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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13일 목요일
[(녹)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며 자신을 낮춘 이교도 여인의 청을 들어주신다(복음).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18-25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5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창조 이야기는 며칠 전 들은 사제계 전승의 창조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와 전개 방식을 보입니다. 야훼계 전승에 따른 이 창조 이야기에서는 인간 창조, 특히 여자의 창조 이야기가 두드러집니다. 먼저 여자가 창조된 동기와 그 과정을 눈여겨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창세 2,18)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고자 하십니다. 알맞은 협력자는 종속된 자도 아니고 지배하는 자도 아닌 동등한 관계로서, 히브리 말로는 ‘말 없는 대화로도 가능한 직접적 관계’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흙으로 만든 온갖 짐승과 새들은 사람에게 알맞은 협력자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서 그와 동등한 존재를 만들어 그에게 데려다주십니다. 결국 동등한 남자 사람의 뼈로 지어진 여자는 흙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존재인 셈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가정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만드신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5년 필라델피아 세계 가정 대회). 이는 인간이 혼자서는 온전한 피조물이 아니고 다른 인간과 맺는 협력 관계 안에서, 곧 친교 안에서만 온전한 인간일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인간’(人間)의 한자 말이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서로 기대고 있는 두 사람의 관계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의 깊은 의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상호 관계 안에서만 참으로 인간이 되는 친교의 신비가 성삼위의 친교를 닮았다는 사실입니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자신은 강아지가 되어도 좋다며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이방인 여인의 모습을 묵상하며,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어린 시절 죽을병에 들린 어떻게든 한번 살려보겠노라며, 당신 등에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뛰어다니면서 의사 선생님들께 사정사정하셨던 어머니였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시며 병원 성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으셨습니다.
어머니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언제나 송구스러운 마음과 함께 ‘어머니를 봐서라도 더 잘 살아야 하는데...’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혹시라도 너무나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때로 너무 간절해서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간청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부족한 우리 인간 존재인지라 별의별 상황 앞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너무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주님 앞에 부르짖기도 합니다.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뭐 그리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차라리 저한테 그러시지 왜 저 어린것에게, 저 딱한 사람에게 저런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교도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만 더러운 영에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차라리 딸 대신 자신이 악령에 들렸으면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딸은 살고 자신이 대신 죽었으면 했습니다.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가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딸만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 한 점 먼지가 되어도 좋다, 한 마리 개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살짝 뜸을 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상관없었습니다. 딸만 낫게 된다면 그 어떤 수모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런 놀라운 모성 앞에 예수님께서도 두손 두발 다 드신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혹시라도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이 너무 커서 할 말을 잃고 계신가요? 혹시라도 지금 너무나 큰 시련 앞에 일어설 힘조차 없으십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 끝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아직도 마지막 카드가 한 장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딸을 대신해서 기꺼이 한 마리 강아지라도 되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 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겠다는 그 각오로, 주님께 간절히 한번 매달려 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 그리고 사도들의 활발한 복음선포 기간을 끝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적과 치유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부르짖는다면, 온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 성심성의껏 기도드린다면, 자비하신 주님께서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이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헌법재판소에서 비상계엄이 관련된 심문이 있었습니다. 명령을 받았던 군인들은 대통령이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총을 쏴서라도 문을 열고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는 경찰청장, 특전사 사령관, 방첩사 사령관의 일치된 증언입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런 지시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자신들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지 못한 점을 부끄러워하였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은 포고령의 내용도 몰랐다고 합니다. 단순히 겁주기 위해서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결의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탄핵과 권한 대행 체제로 정부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는 사람들의 시위가 있었고,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위도 있습니다. 법원에 난입해서 집기를 부수고, 경찰을 폭행하고, 판사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정과 정의, 법과 원칙을 떠나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끄러움은 동물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물들은 본능에 따라서 생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부끄러움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는 ‘숨’을 넣어 주셨고 그 숨은 인간의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옳지 않은 일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즉 불의를 거부하는 양심을 뜻합니다. 이는 유교에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로 간주하지만, 사실 성경과 신앙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범한 후, 벌거벗었음을 깨닫고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이는 인간이 죄를 지을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수치심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이 수치심은 단순히 부끄러움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을 여는 초대장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숨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찾으시며, 죄 안에서도 사랑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느님께 진심으로 회개하며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 그의 회개는 수오지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가 다시 하느님께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수오지심은 죄를 깨닫고 회개로 나아가는 출발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예수님의 시선을 마주하고 밖에 나가 통곡했습니다. 그의 눈물은 수오지심에서 나온 것이었고, 이는 그가 진정한 제자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수오지심을 잃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6장 15절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혐오스러운 짓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얼굴을 붉히지도 않는다.” 우리는 종종 잘못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거나, 죄를 합리화하려는 태도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수오지심은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예를 들어, 환경 파괴, 사회적 불의, 그리고 인간의 탐욕은 모두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일들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서 인간이 환경을 파괴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며, 회개하고 창조 세계를 돌보아야 한다고 강력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러한 세상 속에서 도덕적 나침반을 잃지 않고 수오지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수오지심은 단순한 도덕적 감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수오지심은 십자가의 신비 안에서 구체화합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수치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찬례에서도 우리는 수오지심을 고백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는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느끼는 겸손한 수오지심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하며 용서와 회복을 청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희망으로 바꿔 주십니다. 수오지심은 회개와 변화로 이어질 때 진정한 의미를 갖습니다. 매일 자신을 돌아보며 양심 성찰을 통해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사회적 불의와 잘못된 구조를 부끄러워하며, 하느님의 정의를 이루는 데 앞장서면 좋겠습니다.
