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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이사야-22 여호와의 종을 보라(이사야 49장 1-4절)
성경 말씀은 이사야 49장 1절에서 4절부터 봉독합니다.
[이사야 49장]
1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2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4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이사야서 안에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은 주어가 ‘내가’라고 하는 말을 여러 사람이 하고 있다는 거죠.
‘내가, 내게’ 하는 그런 말이 누구를 말하는지, 구스 내시도 어려워하던 부분이죠.
책을 읽기는 읽는데 고난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선지자가 자기를 말하는 거요? 타인을 보고 하는 거요? 하고 구스내시가 어려워하는데, 구스내시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봐도 어려워요.
이사야 꽤 여러 번 읽어봐도 ‘내가’라는 사람이 있고, 혹은 ‘그가’라는 말도 있고, ‘네가’ 라는 말도 있는데, 이것을 앞뒤 문맥을 잘 파악해서 분별하지 못하면 상당히 어려움이 있습니다.
49장에도,
[이사야 49장]
1 섬들아 나를 들으라,
하는 말은, ‘나를’ 할 때에 ‘내 말을’ 하는 건데, 여기 ‘나’가 누구냐는 거예요.
나가..
하나님인지 예언자인지 이런 분별이 안 되는 때가 상당히 많아요.
..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라고 하면, 이 ‘내가’는 예언자구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2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여기 이 예언자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느냐?
예언자가 만약에 우리가 이 책이 이사야서라는 긴 두루마리 중에 나오기 때문에, 이사야라면 이런 말을 하기 어렵다는 거예요.
조금 있다보면 ‘나’라고 하는 예언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도 할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작은 일이라 그것보다 더 큰일도 해 나간다. 이런 말이 나와요. 그
러면 이사야가 죽은 지 상당히 지난 후에 바벨론 포로갔고, 바벨론 포로가서 70년 되어서 돌아오는 이야기이니까..
지금 40장부터 66장까지 있는 이 예언자는 아무래도 1장부터 39장까지를 기록한 그 예언자와 같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래전에 자유주의신학자들이 한 것이 아니고, AD12세기 경에 ‘아브라함 이반 에스라’라는 사람이 이사야서 구조에 대해서 아무래도 이게 한 사람의 기록 같지 않다.
일찍부터 이런 저자가 1인칭을 쓸 때 이사야가 쓰지 않던 말을 쓰고, 그리고 이사야가 할 수 없는 말, 이사야 때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이사야서 구조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보통 신학을 근본주의라든지 이런데 매여있지 않고 신학적 학문의 분위기가 자유로운 데에서는 이것은 앞에 이사야가 아니고 이름을 알 수 없는데, 제2이사야 이런 말을 합니다.
이사야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이사야서에 붙어 있으니까 다른 이름을 알지도 못하니까 붙이기는 어렵고, 용어를 구사하는 것을 볼 때, 이 사람은 누굴까 하고 사실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예요. 누가 썼는지..
구약성경에는 이런 책 뿐 아니라 누가 썼는지 모르는 책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열왕기상하서 누가 썼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역대상하서도 저자 불명이고, 욥기도 누가 썼는지 몰라요.
저자를 모르는 책이 신약에는 거의 없습니다만 구약에는 더러 있는데, 특히 이사야서 후반부에 있는 제2부에 있는 종이 누구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 종은 너무 예수님을 닮아서 예수님의 입장, 예수님의 처지와 너무 같아요.
그리고 그 외에도 예언자, 여러분 예수님 안에 제사장적인 혹은 왕적인 요소, 그리고 예언자적 요소가 다 있는데, 그 예언자적인 요소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런 삶이나 애환이나 고통이나 수난이나 이런것들이 여기 지금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 ‘종의 노래’라고 보통 말하는데,
종의 신앙고백 고난과 현실을 고백하는 내용이 너무 예수님과 닮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닮은 사람들은 성경에 꽤 있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사람도 예수님과 너무 많이 닮았죠.
