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그 사람이 우리 중 하나와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되니, 이제 혹 그가 자기 손을 내밀어서 생명 나무의 과실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함이라.” 하시니라(창 3:22).
인간은 창조될 때 이전부터 자유의지를 갖고 지음 받았고 타락 이후에도 그의 영적 부분이 손상을 입었을망정 의지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음을 성경에서 배울 수 있다.
자유의지를 간략히 정의한다면 인간은 자기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갖고 행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부문은 이생에 관한 것들을 포함해서 영원한 정죄나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폭이 넓다. 하나님께서 그런 광폭적 권한을 아담에게 주셨기에 그의 어깨는 무거운 것이고 그가 잘못 내린 결단 하나가 온 세상과 그의 후손들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여러분에게 있는 "운명 결정권"은 여러분의 손 안에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인간 스스로가 그 권한을 행사하기 전까지 그 사람을 억지로 구원으로 밀어넣지 않으시며 기다리신다.
아니면 네가 그분의 선하심이 너를 회개하도록 인도하심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관용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무시하는 것이냐?(롬 2: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딤전 2:4) 원하시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의 멱살을 붙들고 "너 예수 믿을래, 안 믿고 한번 죽어 볼래" 협박하시는 분이 아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셨기에 지체없이 그것을 행사하시어 영원한 복락으로 정해진 사람들은 이유 불문하고 믿게 만든다고 가정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며 칼빈의 몽상에 나오는 가짜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신 부분이 무엇인고 하면 바로 그 분은 아주 아주 오래 사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번 작정하고 오래 참으시면 인간들의 인내심과는 비교도 못할 정도로 장구한 세월이 될 수 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생각하라.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그렇게 썼고(벧후 3:15).
심지어 베드로는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생각하라"고 썼고 사도 바울도 그에 동의한다고 확증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개개인에 대해서도 50년, 60년은 예사로 참아 주신다. 그러나 주님의 분노가 폭발하는 때가 오는데 그것은 여러분이 생애 끝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복음을 거절한 채 죽었을 때이다.
악한 사람이 죽을 때 그의 기대는 멸망할 것이요, 불의한 자들의 소망은 멸망하느니라(잠 11:7).
이런 자들은 주의 임재와 그의 능력의 영광으로부터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살후 1:9).
이제 본론인 자유의지로 돌아와서 칼빈주의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 보겠다. 그들의 가장 큰 부조리는 "자유의지"를 무용하게 만들고 인간은 하나님께서 갖고 조종하는 인형처럼 그려놓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저 구원받겠습니다." "영접하겠습니다" 하는 의사를 표명하는 것조차도 죄인의 월권과 교만이라는 식으로 정죄한다. 인간은 감히 스스로 "내가 구원받고 싶습니다" 고백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일방적으로 내려주기 전까지 고개 쳐박고 기다려야 된다는 것이 칼빈주의라는 그 이단 사상의 실체이다.
그래서 칼빈주의자들은 영접 기도를 하는 법이 없고 그들의 철학 체계에서는 모든 죄인들이 미리 정해진 운명대로 되어지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지옥 갈 놈은 지옥 가고 하늘나라 갈 의인은 하늘나라 가게 다 정해져 있으니까" 자기들은 그런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놓고 열심히 교회 생활 하면서 "언젠가 좋은 날 오겠지"의 태도를 견지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 달관한 자세를 그들은 칼빈주의 5대 강령 가운데 "견인"(성도의 견인)이라고 부른다. 운명론적 사고방식이 낳을 수 있는 수동적인 삶의 태도가 "견인"이라는 말로 고상하게 포장되어 있는데 심지어 그 단어는 신약 성경의 "구원의 보장" 교리와 종종 혼동되기까지 한다. 실은 전혀 사돈에 팔촌, 상관도 없는 것이 "견인"과 "구원의 보장"인데 칼빈주의자들이 자기들을 신실한 사람으로 선전하기 위해 믿는 체 하며 갖다 쓴 구원의 보장 교리가 불신자와 이단들에게 모독을 당하고 있다.