수오지심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성화로 나아가는 초대입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통로가 됩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아, 우리의 수오지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살아갑시다.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 가는 쪽>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하느님께서
기꺼이 사람이
되어 오시고
아픈 딸 고치고픈 부인이
한갓 강아지라도
되고자 하니
사랑은
아래를 향한다
사람을 오롯이
하느님 닮게
올리시고
더러운 영 쫓겨난 딸
품은 어머니로
새로 나니
희망은
위를 향한다
낮추시는 하느님과
낮추는 사람이
서로에게서
올리시는 사람과
오르는 사람이
서로에게서
서로를 애틋이 보고
서로를 오롯이 느끼고
서로를 따뜻하게 품으니
믿음은
서로를 향한다
오늘의 성인
성녀 가타리나 데이 리치 동정
신분 : 수녀
활동지역 : 리치(Ricci)
활동연도 : 1522-1590년
같은이름 : 카타리나, 까따리나, 캐서린
성녀 리치의 카타리나(Catharina de Ricciis, 또는 가타리나)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의 프라토(Prato)에 있는 도미니코 수도원의 수녀이다. 그녀는 좋은 감각과 정성을 다하여 맡아온 수련장과 장상직을 사임하였는데, 그녀의 놀라운 신앙 체험들은 많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면, 매주일 같은 시간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탈혼하였는데, 이때 그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수난에 흠뻑 취하곤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2년 동안이나 정기적으로 일어났다.
성녀 카타리나의 영향은 수녀원의 벽 안에서만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편지에서 나타난 그대로 교회의 개혁 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성녀 카타리나는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5월 26일)와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 그리고 교황 성 비오 5세(Pius V, 4월 30일)와 함께 현대 교회의 개혁자로서 높은 칭송을 받아왔다.
성녀 카타리나는 1590년 2월 2일 선종하였고, 1732년 교황 클레멘스 12세(Clemens XII)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746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녀의 축일은 지역에 따라 2월 2일 또는 4일에 기념하기도 한다.
성 마르티니아노(Martinian)
신분 : 은수자
활동지역 : 카이사레아(Caesarea)
활동연도 : +400년경
같은이름 : 마르띠니아노, 마르띠니아누스, 마르티니아누스, 마르티니안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카이사레아에서 태어난 성 마르티니아누스(Martinianus, 또는 마르티니아노)는 18세 때에 고향 근방의 '계약의 궤의 장소'라 불리는 산으로 은거하여 은수자로서 25년을 살았다. 그의 전기에는 전설적인 내용이 많은데, 그중의 한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조에(Zoe)라는 한 카이사레아의 여인이 그의 성덕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유혹해보려고 하였다.
그녀는 밤늦게 사막을 방황하는 가련한 여인으로 꾸몄다. 그런 다음 그녀는 그의 움막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뜻을 이루었다. 새벽녘이 되자 그녀는 자신의 넝마 같은 옷을 벗고 화려한 옷으로 갈이 입으면서 성 마르티니아누스에게 자신은 카이사레아의 귀부인이며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으니 같이 가자고 제의하였다. 그는 쾌히 승낙하면서 오늘 축복받으러 올 사람이 있지만 같이 가자며 길을 나선 후 갑자기 자기 움막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그 불속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온몸이 반쯤 그을린 채로 밖으로 나와서 하는 말이 “이처럼 약한 불도 못 견디는 주제에 연옥의 불은 어떻게 견디겠소?” 하고 말하였다. 이에 그 여인도 회개하여 구원의 길로 인도해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하늘을 지붕 삼고 바람을 친구로 삼아 일생을 살았다.
그는 특히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위대한 수도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성 야고보 (James)
신분 : 대주교
활동지역 : 비테르보(Viterbo)
활동연도 : 1255-1308년
같은이름 : 야고부스, 야코보, 야코부스, 제임스
이탈리아 비테르보의 귀족인 카포치(Capocci) 가문에서 태어난 야고보(Jacobus)는 1270년경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수자회에 입회하였다.
파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1293년부터 1300년까지 파리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였다.
당시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Philippe IV)는 교황권과 세속 왕권의 한계 문제로 겨루고 있었는데, 야고보는 신학적인 범주를 넘지 않으면서 교황의 권리를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1302년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는 그를 베네벤토(Benevento)의 주교로 임명했고, 이듬해에는 나폴리(Napoli)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는 재임기간 중 주교좌성당을 재건하는 공사를 진행시켰다. 1308년 나폴리에서 선종한 그는 1914년 6월 4일 교황 비오 10세(Pius X)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성 모돔녹 (Modomnoc)
신분 : 수도원장 주교
활동지역 : 아일랜드(Ireland)
활동연도 : +550년경
같은이름 : 모돔노크
성 모돔녹의 찬가는 이런 구절로 시작된다.
