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종유한 제현은 모두 내가 일찍이 존모하고 친애한 사람들이다. 나는 스승의 가르침에 훈도되고, 붕우들과의 강습에 도움을 받아
담장을 마주하고 선 것을 거의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문이 불행하여 남명(南冥)ㆍ구암(龜巖) 두 선생 및 약포(藥圃) 정 선생(鄭先生)이 모두 세상을 떠나시고, 수우당(守愚堂) 최공(崔公), 한강(寒岡) 정공(鄭公), 망우당(忘憂堂) 곽공(郭公)이 서로 이어 세상을 떠나시니,
신가(晨歌)의 애통함과
산양(山陽)의 감회가 어찌 그침이 있겠는가. 이에 제현들의 출처의 전말을 간략히 서술하여 한 편으로 집성해서 평소 앙모하던 정성과 강마하던 즐거움을 부친다. 이를 보는 자들은
자하(子夏)가 삭거(索居)한 탄식을 슬퍼함이 있을 것이다.
남명 조 선생(南冥曺先生)
선생의 이름은 식(植)이고, 자는 건중(楗仲)이다. 홍치(弘治) 신유년(1501, 연산군7)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은 영특하고 빼어나며, 용모는 준엄하고 정숙하였다. 당초 과거 공부를 하였는데,
허노재(許魯齋)의 글을 읽고서 척연히 자신을 경계하여 의지를 가다듬고 도를 구하였다. 쇠방울을 차고서 정신을 불러 깨웠고, 〈신명사도(神明舍圖)〉를 그려서 마음을 보존하였다. 책상을 대하여 책을 펼치면 마음과 눈을 집중하니, 방안이 고요하여 아무도 없는 듯하였다.
시사(時事)가 혼란한 것을 보고서 세상을 피해 은둔할 것을 결심하여 두류산에 은거하였고, 여러 번 징소(徵召)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께 상소한 글에는 말씀을 다하여 꺼리는 것이 없었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사숙(私淑)하는 학문에서 자득하고, 후진을 이끌어 진취시킨 공이 많아 당시의 제현들이 모두 스승으로 높였다. 임신년(1572, 선조5)에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72세였다. 호는 남명(南冥)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구암 이 선생(龜巖李先生)
선생의 이름은 정(楨)이고, 자는 강이(剛而)이다. 정덕(正德) 7년 임신년(1512, 중종7)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글을 지었으며, 12세 때 경상도
하과(夏課)에서 장원을 하였고, 17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문망(文望)이 매우 컸다. 당시 규암(圭庵)
송 선생(宋先生)이 사천(泗川)으로 귀양 오자, 선생이 곧바로 나아가 스승으로 섬기고 위기지학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병신년(1536, 중종31) 봄 별시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뒤에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있을 적에 퇴계 선생에게 나아가 배알하고 의리를 강론하여 밝혔다.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지극한 공경으로 제사를 받들었다. 또 중종ㆍ인종ㆍ명종 세 임금의 상복을 입었는데, 3년 동안
방상(方喪)을 하였다. 관직은 부제학에 이르렀다. 신미년(1571, 선조4)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0세였다. 호는 구암(龜巖)이다.
약포 정 선생(藥圃鄭先生)
선생의 이름은 탁(琢), 자는 자정(子精)이며, 호는 약포(藥圃)이다. 가정(嘉靖) 병술년(1526, 중종21)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맑고 빼어났으며, 용모는 단아하고 정중하였다. 퇴계ㆍ남명 두 선생을 사사했고, 실천하기를 독실히 하였다. 서적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천문ㆍ지리ㆍ병가류에 이르기까지 또한 궁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정언이 되었을 때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전횡하여 국가를 그르친 죄를 탄핵하였는데, 사람들이 ‘옛날 강직한 신하의 풍모가 있다.’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이 서쪽으로 행차해야 한다는 의론을 가장 먼저 내었으며, 북쪽으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였으니 중흥의 공은 실로 공에게서 기초가 놓인 것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에서 물러나 살다가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0세였다. 가정(嘉靖) 경신년(1560, 명종15) 사이에 선생이 진주 교수(晉州敎授)로 부임했는데, 내가 찾아가서 《상서》를 배웠다. 그 뒤 과거를 보러 한양에 가서도 여러 번 문하에 나아가 배알하였다.
조계 신공(槽溪申公)
공의 이름은 점(霑)이고, 자는 군흡(君洽)이다. 문충공(文忠公) 숙주(叔舟)의 증손이다. 사람됨이 평안하고 고요하며 스스로 지키는 것이 있었다. 일찍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별도로 서당을 지어 후진들을 가르쳤다.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조리면서 스스로 즐겼다.
수우당(守愚堂)과 벗이 되어 매번 좋은 계절을 만나면 술을 가지고
봉학대(鳳鶴臺)ㆍ
임연대(臨淵臺)에서 놀았다. 또
강심(姜深)ㆍ
정몽규(鄭夢虯)와 함께 진주의 부역을 의논하고 정하여 시행에 편의하게 하니, 사람들이 그 균등함에 복종하여 말하기를 “진양삼로(晉陽三老)가 지금까지 부역을 편의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내가 어려서부터 공에게 배웠는데, 매번 이치를 밝히는 것으로써 권학하였다. 자호는 조계(槽溪)이다.
