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사진 편지 제 855호 (08/8/21/목)
'김용만의 주말걷기 음악파일'을 '한밤의 사진편지'에
연재하기 시작하자 독자님들의 뜨거운 반응과
격려가 쇄도하여 놀랐고 또 기쁜 마음입니다.
역시 우리 것은 좋은 것이고 오래 된 것은 그만큼
정이 들고 익숙한 것이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지난번 김용만 님이 써보낸 '황성옛터'에 관한
이야기는 원래 긴 원고여서
제가 맘대로 토막을 내어 3회로 나누어 실을까
했는데 그 생각을 바꿔서 두 번에 보내드리겠습니다.
김용만님이 보내준 원고 중 지난번에 전해드리지
못했던 나머지 부분을 아래에 모두 보내드립니다.
좋은 원고를 보내주신 김용만 님께 감사드리면서
보내주신 귀한 사진 3장이 �겨지지 않아
싣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합니다.
함수곤 드림
김용만의 주말걷기 음악 파일(3)
글: 김용만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빅터레코드, 1932)
1.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버레(벌레) 소래(소리)에 말 없이 눈물 져요
2.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난(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3.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 없난(없는) 이 심사를 가삼속(가슴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넷(옛)터야 잘 있거라
위의 ‘황성의 적’은 ‘낙화유수(강남달)’ 이후 나온
여러 영화주제가들과 함께 ‘30년대 초반에 유행한
여러 노래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널리 퍼진 노래였으며,
일본인까지 ’조선의 세레나데‘ 라고 하며 애창했던 노래였다.
1933년에 나온 음반에서부터는 곡명을 ‘황성의 적’에서
노랫말 첫 구절인 ‘황성옛터’로 바꾸어 대중 속으로
더욱 깊이 다가가 우리 민족의 마음의 벗이 되었고,
망국의 한을 달래는 노래로 정착하였다.
이렇게 민족정서가 강한 노래이다보니
일제 식민당국이 이 노래를 요주의곡으로 보고,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수 진방남(작사가 반야월)이 신인가수 시절에
이 노래를 무대에서 부르다가 일본순사에게 끌려가서
혹독하게 문초를 받고 겨우 풀려나오기도 했다는 걸 보드라도,
일제 식민당국이 이 노래에 대해 얼마나 신경질적으로
보고 있었는가를 말해 주는 좋은 예가 된다.
우리 가요 발전사의 입장에서 보면,
이 노래는 낙화유수(강남달)로 시작된 창작가요를
대중 속에 뿌리내리게 하여 본격적인 의미의
대중가요 시대를 열게 한, 대중가요의 효시이자
불후의 명곡이었다.
또 이노래는 뒤이어 전개되는 본격적인 트로트곡 중심의
대중가요 전성시대와 연결되는 징검다리가 되면서도,
노래의 작품성이 뛰어나 다음 시대를 향해 건너가는 다리로서
우뚝 선 가교와 같은 역할을 한 명곡이다.
‘30년대 중반부터 이난영, 남인수, 백년설 등의
인기가수들이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
번지없는 주막‘ 등
트로트 계열의 새로운 인기곡들을 쏟아내어
한국 가요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되자,
’황성옛터‘는 새로운 창법과 뛰어난 기량을 갖춘 가수들이
부른 수많은 새로운 곡들에게 밀려나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차츰 잊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1941년, 인기가수 남인수가 ’황성옛터‘를
리바이벌시킴으로써 다시 유행을 타게 된다.
이 노래의 작사자 왕평이 평북 강계에서 공연중에
급서한 것을 애석해 하여 낸 추모 곡
’오호라 왕평‘(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남인수 노래)을
타이틀곡으로 하는 추모음반에 남인수가 부른
’황성옛터‘가 실렸던 것이다.
추모곡인 ’오호라 왕평‘보다 남인수가 부른 ’황성옛터‘가
더욱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남인수가 부른 ’황성옛터‘ 는
종래의 여성가수가 불렀던 취향과는 달리,
새로운 감각으로 대중에게 다가가 민족의 가슴 가슴에
깊이 새겨지는 노래로 각인시켜,
이 노래를 영원한 민족의 노래가 되도록 했던 것이다.
