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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은하수' 첫 창작 동요 100살 됐어요.
이 노래의 제목을 한번 맞혀 보세요.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서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 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https://www.youtube.com/watch?v=HTktFhv17u8
이 노래는 많은 사람이 잘 알고 있고
'쎄쎄쎄' 놀이에도 빠른 박자로 활용되지만
의외로 제목을 맞히기 어려운 노래입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로 알고 있는 사람도 꽤 많아요.
정답은 노래 가사에 나오지 않는 '반달'입니다.
마치 바다 같은 넓은 밤하늘을
떠다니는 배 모양으로 생겼지만
돛대도 삿대(배질할 때 쓰는 긴 막대)도
당최 보이지 않는 반달을 노래한 거지요.
올해는 한국 첫 근대 동요로 인정받는
'반달'이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관동대학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청년)
1924년 어느 날 경성(지금의 서울),
한 청년이 우울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어요.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봤죠.
아직 낮인데도 하얀 조각달이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는 모습이 그의 눈에 띄었고,
이 때문에 더욱 슬퍼졌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아동문학가이자 동요 작곡가로 이름을 남긴
‘반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지닌 동요 작곡가 윤극영.
‘반달’을 비롯해 동요 600여 곡을 남겼어요.
스물한 살 윤극영(1903~1988)이에요.
(무엇이 그렇게 슬펐을까요?)
부친의 권유로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간
촉망받던 젊은이 윤극영은
도무지 법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 우에노 음악학교 등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배웠어요.
하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무장한 일본인이 숱한 조선인을 참혹하게 살해한
관동대학살이 일어났고,
이때 윤극영도 일본 군인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지푸라기 위에 누워 있었고
눈을 들어 보니 말 머리가 보였다고 합니다.
마구간에 갇혔던 것이죠.
간신히 살아나 고국으로 돌아온 윤극영은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광경을 마주했다고 합니다.
관동대학살 소식을 들은 부산 사람들이
구름처럼 항구에 몰려들어,
귀국하는 동포들을 위로한 겁니다.
"아이고,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어요?"
그들이 입에 물려주는 떡 한 조각을 꾹꾹 씹으면서 윤극영은 눈물을 삼켜야 했다고 합니다.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그런데 서울로 돌아온 뒤인 1924년 10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어머니가 흐느끼면서 가슴을 치는 것이었어요.
"이를 어쩌면 좋으냐! 네 누나가 그만…."
윤극영이 다섯 살 때 시집간 큰누나가,
일제가 재산을 몰수한 집에서
고생만 하다 젊은 나이에 숨진 것이었어요.
이렇게 나라 잃고 타국에서 핍박당한 아픔에
혈육의 죽음까지 겹쳐 복받치는 설움을 안은 윤극영.
그런데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서
말없이 뜬 조각달이 눈에 띄었던 겁니다.
'큰누님은 저 쪽배를 닮은 반달을 타고
은하수를 건너가겠구나,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순간 그의 머릿속에
어떤 가사와 곡조가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푸~른 하~늘 은~하수….' 바로 동요 '반달'이었어요.
윤복진 작사 박태준 작곡 기러기
동요 '기러기'는 1920년
대한민국 최초의 동요곡입니다.
동요의 효시라고 알려진 '반달(1924년)'보다
4년전에 발표된 곡입니다.
울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길을 잃은 기러기 날아 갑니다
가도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로
엄마 엄마 찾으며 날아 갑니다
오동잎이 우수수 지는 달밤에
아들 찾는 기러기 울며 갑니다
엄마엄마 울고 간 잠든 하늘로
기럭기럭 부르며 울고 갑니다
감상
1920년대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의 비극과
아픈 마음을 절절하게 드러낸
대구계성중학교 윤복진 시인의 시에다
그 선배 박태준이 곡을 붙인
아름다운 동요입니다.
그런데 1950년대 이후
이 노래는 불려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시를 쓴 윤복진 시인이
월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 동시는 시대와 이데오르기를 초월하여
사람들에게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UIyO1Y8IyA
한국 동요의 시작이 1924년 바로 이때입니다.
1924년 10월 20일 '동아일보'에 윤극영이라는 21세 청년이 노랫말을 쓰고 곡을 지은
'반달'이라는 동요가 발표됐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는 반달'이란
바로 나라를 잃고 정처 없이 헤매야 하는 처지인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로 시작하는
2절을 쓰던 윤극영은
노래 마지막 부분에서 막혀 한참 고민했다고 해요.
그때 떠오른 것이
부산항에서 떡을 먹여 주던 동포들 얼굴이었습니다.
'그래. 아무리 슬프고 암울해도 희망은 있어!'
그러고 다음 가사를 써내려 갔습니다.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이후 수많은 동포는 그 노래에 한(恨)과 설움,
그리고 결코 놓을 수 없는 미래의 희망을
꾹꾹 담아 불렀습니다.
희미하게나마 멀리서 등대처럼 빛을 내는
샛별을 찾아 반드시 광복을 이뤄내겠다는 염원이었죠.