소고 박공(嘯皐朴公)
공의 이름은 승임(承任)이고, 영천(榮川) 출신이다.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21) 진주 목사가 되었다. 정사는 청렴하고 송사는 간결하며, 성품이 어질고 밝아서 백성들이 사랑하고 아전들이 두려워하였다. 진주 목사로 있을 때 학문을 일으키고 문(文)을 숭상하는 것으로써 임무를 삼아 학교를 설치하는 규정에 의하여 진주의 사면(四面)에 각각 서재를 개설하였는데 강당, 서루(書樓), 동재(東齋), 서재(西齋), 창고 등을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또 학전(學田)과 지키는 사람을 두어 사인(士人)들의 학문 닦는 곳으로 삼고, 생원
정두(鄭斗)ㆍ
하위보(河魏寶), 진사
유백온(兪伯溫)으로 훈장을 삼아서 각 면의 서재를 나누어 맡게 하였는데, 모두 진주에서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겨울과 봄에는 글을 읽고, 가을과 여름에는 과업을 익히게 하는 것으로 영구히 준수하여 행할 규칙으로 삼으니, 문학이 크게 성대해졌다. 자호는 소고(嘯皐)이다. 내가 또한 여러 번 나아가 의심난 것을 물어 깨달은 것이 많았다. 또 공의 아들은 이름이
록(漉)이고, 자가 자징(子澄)인데, 함께 학문을 강마하였으며 도의로 사귐이 매우 좋았다.
수우당 최공(守愚堂崔公)
공의 이름은 영경(永慶)이고, 자는 효원(孝元)이다. 본래 한양 출신인데, 남명 선생을 사사하여 진주의 도동촌(道洞村)에 와서 살았다. 아우
최여경(崔餘慶)과 함께 한집에 거처하면서 우애가 지극히 두터웠다.
명종조 초기에 참봉, 사축, 지평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악한 이를 미워하기를 원수 같이 하여 마땅한 사람이 아니면 만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다. 기축역옥 때 간사한 무리들에 의해 무고를 당해 의금부 옥에서 병들어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원통해 하였다.
신축년(1601, 선조34)과 임인년(1602, 선조35) 사이에 온 도내의 유생이 일제히 상소하여 그 원통함을 풀었다. 덕천서원(德川書院)에 배향되었다.
한강 정공(寒岡鄭公)
공의 이름은 구(逑), 자는 도가(道可)이며, 호는 한강(寒岡)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9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상례를 치르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일찍이 선성(先聖)의 화상을 그려 벽에 걸어놓고 날마다 반드시 예배를 드렸다. 처음 덕계(德溪)에게 배웠고, 뒤에 퇴계 이 선생을 알현하여 《심경》을 질의하였다. 또 남명 조 선생을 찾아뵙고 의리를 강마하였다.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무신년(1608, 선조41)에 상소하여 임해군(臨海君)에게 은혜를 보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진달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과 정사년(1617, 광해군9)에 이르러 연이어 봉사(封事)를 올렸으나, 진달되지 않자 항상 이를 한스러워하였다. 거처하던 곳의 시냇가에
백매원(百梅園)을 짓고 학도들을 모아 학업을 강론하였다. 행실이 진실하고 예절과 학문이 모두 돈독하였다. 만년에 더욱 학문을 강론하고 이치를 밝히는 것으로써 임무를 삼았다. 공이 창녕 군수를 지낼 적에 내가 이때 이 고을에 이르러 선영을 참배하였는데, 공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여관을 방문하였다. 내가 드디어 나아가 사례하고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였다. 뒤에 함안 군수를 지낼 적에도 찾아가서 유숙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다. 경신년(1620, 광해군12)에 세상을 떠났다. 천곡서원(川谷書院)에 종사되었다.
망우당 곽공(忘憂堂郭公)
공의 이름은 재우(再祐), 자는 계유(季綏)이며,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감사(監司)
곽월(郭越)의 아들이다. 일찍이 남명 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도량이 크고 깊었다. 평소에는 신실하여 자기 주장이 없었으나, 큰일을 만나고 이해(利害)에 임함에 이르러서는 확고하게 그 마음을 옮길 수 없었다. 문장과 무예 모두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강우(江右) 지역을 차단하였는데 싸울 때마다 전공이 있었다. 왜적으로 하여금 감히 영남의 우도와 호남에서 기세를 펴지 못하게 한 것은 모두 공의 힘이었다. 연이어 소명을 받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관찰사, 판결사에 이르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비슬산(琵瑟山)에 들어가 솔잎을 먹고 벽곡(辟穀)을 하였다. 만년에는 낙동강 가에
정자를 짓고 소요하며 살았다.
