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무심재
□ 선(先)안동김씨와 우(後)안동김씨
안동김씨에는 신라김씨의 시조인 태보공(諱 閼智)의 후손으로서, 본관명은 같으나 그 시조를 달리하는 두 종중(宗中)이 있다. 선(先) 안동김씨와 후(後)안동김씨이다.
안동김씨라 하면 일찍이 선 안동김씨만을 일컬어 왔다. 그런데 ‘후(後) 안동김씨(신안동김씨)’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선 안동김씨(구안동김씨)’란 말을 쓴다.
경제기획원에서 조사한 바 안동김씨(安東金氏)-47,702 (신)명으로 성씨별 인구수에서는 141위로 조사되었다.
□ 안동김씨 시조
후 안동김씨는 고려 태사공(泰師公-金宣平)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태사공은 신라 말에 고창(古昌-안동의 옛이름)의 성주였는데 신라가 후삼국으로 나뉘어 각축을 벌이고 있을 때 후백제의 견훤군을 격파하고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여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벼슬이 태광태사(泰匡泰師)에 이르렀던 사람이다. 이리하여 그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으며, 조선 중기에 도정(都正)을 지낸 김극효(金克孝)를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 밖에 지절파, 원수파, 열파 등 3파가 있다.
안동김씨는 신라 왕손이며 고려왕의 외손(外孫)으로서 고려 500년간 대대로 공경장상(公卿將相)이 끊이지 않았다. 고려가 망하자 모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켜 8도에 흩어져 은거하였고, 그 후 형성된 세거지(世居地)를 중심으로 후손들이 번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신안동김씨] 흔히 ‘신안동’을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내었다는 비유로 삼는데, ‘신안동’은 특히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으로 더 알려졌다. ‘신안동’의 시조 선평(宣平)은 신라 말 고창군(古昌郡:현 안동)의 성주로, 왕건이 고려를 개창할 무렵 고려에 귀부, 개국공신, 태광태사(太匡太師)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선평의 후손들은 극효(克孝)의 아들대에서 상용(尙容), 상헌(尙憲) 등이 정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좌의정 상헌의 후손이 세도가문으로서의 주류를 이루어 이들을 ‘장김(壯洞金氏)’이라고도 한다. 상헌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 형제 영의정, 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 명의 판서가 나왔고, 우의정 장헌의 형 상용의 후손에서도 정승, 판서 등이 많이 나왔다. 형제 영의정 수흥(壽興), 수항(壽恒)과 수항의 아들 영의정 창집의 후손에서 왕비 3명을 내었는데, 이들이 ‘신안동’을 세도가의 반석 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다. 조순(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달순(達淳), 문순(文淳), 희순(羲淳), 유근( 根), 교근(敎根) 등 일족이 정승, 판서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 후 이들 일문에서는 영의정 좌근(左根), 흥근(興根), 병학(炳學), 병국(炳國), 병시(炳始), 호위대장(扈衛大將) 조근(祖根:헌종의 장인), 판서 수근(洙根), 보근(輔根), 병기(炳冀), 병주(炳 ), 병덕(炳德), 병지(炳地), 병교(炳喬)등을 배출하였다. 이들 권문(權門)과는 대조적으로 ‘김삿갓’으로 유명한 병연(炳淵)도 ‘신안동’이며, 근대 인물로는 한말의 정치가 옥균(玉均), 독립운동가, 장군 좌진(佐鎭) 등이 있다.
太師公 김선평의 태장재사(安東金氏台庄齋舍) - 시도민속자료 제26호로 1981.4.25 지정
고창(지금의 안동의 옛지명) 성주였던 太師公 김선평은 안동권씨 시조인 권행(權幸), 안동장씨 시조 장길(張吉)과 더불어 신라를 침공 멸망케 한 후백제의 견훤이 병산(甁山)전투에서 왕건의 군대와 격전을 벌이자 왕건을 도와 견훤 군을 무찔러 왕건의 목숨을 구해준 공을 세웠다. 이공으로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삼한벽상 삼중대광 태사 아부공신(三韓壁上 三重大匡 太師 亞父功臣)에 봉해지고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으며, 안동부는 삼태사(김선평, 권행, 장길)의 식읍(食邑)이 되었다.
이 중 김선평의 묘소는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에 있다. 묘소 입구인 태장리 249번지에는 안동 김씨 시조 태사 김선평 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安東金氏台庄齋舍가 있다. 조선 영조 26년(1750)에 후손들이 지었으나 식수난과 질병이 겹쳐 원래 있던 승려집을 철거하고 정조 17년(1793)에 다시 지었다. 1913년에 10칸을 다시 짓고 1960년에 수리하였다.
태장재사라 하는 것은 재사 전체를 일컫는 말이며 ㅁ자형의 재사와 一자형의 이상루, ㄷ자형의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재사는 내정보다 한단 높게 구성되어 있는 건물이다. 처마 끝에는 빛이나 비를 막기 위해 설치한 차양이 있으며, 간결하고 검소한 집이다. 재사에는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과 전사청, 참제원실이 있다. 이상루는 집의 전면에 있는 건물로 제사 지낸 후에 음식을 먹거나 문중회의를 여는 장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이 지역 재사 건물 가운데서도 규모가 비교적 크고 각 부분이 용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건물이다.