나는 의인들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들을 불러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왔노라.”고 하시더라(눅 5:32).
"회개"는 그 사람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위해 쓰고 있던 자유 의지를 돌이켜서 하나님을 향해 쓰는 것을 말한다. 자기가 저주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받고 마음에 찔림을 받을 때 자기 안에 잠자고 있던 자유 의지를 일깨워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것이 "회개"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은 구원을 위한 회개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세상의 슬픔은 사망에 이르느니라(고후 7:10).
회개는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 정, 의가 함께 수반되어 하는 것인데 즉 참된 회개에는 걸맞은 감정이 있게 마련이다. 회개하는 죄인이 가장 먼저, 또 일반적으로 나타내는 반응은 기쁨 이전에 오는 슬픔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슬픔"은 속으로 슬프지도 않으면서 장례식장에서 돈 받고 곡하는 사람들처럼 "아이고, 아이고" 하는 식으로 슬퍼하는 체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감수성이 넘쳐서 좀 슬픈 영화나 드라마만 봐도 눈물이 핑 도는 사람이 있고 부모 돌아가시는 정도의 임팩트 있는 사건 아니고서는 눈물이 안 흐르는 메마른 감성의 사람도 있다. 성경은 인위적으로 울라고 하는 게 아니라 회개의 과정에서 죄인은 "자기 존재에 대한 슬픔"이 우러나게 마련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내가 죄인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몰라본 채 주님을 원망하며 살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통분함과 안타까움에서 나오는 슬픈 감정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이 구원받기 위해서 그런 슬픈 감정에 휩싸여서 3박4일 정도 눈물을 한됫박 쏟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절대 아니고 적어도 참된 회개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죄인은 그 과정에서 "눈물 한 방울"도 없이 방실방실 웃기만 하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혹은 영접하는 그 순간에는 뭐가 뭔지 잘 몰라서 얼떨떨한 가운데 구주를 믿었더라도 이후에 감정이 밀려와서 슬퍼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여러분이 균형 잡힌 자유의지관을 갖고 있다면 슬퍼하고, 기뻐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행하고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의지라는 것을 모를 수 없을 것이다.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나 성령을 통하여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 8:13).
분명 성령께서는 믿는 자에게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기 삶의 방식을 정할 수 있게 허용해 두셨다. 성령께서 주신 자유는 선용하라고 주신 자유이지 나쁜 쪽을 선택하라고 주신 것은 아니다. 성령께서 자유 의지를 믿는 자에게 주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원치 않아도 성령께서 리모트 컨트롤해서 교회 다니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하는 로봇트로 살아야 한다.
칼빈이 제네바에 세운 실패한 신정국가인 가짜 지상천국은 바로 그런 공간이었다. 시민들 중에 일요일에 예배드리러 나오지 않는 자는 종교 경찰이 가가호호 돌아다니다 체포해서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부모에게 거친 말을 하거나 경범죄를 저지르면 종교 경찰이 와서 곤장을 때리거나 족쇄를 채워서 거리에 전시하고 욕을 먹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들이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절대 권력 앞에서 잠시 굴복하지만 뒤에서는 술 마시고 카드 게임하고 방탕하게 살고 할 짓 다하고 사는 것이다.
그런 "자유의지 박해"의 현장이 지금 어디인가 하면 "주체사상을 유일 종교로 신봉하는 북한"과 "코란과 마호메트만이 법이요 진리인 모슬렘 나라들"이다. 심지어 모슬렘 국가들에서는 서방 자본주의의 타락한 스포츠라고 극단주의 이맘들이 저주하는 "축구 게임" 응원만 해도 IS같은 종교 광신자들이 붙잡아서 총살하곤 했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말살하면 감정없는 로봇트가 되거나 권력자에게 길들여진 사나운 맹견처럼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전락한다. 인간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마귀가 하는 짓이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의 성품을 조화되게 이끄시지 세뇌된 얼간이로 키우시길 원하지 않으신다.
