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지루하고 피폐하면 바람없이 비오는 날 비행기를 타보라 권한다.
예매는 필수.
비행기 날개가 허공을 가리지 않는 창 쪽 좌석을 확보해야 짧은 시간이나마 하늘 여행의 보람이 크지만, 안 쪽 좌석은 불편하고 답답하니 그럴 바엔 기차가 좋다.
검은 먹구름을 뚫고 하늘에 오르면 눈부신 흰 구름의 용틀임 위로 붉은 태양은 무시무종의 푸른 허공에 저 혼자 빛난다. 눈 아래 흰 구름바다의 신비경에 나란 자아는 무아지경에 이른다.
45분. 나는 티 테이블에 턱 고우고 차 한 잔 천천히 마시며 김해에서 김포까지 눈 시리도록 구름바다 푸른 허공에 눈 박고 흐르다 그 시선 아쉽게 거두고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얼킨 지상으로 진입한다.
여의도 kbs 본관 제 2 스튜디오에서 ‘쇼 진품명품’ 녹화가 있었다.
큰방 또는 작은 방. 그리고 서재의 한 모서리에 길게 펼쳐져 있던 괴석난죽도 10폭 병풍.
몽인 정학교의 문인화는 이미 방송국에 맡겨져 있다.
정학교. 丁學敎. 정확교. 丁鶴喬. 이름조차 분분한 그이의 본관은 나주(羅州). 일명은 학교(鶴喬). 자는 화경(化景·花鏡). 호는 향수(香壽)·몽인(夢人)·몽중몽인(夢中夢人). 벼슬은 종4품인 군수를 지냈는데 1832년에 태어나 82수를 누리고 1914년에 적멸에 들었는데 나는 그의 아호가 말해 주듯 존재의 실상을 무심으로 바라보는 그의 반야. 초월지에 사뭇 경건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의 아호. 몽인. 몽중몽인, 즉, 꿈의 사람, 꿈속에서 꿈을 꾸는 사람.
그의 글씨는 전(篆)·예(隸)·행(行)·초(草)에 모두 능했으며, 그림은 주로 죽석도(竹石圖)·괴석도(怪石圖) 등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린 화목(畵目)을 많이 그렸는데, 담백하면서도 섬세한 필치로 바위의 특성을 예리하게 포착, 비수처럼 날카롭게 묘사하고 있다.
유작으로 청수상의죽석도(淸壽相倚竹石圖), 기암고용도(奇巖孤聳圖). 외에도 죽석도, 괴석도 등 다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다수 중 한 점이 내 집안의 귀한 그림으로 대대로 대접받고 내려와 내방객의 시선을 잡아당기고 내 손때를 묻히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거울처럼 노상 보고 감상했던 몽인의 괴석난죽도와 그 외 우향 임경수의 신선도와 연대. 작가 미상의 일출송학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문인화. 사군자 등의 서예작품에 소소한 애착이나 호감조차 전혀 가질 수 없었는데, 내가 가진 몇몇의 작품에 눈높이가 고착고정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화를 즐기는 감성과 감각이 내 나름의 편견에 사로잡혀 오만방자해져버린 탓이다.
그렇게 내 안목에 콩깍지를 씌운 그의 그림과 글씨. 우리 집 묵객, 경재 조영조 선생이나, 무변 김재근 법사나 돈재 이효재 선생이나 내 가까운 지우들 서예학원을 열고 있는 상림이나 운정이 그이들이 그냥 바라만 보아도 좋다고 칭찬하던 그 몽인의 작품을 공중파를 통해 공개해 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선, 녹화 진행을 서술하기 전, 몽인에 얽힌 광화문 얘기를 먼저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광화문은 조선왕조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으로서 1395년 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조선초기 문신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으나 세종 8년에 지금의 광화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현판의 글씨를 쓴 인물은 알려져 있지 않다. 경복궁의 이름은 시경 君子萬年介爾景福 (군자만년개이경복)에서 따 온 말로 임금의 복을 돕고 빈다는 의미를 담았고 광화는 빛이 사방에 비친다는 의미로 임금의 덕이 높으면 그 은혜가 초목까지 이른다는 깊은 의미를 담았다고 정도전의 충성과 지성의 결정체인 三峰集에 나타나 있다. 삼봉은 정도전의 아호.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궁궐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해 버린 선조임금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백성들에 의해 소실된 이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가 일제시대 총독부 건설에 의해 동편으로 이전되었고, 이마저 6.25 한국전쟁 때 다시 초토화된 것을 1969년 2월 박정희 집권시 다시금 중건한 것이다.