세상을 떠나는 날 우레와 비가 갑자기 일어나고 붉은 기운이 하늘로 솟구쳤다. 향년 66세였다.
이도구(李陶丘)
공의 이름은 제신(濟臣), 자는 언우(彦遇)이며,
의춘현(宜春縣)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기품이 범상하지 않았고,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았다. 10세 때 고을 사람
안주(安宙)에게 수업했는데, 안주가 그를 ‘사고(史庫)’라 일컬었다. 18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상례와 제사를 한결같이 《주자가례》에 의거하였다. 21세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며
배신(裵紳)ㆍ
김범(金範)ㆍ김희년(金禧年)ㆍ
여응구(呂應龜)와 벗이 되었고, 명륜당에 글을 올려 나이 순서대로 자리에 앉을 것을 청하였는데, 일이 비록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명성은 더욱 자자해졌다.
인종이 승하하자 심상(心喪) 삼년복을 입었다. 윤원형(尹元衡)ㆍ이기(李芑) 등은 공이 조정을 헐뜯는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사지(死地)에 몰아넣고자 공의 고향 사람 정사룡(鄭士龍)에게 묻기를 “이 아무개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니, 정사룡이 대답하기를 “이 아무개는 빈궁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다. 얼마 전에 청하 훈도(淸河訓導)가 되었지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떠났다.”라고 하자, 이기가 “이 사람을 책망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서 마침내 해칠 뜻을 그만두었다. 이로부터 세상일에 마음을 끊고 물외에서 마음껏 노닐었다. 수석이 맑고 그윽한 곳을 만나면 문득 종일 배회하였는데, 손수 표금(瓢琴)을 타며 노래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만년에 남명 선생을 따라 덕천동(德川洞)에 들어가 살았다. 선생이 그를 칭찬하기를 “언우(彦遇)는 나의 오래된 벗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활쏘기ㆍ바둑 도구를 가지고 다녔는데, 선생이 꾸짖자 곧바로 한 연구(聯句)를 읊어 사죄하기를 “바둑을 두면 입은 남을 논하는 말을 끊게 되고, 활을 쏘면 마음은 나를 돌아보는 생각을 보존하네.〔看棋口絶論人語 射革心存反己思〕”라고 하니, 선생이 매우 칭찬하였다.
평소 지은 시구에 절창이 많으니, 예컨대
〈금성산음(金城山吟)〉에 “바위 아래 맑은 물은 새로 내린 빗물이고, 돌 틈의 야윈 대나무는 옛 승려가 심은 것이네.〔巖下淸泉新雨水 石間枱竹古僧栽〕”라고 한 것과
〈제천정음(濟川亭吟)〉에 “동서의 광활한 들녘에는 벼가 향기롭게 익어가고, 상하의 깊은 강물에는 물고기가 늙고 살졌네.〔東西野闊稻香熟 上下江深魚老肥〕”라고 한 것 등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어로비 선생(魚老肥先生)’이라 하였다. 나이 70여 세에 질병으로 도구(陶丘)에서 생을 마쳤다.
강임계정(姜臨溪亭)
공의 이름은 심(深)이고, 자는 태함(太涵)이다. 도량이 크고 웅장하여 온 고을에서 명망이 높았다. 재능이 매우 뛰어났는데,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냇가에
초정(草亭)을 지어 노년을 마칠 계획을 삼고 아래와 같은 절구 한 수를 지었다.
감암산 아래에 있는 설매촌에 / 紺巖山下雪梅村
시냇가 띳집 대나무로 문을 만들었네 / 茅屋臨溪竹作門
병이 많아 근래에는 인적마저 끊어지니 / 多病年來人跡絶
아침부터 홀로 앉은 것이 어느덧 황혼일세 / 終朝獨坐到黃昏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 김행(金行)은 자가 주도(周道)인데, 공의 집을 방문하고서 이 시에 차운하였다.
산이 감싸고 골짝이 품어 절로 마을 이루니 / 山圍谷抱自成村
이곳은 인간세상 화복의 문이 아니로세 / 不是人間禍福門
대숲 마주해 앉으니 맑은 뜻이 넉넉하여 / 坐對竹林淸意足
한바탕 봄철의 단잠처럼 곤히 잠들고 싶네 / 一塲春睡任昏昏
아들 덕룡(德龍)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된 것 때문에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일찍이 공에게 학업을 익혔다.
하각재(河覺齋)
공의 이름은 항(沆), 자는 호원(浩源)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굳은 지조는 맑고 순수하며 영특한 재주는 빼어나고 특출하였다. 약관에 남명 선생에게 알현하였는데, 선생이 그의 재주를 사랑하여 마침내 《소학》ㆍ《근사록》 등의 책을 권하였다. 이로부터 오로지 위기지학을 숭상하여 의리에 대해 날마다 강구하는 것을 일삼았다. 실천하기를 독실히 하고, 언행에 법도가 있었다. 진주 고을의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나아갈 방향을 조금 알게 된 것은 모두 공이 선도하였기 때문이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 삼년복을 입었다. 두 번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중년에
대각촌(大覺村)으로 옮겨가 살았다. 자호는 각재(覺齋)이다.