‘복 중에 짓기 전에 내가 너를 알았고’ 하는 것도 그렇고, 예수님이 가끔 눈물을 흘리신 것처럼 예레미야도 자주 눈물을 흘리시고, 고난과 매맞음과 그런 천대를 예레미야도 무지무지 받았어요.
그래서 그 예레미야도 예수님의 그림자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보인다는 거죠.
훗날에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바울같은 분도 고난과 수난과 복중에 짓기 전에 모태로부터 구별되었다는 것도 예수님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예언자는 신령하고 거룩한 그런 예언자 중에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모습을 베드로 사도가 나중에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고난과 수난이 있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영이 그 예언자 속에 있었다는 거야.
그런데 예수님의 영이 그 예언자 속에 있었다면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에 고난도 받고 수난도 겪고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생각할 때 성령충만하고 예수님을 잘 믿고 하면 우리 일반 성도들에게 늘 알고 있는 것은 그저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구약에서 신약까지 전체 사도시대까지 오면 예수의 영이 있으면 어디가도 미움을 받아요.
그러니까 여러분 어디가서 미움 받을 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우리가 죄를 짓고 잘못해가지고 미움 받으면 그거야 참 회개하고 자복할 일이지만, 죄가 없는데 누가 나를 미워한다 그러면 기뻐하고 뛰어놀라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자기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장차 받을 고난과 후에 얻을 영광을 노래하는데, 어느 시 어느 때를 지시하시는지 학자들이 맨날 연구했다’ 그런 얘기가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고 욕을 먹을 것이고 따돌림 당할 것이고, 그러면서 그 본인의 의식은 내가 이것 말짱 헛일하고 있는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조금 더 봅시다.
49장 1절,
1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2 내 입을 날카로운 칼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3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그냥 애굽에서 출애굽된 그 이스라엘이 아니고, 지금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것을 ‘영적인 이스라엘이다’ 하고 ‘이분이 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다’ 하는데, 예수님의 그 때 안 태어났잖아요.
예수님은 바벨론 포로직전이라고 하면 예수님 태어나기 500년 전에 어떤 사람이 ‘내가’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 뒤에 보세요.
4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하고 이 ‘나는’ 앞에서 말하는 그 ‘나’인데, 말하기를,
..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언자에게 굉장한 인물로 지목을 했는데, 그 예언자 스스로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고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그러나,
..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하고 자기의 자의식은 내가 쓸데없이 나 혼자만 세상에서 고생한다 하고 나만 핍박받고 나만 욕먹고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 이렇게 했는데,
..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라고 하면서 자기 의식을 다시 추스려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보세요.
5절에,
5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여태까지 자기가 생각했던 것이 아닌 것을 깨달은 거죠.
..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6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보전된 자’는 바벨론에 보내가지고 일정기간 동안 생명이 보전된 자를,
..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그것은 작은 일이야.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는 그 일도 할 뿐 아니라 그것은 작은 일이라.
..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런 것을 두고는 예수님이라야 할 수 있는 얘기거든요.
그래서 그냥 예수님이다 하면 여기 좀 안 맞는 것이 나와요.
바로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 같으면 앞에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하는 그런 일들을 할려면 500년 후에 태어난 예수님이 할 수 없잖아요.
이런 것을 두고 구스내시가 성경을 읽으면서 참 어렵다 한 얘기인데, 예수님을 영을 가진 그런 예언자가 구약 시대 있으면서, 예수님과 같은 고난, 예수님과 같은 수난, 예수님과 같은 어떤 영적인 아픔 이런 것을 겪고 있는 거죠.
여러분 시편 22편에 보면, 예수님의 영이 다윗안에 충만히 거하면서 1000년 후에 받으실 십자가 고통을 다윗의 시 속에 흘러나오는 거예요.
1000년 후에 이루어질 일들이 다윗의 시편 22편 속에 절규처럼 터져나오는 그런 장면이 나와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이런 것을 보고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장차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을 영광을 상고했다 그런 얘기를 한다 말이죠.
7절 보세요.