가요계에서는‘황성옛터'를 작품성으로 보아
‘목포의 눈물’(이난영),‘산유화’(남인수)와 함께
우리 가요의 3대 명곡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노래는 그 후 고복수, 김정구, 신카나리아, 현인, 이미자,
윤복희, 패티김, 조용필, 나훈아 등 수많은 가수들이 불러
각 가수의 개성이 가미된 ‘황성옛터’를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한결같이 이 노래가 풍기는 쓸쓸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가
살아있는 것은 가사와 멜로디의 작품성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조용필이 일본 NHK홀 라이브 공연에서
피아노의 잔잔한 반주 속에 부른 ‘황성옛터’가
열렬한 박수를 받는 것을 보면, 좋은 감의 멜로디에서
느끼는 감정은 일본인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지난 70여 년간 우리 민족에게 그토록
사랑받으며 불려진 것은,
이 노래가 지닌 근본이념이랄까 사상이라 할 수 있는
나라를 빼앗긴 슬픔과 회한을 울분으로 통곡하는
민족감정 또는 민족정서가 우리들 가슴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황성옛터’를 좋아하여 기쁠 때나
우울할 때나 이 노래를 단골로 불렀다고 한다.
필자가 일본에서 근무할 때에 일본인과의 모임에서
마지못해 노래를 불러야 할 때에는 ‘황성옛터’와
이미지와 분위기가 비슷한 감이 있는
코우조노쯔키(荒城の月)라는 노래와
‘황성옛터’를 함께 불렀다.
코우조노쯔키(荒城の月)는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100년간 실려 왔던 창가(唱歌)로서 미야기현 출신의
도이반스이(土井晩翠)와 오오이타현 출신의
타키렌타로(滝 廉太郎)가
작곡한 창가의 명곡으로서, 달빛 비치는 옛 성에서
옛적의 영화를 지금의 현상과 대비시켜
회상하면서 느낀 감회를
노래한 교과서용 노래 (소위 문부성의 노래)였다.
Ⅱ.'황성옛터' 작사자 왕평(王平)
이 노래를 작사한 왕평(王平, 1908-1940) 은
본명이 이응호(李應浩)로서,
경북 영천 출신이고, 극작가, 연극 및 영화 배우,
작사가로 활약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배재중학을 나온 뒤 현철과 이구영이 주도하는 ‘조선배우학교’
첫 입학생으로 들어가 연기 수업을 받았다.
1930년대 초 ‘조선연극사’의 전속작가로 활동하면서
‘이팔청춘’, ‘학창 로맨스’ 등의 극본을 집필했고,
‘연극시장’, ‘연극호’ 등에서도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32년부터 포리돌레코드 문예부장을 맡아
많은 가사를 발표하였는데,
‘황성옛터‘, ’조선팔경가‘(선우일선) 등이 대표곡이다.
또한 1933년에 나오기 시작하여’ 35년 속편,
‘39년의 완결판까지 무려 8장이 발표된
포리돌의 인기 극반(劇盤) ’항구의 일야‘는
그가 작품을 쓰고 전옥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이다.
이 음반이 성공한 이후, 낸 ’아내의 무덤을 안고‘,
’지나간 그날’ 역시 그가 쓰고 전옥과 함께 출연하였다.
‘38년에는 성봉영화원에 참여하여 ’나그네‘, ’군용열차‘ 등에
출연하였다. 1940년 강계에서 ’남매‘를 공연하는 도중,
무대 위에서 뇌익혈로 별세했다.
(이영미 외,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p.20)
Ⅲ.'황성옛터' 작곡자 전수린(全壽麟)
작곡자 전수린 (全壽麟 1907∼1984)은
1907년 12월 15일 開城에서 출생했다.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바이올린 연주법을 배우면서
음악에 눈뜨기 시작하였고 樂典을 배웠다.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기 위하여
호수돈여학교 교장 리콜스 부인으로부터
바이올린 개인지도를 받기도 했다.
열아홉 살 때 상경하여 연악회(硏樂會)를 주도하고 있던
홍난파가 주관하는 파락한(破樂限)의 멤버로서,
바이올린 연주 활동을 하면서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 지도를 받았다.