박황암(朴篁巖)
공의 이름은 제인(齊仁)이고, 자는 중사(仲思)이다. 가정(嘉靖) 병신년(1536, 중종31)에 태어났으며, 함안(咸安) 출신이다. 도량이 깊고 넉넉하며 학식은 연원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대인의 기풍이 있어 안자(顔子)의 ‘사물(四勿)’과 주자의 〈십훈(十訓)〉을 써서 벽에 걸어놓고 보며 성찰하였다. 남명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각재(覺齋) 하항(河沆) 등 여러 공들과 교유하였다. 정한강(鄭寒岡) 도가(道可)가 함안 군수로 있을 적에 공 및 황곡(篁谷) 이칭(李偁), 모촌(茅村) 이정(李瀞)과 함께 날마다 노니니, 이들을 ‘
파산삼현(巴山三賢)’이라 일컬었다. 사는 곳의 바위 가에 대를 심고 자호를 황암(篁巖)이라 하였다. 천거로 여러 번 제수되어 벼슬이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이르렀다. 왕자사부로 부름에 나아갔는데 계도하는 방법이 한결같이 성현의 법도를 따랐다. 뒤에 또 군위 현감(軍威縣監)에 제수되었는데 정사는 맑고 송사는 간결하였다.
소리(素履)의 지조는 늙음에 이르러도 쇠하지 않았다. 83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송암(李松嚴)
공의 이름은 로(魯)이고, 자는 여유(汝唯)이다. 갑진년(1544, 중종39)에 태어났으며, 의령 출신이다. 사인(舍人)
정황(丁熿)이 거제에 유배되었을 때 나아가 배웠으며, 또 수우당(守愚堂)의 문하에서 배웠다. 기골이 웅장하고 호걸스러웠으며, 언론은 격렬하고 엄정하여 사람들이 기개와 절의로써 칭송하였다.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젊어서부터 성대하였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뒤늦게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언(正言)에 제수되었으나 곧 그만두었다. 일찍이 비안 현감(比安懸監)을 지낼 때 치적이 크게 드러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양 군수 조종도(趙宗道)와 함께 왜적을 토벌하기로 맹세하였다. 이때 학봉(鶴峯) 김 선생이 초유사로 함양에 도착해 있었는데, 두 공을 약속 없이 만나게 되니 학봉이 매우 기뻐하면서 그들을 막하에 머물게 하였다. 진양성에 함께 와서 성의 방어가 완비되어 있지 않고 군졸과 백성이 흩어진 것을 보고서, 앞으로 닥칠 일의 형세는 다시 손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여 함께 강물에 빠져 죽고자 하였다. 학봉은 죽는 것이 이르다고 생각하여 웃으면서 그만두게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촉석루 삼장사(三壯士)’라고 하였는데,
그때 지은 시가 세상에 전한다. 뒤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참모관이 되어 계책을 세운 것이 많았다. 학질로 한 해 남짓 앓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자호는 송암(松巖)이다.
이운당(李雲塘)
공의 이름은 염(琰), 자는 옥오(玉吾), 자호는 운당(雲塘)이며, 또 다른 호는 안계(安溪)이다. 도량이 크고 웅장하며,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 어려서는 《소학》과 사서(四書)에 힘을 쏟았고,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더욱 공들여 공부하였는데, ‘불기(不欺)’ㆍ‘근독(謹獨)’을 일용의 공부로 삼았다. 어두운 방에 있더라도 의관을 반드시 바르게 하여 엄숙히 사우를 마주할 때처럼 하였다. 상중에는 모든 것을 주문공(朱文公)의 《주자가례》에 의하여 행하였고, 여러 아우들을 대할 때는 그 우애를 다하였다. 두 아우 선(璿)과 탁(琢)이 모두 등창을 앓자 항상 빨아주었고, 고통을 자기가 당하는 듯이 하였다. 최수우당(崔守愚堂)과 도의로 사귀었는데, 의리를 분석함에 수우당이 그 조예가 깊음을 허여하였다. 공천으로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1세에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수우당이 비통해 하고 마음아파하며 말하기를 “내가 교유한 자들이 많지만, 실제에 힘쓰고 행실을 돈독히 하는 것이 이와 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병이 심해졌을 때 수우당, 하각재(河覺齋), 류조계(柳潮溪), 하영무성(河寧無成)이 항상 모여 문병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다고 애통해 말게나. 몇 년 뒤에 마땅히 내가 먼저 죽은 것을 부러워할 것이네.”라고 하였다. 기축사화가 크게 일어나자 수우당과 조계가 모두 화를 입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류조계(柳潮溪)
공의 이름은 종지(宗智)이고, 자는 명중(明仲)이다. 천성이 총명하고 용모가 단아하였다. 언론은 상세하고 분명하며, 또 재능이 있었다. 하각재(河覺齋)와 함께 남명 선생에게 배알하고 《소학》ㆍ《 근사록》 등의 책을 배워 학문하는 방법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수우당을 종유하며 도의로써 사귀었는데, 항상 의리와 공사(公私)의 분변에 대해 강론하니 수우당이 깊이 허여하였다. 기축옥사 때 권간들의 무고에 얽혀 원통하게 의금부의 옥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당시 나이가 44세였다. 자호는 조계(潮溪)이다.
