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하고 애잔한 추억속의 초안산/전성훈
건강을 위해 자주 찾는 동네 뒷산, 초안산(楚安山). 편안한 안식처라는 뜻의 초안산에는 조선시대 내시 분묘가 1000여 기 이상 묻혀 있다. 해발 100미터 정도의 야트막한 산이라기보다는 높은 언덕배기라고 부르는 편이 어울리는 곳이다. 이곳엔 내 어린 시절부터 가슴 아프고 먹먹한 추억거리가 곳곳에 겹겹이 쌓여 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바라볼 수 없지만 어린 시절엔 번동 외갓집에서 집 앞 방죽너머로 이 초안산을 바라 볼 수 있었다. ‘한내’라 불리는 시냇가를 건너면 바로 초안산 입구였다.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이 끝난 지 몇 년 안 된 고달픈 시절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대개 점심은 굶고 건너뛰었다. 꼬마들은 허기진 배를 움켜진 채 형들 손을 잡고 얕은 곳을 이용하여 ‘한내’를 건넜다. 초안산엔 씹으면 침이 고이는 ‘싱아’와 입에 쏙 넣으면 삽살한 맛을 내는 ‘까마중’ 그리고 산딸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그것들이 배고픈 시절 우리의 간식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외가를 떠난 후 가끔 할머니 댁을 찾았지만 초안산은 까마득하게 잊고있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20년 전 초안산을 찾은 것은 슬픈 사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께서 구십대 중반의 천수를 누리시고 돌아가셨다. 할머니께서는 몇 번 위험한 고비를 잘 넘기셨다. 그 해 여름 팔월 엄청나게 쏟아지는 장맛비속에 할머니께서는 우리를 남겨두시고 먼 길을 떠나셨다. 할머니께서는 후손들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셨다. 장례식 날 아침 언제 그랬던가 싶게 쨍하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외갓집 살림 형편이 매우 곤궁하여 화장한 할머니 유골을 초안산에 뿌려드렸다. 한동안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던 나는 할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을 잊을 수 없어 그 후 오래도록 초안산을 찾지 않았다.
십여 년 전 태어난 지 3일 만에 죽은 강아지 새끼를 포대기에 곱게 싸서 초안산에 묻어주었다. 새끼가 죽자 일주일 동안 물도 먹이도 먹지 않았던 어미 강아지. 그렇게 굶으며 새끼를 그리워하던 어미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페키니즈 종인 우리 집 귀염둥이 ‘백설’이, 그 녀석도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우리 가족 곁을 떠난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몇 년 전 태풍 ‘콘파스’가 우리나라 전역을 매섭게 휩쓸고 지나갔다. 태풍의 강한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쓰려진 나무들, 그 안타까운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태풍의 발톱에 초토화된 초안산에 한두 해 지나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자연 재해가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지어낸 일이었다. 어떤 몹쓸 사람들이 몇 십 년 된 커다란 나무들에 불을 질렀다.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밤, 몰래 나무 허리부분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형언하기 어렵게 일그러진 모습은 참혹한 몰골이었다. 불에 그을린 흉한 모습의 나무들, 그들은 누구에게도 아무 원망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들은 밑동부터 베어지고 말았다. 초안산에 골프연습장을 지으려고 몇 년 동안 발버둥 치던 사람들이 있었다. 주민들의 숱한 반대와 관련기관의 협조로 골프장 건설은 취소되었다. 대신 그 자리에 멋지고 아름답고 소박한 공원이 들어섰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이토록 힘들고 험난한 일인 줄 몰랐다.
다시 찾아가는 초안산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는다. 조금은 저린 증세를 보이는 다리이지만 이만큼이라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걸음을 옮길 때 무심코 개미나 벌레를 밟을까봐 신경 쓰며 걷는다. 이제 슬프고 서러운 일은 내 곁에서 멀리 사라졌다. 평온하고 담담한 마음으로 자연을 벗 삼아 천천히 걷고 또 걷는다. 맑은 하늘을 쳐다보고 속살처럼 부드러운 땅을 내려다본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어느 스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산은 옛날부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이다. 변한 것은 내 마음이다. (2016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