7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1)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2)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3)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그러니까 지금 이 예언자 자기 자신을 두고 하는 말 같은데,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예수님과 똑같죠?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이것도 예수님과 똑같애요.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 관원들에게 예수님이 종이 된 자 같지는 않은데..
어떻든 지금 현재 이 예언자가 자기 자신을 볼 때,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고,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 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그래서 이 사람이 누구냐 하는 거죠. 도대체..
제가 바벨론 포로 기간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사람들, 우리가 다니엘서라든지 에스겔서 같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고, 그 다음에 또 어떤 사람이 두각을 드러내 만한 그런 인물이 성경에서는 찾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이사야서 제2부를 기록한 이 예언자가 바벨론에 있으면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했다는 얘기고,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았다는 것이고, 관원들에게 종이 되었었는데,
그러나,
..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니리,
그러니까 여러 왕들이 어떤 이스라엘 예언자 한 사람을 보고 유대인 예언자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고,
.. 이는 너를 택한 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이런 사람이 누구였을까?
어렴풋이 보면 모르드개 같은 사람이 이렇다고 할 수 있겠죠. 모르드개.
바벨론에 있었던 모르드개가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고 관원들의 종이 되고 이럴 수 있겠죠.
그런데 그 모르드개가 과연 이것을 썼겠느냐?
하여튼 그런 사람이야.
바벨론이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고, 관원들의 종이 되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도 뭔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아까 우리가 49장 4절에 읽은 대로,
4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자기가 하잘것 없는 사람이 아니고 존귀한 자라는 거예요.
8절입니다.
8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9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벌거숭이 산에서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11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12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
‘시님 땅’이 어디인지 성서 사전을 찾아봐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분은 페니키아 지방의 어느 땅이 아니냐 하는데 정확하지 않습니다.
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우리가 40장 첫머리 처음 시작할 때,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던 그 어조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거든요.
그리고 예루살렘 70년 동안 황무지가 되어 잠들어 있는 시온을 깨우는 이야기인데,
14절에,
14 ○오직 시온이 (예루살렘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아마 완전히)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그렇게 예루살렘은 잠들어 있는 예루살렘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저는 애를 안 낳아봐서 젖을 안 먹여봤어요.
그래서 젖을 먹이는 어머니가 젖먹이 아이를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지를 잘 감정적으로 짐작으로는 하지만 내가 체험을 못했으니까 잘 이해가 안되는데,
제가 우리 아이를 기르는 집사람이 아이를 생각하는 것 보면 끔찍하게 해요.
그 아이에게 하는 것 절반만 남편에게 하면..
정말 대단한 정성을 기울이는 거죠.
아이들에게 쏟는 정성은 우리가 잘 몰라요.
자기가 엄마가 되어가지고 아이에게 쏟아봐야 알지, 부모님이 나를 어떤 정성으로 기르는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그 모성애 모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 그런 거룩한 사랑인데,
그들은 그런 어머니, 젖먹이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한다.
70년 동안 황무지가 되어 잠들어 있는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잊지 않는다는 거예요.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 예루살렘 그 도시는 ‘아이고 하나님이 이제 완전히 잊었구나, 나를 완전히 버렸다’ 하고 낙심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나는 너를 잊은 적도 없고 버린적도 없다’는 거예요.
16절,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17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바벨론 사람들이죠.
18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로 장식을 삼아 몸에 차며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이런 부분들은 QT하는 사람들이 꼭 착각하기 좋은 건데, 어떤 사람이 교회 개척을 할 마음을 먹고 딱 폈더니 이 말씀이 나온거야.
18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아멘, 할렐루야!’ 하면서 몇억을 내어가지고 예배당 지었는데 아무도 안 오는 거야.
그런 실수 그런 착각이 부지기수 입니다. 지금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자기에게 한 말씀도 아닌데, 어느 날 착각을 해가지고, 딱 폈더니 레마가 주어졌다는 거야.
그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내게 응답을 주셨다 하면서 이 구절을 가지고.. 자기에게 한 말이 아닌데..