이죽각(李竹閣)
공의 이름은 광우(光友)이고, 자는 화보(和甫)이다. 집안이 가난했으나 지조를 지켜 물욕에 대하여 담담하게 얽매이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남명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며 《중용장구》를 강론함에 그 상세하고 명확함을 지극히 하니, 선생이 가상히 여겨 말씀하기를 “그대의 노둔한 자질로 밝게 풀이하는 것이 이러한 경지에 이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최수우(崔守愚)ㆍ김동강(金東岡)ㆍ정한강(鄭寒岡)ㆍ하각재(河覺齋) 등 제현과 교유하였다. 평소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을 갖추어 입고서 가묘에 참배하였으며, 부모님께 아침에 문안 인사를 올리고 저녁에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는 것을 일찍이 그만둔 적이 없었다. 효성과 우애로써 세상에 칭송되었다. 90세가 넘어 세상을 떠났다. 자호는 죽각(竹閣)이다.
김 장군(金將軍)
공의 이름은 덕령(德齡)이다.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에서 태어났다. 용맹과 기력이 매우 뛰어났고, 의지와 기개가 강개하였다. 임진년에 왜구가 대거 쳐들어와
삼경(三京)을 연이어 함락시키자,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하고 여러 고을에는 남자가 없다는 탄식이 있었다. 이때 김 장군이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을 지키고 있었는데, 전라도 감사와 담양 군수의 권유를 받아들여 기복(起復)하였다. 동궁이 가상히 여겨 ‘익호장군(翼虎將軍)’의 칭호를 내렸다. 장계가 행재소에 상달되자 행재소에서 또 ‘충용장군(忠勇將軍)’이라는 칭호를 더하였다. 이로부터 군대의 명성이 크게 진작되고 의병들이 다투어 모여들었다. 이에 격서를 여러 군에 전하니, 오랑캐 두목이 보고서 크게 두려워하였다.
갑오년(1594, 선조27) 봄 진주의 동쪽 대여촌(代如村)에 와서 진을 쳤다. 매번 한가한 날에 마평(馬坪)에서 군사 훈련을 하였는데, 말 위에서 호랑이 가면을 쓰고 24근의 철퇴를 차고 50근의 칼자루를 휘두르며 큰 소리로 꾸짖으니, 사람들이 모두 물러났다. 군법을 엄격하고 명확하게 하여 명령을 어긴 자가 있으면 조금도 너그러이 용서하지 않았다.
병신년(1596, 선조29)에
홍산(鴻山) 도적
이몽학(李夢鶴)의 역옥(逆獄)이 크게 일어났다. 호남 사람으로 역모에 참여하여
정국(庭鞠)을 받던 자가 있었는데, 장군이 전날 목을 벤 군졸의 동생이었다. 그가 역모에 동참하였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장군을 잡아 와 임금이 친히 국문하였다. 장군이 말하기를 “신은 스스로 지은 죄가 조금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은명이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엄한 신문을 더하시니, 신은 죽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죽은 후 전하께서는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하고서 드디어 눈을 감고 말없이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눈물을 뿌리지 않은 자가 없었고, 왜적 두목들은 술을 권하며 서로 축하하였다. 뒤에 임금이 그 원통함을 통촉하여 증직하고 사제(賜祭)하였다.
이모촌(李茅村)
공의 이름은 정(瀞)이고, 자는 여함(汝涵)이다. 가정(嘉靖) 신축년(1541, 중종36)에 태어났다. 집에 있을 때는 효도하고 우애하며, 고을에서는 돈후하고 화목하였다. 남명 선생에게 배웠고, 수우당(守愚堂)에게 중망을 받았다. 성품이 정밀하고 민첩하여 일을 주관함에 수단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향병을 소집하여 적의 길목을 차단하니, 왜적이 이 때문에 감히 멀리 침입하지 못하였다. 그 공적으로 사근도 찰방(沙斤道察訪)에 제수되었고, 얼마 뒤에 단성 현감(丹城縣監)에 제수되었다. 악견산성장(岳堅山城將)이 되어 뒤에 당상관에 올랐고, 청주 부사, 창원 부사에 제수되었다. 함안의 모촌(茅村)에 살았기 때문에 자호를 ‘모촌’이라 하였다. 뒤에 진주의 서쪽
원당리(元堂里)로 옮겨 와 살았다. 난리가 지난 뒤 덕천서원(德川書院)의 터에 풀만 무성하자, 공이 진주 고을의 사우들과 함께 원우를 다시 세웠다.
