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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항의 길
쓸쓸해지기 위해 찾아가는 길이 있다
물항이 그런 곳이다, 물항의 길이란
낮이면 종종걸음으로 달아나 버리고
밤이면 느릿느릿 비린 내음으로 돌아온다
그리하여 낮에 내가 잡은 것들은 헛것이고
밤에 내가 껴안은 것들은 모두 깨어진다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물항의 길 위에서 누구나 자유로우나
자유로운 만큼 쓸쓸하다, 부정하지 마라
미로처럼 얽혀있는 물항의 골목길을 풀어가다
연금술사의 접시 안에 타고 있는 물내음 맡았다면,
또 검은 소를 끌고 가는 늙은 순례자가
하얀 맨발로 밟는 물소리 들었다면, 그 때
저녁 거울에 비친 물항의 길을 보았을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길처럼
떠나기 위해 돌아오는 그 길을 보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돌아가는 곳을 알고 있다
은어가 회귀하는 마지막 강처럼
돌아가는 그 마지막 길을 알고 있다
가벼워져 찾아온 사람들이
무거워져 물항을 떠나가고 있다
물항의 길이 둥근 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언제나 떠난 자리로 되돌아오고, 둥근
물항의 길 위에서 오래 헛돌고 있을 뿐이다
시월의 기도문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천고마비보다 시고시인비이게 하소서
서정성으로 둔갑하는 누이의 가을 사랑 속에서도
번번이 결별의 비수는 빛나고
안경을 벗은 안맹의 여린 내 시선으로도
반도를 움켜쥐는 바람의 손길이며
한반도의 툭툭 불거진 슬픔의 힘살들이 환히 보입니다
하여 시월 속으로 떠나간 사람들의 길을 따라
이제는 당당하게 걸어가게 하소서
시월에는 유신이게 하지 마소서
가을이 주는 넉넉한 풍요로움으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즐거이 일하고 놀이합니다
하누님 당신은 늘 그대로 하늘에서 쉬시고
시월에는 무신이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월의 공산 같은 달밤이 오면
아이들, 낙엽, 대통령, 바보, 눈물, 풀꽃 모두 모여
고운 시를 읽게 하소서
높은 더욱 낭낭히 높은 목소리로 시를 읽게 하소서
가을 부근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 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들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쫒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 과수원을 하는 착한 친구가 있다. 사과꽃 속에서 사과가 나오고 사과
속에서 더운 밥이 나온다며, 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
그루 그루마다 꼬박꼬박 절하며 과수원을 돌던 그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사
과꽃이 새치름하게 눈뜨던 저녁이었다. 그날 나는 천 년에 한 번씩만 사람
에게 핀다는 하늘의 사과꽃 향기를 맡았다.
눈 내리는 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툭, 칼등으로 쳐서 사과를 혼절시킨
뒤 그 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붉은 사과에 차가운 칼날이 닿기 전에 영
혼을 울리는 저 따뜻한 생명의 만트라.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야 미안하다.
친구가 제 살과 같은 사과를 조심조심 깎는 정갈한 밤, 하늘에 사과꽃 같은
눈꽃이 피고 온 세상에 사과 향기 가득하다.
나무, 즐거운 전화
나무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바람부는 날 숲으로 가 보셔요. 바람을 투명한 전홧줄 삼아
뚜와루 뚜와루 즐거운 나무들의 手話 혹은 樹話, 그리워 살
금살금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서지 않아도, 안타까워 안타까
워 살 비비며 불태우지 않아도 기쁨 넘쳐나는 나무들의 깨
끗한 사랑법. 저 단정한 거리를 두고도 꽃 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들의 사랑을 아시는지요? 사랑이여, 나도 이제 그대 앞
에 한 그루 잎 많은 나무로 마주 서고 싶습니다. 그대와 나
사이에 바람이 전홧줄을 놓아줄 때 잎새 하나하나 사랑의
푸른 수화기를 들고 즐거운 전화를 걸고 싶습니다. 뚜와루
뚜와루......