이런 것은 웃을 일이 아니고 심각한 상태예요.
그래서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이 착각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QT는 착각의 지름길이라고..
역사적 배경도 사실 파악도 못하고 어느 날 문득 떠오르는 말씀을 가지고 그것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이다. 착각하기 시작하면 하나님도 감당을 못해요.
착각은 하나님도 감당을 못합니다.
제 스스로 속는 거예요. 누가 속여서 속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속으니까..
그런데 그런 자기 소원을 가지고, 지나친 소원의 안경을 가지고 보니까 또 그런 구절만 보여요. 많이 있거든요. 그런 구절이..
계속 보이니까 계속 믿음 충만해가지고..
사실은 오해 착각 충만인데, 그것을 믿음인줄 알고..
어떤 사람이 빚을 크게 내어가지고 예배당을 엄청나게 지었는데, 그 목적이 정필도 목사님 꺾는거라는 거야.
그래서 23억을 빚을 냈다는 거야. 교인들이 100명도 안 되는데..
전화가 와요. ‘노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집사들이.. 내가 어떻게 합니까? 내가..
들어보니까 기가 막히는 거예요.
이런 착각을 해서 그래요. 착각을..
그래서 이런 예언서를 볼 때 사실 파악을 먼저 하고, 이 말씀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왜 주어진 것인가? 하는 사실 파악을 해가지고,
지금 우리도 황무지가 되어있고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이런 것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고려해볼 수 있지만,
어느 날 내가 그냥 기도하다가 소원이 간절하던 차에 성경을 폈더니 그런 말씀이 들어왔다고 해가지고 ‘그 말씀은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해가지고 착각을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는 겁니다.
극히 조심해야 돼요.
19 대저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예루살렘을 말하죠?
..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거민이 많으므로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
‘너를 삼켰던 사람들’은 바벨론 사람들이죠!
.. 멀리 떠날 것이니라
20 고난 중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곳이 우리에게 좁으니 넓혀서 우리로 거처하게 하라 하리니
21 그 때에 네 심중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 무리를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와졌으며 사로잡혔으며 유리하였거늘 이 무리를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되었거늘 이 무리는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14절부터 시온성, 다시 말해 예루살렘이 스스로 낙심하여 할 때, 그 예루살렘을 보고 예루살렘을 의인화 혹은 인격화 해가지고 그런 소망의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22절,
22 ○나 주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열방을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호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아들들’은 시온의 아들들, 예루살렘의 아들들, 바벨론 포로 잡혀갔던 사람들)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23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여러 왕들이 너를 길러 돕는다 그 말이죠?
..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지금 낙심하고 좌절하고 다 포기하고 싶은 그런 시온성, 예루살렘을 향하여 위로의 말씀이 이렇게 주어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이 ‘아이고 바벨론이 빼앗아 간 것을 우리가 어떻게 되찾겠나’ 하고 낙심을 하는데,
24절,
24 ○용사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마는
2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강포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
26 내가 너를 학대하는 자로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
이것은 바벨론을 두고 한 말이죠.
..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리라
그래서 고레스왕의 군대를 보내가지고 바벨론을 함락시키면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자녀를 업고 안고 어깨에 딸들을 메고 이렇게 줄줄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을 내어다 보고 이런 말씀을 하신 거죠.
50장입니다.
[이사야 50장]
1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 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버리지 않았다는 얘기를 이어서 하고 있는 겁니다.
‘네 어미’라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대인들을 하나님께서 이혼하지 않았다는 거야.
그리고 팔지도 않은 것이고, 단지,
..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
2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어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3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이 자꾸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할 때 하나님이 절대로 그냥 두지 않는다. 예루살렘을 회복하게 하신다는 거죠.
50장 4절에 또 다시 종의 얘기가 나오는데요,
4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이 때 ‘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죠. 여호와의 종이예요.
..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여러분 성경말씀의 수준이 물론 사람에게 맞춘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이예요.