이설학(李雪壑)
공의 이름은 대기(大期), 자는 임중(任重)이며, 호는 설학(雪壑)이다. 가정(嘉靖) 신해년(1551, 명종6)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충효의 성품이 있었다. 성장하여 최수우당에게 나아가 배웠고, 그로 인해 남명의 문하에 출입하여 성리학에 대해 들었다. 또 의로운 일을 하는 데에 용감하여 일찍이 정동계(鄭桐溪)의 원통함을 신원하다가 백령도로 귀양을 갔다.
신묘년(1591, 선조24)에 부친상을 당하자 슬픔과 예법이 모두 지극하였다. 다음 해 임진년에 왜구가 나라에 가득하니,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의리를 슬피 생각하고, 종묘사직과 군부의 위험함을 애통해 하였다.
연제(練祭)를 지내고 나서 향병을 소집하였다. 곽재우 등 여러 공들과 함께 서로 성원해서 낙동강을 차단하자, 왕래하던 적선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전공으로 승진하여 벼슬이 함양 군수에 이르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78세에 세상을 떠났다. 나와 함께 어려서부터 서로 좋아했는데, 여러 해를 자굴산(闍崛山)의 절에서 같이 공부하며 도움을 받은 것이 서로 많았다.
이일신당(李日新堂)
공의 이름은 천경(天慶)이고, 자는 상보(祥甫)이다. 가정(嘉靖) 무술년(1538, 중종33)에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다. 10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상례를 집행하며 애훼(哀毁)하기를 한결같이 어른처럼 하였다. 어머니를 섬기는 데 그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고,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장례와 제사를 예에 맞게 하였으며, 죽을 먹으면서 울며 곡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상복을 벗기도 전에 임진왜란을 만나자, 자신이 위패를 받들고 한 종으로 하여금 제기(祭器)를 지고 가게 하면서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렸는데, 겨를이 없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하루도 그만두지 않았다. 정성과 효성에 감응한 일 또한 칭송할 만한 것이 있었다. 평소 의관을 바로 하여 종일 꿇어앉아 있으면서 일찍이 기대거나 나태한 적이 없었다. 또 일찍이 남명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자호는 일신당(日新堂)이다.
하영무성(河寧無成)
공의 이름은 응도(應圖)이고, 자는 원룡(元龍)이다. 경자년(1540, 중종35)에 태어났다.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남명 선생의 문하에서 배워 나아갈 방향을 알았다. 세 형제가 어머니를 봉양하며 같이 살았는데, 생활이 매우 가난했으나 화락하게 지냈다. 도량이 크고 넓었으며, 외모를 꾸미지 않았다. 천거로 능성 현감(綾城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도우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다.
계사년(1593, 선조26) 진양성이 함락된 뒤에 진주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에 요청하여 공을 진주 판관에 제수하니 민심이 그를 의지하였다. 덕천서원의 터는 곧 공의 전장(田莊)이었는데, 사림이 그곳에 서원을 세우고자 하여 공이 흔쾌히 응낙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자호는 영무성(寧無成)이다.
진백곡(陳栢谷)
공의 이름은 극경(克敬), 자는 경직(景直)이다. 사람됨이 강직하여 의로운 일을 보면 반드시 용감히 행하였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천성에서 나왔으니, 사람들이 ‘강개한 선비’라 일컬었다. 남명의 문하에 출입하였으며, 수우당도 깊이 허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이정(李瀞)ㆍ하징(河憕)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덕천서원을 중건하였다. 자호는 백곡(栢谷)이다.
하송강(河松岡)
공의 이름은 항(恒)이고, 자는 자상(子常)이다. 힘써 배우고 돈독히 행하며,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고 벗에게 미덥게 하니, 사람들이 이간질하는 말이 없었다.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에서 죽을 먹으며 3년 동안 몹시 슬퍼하여 병을 얻었다.
송강(松江) 가에 정자를 짓고 꽃을 심어 병을 조리하며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삼고서 ‘송강정사(松岡精舍)’라 편액하였다. 날마다 학문에 종사하며, 옛 사람의 도로써 스스로 기약하였다. 내 집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였는데, 꽃이 피고 달이 뜨는 날이면 아침저녁으로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정자의 터에 잡초만 무성하니,
산양(山陽)의 감회가 어떠하겠는가.
신이계(申伊溪)
공의 이름은 가(檟)이고, 자는 양중(養仲)이다. 문충공(文忠公) 숙주(叔舟)의 후손이다. 타고난 자질이 질박하고 성실하였다. 나와 동갑이지만 태어난 날이 나보다 뒤이다. 어렸을 때부터 신조계(申槽溪)에게 같이 배웠고, 또 최수우당(崔守愚堂)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수우당이 또한 깊이 허여하였다. 독실하고 효우(孝友)한 정성은 천성에서 나왔으며, 학문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거칠고 비루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엄정한 것 때문에 후배들에게 꺼림을 받았다. 또 시율(詩律)에 밝았으나 항상 스스로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부분 그의 재능을 알지 못하였다.
