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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당당할 수 있구나' 하는 꿈이 있었죠" 국내최고 하모니카 연주자 시각장애인 전제덕 신정선 기자 violet@chosun.com 2007.10.19 23:14
한 뼘 길이, 네모난 구멍이 가지런히 뚫린 작은 ‘막대기’가 이 남자의 구원이었다. 태어나 ‘빛’을 본 것은 고작 보름. 원인 모를 열병으로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하모니카를 불게 되면서 전제덕(33)은 희망을 만났다. “아마 음악을 안 했으면 저도 지금쯤 다른 시각장애인들처럼 안마를 하고 있었겠죠.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까요.” 최근 막을 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의 곡을 연주해 큰 박수를 받은 전씨는 7살 때 인천혜광학교에 들어가 중학교 무렵부터 사물놀이를 배웠다. “그때 물이 줄줄 새는 지하연습실에서 고생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더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아서 계속했어요. 공연을 하고 박수를 받다 보면 희망이 생겼거든요. ‘아, 우리도 당당할 수 있구나, 조금만 참으면 되겠구나’ 하는 꿈이 있었어요.” 세계사물놀이대회 특별상(1989), 세계사물놀이대회 대상(1993)을 받은 전 씨는 최고로 꼽히는 김덕수 산하 사물놀이패에 들어가 장구를 치면서 ‘나도 뭔가 이뤘다’는 뿌듯함도 느꼈다. 그러나 졸업하면서 ‘현실’이 닥쳤다.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저하고 비슷한 아이들과 어울리니까, 불편한 거 잘 몰랐어요. 그런데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니 막막하더군요. ‘이제 나 혼자 돌파해야겠구나’ 했을 때 제가 들고 있던 게 하모니카 달랑 하나였어요.” 세상의 파고를 헤쳐 갈 무기이자 동지였던 하모니카에 본격적으로 빠진 것은 11년 전.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된 벨기에 출신 하모니카 연주자 투츠 틸레망스에 매료됐다. 앞을 볼 수 없는 그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코드를 익히고 리듬을 공부했다. 연주가 담긴 녹음테이프 하나를 구하기 위해 사투(死鬪)를 하듯 지팡이를 짚고 아는 이를 찾아가기도 했다. ‘국내 최고의 하모니카 연주자’라는 수식에 그는 많이도 쑥스러워했다. 그의 음악이 성장하게 된 동력을 묻자 “제가 이해력이 떨어져서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해력이 빠른 사람들은 한 번만 들으면 알잖아요. 저는 두 번, 세 번, 열 번 듣고 다시 해야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나중에는 인이 박여서 저절로 트이게 된 거죠.” 그가 음악가로 홀로 선 데에는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 씨의 도움이 컸다. 8년 전 우연하게 김 씨 앞에서 하모니카를 불게 됐다. “한국에서 이거 하는 사람 없어. 한번 열심히 해봐.” 그 한 마디를 인연으로, 김 씨의 앨범 작업에 참여하고 처음으로 TV 무대에까지 서게 됐다. “연주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틀리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만 죽도록 했는데 다행히 박수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첫 앨범이 나온 것은 2004년. 현재 그가 소속된 음반기획사 ‘JNH뮤직’의 이주엽 대표가 앨범을 만들자고 손을 잡아끌었다. “처음엔 거절했어요. 망하면 얼마나 미안해요. 그런데 포기를 안 하시더라고요. 결국 1집을 내고 처음 공연했는데 청중이 어찌나 열광하던지. 그때 깨달았죠. ‘아, 내가 사람들을 이렇게 즐겁게 해줄 수가 있구나. 하모니카 하길 참 잘 했구나….” 뭐든지 ‘혼자 힘으로’ ‘끝을 볼 때까지’ 매달려온 그는 컴퓨터에도 도사다. 그래픽 디자인 빼고는 컴퓨터로 뭐든지 다 한다. 파일로 곡을 내려 받아서 공부하고, 프로그램도 만들고 책도 읽고 신문 기사도 ‘듣는다’. ‘24’ ‘CSI’ 등 미드(미국 드라마)도 ‘들으면서’ 즐긴다. 지난해 12월 2집 발매 후에는 “음악가로 인정받고 싶은데, 사람들은 내 장애만 본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제는 인터뷰할 때 굳이 그런 말 강조하지 않아도 되는 걸 보니까, 제 음악이 어느 정도 인정받았나 봐요. 알고 보면 장애인들도 일반 사람하고 크게 다르지 않아요. 나아갈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가 인생을 좌우하는 건 똑같으니까요.” 전 씨의 하모니카는 20일 직접 들을 수 있다. 오후 7시, 홍대 앞 라이브홀 상상마당에서 펑크 그룹 ‘얼바노’의 전영진과 함께 신나는 토요일밤 무대를 펼친다. 11월 16일과 12월 21일에는 각각 포항문화예술회관과 양산문화예술회관에서 ‘전제덕의 소울 오브 하모니카’ 공연을 연다. (02)3143-54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