안 되겠다는 반성적 성찰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 하나가 시적인식이 된 시다. 그러고 보면 시는 일상과 자연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삶의 메시지다
인간이 위대하지만 자연앞에서 경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이미 여러 측면에서 경험했다.
시의 말은 이처럼 그 대상과 상황에 알맞은 말이다.
그런데 공감을 주는 말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말일수록 더 큰 시적 감동을 갖는다.
플로베르는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을 주장했다. 그 대상의 본질에 맞는 말은 하나의 말이 있을 뿐이라고 대상이나 상황에 맞는 적확한 말을 찾아 쓰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했다.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롯데시네마에서 한재 터널 방향 산비탈에 매화가 활짝 핀 것을 보았다. 그 중 그중 유달리 환하게 핀 매화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웬걸 스티로폼 하얀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에 가슴에서 머리로 펄떡 뛰어오른 생각이 있었다.
아, 분명 봄이구나
쓰레기도 꽃이 되는 봄이구나
이 생각이 곧 시가 되는 것이다.
디자인된 말의 힘, 시 창작은 디자인된 말의 힘에 의존한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나는 특별한 재능이 없습니다. 열렬한 호기심이 있을 뿐입니다."
열렬한 호기심으로 우리가 늘 만나는 대상, 상황 혹은 우리가 늘 하고 듣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일이다.
꽃 피다 - 뒤곁에 고여 있던 그늘과 햇살의 기억이다.
저물다 - 어둠에서만 피어나는 꽃, 저무는 이름들은 저마다 풍경으로 자리한다
새의 주소 - 지붕이 없는 새의 주소, 편백나무 길 5번지다
고수레 고수레 - 허공에 새긴 아버지의 착한 어법이다
선암사 고매 - 600년 고요의 깊이, 오랜 해탈의 깊이도 한순간에 피었다 지는 꽃잎의 무게다
겨울봄비 - 허공의 겨울나기, 허공에 매달린 초록의 꿈이다
물들다 - 내 것과 네 것을 받아주고 내어준, 서로를 물들인 시간의 깊이다
입춘 - 서로 따뜻해져야죠
선인장과 과꽃 - 곁이 된다는 것이 더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썩는다 – 다시 꽃이 되고, 노란 봄꽃이 되는 겨울 우화다
해탈 – 알밤 털린 빈 밤송이로 웃다, 텅빈충만이다
그립다는 것 - 그대 안쪽에 슬그머니 바람기 묻은 마음을 기대두는 일이다,
해빙기 - 모르긴 해도 얽히고설킨 너와 나의 관계가 풀리는 일이다
숲에 비가 오면 - 나무가 나무, 풀이 풀을 서로를 건넌다
바람과 풀 - 서로의 이마를 짚고 안부를 묻는 일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야생화 만나기 - 낮은 자리의 세상에는 낮은 자리의 아침이 열린다
나뭇잎 - 바람의 지느러미다
벼랑에 선 소나무 - 귀미테를 붙여주고 싶다
씨앗 - 작지만 들어있을 건 다 들어있는 하나의 세계다
꽃의 뒤태 - 한 잎 한 잎 떨어진 뒤에 남는 시간의 결입니다.
비오는 날 은행나무 이파리는 무슨 냄새가 날까? - 물비린내가 난다
겨울산 - 능선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시 창작은 뭐 이런 생각과 이런 말들을 기억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또 다른 낯선 말을 대입해보는 일이다. 참 부질없는 것 같지만 세상은 늘 보는대로 늘 하는대로 늘 생각하는대로 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 이렇게 새롭게 세계를 만나고 보고 생각하는 일이 즐겁고 행복한 삶이 된다.
세상과 새롭게 접속하는 일이다.
세상과 새롭게 접속하는 방법을 나는 <어린왕자>에서 많이 배운다.
그래서 평소에 어린왕자를 읽고 또 읽는다.
어린왕자에는 내가 좋아하는 디자인 된 말들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네가 나를 길들이면 난 어느 발소리하고도 다른, 네 발소리를 알게 될 거야.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나는 너에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
어떠한 것을 볼 때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건 기적이야
네가 오후 네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어른들은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그러나 그것은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결코 열어주지 않는 문을 당신에게만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다
네 장미꽃을 그렇게 소중하게 만든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소비한 시간이다
어른이 되는 건 문제되지 않아, 어린 시절을 잊는 게 문제지
정호승 시인은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고 했다.
꽃을 보려면 ‘봄을 기다려라’라는 늘 듣던 말이 아니라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고 말하는 것이다.
‘흙의 가슴이 따뜻해 지기를 기다려라’고 말하는 것이다.
봄은 눈이 녹는 계절이고, 흙이 녹아 따뜻해지는 계절임을 이렇게 관계성을 들어 또 다른 관계성을 회복하는 말이다.
너 혹시 아니,
봄 앞에 서면
우리 모두 꽃이란 것을
너의 안쪽으로 날아간 바람의 말이
너의 안쪽에 가 닿은 햇살의 말이
꽃이란 것을
내 안쪽에 날아온 바람의 말이
내 안쪽에 닿은 햇살의 말이
꽃이란 것을 - 신병은 <개화>
예술가는 포즈, 즉 일상적인 말에 안겨 있는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를 알아야한다.
입술의 언어, 마음의 언어, 남자의 언어, 여자의 언어, 꽃의 언어, 바람의 언어, 돌의 언어, 어둠의 언어, 물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
입술로 나오는 언어는 엄청난 진동과 에너지를 품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이미지, 즉 마음의 언어는 더 강력하다. 마음 속 생각과 이미지(그림)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가 분출되기 시작한다.
시의 힘은 무엇보다 발화법에 있다.
그래서 시적 매력은 상투성을 시적 사유로 새롭게 파헤쳐 얻는 가치에 있다.
그것은 사물의 내면을 응시하는 힘이 관건이다.
즉 ‘염병하네’ ‘쓰레기도 꽃이 되는 봄’ 이라는 일상적 화법이 시적가치가 있는 화법이 된다.
말의 힘은 삶의 때가 묻어있는 말일 수록 힘이 있다. 생명 그대로의 최초 발성이 필요하다. 즉 날 것 그대로의 언어로 대상의 의미를 재탐색할 수 있어야 한다.
시어는 노래하는 정신의 그림이요 그림 그리는 마음의 음악이라 했다.
시어는 입술의 언어보다 마음의 언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