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4회 장자와 불교의 융회 2 – 9
[事적으로, 현실적인 현상으로 봐서 말해본다면,
성인의 진심, 참다운 마음은 四威儀(,사위의),]
四威儀라는 것은 行住坐臥(행주좌와)입니다.
行 = 행할 때. 住했을 때. 坐 = 앉았을 때. 臥 = 누웠을 때.
[行住坐臥 = 四威儀 가운데 小分(소분)도,
조금도 間斷(간단)이, 중간에 틈이 없으나,
우리 학자의 경지에 있어서는 靜坐(정좌), 고요하게 앉아 있는
가운데서도 오히려 마음을 쉬지 못하거늘, 하물며 行住 등으로,
움직이고 住하는 등으로 어떻게 능히 道에 들어가겠느냐?]
이치적으로 볼 때는 아무리 움직이더라도 마음이 안 움직이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行住坐臥 전체에서도 마음이 안 일어나는 것은 쉽지
않고, ‘고요하게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坐하지 않은데, 行住.
움직이고 돌아다닐 때는 어떻게 쉽겠느냐?’ 그러기 때문에 坐忘이라고
쓴다는 겁니다.
이치적으로 볼 때는 아무리 움직여도 마음이 안 일어나면 되겠지요.
그런데 일반인들, 우리 중생들 수준에서는 앉아 있어도 마음이 뛰어다
니는데, 어떻게 움직일 때 마저도 마음이 안 일어날 수 있겠느냐?
‘이치적으로는 坐라는 의미는 그것이 맞다. 항상 마음이 안 일어나면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인데, 현상적으로 볼 때는 우리 몸뚱이라고 하는 것,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고요하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제일 좋은 것이 “좌선이더라.” 이것이지요.
“좌선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설명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가에서 좌선을 많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일단 앉아서라도 좀 돼라. 앉아서라도 마음이 안 일어나면, 그 다음은
다니면서도 좀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좌선을 많이 주장하는 것이지요.
선에는 行禪(행선)도 있고, 臥禪(와선)도 있고, 立禪(입선)도 있고, 다
다양하게 모든 것이 깊어지면 선이 됩니다.
하지만, ‘일단 처음에는 좌선을 시작하듯이 여기도 “坐忘”이라는 용어를
그렇게 해서 쓰게 된 것이다.’
[유마경에 “不必坐(불필좌)라고 하는 말씀도 역시
이를 의미한 것이니 좌선 立言(입언)의 뜻이 원대하다.]
유마경에 보면 사리불존자가 좌선에 대해서 얘기를 하지요.
좌선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요. 뭡니까?
“不必坐라. 반드시 앉을 필요가 없다.” 유마거사가 이렇게 얘기하는 겁
니다. ‘굳이, 꼭 앉아야만 좌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이지요?
“일체처 일체시에 좌선은 가능하다.”는 말을 유마거사가 멋지게 하거든요.
그래서 사리불존자가 깜짝 놀랍니다.
유마거사가 병환이 났을 때, 병문안 가라니까 사리불존자가
“아, 그 분 너무 대단해서 제가 감히...” 이런 말을 하게 되는 것이
不必坐 ←이런 데서 나오잖아요.
“不必坐라.” 사실 굳이 앉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坐라는 뜻을 쓴다.” ←이것이 坐忘입니다.
불교공부 하는 분이 장자를 보면, “坐忘이라.” 이러면 어떤 분은,
“노장학이 말하는 坐忘이라고 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좌선의
수준에 못 미치는 거야.” 늘 이렇게 얘기하지만, 저 팜플릿처럼 회통을
해서, 주석을 해서 장자가 말한 좌망과, 우리 불교에서 말한 좌선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 근본이 같은 것이라는 설명을 늘 해주고 계셨던 겁니다.
이어서 장자 內 7편의 마지막이 應帝王(응제왕)편입니다.
첫댓글 _()()()_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나무 대방광 불 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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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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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방광불화엄경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不必坐...
꼭 앉아야만 좌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체처 일체시에 坐禪은 가능하다(유마거사)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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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文光스님 - 韓國學(呑虛思想) - 24-2-9. 莊子와 佛敎의 融會.
고맙습니다. _()()()_
행주좌와 어묵동정
모든 것에 마음이
안 일어나면 도에 들어간다
행선 와선 입선도 있다
모든 것이 깊어지면
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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