“작은 배를 타고 동으로부터 검푸른 바다를 가로질러, 나의 모돔녹은 아일랜드 사람에게 은혜로운 벌들을 모시었네.…” 그는 아일랜드 왕가의 후손으로 웨일스(Wales) 지방에서 높은 지식과 수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여기서 그는 성 다윗(David, 3월 1일)의 지도를 받으며 벌을 돌보았는데, 후일 귀향할 때 그 벌들을 아일랜드로 가져와 보급시켰다.
일부 성인전 작가들에 의하면 그는 아일랜드 남동부 킬케니(Kilkenny)의 티브래니(Tibraghny)에서 은수자가 되었고 후에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성 아가보 (Agabus)
신분 : 예언자 순교자
활동지역 : 안티오키아(Antiochia)
활동연도 : +1세기
같은이름 : 아가부스, 하가보
예루살렘 출신의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자 예언자였던 성 아가부스(또는 아가보)는 안티오키아에 가서 로마 제국의 기근을 예언하였는데(사도 11,27-28), 이 일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재임 기간인 49년에 실제로 일어났다.
그는 성 바오로(Paulus)의 투옥을 예견했던 아가부스와 동일 인물인 듯하다(사도 21,10 이하).
전승에 의하면 그는 안티오키아에서 순교하였다
성녀 푸스카 (Fusc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연도 : +250년
성녀 푸스카는 15살 된 소녀로 데키우스 황제 때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에서 유모인 성녀 마우라(Maura)와 함께 순교하였다.
교회 미술에서 이들 성녀들은 각각 칼에 찔린 소녀와 유모로서 표현된다.
그들은 라벤나에서 공경을 받고 있다.
복자 안젤로 딴끄레디(ANGELO TANCREDI DA RIETI)
신분 : (OFM 프란치스코 1회)수도자
활동년도 :
지역 :
같은 이름 :
1첼라노 109, 110 에서 프란치스코, 그가 몹시도 그리던 곳(뽀르찌웅꿀라)에서 며칠을 쉬고 나서,그는 죽음의 시간이 임박하였음을 느꼈다. 그때 그는 형제이며 정신적인 아들로 생각하는 두 형제를(완덕의 거울에 따르면 안젤로 딴끄레디와 레오이다)
불러 부탁하기를 죽음이 다가오고 있으니, 아니 차라리 생명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으니 기쁨에 넘친 큰소리로 주님께 찬미의 노래를(이는 태양의 노래를 뜻한다) 부르라고 하였다.
갑자기 그는 온 힘을 다하여 다윗의 시편을 큰소리로 읊었다: "목소리 높이어 주께 부르짖나이다.
소리소리 지르며 주께 비옵나이다.(시편141) ... 이윽고 그가 성서를 가져오라 명하였고, 요한 복음의 다음 구절부터 읽으라고 하였다: 과월절 6일전에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셨다."(요한12,1; 13,1.3.)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과 제대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을 중심으로 오른편에는 루피노, 안젤로 형제의 무덤이, 오른쪽에는 레오와 맛세오 형제의 무덤이 있고, 성인의 무덤 맞은편에는 야고바 형제의 무덤이 있다.
세 동료 전기(Legenda trium sociorum)
"세 동료 전기"는 그 저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프란치스코라는 역사적 인물을 아씨시라는 틀 안에서 제시하고자 목적하고 있는 가장 세심한 전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료로써 1246-47년경의 작품이다.
모든 사본들이 그렉치오의 세 동료들의 편지(1246.8.11)를 서두에 달고 있다. 이 때문에 "세 동료 전기"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오늘날 아무도 이것이 "세 동료들의 전기"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소위 혹은 이른바 세 동료 전기"라 부르는 것이 가장 올바른 호칭일 것이다.
"세 동료 전기"는 "제1첼라노"와 스피라의 율리아노를 사료로 택하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요소들을 첨부하고 있으며 "익명의 뻬루지아 전기"를 그대로 따르면서 새로운 요소를 첨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동료 전기"는 후에 "제2생애"
제1부의 주요 원천이 된다.
아씨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를 강조하고 있음을 볼 때 아마도 저자는 아씨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제2첼라노"이전의 작품으로 토마스의 "제1생애"를 반박하기 위한 목적도 아울러 지니고 있는 듯하다.
"세 동료 전기"에서 나타나는 프란치스코는 지혜로운 상인이요 사업가이며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 정중하고 예의 바른 젊은이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회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나환자와의 만남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데서 프란치스코 자신이 유언에서 언급하는 회개 여정과 가장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성인을 현양할 목적으로 기적 사화를 전혀 전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한마디로 "세 동료 전기"는 아씨시판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청년기의 프란칫코와 회개 및 형제회의 창설 과정 등에 있어서 가장 정확한 사료로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들과 문제점-오상선바오로O.F.M. 프란치스칸 삶과사상 1999 특집호202-203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