가을 억새
때로는 이별하면서 살고 싶은 것이다.
가스등 켜진 추억의 플랫홈에서
마지막 상행선 열차로 그대를 떠나보내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흔들거나
어둠이 묻어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터벅터벅 긴 골목길 돌아가는
그대의 뒷모습을 다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랑 없는 시대의 이별이란
코끝이 찡해오는 작별의 악수도 없이
작별의 축축한 별사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총총총
제 갈 길로 바쁘게 돌아서는 사람들
사랑 없는 수많은 만남과 이별 속에서
이제 누가 이별을 위해 눈물을 흘려주겠는가
이별 뒤의 뜨거운 재회를 기다리겠는가
하산길 돌아보면 별이 뜨는 가을 능선에
잘 가라 잘 가라 손 흔들고 섰는 억새
때로는 억새처럼 손 흔들며 살고 싶은 것이다.
가을 저녁 그대가 흔드는 작별의 흰 손수건에
내 생애 가장 깨끗한 눈물 적시고 싶은 것이다
옛날자장
추억처럼 옛날도 힘이 된다
울산 달동 사거리 자장면 집에서
손으로 두들겨 뽑은
옛날자장에 불현듯 식욕이 솟는다
자장면이 희망이었던 옛날처럼
남루도 돌아보면 따뜻하게 그리워지는데
슬픔도 흘러가면 빛나는 무늬가 될 수 있는데
자장보다 옛날이 더욱 먹음직스러워
그리운 옛날에 코 박고 먹는 옛날자장 한 그릇
사람에게 상처받아 쓸쓸한 오늘도
살다보면 옛날이 되어
힘이 될 날이 오려니
가을엽서 2
그대의 일자무소식과
막막한 내 그리움 사이
가을만 저 홀로 차다
그대에게 가까이 가기에는
늘 손 시린 새벽,
유리창 가득 호호 입김 불며
그리운 그대 이름 적는다
그립다, 라고만 쓰기엔
가을꽃밭 붉은 꽃대궁처럼
너무 더운 그대
빈 손톱 밑으로 스며드는
그리운 그대
가을의 일
풀잎 등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이 무거워진다
그 무게에 풀들이 땅으로 휘어지며 겸허해지고
땅은 씨앗들을 받아 품으며 그윽하게 깊어진다
뜨거웠던 황도의 길도 서서히 식어가고
기구가 만든 그림자 속으로 달이 들어와 지워지듯
가을의 길을 걸어가면 세상살이 욕심도 무색이 된다
어두워지기 전에 아궁이를 달구어 놓아야겠고
가을별들이 제자리를 찾아와 착하게 앉았는지
헤아려 보는 것도 나의 일, 밤이 오면
나는 시를 읽으며 조금씩 쓸쓸해질 것이다
시읽는 소리가 우주의 음률을 만드는 시간
가벼워지기 위해 나도 이슬처럼 무거워질 것이니
가을 전어
시인이여,
저무는 가을 바다로 가서 전어나 듬뿍 썰어달라 하자
잔뼈를 넣어 듬성듬성한 크기로 썰어달라 하자
지금 바다는 떼 지어 헤엄치는 전어들로 하여 푸른 은빛으로 빛나고
그 바다를 그냥 떠 와서 풀어놓으면 푸드득거리는 은빛 전어들
뼛속까지 스며드는 가을을 어찌하지 못해 속살 불그스레 익어
제 몸속 가득 서 말의 깨를 담고 찾아올 것이니 조선 콩 된장에
푹푹 찍어 가을 바다를 즐기자
제철을 아는 것들만이 아름다운 약이 되고 맛이 되느니
가을 햇살에 뭍에서는 대추가 달게 익어 약이 되고
바다에서는 전어가 고소하게 익어 맛이 된다
가을에는 시인의 몸속에서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슬픔 있으니
