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2일 (일) / 제 64 회 mbc
▶ 강요된 화해 -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 연출 : 김환균
* 마지막 전쟁
일본군과 일본 정부의 관여아래,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한국인 여성들이 ''일본위안부''로 끌려갔다. 그녀들의 나이 12세-28세였다.
또 많은 청년들이 징용에 강제동원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상처에 대한 사과 한 마디 없이, 한 푼의 배상도 없이 반세기란 시간
이 흘렀다.
미국에서는 이들의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 진행중이다. 변호를 맡은 변호사 배리 피셔(Barry Ficsher)는 ''우리는 2차 대전
의 마지막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소송은 나치의 강제 노역에 대해 유태인들이 낸 소송의 후속 편이었다. 그
러나 진행 양상은 대조적이다. 대(對)나치 소송에서 미국 정부는 여러 형태로 독일에 압력을 가해 독일의 합의금 지불을 이끌어냈
다.
하지만 일본에 대한 소송에서는, 미국 정부는 명백히 일본 편에 서 있다. 심지어 일본군에게 잡혀 강제노역을 한 미군 전쟁 포로들
의 소송도 기각되었다. 판결을 맡은 미국의 지방판사 워커(Vaughn R. Walker)는 2000년 9월 21일자 판결문에서, "고소인들
의 모든 보상은, 그들과 그들의 자식들이 살면서 누리게 될, 헤아릴 수 없는 자유와 평화가 그 빚의 이자를 지불하고 있다"고 말했
다.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나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A Just Peace?"
전쟁의 그림자가 옅어질 무렵인 1951년 9월 4일, 50여 개 국가의 사절단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하우스에, 평화를 위한 대 일본 강
화조약을 맺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9월 8일, 48개국이 이 조약에 서명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라고도 알려진 이 조약
은 7개의 장과 전문을 포함하고 있다. 이로써 서명국 사이의 적대감은 종지부를 찍었고, 점령의 종식에 대비한 전후의 여러 문제들
을 위한 세부 사항이 열거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했던 일본 요시다 시게루 수상은 훗날 ''강화조약이 공정하고 관대했다''고 술회했다. 배상을 물리지도
않았고, 조약의 이행에 대한 감시도 없었다. ''관대한 조약''을 주도했던 미국이 내세운 이유는, ''배상을 가혹하게 물릴 경우, 일본 경
제가 붕괴한다''는 것이었지만, 2차 대전의 추축국 중 미국의 영토를 공격한 것은 일본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또 독일에 대해 가혹
한 배상을 물렸던 (나중에 바뀌기는 하지만)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관용은 이상한 것이었다.
* "그렇다면, 한국은 제외합시다!"
2000년 8월 22일 일본 <아사히신문>이 기밀 해제된 미국 국립공문서관 자료 하나를 공개했다. 1951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 애초 한국이 연합국(전승국)의 일원으로 명기됐다가 일본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제외됐다는 내용이었다. 1949년 12월에
작성된 조약 초안의 연합국 명단에는 한국이 분명히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조약체결 직전 한국은 교전국 및 전승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체결 5개월 전인 51년 4월 23일,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당시 일본수상은 미국 쪽 조약초안 담당자 존 포스터 덜레스(John F. Dulles) 특사를 만난다. "일본 국내의 조선인은 대부분
이 공산주의자다. 그들이 평화조약의 수혜자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 한국이 조인국이 되면, 조선인이 100만 명 가까이 있는 일본은
터무니없는 규모의 청구금액에 묻혀버릴 것이다."
결국 3개월 뒤인 7월 9일, 미국 정부는 남한을 배제시키기로 결정한다. 덜레스 특사는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를 불러 "당신네 한국
은 교전국이 아니었으며, 미국은 결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 적이 없다."고 통보했다. 양 대사는 항변했다. "왜 우리가 조인
국이 못 되는가. 우리 (상하이)임시정부는 2차대전 전부터 줄곧 일본과 싸워왔는데…."
*태평양은 미국의 호수
결과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단지 지엽적으로만 평화조약일 따름이었다. 강화조약 본래의 목적인 전쟁처리라는 점에서는 불충
분한 조약이었으며, 전쟁의 청산에 이은 아시아 국가들의 화해를 가로막은 장애물이 되었다. 미국은 더 나아가, 일본으로부터 막대
한 피해를 입은 아시아 국가들을 압박해 일본과 협정을 맺도록 했다. ''억지 화해''를 강요한 것이다. 그것은 태평양은 미국의 호수가
될 것이라는, 20세기초부터 시작된 미국의 야망을 확증해 주는 일련의 상호간, 그리고 다자간 군사조약이었다.
*적과의 동침
전후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 되길 원했다. 그러나 이때는 군사 정비가 헌법으로 금지되
었던 시기였다. 소련의 공산주의 열풍과 냉전이 대두되면서, 미국은 강한 일본을 필요로 했다. 일본의 열망을 알고 미일안보조약에
동의한 미국이었지만, 그 뒤에는 일본을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방파제''로 만들려는 더 큰 계략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일본으
로 하여금 모든 아시아 전략을 추구하게 하여 미국이 세계적 전략을 꾸밀 수 있게끔 했다.
미국의 일본 주둔이 시작되었을 때,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미국인들이 지금 오니 그들을 따뜻하게 친구처럼 맞아서 다시 우정관
계를 맺도록 하자"는 기사를 냈다. 이것은 미국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일본의 잘못된 이해였다. 당시 연합국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
군은 일본의 이런 우애관계의 바램에 의해 기분이 상했다.
* 당신이 한국인이라면…,
한국은 일본의 침략정책의 가장 큰 희생양이었다. 그러나 배상의 전 과정에서 한국의 이해는 전혀 대변되지 못 했다. 조약이 체결
된 지 60여 년. 당시의 전쟁 피해자들은 아픔을 함께 나눈 친구들을 하나 둘 떠나보내는, 죽음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되었다. 해묵은
옛날 얘기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오늘도 광화문 일본 대사관 앞 수요정기집회에 나온 ''정대협'' 소속의 한 할머니는, ''이것은 한 개인
의 문제가 아니라 온 인류의 문제이다. 우리는 그 시대를 대표한 희생자이다.''라고 말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민족의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유태인의 말처럼, 희생자가 생존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역사가 미래
에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연된 정의는 반드시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벌어진 일을 우리
가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