安東金氏台庄齋舍 입구
담장 너머로 본 재사
민박이라는 글이 이채롭다.
주차장 앞 연지
태장재사 안내판
太師公 김선평의 묘소 전경
비석(오른 쪽에는 건립연대가 나온다)
조선시대에 들어 선평의 후손들은 극효(克孝)의 아들대에서 상용(尙容)·상헌(尙憲) 등이 정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좌의정 상헌의 후손이 세도가문 으로서의 주류를 이루어 이들을 ‘장김(壯洞金氏)’이라고도 한다. 상헌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 형제 영의정· 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 명의 판서가 나왔고, 우의정 장헌의 형 상용의 후손에서도 정승·판서 등이 많이 나왔다. 형제 영의정 수흥(壽興)·수항(壽恒)과 수항의 아들 영의정 창집의 후손에서 왕비 3명을 내었는데, 이들이 ‘신안동’을 세도가의 반석 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다.
조순(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달순(達淳)·문순(文淳)·희순(羲淳)·유근(根)·교근(敎根) 등 일족이 정승·판서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 후 이들 일문에서는 영의정 좌근(左根)·
흥근(興根)·병학(炳學)·병국(炳國)·병시(炳始), 호위대장(扈衛大將) 조근(祖根:헌종의 장인), 판서 수근(洙根)·보근(輔根)·병기(炳冀)·병주(炳?·병덕(炳德)·병지(炳地)·병교(炳喬) 등을 배출하였다.
이들 권문(權門)과는 대조적으로 ‘김삿갓’으로 유명한 병연(炳淵)도 ‘신안동’이며, 근대 인물로는 한말의 정치가 옥균(玉均), 독립운동가·장군 좌진(佐鎭) 등이 있다.
신, 안동김씨의 인물
조선 중기에 와서 성씨 운(姓氏 運)이 크게 일었는데, 인조 때 도정공의 아들로서 우의정을 지내고 대문장가인 선원 김상용과 좌의정을 지낸 청음 김상헌 형제가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신,안동김씨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후 300년 동안에 15명의 정승과 6명의 대제학, 1명의 호당, 1명의 청백리, 9명의 장신(將臣), 그리고 3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순조 이후 철종까지 약 60년 동안은 이 장동김씨 일문이 정권을 좌우하는 세도정치 가문으로서 대명문(大名門)을 이루었다.
★군) 김정호(金正浩) 고종4(정묘, 1867) 식년시(式年試) 甲科1
★서) 김홍도(金弘度) 중원(重遠) 남봉(南峯) 명종3(무신, 1548) 별시(別試) 甲科1
□ 세도가 안동김씨의 처음 거주지는 청운동
노론 벽파가 時派에 대해 정치적 보복을 하는 와중에 노론 가문의 김조순(金祖淳)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순조의 妃(비)로 들이는 데 성공, 이후 63년간의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개막시킨다. 더욱이 1804년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김조순은 일족 지배의 정치 구도를 만들었다. 그의 권력은 그의 가문에서 계속 왕비를 들임으로써 그의 아들과 손자대로 이어졌다.
김조순의 집은 紫霞洞(자하동:지금의 청운동)에 있었다. 자하동은 경복궁의 서북쪽 창의문 아래 북악과 인왕산 사이다. 자하동을 줄여서 ‘자동’이라고도 했는데, 급하게 부르면 壯洞(장동)으로 들렸다.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서 안동김씨를 장동김씨 또는 壯金(장김)라고 불렀다. 壯金이란 호칭은 김조순이 집을 校洞(교동)으로 옮긴 후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교동에는 김조순 사후에도 그의 아들 金左根(김좌근)과 손자 金炳冀(김병기)가 살았다.
순조․헌종․철종은 모두 壯金의 세도정치 에 휘둘리는 허수아비 임금이었다. 더욱이 철종은 부모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농사를 짓다가 壯金에 의해 갑자기 서울로 불려 올라와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했다. 壯金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1963년 음력 12월 말 ‘강화도령’ 철종이 후사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새로 왕위에 오른 이가 흥선군 李昰應(이하응)의 둘째 아들 命福(명복), 즉 高宗(고종)이다. 13세의 명복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은 순전히 아버지 흥선군이 翼宗(익종: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1세에 요절하여 추존됨)의 비인 조(趙)대비과 밀의하여 상호 동맹관계를 굳혀 놓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관례상 임금이 후사 없이 사망할 경우에 후계왕 지명권은 왕실의 최고 어른에게 있었다. 이 시점에 조대비는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다. 조대비는 장김(壯金.안동김씨)에 한이 많이 맺혀 있었다. 야망을 감추고 보신을 위해 파락호 행세를 함으로써 壯金에게 ‘상갓집 개’로 취급당했던 흥선군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군을 대원군(임금의 아버지)으로 높였다. 고종이 태어난 潛邸(잠저)는 옛 書雲觀(서운관:觀象監)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雲峴宮(운현궁)’이라 불렸다. 지금의 종로구 운니동 114-10번지, 덕성여자대학 옆이다.