2006년 1월. 대전에 소재한 문화재청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원형 복원을 결정하고 광화문의 편액을 내리게 되었다. 그때 문화재청장 유흥준은 예상 이상의 반대 여론에 부딪혀 엄청난 오해와 비난에 휘둘리게 되었는데 현 노무현 정부의 박정희 지우기에 편승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산물이며 숨결인 문화재 복원은 순수지향의 문화재 복원으로 바라볼 따름이지 정치적 시선과 논란은 비켜가는 게 옳지 싶다.
그렇게 내려지고 중앙 고궁 박물관으로 옮겨진 편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에 광화문을 중건하며 손수 쓰고 걸게 된 이른바. 사령관체의 친필 한글 광화문.
사령관체란 박 전 대통령의 측근들이 그를 향한 애정과 우호의 덕담을 담아 글이 풍기는 강직함과 호방함을 일컬었는데 신영복 선생의 어깨동무체나. 박윤규 선생의 바람체 같은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다시금 복원될 광화문의 편액은 뜬금없이 정조의 비문 탁본에서 한 글자씩 뽑아서 집자해 광화문 현판을 복원하자는 의견도 일부 제시되는데 그 이유는 역대 제왕의 글씨 중 정조대왕의 글씨가 으뜸이라는 문화재청 유흥준 청장의 부언설명이 뒤따랐기 때문이지만 그저 여러 의견 중 하나일 따름.
그런 와중에 아주 뜻밖의 자료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2006년 광화문을 해체하는 과정과 자료수집 중 ‘경복궁 영건일지’속의 새로운 기록이 세인의 눈에 띈 것이다.
영건일지’에는 임태영이 ‘광화문 현판 서사관(書寫官)’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서사관이란 글씨를 쓰는 임시직을 뜻한다. 임태영이란 그의 이름은 ‘함원전’ ‘천추전’ ‘영추문’ 등 주요 전각 현판을 쓴 다른 서사관 이름들과 함께 적혀있었다. 임태영은 본관이 풍천으로 좌우 포도대장, 어영대장 등을 지낸 고위급 무관이며, 경복궁 중건 때 공사 감독기구인 영건도감의 제조를 겸직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s이런 진실 이전에 광화문 편액은 어떤 연유로 몽인. 정학교의 글씨로 회자되고 기록되었을까? 이유는 다음과 같다.
1865년과 1867년 조선 후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 중건 당시의 일이다.
홍선 대원군에게 아랫사람이 ‘복권된 경복궁의 현판을 쓰시라 권했을 때 대원군이
“나보다 정학교가 잘 쓰니 그에게 부탁해라”는 추천이 회자되고 기록되어 거의 정설로 굳어져버린 것이고, 근대기 서화가인 위창 오세창의 (1864-1953) 고금 서화가들의 일대기와 작품 품평을 기록한 ‘근역서화징’에서도 위의 일화가 기록되어 여러 관계자들이 발췌 인용한 탓이지만. 2006년 이후 ‘경복궁 영건일지’ 이후 학계에서도 정학교보다 후대에 태어난 오세창이 잘못 기록했을 공산이 크다”는 오류를 조심스럽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재청의 새로운 발견문서인 ‘영건일지’는 ‘공식기록;인 만큼 서사관 임태영이란 기록이 틀릴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영건일지를 바탕으로 그 신빙성을 높여 광화문 현판 원작자를 문인 정학교에서 무인 임태영으로 바뀌어야 마땅하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또한 고문서 연구자 김영복 선생도 경복궁 중건 시기가 1865~1867년이므로 몽인의 그대 나이 30대 초반인데 그런 대작 현판을 썼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며 “ 영건일지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아 광화문 현판 원작자에 대한 통설은 바뀌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는 언급이다.