이계(伊溪) 가에 살았기 때문에 자호를 ‘이계(伊溪)’라 하였다. 이계가 나를 부르기를 사옹(査翁)이라 하였고, 내가 이계를 부르기를 이옹(伊翁)이라 하였다. 항상 서로 왕래하며 주고 받은 시가 매우 많았고, 서로 산의 남쪽과 물의 북쪽에 있으면서 항상 만나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갑인년(1614, 광해군6) 가을에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인자(仁者)가 오래 살지 못한 것과
백도(伯道)처럼 자식이 없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애석해 하였다.
하창주(河滄洲)
공의 이름은 징(憕)이고, 자는 자평(子平)이다. 계해년(1563, 명종18)에 태어났고,
자상(子常)의 아우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지조와 행실은 부지런하고 성실하였다. 평생의 일처리는 충후(忠厚)를 위주로 하였고, 규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일찍이 남명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실리(實理)의 학문을 얻어 들었고, 선생이 편집한 《학기(學記)》를 다시 실증하여 확정하고 인쇄하였다. 또 나와 함께 《진양지(晉陽誌)》를 찬술하였는데, 탈고하지도 못하고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슬프다. 난리 뒤에 이정(李瀞)ㆍ진극경(陳克敬)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덕천서원(德川書院)을 중건하였다. 자호는 창주조도(滄洲釣徒)이다.
김동리(金東籬)
공의 이름은 윤안(允安)이고, 자는 이정(而靜)이다. 경신년(1560, 명종15)에 태어났고, 안동
구담(九潭) 출신이다. 퇴계 선생과 서애(西厓)를 존숭하여 섬겼다. 도량이 크고 넓어 구속됨이 없었다. 글을 잘 지었는데, 시에 더욱 능하였다. 병오년(1606, 선조39) 소촌 찰방(召村察訪)에 전임(轉任)되었는데, 신이계(申伊溪)와 사는 곳이 매우 가까워 왕래하며 시를 주고받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또한 나와도 서로 알고 지내며 정이 좋아 화답한 시가 많다. 뒤에 직장(直長)으로 부름에 나아갔다. 자호는 동리(東籬)ㆍ청만(晴巒)이다.
정남계(鄭南溪)
공의 이름은 승윤(承尹), 자는 임중(任仲)이며, 호는 남계(南溪)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지조와 행실이 매우 높았고, 효성과 우애가 더욱 지극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시묘살이를 한결같이 예절에 따르고, 삼 년 동안 바깥에 나가지 않으며,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에도 상복을 벗지 않고 죽을 먹으며 슬퍼하니, 보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애초 재산이 있었는데, 가난한 형제와 여러 조카들에게 나누어 주고서 자주 끼니를 거르는 데에 이르렀으나, 그 지조와 행실을 바꾸지 않았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 늙어서 더욱 돈독해졌다. 전원에서
졸렬함을 지키며 이로써 생애를 마쳤다.
한 봉사(韓奉事)
공의 이름은 계(誡)이고, 자는 신백(愼伯)이다. 무신년(1548, 명종3)에 태어났다.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집에서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친족들에게는 친후하고 화목하였다. 약관이 되지 않아 부친상을 당하자 아우 응(譍)과 함께 상례를 집행하였다. 또 매우 부지런히 아우를 가르치고 인도하여 문학을 성취하는 데 이르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를 ‘어진 부형’이라고 하였다. 천거로 참봉을 제수받았고, 벼슬이 봉사에 이르렀다.
최 신녕(崔新寧)
공의 이름은 여경(餘慶)이고, 자는 적원(積元)이다. 수우당의 아우이다. 한양으로부터 수우당을 따라 와 진주 도동촌(道洞村)에 살았다. 형과 한 집에 같이 살며 모친을 섬겼는데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드려 효의 도리를 지극히 하였고, 수우당을 대하기를 엄한 아버지 같이 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약포(藥圃) 정 상국(鄭相國)이 천거하여 감역(監役)을 지냈고, 전임하여 현감에 이르렀다. 기축옥사 때 수우당보다 1년 앞서 피살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뒤에 신원이 되었고, 참의에 추증되었다.
강 처사(姜處士)
공의 이름은 언평(彦平)이고, 자는 군보(君保)이다. 구암(龜巖)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천성에서 나왔다. 형 진사 여평(汝平)이 병에 걸리자 조리하고 봉양함에 그 지성을 다하였는데,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바가 있었다. 형이 별세하자 1년 동안 빈소 곁을 떠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그의 행의(行義)에 감복하였다.
남 처사(南處士)
공의 이름은 태형(泰亨)이고, 자는 원길(元吉)이다. 천성이 순후하고 효우를 독실히 행하였다. 일찍부터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구암(龜巖) 이 선생(李先生)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강 장기(姜長鬐)
공의 이름은 덕룡(德龍)이고, 자는 여중(汝中)이다. 천성이 충효하고 청렴하고 순정하고 후덕하였으며, 이름난 무반(武班)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임진왜란 때 원균(元均)의 비장(裨將)이 되었는데 공이 힘을 다해 계책을 세워서 싸우면 반드시 크게 이겼다. 초유사 김학봉(金鶴峯)이 그 명성을 듣고 장계를 올려서 함창 군수(咸昌郡守)에 제수되었고, 방백이 또 천병방량사(天兵放糧使)로 차출하니 마음을 다하여 직책을 수행하였으며, 피란에 굶주린 사람들을 또한 살려 준 것이 많다.