(설날, 고드름, 따오기… 국민 마음 어루만져)
윤극영은
어린이 운동가 방정환이 결성한
색동회 창립 멤버입니다.
조선 가사를 붙인 찬송 가곡이나 일본 동요 말고는
딱히 어린이가 부를 노래가 없던 시절에
본격적으로 동요 창작을 시작한 것이죠.
'반달'을 만든 1924년
어린이 합창단 '따리아회'를 조직하고
동요를 통한 어린이 문화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1926년 만주에 가서 음악 교사로 일했고,
이후 만주와 경성·일본을 오가며 활동했습니다.
늘 꽃길만 걸은 것은 아니었고,
일제 말 그의 행적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광복 후엔
중국에서 손수레를 끌다가 남한으로 탈출했다고 합니다.
1970년대 다시 결성한 색동회를 중심으로
무궁화 보급 운동에 나섰습니다.
그가 평생 지은 수많은 동요는
어린이이거나 한때 어린이였던 모든 국민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노래였습니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설날)라며
새해를 맞는 기쁨을 북돋웠고,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고기잡이)라며
세상에는 슬픈 동요만 있는 것이 아님을 일깨웠습니다.
고드름(유지영 작사),
따오기(한정동 작사),
기찻길 옆, 어린이날 노래, 나란히 나란히
(이상 윤석중 작사)
역시 그가 작곡한 주옥 같은 동요입니다.
'반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은 윤극영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별세했습니다.
윤극영 작곡가가 1988년 작고할 때까지 살았던 서울 강북구 가옥.
현재는 누구나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는 기념관으로 운영해요. 서울시
서울시는
그가 살았던 강북구 수유동 집을 2013년 매입하고
'서울시 미래 유산'으로 지정해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PAwH0qKwsg&t=1s
중국에선
'반달'을 1950년대 조선족 가수가 번역해 불렸는데,
나중엔 '소백선(小白船·하얀 쪽배)'이란 제목으로
음악 교과서에까지 실렸다고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일부 중국인은
'중국 전통 동요'라 우긴다고 해요.
자칫 동북 공정, 한복 공정, 김치 공정에 이어
'반달 공정'까지 나올 판입니다.
끝으로 '동심 파괴'가 될 수도 있는 얘기를
덧붙이자면, 실제로 반달과 은하수를
한눈에 볼 수는 없다고 합니다. 달빛 때문에
은하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죠.
유석재 기자
‘반달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지닌 동요 작곡가 윤극영.
‘반달’을 비롯해
동요 600여 곡을 남겼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7ejhlhtYR34
노인들을 대상으로 응모한 짧은 글 당선작.(2024년 1월 19일 발표)
1.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2. 전구 다 쓸 때까지
남지 않은 나의 수명.
3. 종이랑 펜 찾는 사이에
쓸 말 까먹네.
4. 병원에서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 들은 병명은
"노환입니다"
5. 일어나긴 했는데
잘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다.
6. 자명종 울리려면 멀었나
일어나서 기다린다.
7. 연명치료 필요없다 써놓고
매일 병원 다닌다.
8. 만보기 숫자 절반 이상이
물건 찾기.
9. 몇 가닥 없지만
전액 다 내야 하는 이발료.
10. 눈에는 모기를,
귀에는 매미를 기르고 산다.
11. 쓰는 돈이
술값에서 약값으로 변하는 나이.
12. 젊게 입은 옷,
자리를 양보받아 허사임을 알다.
13. 이봐 할멈!
입고 있는 팬티 내 것일세.
14. 일어섰다가 용건을 까먹어
다시 앉는다.
15. 분위기 보고
노망난 척하고 위기 넘긴다.
16. 무농약에 집착하면서
먹는 내복약에 쩔어 산다.
17. 자동응답기에 대고
천천히 말하라며
고함치는 영감.
18. 전에도 몇 번이나
분명히 말했을 터인데
"처음 듣는다!"고.
19. 할멈!
개한테 주는 사랑
나한테도 좀 주구려.
20. 심각한 건
정보 유출보다 오줌 유출.
21. 정년이다.
지금부턴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야지.
22. 안약을 넣는데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린다.
23. 비상금 둔 곳 까먹어
아내에게 묻는다.
24. 경치보다 화장실이 신경 쓰이는
관광지
25. 손을 잡는다.
옛날에는 데이트,
지금은 부축.
26. 이 나이쯤 되니
재채기 한 번에도 목숨을 건다.
*참 현실적이고 사실대로 잘 표현했네요.
일본은 영원히...
이길 수 없는 우리의 敵이라야 하는가?
"일본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실컷 얻어맞고 온 느낌이 든다.
일본!
아, 싫고 미운 나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와서 한 가지 더 고약한 감정, 무서움이 추가되었다.
즉 ❝영원히 원수가 될 필요는 없지만,
이길 수 없는 나라가
원수로 남아있다는 것은 국가적 재앙이
아닐 수 없다.❞라는 생각이다.