그러므로 2007년 7월 현싯점에 조성될 광화문 편액은 사진자료를 기초한 디지탈 작업을 통해 서사관 임태영의 글씨로 복원될 개연성이 아주 높아진 것이다.
각설.
그리고 여의도 kbs 본관.
신분증을 제시하고 출입증을 받았다.
약속된 시간에 출연진들이 다 모였다.
진행자 왕종근 아나운서.
감정계의 공인된 지존, 진동만 선생과 김영복 선생.
연예인 감정단으로 선정되어 즐거움을 더해 주는 영화배우 김청. 그리고 개그맨 장용과 배동성과 함께 몽인의 작품 ‘괴석난죽도’는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왕종근 아나운서가 여러 형제 중 유독 나의 집에 이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지를 물었다.
나의 대답은
‘관심’의 문제라 했다.
그들은 사업과 부동산에 관심이 지대하고, 나는 글과 그림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형제들은 낡고 빛바랜 글과 그림을 예사롭게 보고 지나쳤지만, 나는 내 앞에 놓인 글과 그림을 비록 낡고 퇴색했으되. 관심과 애정으로 챙기고. 바라보고, 다른 작품과 비교하고 즐기며, 귀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김영복 선생이 몽인의 글씨를 논했다.
“오늘 보는 작품은 행서 초서로만 썼지만, 몽인은 모든 서체에 능한 분이셨지요. 그분의 초창기 서풍은 처음 어떤 누군가의 영향을 반드시 받았겠지만 점차 아주 독특한 자신만의 화풍과 서체를 구축해나간 분입니다. 그리고 글의 내용은 漢詩로 지은이는 알 수 없으며 한시의 배경은 중국으로 추정되는데 문장의 흐름과 멋, 정취가 빼어나다 볼 수 있어요.”
고서화 감정 40년의 이력을 가진 진동만 선생은 몽인의 그림을 두루 지적하며 성실히 감정했다.
“몽인은 괴암괴석을 잘 그리기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의 그림에는 괴암괴석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전혀 기교를 부리지 않고 짧은 붓질로 쭉쭉 뻗어 올려 절제된 분위기. 강직한 느낌. 그리고 속도감이 느껴지게 하는데 오늘 이 작품 또한 그의 친필 진품으로 책을 쌓아 놓은 듯한 괴석과 그 사이사이 조화를 이룬 대나무를 뛰어나게 잘 그렸습니다.”
또한, 진동만 선생은 그때 당시 몽인과 더불어 문장과 필력을 높이 평가 받았던 허련 소치의 괴석도 두 점을 복사한 자료를 미리 준비해서 몽인의 괴석도와 비교, 시청자들의 안목과 상식을 더 높여 주었다.
그리고 서예에 능숙한 솜씨를 가진 영화배우 김청이 김영복 선생의 도움을 받아 싯귀 한 소절을 낭랑하게 읊었다.
깊은 계곡 난초는 얼굴 꾸미지 않고 제 마음 가는대로 수석을 희롱하네.
향기 옆에는 울타리가 없어 사람이 캐 가는 것을 스스로 피하고.
시종일관 웃음이 많은 개그맨 배동성의 음성은 맑고 우렁찼다.
사람들은 달에 사는 나무로 알고 있지만 산과 바다의 그림자가 아닐까.
조각돌로 터진 하늘 기우고 나니 성기성기 푸른 구름 차갑게 걸려있고,
근육질의 개그맨 장용의 목소리도 나직히 진지했다.
넓은 언덕에 난초를 심었더니 봄날 제일가는 향기가 일어난다.
꽃 들고 웃으며 손가락으로 한 곳 짚으면 그곳에 급히 강물이 흐르고.
이렇게 몽인의 작품은 전문가의 세밀한 감정과 세 사람의 한시 낭송 후,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보여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 출연진과 티없이 고운 피부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배우 김청의 고운 목소리 귓전에 걸고.
후손의 정신적 물질적 풍요를 도모해 여러 귀한 물건 아낌없이 물려주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믿음과 애정을 온 몸으로 재차 확인하며. 내 삶 이전 175년전의 풍류객, 꿈속의 사람 夢人의 숨결과 재취를 가슴에 품고 돌아오는 길 다시금 하늘길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