높은 수준의 말씀을 사람들이 깨닫는다는 것은 작은 은혜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종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은데, 학자의 혀를 주셔서 말로 사람을 어떻게 도와 줄줄 알게 하시고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셨다.
두 가지죠.
하나는 말 할줄 알게 하시고, 하나님 말씀을 들을 줄 알게 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농아(聾啞), 다시 말하면 언어장애가 심해서 말을 전혀 못하는 경우는 대개 보면 귀가 안 들린다는 거예요. 귀가 들리지 않으니까 소리를 듣지 못하고, 소리를 어떻게 성대를 이용해서 어떻게 소리를 내는지 연습이 안 된 거예요.
귀가 안 들이면..
그래서 대개 후천적으로 말을 할줄 아는데 귀가 안 들리는 사람이 있겠죠.
그런 사람도 있지만 그게 아니고, 처음부터 귀가 안 들린 사람은 말을 잘 못해요.
우리가 영어같은 것도 마찬가지죠.
영어가 슬슬 들리면 그냥 말을 합니다.
그런데 안 들리죠. 솔직히..
우리만 그런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 우리가 영어 안들린다고 겁낼 것 없습니다. 영국사람들 미국사람들 한국말 하나도 안 들려요. 피장파장이지..
영어를 하는 사람들이 이방인을 뭐라고 하느냐? ‘바르바리안.’ 바르바리안이 무슨 말이냐? 바르바르..
말이 하나도 안되고 바르바르 한다고 바르바리안이예요.
바르바르.. 계속해서 바르바르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겠다..
제가 인도네시아에 가니까 한 마디도 못 알아듣겠어요. 계속 바르바라바라바라..
공항에서 한 주간 내내..
왜 바르바리안이라고 있는지.. 야만이란 말을 바르바리안이라고 하죠.
자기도 야만인이잖아.
야만인들에게는 자기도 헬라어도 바르바르야.
그러니까 우리가 영어를 못하는 이유가 안 들리기 때문에 못하는 거예요.
들으면 나옵니다. 들려서 들어가면 입으로 나오는데 안 들리기 때문에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알든지 모르든지 자꾸 들으면 말이 되어 나와요.
음악도 자꾸 들으면 소리는 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지금 기도할 때 두가지 다 달라고 해야 됩니다. 듣는 귀도 주시고, 말하는 혀도 열리게..
그래서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고 또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실 수 있게 한다는 거죠.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귀를 열어주신 다는 것, 참 중요하죠. 듣는 귀와 보는 눈과 깨닫는 마음.
성경에 자주 나오는 말인데, 마음을 열고 귀를 열어주셔야 하나님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그것은 제가 현저하게 체험했습니다.
제가 처음 믿을 때 이야기 했죠? 2~3달 되어도 한 마디로 못 알아듣겠어.
그 전도사님이 설교를 어렵게 하는 분도 아니고, 세상 설교를 논두렁 밭두렁에서 하는 이야기 이렇게 쉽게 하는데도, 무슨 말인지 그렇게 못 알아듣는 것도 기적이야. 정말..
그러나 자꾸 ‘몇장 몇절’이라고 하는데, ‘몇장 몇절’ 자꾸 그런 걸 하는 거예요.
본인은 자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인용한다고 했다는 건데 하나도 못 알아들어요.
무슨 철학자가 하면 반짝반짝 하는데, 성경 말씀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그렇게 못 알아듣다가 어느 날 귀가 딱 정말 열린 거예요.
정말 다른 표현으로 안 되고 귀가 막혀있다가 귀가 열린거야.
그러면서 들리기 시작하니까..
들리니까 말 하게 됩디다.
딱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 가만 못있고 아무나 만나면 전도한답시고 사람을 못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5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예언자가 얻어 맞아보기도 했던 거예요.
..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옷을 벗기운다든지 수염을 잡아뽑히는 것은 아주 수치중에 수치죠.
..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침뱉음도 당하고 이런 사람이 지금 있는 거예요. 누군가..
꼭 예수님 당한 것과 비슷한 고난을 당하는 종이 있었다는 거예요.