1928년 순회공연 극단인 동방예술단에 입단하는 것을
시작으로 취성좌 등 악단에 관계하면서 배경음악을
연주하는 악사와 작곡가로 활동하였다.
1928년, ‘황성(荒城)의 적(跡)’을 작곡하여
우리 나라 사람의 손에 의해 단조 트로트의 시대를 연
첫 곡이 되게 했다. ‘황성의 적’으로 배우 이애리수를
유명가수로 만든 그는 ‘나는 열일곱살이예요’로
열일곱살의 소녀가수 박단마가 스타덤에 오르게 했으며,
박단마
‘알뜰한 당신’으로 16세의 소녀 황금심을 하나의 데뷔곡으로
황금의 신인이 되게 했다.
황금심
‘42년 창씨개명(創氏改名)한 자신의 이름을 딴
’타마카와(玉川)위문대‘를 조직하여 만주와 일본의
북해도 탄광지대에 가서 한국 노무자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그는 트로트는 물론, 신민요, 재즈송에 이르기까지
작곡 영역을 넓혀, 1930년대 초,중반을 리드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트로트곡인 ’알뜰한 당신‘(황금심),
얄궂은 운명(이인권), 무정(손금용),
재즈나 블루스 색채가 강한 ‘나는 열일곱살이예요(박단마),
’외로운 가로등‘(황금심), 신민요적 색채가 있는
’삼천리 강산 에라 좋구나‘(이애리수) 등
다양한 영역에 걸친 인기곡을 계속 발표하였다.
1926년경에 작곡하여 막간가수에 의해 불리어지다가
1932년에 가서야 취입된 ’고요한 장안(長安)‘(이애리수)은
’아다나사케(仇情 또는 怨情)‘라는 제목으로
일본에서도 크게 유행하였다.
이 노래는 일본의 코가마사오가 1931년 최초의 엔카로
발표한 ’술은 눈물인가 탄식이런가((酒は淚か溜息か)‘가
이 노래를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었던 곡이다.
일본 엔카의 원조라고 하는 이 노래가 ’고요한 장안‘의
표절곡이라면 엔카보다 우리가 트로트류의 대중가요를
먼저 출발시켰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왜색가요 시비도 자연히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코가마사오는 8세 때부터 인천에서 자라
인천창영소학교와 서울의 선린상업학교를 거쳐
명치대학을 다닌 경력이 이야기해 주듯이,
그의 많은 음악적 기초와 소양은 한국에서 쌓여진 것이
많을 수 밖에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본엔카를 대표하는 코가마사오의 엔카에
한국의 음악이 스며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코가마사오는 전수린과 일찍부터 돈독한
교유관계룰 가지고 있었고,
코가마사오가 ’술은 눈물일까 탄식일까‘를 내놓아
엔카가 출발될 즈음인 ’30년대 초기에,
우리 나라에는 벌써 전수린을 비롯하여
김교성, 김준영, 문호월, 김용환, 손목인 등
쟁쟁한 작곡가들이 있었기에,
우리 가요가 엔카의 영향으로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 없고,
처음부터 엔카는 엔카대로 우리 가요는 우리 가요대로
독자적으로 출발하여 상호보완 관계를 가지면서
발전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전수린은 7남매를 거느린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하다가 ‘46년경에 서울 충무로 4가에서
중고 악기를 파는 악기점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폐점하고 연주생활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63년에 이서구 작 방송드라마의 주제가
’강화도령‘을 작곡하여
좋은 반응을 얻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도 했다.
1970년 한국가요반세기동지회 초대회장을 지냈고,
1984년 12월 28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야후백과사전, 위키백과, 이영미 외;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정영도;
철학교수와 대중가요의 만남, 이호섭의 가요학당에
실린 여러 글 등 참고)
Ⅳ.’황성옛터’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
'황성옛터'를 불러 유명해진 가수 이애리수(1910년-)는
개성 출신으로 본명은 이보전(李普全)이고,
‘애리수’라는 예명은 서양 이름 엘리스를 음차한 것이다.
