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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7)
- 온유한 자는 복 있다 -
마태복음 5장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복 있다 - 그 세 번째, “저희가 온유함으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의 첫 번째인 ‘예수님을 따르는 천국을 소유한 자는 복 있다’는 것을 여덟 가지를 들어서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은 그것의 세 번째인 ‘온유한 자는 복 있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온유한 자가 복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 있다와 애통하는 자는 복 있다는 말씀에 이어서 하신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것은 또한 자기를 부인하는 것에 있는 것인데 이는 그가 세상 사람들과 같은 성격에서 그 마음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온유한 자는 복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한 자가 어떤 자이길래 그들이 복 있다고 하신 것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온유한 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를 온유한 자로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온유하다고 하신 것은 왜인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의 이해를 위해선 구약적 배경을 알아야 함
‘온유한 자’라는 말에 사용된 “온유한”(meek)은 이 외에도 “겸손한”, “온순한”을 뜻합니다. 이것은 양처럼 순하다는 것에서인데, 예수님은 이 단어를 사용하신 것에서 그 말하고자 하는 온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데 있어서 무엇이 온유한 것인지, 그래서 어떤 자가 온유한 자인 것인지에 대해서 어떤 설명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무런 설명을 달지 않고 이 말을 해도 이 말을 듣는 제자들은 그 온유가 어떤 뜻이며, 그래서 온유한 자가 어떤 자를 두고서 하는 말인지를 알아듣는 그런 이해가 있는 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의 심령이 가난한 자와 애통하는 자가 구약적인 배경에서 말해졌듯이 온유한 자 또한 구약적인 배경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온유함의 첫 번째 전형(典型) : 모세
구약성경은 온유함의 전형(典型)으로 모세를 듭니다. 민수기 12장에서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을 때, 미리암과 아론은 그 사실을 비난하면서 “여호와께서 모세하고만 말씀하셨느냐? 우리하고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라고 말하며 비난하였습니다. 여호와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이러한 비난을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런 모세를 “이 사람은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라고 말하여 모세만큼 온유한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는 사실을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 이 세 사람에게 회막 - 만남의 장막 - 으로 나오게 하고서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 가운데 선지자가 있다면 나 여호와가 환상을 보여 내 뜻을 알리고 꿈 속에 나타나 말을 하겠지만, 나의 종 모세에게는 나의 온 집을 맡겼다. 내가 모세하고는 얼굴을 마주하고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두 다 말해 준다. 심지어 모세는 나의 모습까지도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너희가 감히 무서워하지도 않고 함부로 나의 종 모세를 비난하느냐?” 라고 하시며 진노하시고 그들에게서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증표로 구름이 장막에서 걷히고 미리암의 몸에 문둥병이 번졌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크게 두려워하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미리암을 고쳐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온유함에 아론과 미리암을, 그리고 온 이스라엘을 두고서 구원 사역을 행하시는 자비를 베풀어 가셨습니다.
온유함의 두 번째 전형(典型) : 다윗
예수님은 구약의 어떤 배경 속에서 이 온유한 자를 말씀하셨는지를 또 다른 한 곳에서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온유한 자를 말씀하심은 구약의 예언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온유한 자에 대한 예언이 있는 것입니다. 그 예언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1),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시 76:9)입니다. 예수님은 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온유한 자에게 복을 선포하심은 구약의 시편 예언들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인가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구약의 시편에 예언되고 있는 온유한 자와는 동격입니다. 다시 말해서 같은 성격의 인물인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의 시편에 예언되고 있는 온유한 자가 어떤 자인지를 알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째서 온유한 자로 복 있는 자인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시편 기자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1)라고 예언하였는데, 이러한 예언을 하게 된 배경은 다윗이 이 시를 지은 데서 알게 됩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온유한 자’를 ‘행악자’와 대조하여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행악자들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더 잘 산다고 할지라도 걱정하지 말고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그들은 쉽사리 말라 버리는 들풀과도 같이 사라질 것이며, 곧바로 시들어 버리는 나무와도 같이 죽어갈 것이라고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망할 것인지를 예언하여 알려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길 것을 말씀하며, 하나님은 그러한 그를 대낮의 환한 햇빛처럼 바르고 정직하다는 것을 드러내 주실 것이므로, 그는 행악자들이 못된 짓을 일삼아도 잘먹고 잘사는 것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는 땅을 차지하고 살 것이지만 행악자는 그 땅에서 쫓겨나고야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11절에서의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란 행악자들의 횡포로 가진 것 없어 서러움을 당하며 늘 불행 속에 있던 가난한 자들이 안식<평화>을 고대하며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림으로 마침내 땅을 차지하고 그토록 고대하던 평화를 누리며 기쁨에 가득 차 살 것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시편에서의 온유한 자는 단순히 양처럼 순하여 온순하고 겸손하다는 사람의 인격, 인품, 성격을 가진 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악자의 횡포에 의하여 압제를 받으며 착취당하는 불행에 있는 힘없고 나약한 가난한 자들로 그들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분노가 일어나고 불평을 토하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신원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갚으심이 되어서 자신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을 고대함으로 참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는 자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온유한 자인 것은 말이죠. 이들의 마음이 성품적으로 착해서, 온순해서, 그래서 겸손을 표하는 자기를 낮출 수 있는 마음에서가 아닙니다. 이들이 온유한 자인 것은 행악자들에게서 억눌림을 당함으로 언제든지 분과 노가 폭발하며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끓어오르는 솥단지인 자들이 하나님께서 화를 가라앉히고 분을 삭이며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을 간절히 애타게 기다리면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지만 행악자들은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기 때문에, 조금만, 이제 아주 조금만 기다리면 그 못된 것들은 다 없어져서 너희가 그들을 보고자 하여도 너희가 그들을 결코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있으며 그 약속을 의지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가 말하여 전해주고 있는가 하면 다윗 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을 다윗 왕은 자신에게 있는 일을 가지고, 그러니까 다윗 자신을 가지고서 하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르기까지 사울 왕을 비롯하여서 많은 대적과 원수들에게 쫓겨 가나안 땅을 떠나 고난과 시련을 겪습니다. 