다음에 언제 시간이 되면 세상이라는 구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으면 좋겠어요.
샤론강좌에도 조금 언급될것 같은데,
세상이라는 구조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완전히 주관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 주관자들이 세상을 주관합니다. 어둠의 자식들이..
그 어둠의 자식들은 까닭없이 예수님을 미워해요.
예수님이 자기 논밭에 가서 곡식을 밟은 것이 아니고, 아무 것도 예수님이 자기를 해롭게 하신 것이 없으면, 까닭없이 연고없이 예수님을 미워해요.
세상 신에 속히 있는 사람은 아무리 무식해도 예수님 미워하는 것은 알아요.
저 지리산 산골짜기에 아무 것도 쥐뿔도 개코도 모르는 사람이 예수님 미워하는 것은 배웠어요. 본능적으로 아는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그 사람들은 점쟁이도 좋아하고 스님도 좋아하고 유교도 좋아하고 다 좋아하거든
모든 종교 모든 신들 귀신부터 성주신으로 용왕신으로 칠성당으로 온갖 잡신을 다 좋아해요
다 좋아하는데 딱 하나만 안 좋아해요.
누구냐? 예수님만 안 좋아해요
왜 그럴까요?
그런 시골에서 전도해보면 참 희한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 전기도 가져와서 쓰게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만든 전화도 쓰게 하고, 예수 믿는 사람이 개발한 텔레비전, 온갖 문화 전체가 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가져온 것인데, 그런 것을 누리면서도 기어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하는 그런 말이 있는데, 진짜 그렇습니다.
여러분 전도를 안해봐서 그렇지 저 시골구석에 가서 해 봐요.
해보면 모든 신, 한 집에 보통 다섯가지 여섯가지 섬기면서도 하나만 더 섬겨봅시다. 이왕이면..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은 안 믿는다는 거야.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절대로 안된다는 거야.
왜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사람도, 이 종이라는 사람도 예수님 탄생하기 500년 전 사람인데,
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전에 제가 처음 예수믿고 성서신학원에서 공부할 때, 누가 우리에게 침을 뱉으면 어떻게 할것인가 우리 교수 강사 목사님이 그래요.
그래서 우리 같으면 당장 닦죠. 이렇게 하는데, 자기는 말라붙어도 안 닦는대..
그리고 전혀 초연하다는 거야.
교수님 왜 그런 말씀을 하실까. 왜 말라붙을 때까지 안 닦고 놔두는가..
지금도 수수께끼에요.
보세요. 상대방이 우리에게 침을 뱉었다. 여러분 혹시 그럴 수 있겠죠. 살아가다가..
요즈음은 잘 안하지만 옛날에는 했잖아요. ‘퉤 더러운 놈들..’ 그런면서..
그런데 그 상대방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 침은 내 얼굴에 있지만 자기는 입안에 있잖아. 지가 더 더러운 놈이지..
그 더러운 것이 자기 입안에 있으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그게 더럽다고 할 수 없어. 놔둬. 그냥..
오래전에 교수님이 이야기한 것을 가지고 나 혼자 생각을 해본거야.
그러니까 침뱉음을 당하고 뺨을 맞고 수염을 다 뽑히고 등을 얻어맞고 해도 참을 수 있는 사람 같으면 예수님의 영이죠.
예수님의 영이 있으면 이런 멸시천대 핍박 당하게 되어있어요.
사도바울도 무릇 그리스도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다.
자꾸 칭찬을 받을려고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면 칭찬이 아니고 핍박을 받고 욕을 먹는 거예요.
베드로는 우리는 좋은 일 하고 욕먹기 위해서 선택된 사람이다.
베드로전서 봐요.
우리는 좋은 일 하고 욕먹기 위해서 선택된 사람이라는 거예요.
7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므로 내가 부끄러워 아니하고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이런 것은 꼭 에스겔 같죠.
말투가 에스겔의 말투와 같은 어구가 많이 구사되고 있어요.
여러분 부싯돌이 뭐예요?