칼빈주의자들의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살하고 정죄한다는 데 있다면 알미니안들, 즉 우리가 "구원상실파"라 부르는 그 자들(성결교, 은사주의, 감리교 등)의 문제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자유의지를 비성경적인 데까지 확장 적용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수준이지 이 우주를 자기 의지대로 움직인다던지 세상을 자기 의지대로 천국으로 또는 지옥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결정권이 있는 수준은 아니다. 여러분이 여호수아가 했던 것처럼 "해야 멈춰라" 한다고 해서 해나 달이나 별들이 여러분에게 순종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주께서 아모리인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넘겨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주께 고하였으니 그가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말하기를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고, 달아, 너는 아얄론 골짜기에 머무르라.” 하자(수 10:12).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발설했고 그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대행한 여호수아의 말을 들었던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렇게 하고 싶다, 라고 해서 세기적 대이변이 발생했던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수 있어요. 꿈꾸면 다 이루어집니다. 꿈을 가지세요. 더 크게 가지세요. 이것은 현대 철학과 현대 교육의 캐치프레이즈일 뿐 아니라 은사주의 교회들 안에서 크게 울려퍼지는 과대망상적 자기 확신의 구호들이기도 하다.
"여러분, 부자가 되는 꿈을 꾸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백만장자로 만들어주시는 것을 구상화시켜서 마음에 계속 그려 보세요. 그럼 언젠가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조용기와 번영신학을 가르치는 거짓 목사들은 그런식으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악에 전용되게 만든다. 여러분이 전 의지와 전 상상력을 다 동원해서 부자 되는 꿈을 열심히 꾸었다손 치더라도 결국 부자가 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서 사례금과 헌금 받는 조목사나 은사주의 두목들 뿐이고 여러분은 그 자들에게 헌금만 갖다 바치고 더 가난해졌을 뿐이다.
이것은 자유 의지를 헛되고 악한 데 낭비하는 것이며 불가능한 것에 의지를 투영해서 억지로 이루어 보고자 하는 뉴에이지적 발광인 것이지 결코 성경적으로 믿었기에 바다에 산이 빠지라고 기도하는 그런 자세가 아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옮겨져 바다에 빠지라.’고 말하고, 그의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며, 그가 말한 것들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면 말한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리라(막 11:23).
여러분이 막 11:23을 응용해서 실험해 보려 하기 전에 주의해야 될 점이 있다. 여러분 마음의 숨은 동기를 거짓되이 감추지 말고 솔직히 드러내야 한다. 여러분이 부동산 투자자 입장으로서 이 산을 밀어 평지로 만들고 저 골짜기를 메꿔 평탄하게 해야 내가 아파트를 지을텐데, 따로 돈을 들이기 아까워서 하나님께 막 11:23을 근거로 들이대면서 "이 산이 옮겨서 저 골짜기에 퐁당 빠지게 해주세요."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가증히 여기시지 않겠는가?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눈에 매우 귀중한 보석 같은 성도이고 많은 죄인들을 주님께 인도한 귀한 구령자라면 어떤 사고나 위기의 절체 절명 순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우리 배를 향해 오는 저 태풍을 우리에게서 돌이켜 주소서, 우리를 살려주소서" 하는 식으로 기도한다 할때 하나님께서 그 허리케인이나 쓰나미의 진로를 바꿔놓으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차원에서 이 기도를 응용한다면 적절한 것이겠지만 여러분이 조용기식 마인드를 갖고서 "꿈꾸면 다 이루어지리라" 하면서 사심 채우기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지옥으로 던져 버리실 것이다.
이제까지 필자가 설명하며 힘을 주어 강조한 것은 자유 의지는 그 자체는 인간에게 있어 저주가 아닌 축복이며 무척 소중히 여겨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이었다. 인간은 성품이 타락해 있기 때문에 머피의 법칙대로 항상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변질시키는 악한 습관이 있다. 자유의지를 남용하고 사장시키고 악한 데 쓰기 때문에 문제가 많은 것이지 하나님께서 쓰라고 하신 좋은 방향에 쓰면,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쓰면 무한한 축복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