그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나안 땅에 돌아오게 하여 그 땅을 차지하게 하는 복을 누리게 하실 것인데, 이는 그와 언약을 맺어 그의 나라와 집을 견고히 세워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온유함에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든지 터져 나올 수 있는 분노와 불평을 토로할 활화산 같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정작 하나님이 주신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고 그곳에서 영원히 복된 자로 살아갈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는 다윗이며, 그의 집에 살고 있는 자이며 그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대적하는 자와 원수들을 그 땅에서 내쫓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할 자들의 것이 되게 할 것입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는 곧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조금만 참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사실 다윗의 대적자요 원수들을 다윗과 그 집, 그 나라에서 내쫓아 몰아내기까지, 그래서 그때를 오게 하기까지 온유함으로 참고 계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온유함에 다윗을 두고서 다윗에게 그가 화를 가라앉히며 분을 삭이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하게 여실히 볼 수 있기까지 참음으로 기다릴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라고 예언한 것이며, 다윗에게 행하신 그 온유한 자를 하나님은 자신이 보낸 아들을 통하여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일으키실 것임을 아삽의 입을 의탁하여서 “하나님이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일어나신다”라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선언하신 온유함의 복
그래서 말입니다. 이렇게 다윗에게 말씀하신 그 온유함으로, 그리고 아삽에게 말씀하신 그 온유함으로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온유한 자는 복 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온유한 자가 되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은 예수께서는 그들을 자신을 따름에 있게 하심으로 그들의 주이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자로 불러 제자 삼은 자들을 자신의 나라 속에 두고 계십니다. 그런 그들은 비록 이 땅에서 잠시 나그네와 같은 몸으로 있지만 그동안에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몸은 결코 평안에 있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은즉 주님을 따르는 그들 또한 배척 - 대적 - 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며,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정해진 운명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배반하여 죽게 하고, 아버지가 아들을 원수처럼 여기게 되고 자식이 제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 것입니다(마 10:21-22). 이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자신들이 따르는 그리스도 때문에 잡혀 심문을 당하고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며, 통치자들과 왕들 앞에 끌려갔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그 앞에서 온유함으로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앞에 주님의 증인이 되는 기회인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10:17-18).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온유함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이 담대함이 그들에게서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요. 그들의 주이신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인 까닭입니다. 주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나라를 주실 것을 확정하시고 자신의 의 속에 그들을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그들의 주님에 의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을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차지하게 할 날이 오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다시는 그들의 대적자요 원수들을 두 눈을 씻으며 아무리 찾아보고자 하여도 찾을 수 없도록 영원히 내쫓아 몰아내고 영영한 불못에 내던질 것입니다. 그때가 곧 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하여 애통하여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일이 많을지라도, 그래서 당장에 분노하며 불평할 상태에 있을지라도 예수님은 그 화를 가라앉히고 분을 삭이며 불평하지 말고 조금만, 아주 조금만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곧 끝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참고. 마 24:1-25:46).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당하게 될 죽음의 모든 고난을 묵묵히 받으시는 온유함에 있으실 것이며, 그 온유함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권능의 행사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온유함 속에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온유한 자는 복 있다” 하시며,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가 우리에게 왜 말씀되어진 것인지를 알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으로서의 미덕을 갖추고 그에 따른 인격과 인품을 고아하게 갖출 것을 권면하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제자들은 다윗과 맺은 언약 백성으로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인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대적자요 원수에 의해 고통을 받는 것 속에서도 그 모든 것에서 온유함으로 계시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십자가의 도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자신들에게 주신 약속대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온유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대적하는 자들과 원수들에 노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며 분으로 싸워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불평과 불만과 원망을 할 수 있는 대로 다 쏟아내며 맞서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백성들과 하나가 되어 무죄한 자신을 고소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일 것을 작정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의 대꾸도 변증도 하지 않고 잠잠하신 것을 아시죠. 예수님은 진리가 아니면, 진리를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로 참으신’ 예수님의 온유함이 대적하는 자들과 원수들의 행악함을 헛되게 만들었으며, 그들이 악을 행한 죄값인 예수님을 죽인 피값은 그들과 그들의 자손 대대로 그들의 머리에 쏟아지는 것으로 그들에게 되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오른팔의 권능을 행하셔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의 오른편에 앉게 하신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에게 있은 온유한 자의 의로움은 그를 따르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온유한 자의 의로움이 되어 그들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계신 그들의 주 예수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는 참으로 복 있습니다. 이 온유는 기분 좋을 때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음으로 인하여, 그래서 예수님을 인하여 배척을 받아 온갖 멸시와 모욕과 핍박을 받아 목숨을 내놓게 되는 위험 속에서 그 너머에 있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기뻐하고 그 즐김에서 발휘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서의 믿음의 선진들이 있어온 것이 그 온유함이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인 12 사도가 그랬으며, 또한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믿음을 좇은 모든 믿음에 있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온유함은 그렇게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의해서 있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