이애리수는 신파극단의 희극배우인
외삼촌 전경희를 따라 1920년 9세 때에
김도산이 이끌던 "가극좌"에 아역배우로
잠시 활동한 후 고향인 개성의 호수돈 여학교에
다니다가 1929년 흥행연극단체인
‘취성좌’[聚星座, 곧 이어 朝鮮演劇舍)로 바뀜]에
입단하여 천한수(千漢洙)가 각색한
‘눈먼 동생’으로 데뷔하였다.
이애리수
그 후 톨스토이의의 부활에서 여주인공 카츄샤 역을
맡으며 서울 단성사에서 신의주, 청진 등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고 그의 미모에
조선의 청춘남녀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카츄샤역으로 인기를 끌던 이애리수의 막간 노래가
열기를 불러일으키자 자연히 레코드 취입을 하게 되어
1931년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메리의 노래’, ‘라인 강’, ‘부활’ 등 번안곡을 취입하였다.
1932년에는 이기세(李基世)의 주선으로
빅터레코드로 옮기면서 일본 동경으로 가서
취입한 ‘황성의 적’(황성옛터)과 ‘버리지 마세요’를
취입했는데, ‘황성의 적’은 5만 매의 음반이
판매될 될 정도로 크게 히트하게 된다.
그 뒤 토월회 후신인 태양극장(太陽劇場)에 입단하여
주연배우로 활동하였고,‘우리 선생님'‘첫 출근’등의
작품에 안인표(安仁杓)·최명화(崔明華) 등과 출연하였다.
1930년대 초 폭발적인 인기선상에 있던
이애리수는 1932년 연희전문학교 학생 배동필과
사랑을 나누게 된다.
시골에 본처가 있던 배동필 부모의 반대로
결혼이 불가능해지자 이애리수는
음독자살을 꾀하였으나 소생하였다.
결국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몄으나
이듬해 1933년 두번째 음독자살을 꾀하게 된다.
1933년 5월 21일 조선일보 기사에는
"인기 유행가수 이애리수가 또 음독자살"이라는
제하에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
"왕년의 빅터레코드 가수 이애리수(23)가
19일 오후 11시경 시내 돈의동 13번지
자기집 건너방에서 또다시 100개의 칼모친을 먹고
자살코저 하였다.
이애리수는 왜 젊은 생애에 두 번이나 애틋한 청춘의
모습을 꺾어버리기를 꾀하였을가?
이제 그 이유를 들으면 지난해 홍련의 참극을
빚어내던 그 애인 배동필과 사랑의 개가를
높히 부른후 영희(3), 윤희(2) 두 딸까지 낳아
스윗트 홈의 자장가를 부르던 중 지난 음력 정월부터
일차 결혼 처인 장정은(23)이 다시 찾아왔다.
그는 친정에 가서 쓸쓸한 생활을 하다가
"죽어도 나는 배씨의 귀신이 되리라"하고
지난달 20일 경부터 배씨집에 머물게 되자
사랑의 보금자리에는 갑자기 어두운 구름이 끼게 되자
19일 밤에 친가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유서 한장을
쓰놓고 음독한 것이라 한다.
그는 고영순내과의원에 입원치료중인데
생명이 위태하다고 한다."
이 신문기사를 마지막으로 이애리수는 가정에서
일절 문밖 출입이 허락되지 않고 종적이 묘연하였다.
1933년 5월에 김억 작사, 전수린 작곡
"포구의 밤" 을 발표하였고 1934년 4월 "꽃각시 설움"이라는
음반이 이애리수가 낸 마지막 작품이다.
1970년초 동아일보에서 연예수첩 반세기를
집필하던 이길범 기자가 이애리수의 행적을
추적하여 수원에 찾아갔으나 대면을 기피하고
피신하였다고 한다.
(이근태, 초창기의 인기 여가수 이애리수,
가요114, http://www.gayo114.com. 음악이야기 4.)
황문평에 의하면 이애리수는 1957년, 서울 종로 5가에서
대중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당시 방송국 직원을 통해서 방송출연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전수린을 통해 동아방송의
‘추억의 스타앨범’ 시간에 출연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전수린의 설득도 무위로 끝나버렸다.
현재는 경기도 안성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다.
(정영도, 철학교수와 대중가요의 만남, 화산문화, 2008, p. 221)
|
댓글 7 인쇄 | 스크랩(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