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8월호
[202208]좋은 청지기
농부의 일권은정 루이제 작가 서울대교구 하늘땅물벗 회원
202208 살아보기
오랜만에 친구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주로 채식으로만 음식을 내는 카페 겸 식당이었다. 마침 그날은 일주일에 한번 그 카페 앞에서 유기농 야채를 파는 작은 장이 서는 날이었다. 이미 소문이 났는지 사람들이 와서 줄을 서기 시작했다.
딱 한사람의 농부가 딱 하나의 판매대를 차리더니 색색의 야채를 늘여 놓는다. 직접 농장에서 키운 채소들이었다. 농부는 첫 수확을 하게 된 자색 브로콜리를 키운 과정을 감동어린 어조로 말했고 듣고 있던 장꾼들은 박수를 보냈다. 깡마른 농부는 연신 미소를 지으면서 채소 꾸러미를 소중하게 건네주었다. 야채를 사가는 이들의 표정에는 단순한 소비자 이상의 무엇이 보였다. 그날 저녁 장을 봐온 유기농 채소로 상을 차리면서 그 농부가 오랫동안 행복하게 농사지을 수 있기를 빌었다.
그리고 장을 보러온 이들이 작은 장보기에 귀찮아하지 않기를 소망했다. 우리는 대형 슈퍼마켓에 가서 한달 치 음식을 사서 쟁여 놓는 소비 패턴에 길들여져 있다. 바구니를 들고 매일 시장에서 저녁거리를 사오던 어머니의 장보기는 그야말로 옛날이야기다. 가까운 거리의 시장에서 장보기를 하는 게 탄소배출을 줄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일은 늘 다른 문제가 되고 만다.
요즘은 뭐든지 대규모로 진행된다. 소비도 생산도 대량이다. 농사도 마찬가지다. 소농들이 버티어 내는 게 점점 힘들다고 한다. 모든 걸 효율성과 이윤으로만 따지니 과수원, 농원, 야생작물 채취, 작은 고기잡이배, 갯벌 채취 등등 사람의 손에 의지해오던 소규모 식량생산 작업 방식은 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설자리를 잃어간다. 친환경적이고 지구에 해를 끼치는 일도 적다고 항변해 보지만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적다.
농업의 규모는 이제 다국적 기업화가 되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 밀 공급에 차질이 일고 있다는 뉴스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세계 밀수출국 6위인 우크라이나에 생산문제가 생기면 당장 우리 식탁에 영향이 온다. 우리나라 밀 소비는 쌀만큼 비중이 크지만 밀의 국내 자급률은 1퍼센트의 절반 수준이다. 그만큼 수입곡물 의존도가 높다. 우리 땅에 심을 농작물 씨앗마저 다국적 기업제품으로 사와야 하는 게 지금 농업의 현실이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존엄한 삶을 누릴 권리 있어
그나마 우리 땅에 심을 토종씨앗 재배 농법이 살아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우리 토종씨앗으로 밀재배를 하자는 ‘우리 밀 살리기 운동’은 일찍이 한국 천주교에서 시작한 운동이다. 우리밀로 만든 빵과 과자들이 판매대에서 보일 때마다 여간 반갑지 않다. 2030년까지 정부는 우리 밀 자급률을 10퍼센트까지 올릴 계획이라고 하니 기대해 볼 일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일을 이어나가는 농부나 어부들은 언제나 고마운 존재이다. 유기농 야채를 생산하는 농부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농사라는 ‘노동’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찬미 받으소서’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노동의 귀중함을 강조하신다. ‘창조 때부터 우리는 노동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128항)
땅을 일구든 사무실에서 일하든 우리는 일을 통하여 사회를 발전시키고 개인의 성장과 성취를 달성해간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존재다.
한창 일할 나이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힘들어 하는 젊은이들, 퇴직한 후에도 일거리를 찾아 나서는 시니어 세대들에게 노동은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존엄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사회구성원들에게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엄을 지키게 할 수 있는 ‘기업의 일자리 창출은 그래서 공동선에 이바지 하는’(129항) 필수요소가 된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녹색 일자리라면 의미가 더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