부시가 가져온 돌이 아니고, 우리는 부싯돌을 봤거든요.
성냥 아낄려고 부싯돌은 차돌입니다. 차돌.
유리처럼 투명성을 띠고 굉장히 강도가 높은 돌인데, 강도높은 돌이 모서리가 서슬이 시퍼렇게 살아있어야 부싯쇠, 부싯돌과 부싯쇠가 탁 치면 거기다가 쑥,
우리 쑥뜸할 때의 쑥처럼 쑥을 잘 비벼서 부싯돌 언저리에 놓고 탁 치면 반짝하는 그 불이 쑥에 붙는 거예요.
그것을 불면 불덩이가 커져서 담뱃대에 붙이기도 하고 그게 점점 불어서 부엌에 붙이기도 하고..
성냥이 없을 때.
우리 아버지는 항상 부싯돌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부싯돌은 차돌인데, 너무 강해져서 스스로 부서질려고 합니다.
얼마나 강도가 높은지.. 스스로 부서질려고 할 정도로 강도가 높은 돌이 차돌인데, 이게 부싯돌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 전도자가 될려면 얼굴이 부싯돌처럼 강해야 돼요.
뻔뻔스럽고 누가 뭐라고 해도 웃고 나타나고 해야 돼요.
정치인들 보다 더 두꺼워야 돼요.
정치인들은 계속 서로 비난해도 만날 때는 웃고 그러죠. 두껍다 두꺼워 몇센치냐 두께가..
그런데 에스엘 예언자를 하나님께서 네 이마를 화강석보다 강한 금강석처럼 단단하게 했다. 그런 말 있죠.
여호와의 종이 되는 훈련을 해요.
예수 믿는 집에 교회 명패있는 집에 들어갈 때 구정물 통을 확 뒤집어 씌워도 삭 웃으면서 들어가는 훈련을 실제로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너무 훈련을 가볍게 하는 거예요.
.. 내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 하였은즉 내가 수치를 당치 아니할 줄 아노라
여러분 우리 자신이 정말 진리를 가지고 생명을 가지고 당당하게 담대하게 나가면 누가 우리에게 미친놈 걸친놈 하고 손가락질 발가락질 해도 너무 노여워하거나 슬퍼할 것 없다는 겁니다.
저는 미쳤다든지 돌았다든지 참 안됐다든지 별말을 다 들었어요.
제가 처음에 믿을 때 요란하게 믿었으니까, 온 동네 사람들 말할 것 없고..
그런 것 욕하는 것 일일이 신경쓰면 주님 따라가지 못해요.
그래서 우리가 좋은 일을 하고 비난받는 것은 유명해진 후에 내는 세금이야. 세금.
당연히 지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너무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질투하고 비난하고 해도 그렇게 너무 슬퍼하거나 노여워 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8절,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뇨 나와 함께 설지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올지어다
9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 나를 정죄할 자 누구뇨 그들은 다 옷과 같이 해어지며 좀에게 먹히리라
이것도 예수님과 거의 같은 정신이죠.
예수님이 당한 것과 너무너무 같아요.
10절입니다.
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그러니까 어려울 때 지금은 캄캄한 칠흙같고 눈앞이 안 보이고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그럴 때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라.
반대로 11절,
11 불을 피우고 횃불을 둘러 띤 자여 너희가 다 너희의 불꽃 가운데로 들어가며 너희의 피운 횃불 가운데로 들어갈지어다,
이것은 유대인들을 다 살라서 태워죽이겠다고 한 그 사람들이 자기가 피운 불에 자기가 들어간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 너희가 내 손에서 얻을 것이 이것이라 너희가 슬픔 중에 누우리라
그래서 예루살렘은 일정기간 동안 징계와 연단과 훈련을 다 받고 교육되면, 다시 돌아와서 예루살렘이 회복하게 될 것이고, 그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핍박하고 괴롭게 하던 사람들은 비참하게 끝장 날 것이다. 그런 얘기가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의를 위해서 핍박받으면서 싸우는 여호와의 종들은 낙심하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다 받아버리면 천국에 가서 받을 것이 없어요.