정유재란 때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불러 체부영장(體府營將)으로 삼았고,
정기룡(鄭起龍)ㆍ
우배선(禹拜善) 등과 함께 적을 공격하게 하여 여러 번 전투에서 적을 크게 이겼다. 전후로 충성스럽고 근실한 것이 매우 많았으나, 입으로 공로를 말하지 아니하고 항상 스스로 감추어 숨겼기 때문에 끝내 포상을 받지 못하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해 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이 효성스러웠는데, 모친이 일찍 병환이 있어 민물고기를 드시고 싶어 했으나, 그때 마침 강물이 불어서 그물을 칠 곳이 없었다. 그리하여 울면서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오르내리며 물고기를 잡을 방법을 생각하는데, 갑자기 큰 물고기가 배 안으로 뛰어 들어오니, 사람들이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 여겼다. 무인(武人)으로 이름났지만, 충성스럽고 효성스럽고 청렴하고 삼가며 성실하고 공경하며 어질고 후덕하여 집안 식구들에게 모범이 되는 마땅한 도리와 자신을 단속하는 절제는 학자들이 미칠 바가 거의 아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원근의 사람들이 탄식하며 애석해 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눈물을 흘리며 “선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구나.”라고 하였다.
이노파(李蘆坡)
공의 이름 흘(屹)이고, 자는 산립(山立)이다. 가정(嘉靖) 정사년(1557, 명종12)에 태어났다. 일찍이 문사(文詞)로 당대에 명성이 있었으며, 한 번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부모님이 연로했기 때문에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아 부친께 아뢰어, 마침내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부모 봉양에 전념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의지와 행실이 온화하고 굳세었다. 외모는 질박했으나 내면은 밝았고, 말은 어눌하였으나 마음은 영민하였다. 평소에는 공손한 모습으로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다가, 의리와 시비를 분변하는 데에 이르면 단호하여 범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늙어서도 더욱 독실하게 하였다. 또 사람 가르치기를 좋아하여 향당의 자제들을 재능에 따라 가르치고 지도하여 성취한 바가 많았다.
항상 ‘공(公)’ 자를 징표를 삼았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마음을 쓸 때나 일을 처리 할 때에 생각이 언제나 여기에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선을 행하는 데에는 용감하였고, 명예와 이익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였다. 남의 선행을 보면 자기가 지닌 것 같이 하고, 남의 악행을 들으면 서로 가까이 한 것처럼 두려워하였다. 또 산수의 취미를 좋아하여 일찍이 〈삼공불환차강산부(三公不換此江山賦)〉를 지어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다. 또 절구 한 수 읊기를
“처신하고 처세하는 데에 꾀가 졸렬하고, 이익과 명성 구하는 데에 계획이 엉성하다네. 어떤 사람이 와서 앞날의 일을 묻거든, 웃으며 하늘 떠가는 뜬구름을 가리키리.〔處身處世謀殊拙 求利求名計亦疏 有人來問前途事 笑指浮雲過太虛〕”라고 하였으니, 그의 지향이 있는 곳을 알 수 있다. 71세에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자호는 노파(蘆坡)이다. 정묘년(1627, 인조5) 봄 정동계(鄭桐溪)가 병조 전랑으로 있을 때 공을 천거하여 세마(洗馬)가 되었는데, 임명장이 내려왔을 때 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으니, 더욱 애석하다.
이 진사(李進士)
공의 이름은 대약(大約)이고, 자는 선수(善守)이다. 경신년(1560, 명종15)에 태어났고,
임중(任重)의 아우이다. 또한 문장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재주를 품고 덕을 쌓았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더욱 재주와 덕을 감추고 정사를 지어 도서를 수장하였으며, 명예와 이익에는 담담하였다. 공의 형제는 성품이 본디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데다가, 모두 학문을 겸하여 명망이 있었다. 나와 함께 어려서부터 서로 알고 지냈는데, 마음이 맞는 것으로 허여하였다. 그러나 이임중은 벼슬살이로 항상 보지 못하였고, 선수는 계서약(雞黍約)을 하며 어울렸으나, 얼마 되지 않아 또한 사정이 생겨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였다.
하신계(河新溪)
공의 이름은 천주(天澍)인데, 효성과 우애로써 세상에 일컬어졌다. 악한 이를 미워하기를 원수 같이 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평소에 항상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며,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을 갖추기를 한결같이 《소학》의 법도에 따랐다.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감탄하기를 “책속에서 일찍이 그런 사람을 보았지만 이 세상에선 일찍이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는데, 지금 그런 그대를 본다.”라고 하였다. 공이 일찍이 향교의 전교가 되었을 적에 세가 대족(世家大族) 중 불법을 자행하는 자 40여 명을 축출하였는데, 온 고을이 숙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