일견(一見)하여 내가 본,
일본인들의 價値를 결정해주는
몇 가지 구체적인 事例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람에 날려 온 가랑잎 하나도 광장에서
볼 수 없고, 담배꽁초 한 개비도 길거리에서 구경할 수 없다.
작은 비닐봉투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껌 통에 씹고 난 껌을 싸서 버리는 휴지도 같이 들어있었다.
3일 동안 주택가나 관광지를 돌아다닌 길거리에서, 시내 도심에서, 고속도로에서,
아직은 괜찮은 이 시력으로
일부러 찾아보았지만 수입(輸入)외제(外製) 차량이라곤 단 한 대도 볼 수가 없어 머리카락이 서서히 곤두섰다.
좌측통행에 익숙하지 못해서 그런 줄 알고
오른쪽 눈에 힘을 주어도
마찬가지니 드디어 양 눈에 뿔이 났다.
내가 사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열대 중에 외제, 수입차가 과반인데
비하면 자유무역 협정이 무색하도록 철저한 배타주의의 이 민족성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워졌다.
등굣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는 시골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았다.
고학년의 큰 학생들이 횡단보도 양쪽에서 깃발을 들어 차를 세운다.
길 양쪽에서 저학년의 어린 학생들이
줄지어 서있는 차량을 향해 동시에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고사리
손을 흔들며 차례를 지켜 질서 정연하게
길을 건넌다. 아이들이 길을 다 건넌 것을 확인한 후 차량의
어른들도 웃으며 경적으로 답례를 한다.
이 얼마나 인간의 가치를 극대화하는,
아름다운 사회의 시민 정신인가?
가정에서 키워지는 일본 어린이들의 사회교육에 관한
극히 일부분을 예로 든 것이다. 등굣길을
같이 지켜본 가이드의 보충 설명 중에
❝오.아.시.스❞'란
말이 신선한 충격으로 전해온다.
오: 오하요우 고자이마쓰
(아침인사 안녕하세요).
아: 아리가또우 고자이마쓰 (감사합니다).
시: 시쯔레이 시마쓰 (실례합니다).
스: 스미마셍(죄송합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이 기본 인사는 완전히 몸에 배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길을 가다가도 자주 뒤를 돌아본다고 한다.
혹시 자신이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배려(配慮)하는 마음에서 라고 한다.
이렇게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투철하고
또한 친절, 정직, 질서를 잘 지키기는 세계에서 으뜸인 나라다.
"강남의 귤을 강북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남귤북지; 南橘北枳)."
안자춘추(晏子春秋)에
나오는 옛이야기다. 일본과 한국 중에
어디가 강남인 줄은 잘 몰라도
한국에는 왜 아직 탱자만 열리는가?
우리도 한국의 강남땅에 어서 빨리
일본처럼 '오아시스'를 만들어 어린
귤나무를 많이 심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길 수 없는 원수를 영원히 옆에 두고
어찌 발 뻗고 편히 잠을 자겠는가?
아! 이길 수 없는 적(敵)!
얼마나 무섭고 절망적(絶望的)인 말인가?
적을 알고 나를 모르면 서로 비기고
(知彼 不知己 一勝一負),
적을 모르고 나를 모르면 싸울 때마다 지고 (不知彼 不知己 每番必敗),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 知己 百戰不殆).
일본을 좀 알고 나니,
미워만 할 때보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고 자신감이 샘솟는다.
지금 일본이 미국에게 공손(公孫)한 것은
미국을 이길 힘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以小大, 畏天者也),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 나라를 보존한다(畏天者其保國)는
孟子의 말씀이다.
한국인들은 아직도 <채>가 많다.
못났으면서 잘난 채,
없으면서도 있는 채,
모르면서도 아는 채,
이 채가 밥 먹여 주지 않는다.
아직도 반성은커녕 기고만장하여
못된 근성(根性)을 버리지 않는다.
누구에게 물어보고 배우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이 비열(卑劣)하고 오만(傲慢)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좀 더 겸손(謙遜)하고
진취적(進取的)인 생각으로...
우리가 일본을...
이길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힘을 기르는 일 밖엔 없을 것이다.
이 힘이란 자존심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오직 겸손(謙遜)한
자세로 열심히 베우고 익혀야 한다.
옮겨온 글 편집
첫댓글 ♬반달 ♪
소중하고 아름다운 동요.
할머니가 되어서도 어린 맘으로 불러보는 반달.
마음이 따뜻해지는 반달.
그
런
데
이렇듯 고운 소개 글에
웬 잡다한 군소리로 반달만이 존재할 공간을 더럽힌단 말인가?
글이란
모양새가 고와야 감상하고 읽고 싶은 것입니다.
방문한 것을 후회하면서......
반달보다 기러기가 먼저 나와서 금지곡이 되기 전에는 모두가 기러기를 많이 부르고 들었는데 이즈음은 기러기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가 금지한 것을 그 아들이 88올림픽을 위하여 해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윤복진 씨의 기러기는 아직 해금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역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