좋은 것은 이 세상에서 가능하면 많이 받지 말고, 꼭 필요한 것만 받고, 우리가 억울한 일 당한 것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것, 이런 종들 보세요.
구약시대 사람이지만 이런 종들은 예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의 영의 일을 예수님의 일을 하다가 다 매를 맞고 수염이 뽑히고 침뱉음을 당하고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고 사람들에게 싫어 멸시를 받고 관원들에게 종이 되고 비참하게 비참하게 여기 이 종은 전혀 영광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요.
그렇게 고난만 받지만 후에 얻을 영광은 현재 받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영광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뻐하라는 겁니다.
의를 위해서 받는 핍박이라면 그것을 즐거워하라는 겁니다.
기뻐하고 뛰놀라. 옛적부터 선지자들에게 세상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저도 별로 의롭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나도 별로 의롭지 않은데, 나보다 너무 심하게 악독하면 못봐주거든요.
그럴 때는 총대메고 항상 제가 앞에 나가서 혼자 총알 다 맞고..
그런 스타일인데, 그러다보니까 저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사람도 많지만, 저에게 그냥 이를 가는 사람도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 사람들은 저를 보고 이를 갈고 있는가봐.
갈아봐야 자기 이빨만 상하는 거지.
여러분 그런 사람이 이간다고 해서 위축되지도 않거든요.
최근에도 들으니까 신학생들을 면접하면서 에스라하우스 노목사에게 안 가기로 서약을 하고 면접을 받았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이구 인내심이 대단하다...
나는 벌써 잊어버렸는데 10년이 넘었는데 싸움한지가..
밀양가기 전에 6~7년간 열심히 싸웠는데, 지금까지도 이를 갈고 있다는 거야.
내가 그걸 갋아버려면 똑같은 사람이 되겠죠.
그쯤 되면 갋을 필요가 없다 싶어서 내가 말을 하지 않지만, 여러분 우리가 다 바로 한다해서 누가 칭찬하는줄 아세요. 저는 잘은 못해도 바르게 할려고 어지간히 노력을 했는데, 그런 것 가지고 얼마나 미움을 받아가지고 제가 개척해서 14년이나 있던 교회에서 쫓겨나 길바닥에 나 앉기도 하고..
그런데 다윗도 보면 그렇고, 예수님도 보면 그렇고, 예언자도 보면 다 고난이 있었어요.
맨날 칭찬과 영광만 받은게 아니야 고난이 있었다는 겁니다.
우리도 살아 갈 때 예수님을 따라 가면 역시 고난이 있다.
각오를 해야 돼요.
그리고 그런 것을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겁니다.
오늘 제목이 ‘여호와의 종을 보라’는 것인데, 여호와의 종은 땅에서는 대개 멸시 천대 고난 수난 이런 것을 당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후에 얻을 영광이 크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면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했는데, 노목사가 크다고 하면 큰지 안큰지 몰라. 그런데 예수님이 크다고 하면 진짜 클거야.
그래서 이 세상에서 선한 일 좋은 일 바른 일 의로운 일, 그런 일을 하고 우리가 욕을 먹거나 핍박당할 때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고, 오히려 주님의 이름에 영광 돌리는 그런 우리 성도님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하나님께서 모태로부터 부르시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구별되고 날카로운 칼과 같은 말씀과 듣는 귀를 주시고, 그러면서도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고 백성에게 미움을 당하고 관원들에게 종이 되고 침뱉음을 당하고 수염이 뽑히고 그렇게 했지만, 항상 하나님을 의뢰하고 바른길 걸어갔던 하나님의 종의 음성을 오늘 들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도 세상 살아갈 때 주님 이름 때문에 선한 일 의로운 일 하고 어려움 당할 때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면 반드시 거둘것을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세상 끝날까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힘써 지켜 나가게 하시고, 끝날까지 거룩한 길로 행하여서 하나님 나라에서 칭찬과 상급과 위로가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