흥선대원군의 저택으로 사용되던 운현궁은 크게 증축되었다. 한때 대원군은 운현궁과 창덕궁 사이에 특별한 통용문을 만들어서 그만이 이 곳을 통해 입궐했다.
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려 들자 세도가 壯金의 일원인 김흥근(金興根)은 조정에서 드러내 놓고 반대했다.
“옛날부터 임금의 아버지는 정치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 부귀나 누리게 해야 합니다”
대원군은 이런 김흥근을 장김 가운데서도 가장 미워했다. 김흥근의 별장이 북문 밖 삼계동(지금의 종로구 付岩洞 자하문 터널 윗 동네)에 있었는데, 서울에서 경치가 제일 좋았다. 대원군은 그 별장을 사려고 했지만, 김흥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팔 수 없으면 하루만이라도 거기서 놀 수 있도록 빌려 주시오”
원래 정자는 누가 빌어서 놀기를 청하면 빌려 주는 것이 서울의 풍습이었다. 이쯤 되자 김흥근은 마지못해 빌려 주었다.
김흥근에게 정자를 빈 대원군은 그 정자 구경을 하자면서 고종을 모시고 갔다. 일이 이렇게 되자 김흥근은 그 정자를 다시는 쓸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임금이 노닐던 곳은 신하가 놀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아 마침내 대원군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대원군의 아호를 따서 명명한 별장 石坡亭(석파정)의 사랑 채는 원래 자리에서 가까운 세검정의 궁중 요리점 石坡廊(석파랑:종로구 홍지동 125번 지)에 이축되어 있다.
대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壯金의 세력을 삭감하고 부정부패에 철추를 내렸다. 또한 안으로는 유교적 민본정치의 부흥과 부국강병을 추구하고, 밖으로는 열강의 도전과 침략 을 배격하는 鎖國攘夷(쇄국양이) 정책을 강행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정책이 결실을 맺기 전에 서구 세력의 파도가 먼저 밀어닥쳤다. 러시아는 수차례에 걸쳐 두만강을 넘어와 통상을 강요했다. 대원군은 천주교도를 통해 프랑스․영국과 3국동맹을 체결,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비밀교섭을 추진했다. 당시 조선에는 베르뇌 등 프랑스 신부 12 명이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고, 신도수가 2 만여 명에 달했다. ///
안동김씨 씨족족보
안동김씨는 본관은 같으나 시조를 달리하는 세칭 "구안동" "신안동"의 두 가문이 있다.
구안동김씨의 시조는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손자인 김숙승으로 고려말엽부터 조선중기까지 상당한 세력을 떨쳤던 명문이다.
신안동김씨의 시조는 고려개국공신 태사 김선평으로 조선말기 순조~철종대에 대명문을 이루었으나 세도정치로 역사에 명암을 드리웠던 집안이다.
※ 선 안동김씨(先 安東金氏)와 후 안동김씨(後 安東金氏)와의 혼인 가능성: 시조를 달리하기 때문에 서로 일가(一家)는 아니며, 자고로 서로 통혼을 하였고 지금도 합법적으로 혼인할 수 있다.
★★★ 구 안동김씨(安東金氏) | ||||||||||||||||||||||||||||||||||||||||||||||||||||||||||||||||||||||
[유래] 시조 김숙승(金叔承)은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둘째 아들로 공부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중시조(1세) 김방경(金方慶, 충렬공)은 경순왕의 9세손으로 고려 원종 때의 명장으로 삼별초와 왜구를 섬멸하여 정란정국공신으로 벼슬이 시중,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판전리사사, 도원수에 이르고 상락군에 봉해졌다. - 김방경의 향사는 음력 10월 9일에 한다.
[계 파] 김방경의 6세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 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 김선 : 김방경의 아들.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를 지냈다. [ 족보 발행 ] - 경진보 : 1580년(조선 선조 13년)
[항렬표]
|
★★★신 안동김씨(安東金氏)
[유래] | ||||||||||||||||||||||||||||||||||||||||||||||||||||||||
시조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 경애왕때 고창(안동)의 성주로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자 930년(경순왕 4년)에 권행(安東權氏의 시조), 장정필(安東張氏의 시조)과 함께 향병을 모으고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무렵 고려에 귀순하여 개국공신이되고 벼슬이 태광태사(太匡太師)가 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으며, 조선 중기에 도정을 지낸 김극효(金克孝)를 중시조(1세)로 하고 있다.
[계 파] 지철파, 원수파, 열파 등 3파가 있다.
[ 대표적 인물 ] - '신안동'을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내었다는
[기타] [인구] 21,554명이 있다.(1985년)
[집성촌] 경기도 고양군 중면 일원 충남 논산군 일원
[명인] 조선 중기(광해군) 이후 약 300년 동안에 15명의 정승과 6명의 대제학, 1명의 호당, 1명의 청백리, 9명의 장신(將臣), 그리고 3명의 왕비를 배출하였다. 가문으로서 대명문(大名門)을 이루었다.
[항렬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