그 빈자리에 가을 전어의 탄력 있는 속살을 채우자
맑은 소주 몇 잔으로 우리의 저녁은 도도해질 수 있으니
또 밤이 깊어지면 연탄 피워 석쇠 발갛게 달구어 전어를 굽자
굵은 소금 뿌리며 구수한 가을 바다를 통째로 굽자
한반도 남쪽 바다에 앉아 우리나라 가을 전어 굽는 내음
아시아로 유라시아 대륙으로 호기롭게 피워 올리자
내 귓속의 물고기 한 마리
젊은 의사는 내 귀의 이명현상을 일시적인 난청으로 진단했다
나는 의사에게 지난 주말 만어사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일만 마리의 물고기들이 돌로 변했다는 만어산 만어사를 다녀온 후
내 귓속에 숨어 따라온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나를 괴롭히는 귀울음 현상의 주범이 아닌지를 묻지 못했다
만어사에서 돌 속의 물고기들이 내는 금종소리 은종소리를 듣다가
산수유 노란 꽃그늘에 누워 낮잠이 들었는데
그 때 나는 분명히 내 귓속으로 숨어드는 물고기 한 마리를 보았다
바위 아래 푸른 바다에 사는 물고기 한 마리가
내 귓 소긍로 들어와 달팽이관 안에 놀고 있다는 것을
의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절집에 걸린 풍경처럼 소리를 내는 물고기를 밎지 못할 것이다
신라사람 경문왕의 당나귀 귀를 본 복두쟁이의 마음처럼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고통이 신화를 만든다
만어산에는 소금내음 풍기며 바다가 출렁거리고
만어사 바위들이 내는 종소리가 그 바다에서 물고기로 태어나고
그 중 한 마리가 내 귓속에 들어와 일으키는 시인의 이명을
간단한 처방전을 쓴 후 이내 다음 환자를 호명하는
젊은 의사는, 그 비밀을 고백한다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서생역
기차가 보지 못하고 지나쳐 갈 때 많지만
새끼손가락처럼 숨은 작은 역 저기 있네
기차를 기다려 꽃잎처럼 피었다
기차를 떠나보내며 꽃잎처럼 지는
봉숭아꽃처럼 키 작은 서생역
기적소리 울리며 기차가 멈춰서면
누나의 손톱에 물든 봉숭아 꽃물처럼
온몸 빨갛게, 온몸 빨갛게 꽃물 드는 서생역
동쪽바다 찾아가는 기차길 옆 키 작은 역
아차 지나쳤다 싶어 돌아보면
서쪽으로 숨어 꽃물 든 손을 흔드는
서생역 있네
감은사지 10
경주박물관 옹관 속에 웅크린 천 년 잠들이
붉은 시간을 굴리며 찾아온다
둥근 시간의 집을 굴리며 감은사로 온다
감은사에는 시작과 끝이 맞닿아 있고
삶과 죽음이 맞닿아 하나가 된다
굴러가는 시간의 저편으로 절은 세워졌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세워진다
감은사에서 오늘을 말하지 마라
흙은 불에 구워져 옹관을 만들고
다시 부서져 흙으로 돌아간다
죽음을 담았던 그 흙 위로
또다시 풀은 자라고 풀꽃은 핀다
감은사에서는 사라지는 것이 탑은 아니다
탑은 그냥 서 있고 시간은 사라진다
시간이 집을 만들고 사랑을 만들고
시간이 집을 허물고 사랑을 깨트려 버리고
작은 금 사이로 사라진다
시간에 갇혀 흘러가는 사람들을 두고
감은사는 천 년째 그 자리에 서 있다
감은사지 11
사라진 감은사 서 있는 탑과 탑 사이
아득한 허공 위에 놓인 문 하나 있으니
지나간 시간과 돌아올 시간 사이에 놓인 푸른 문을 열고
살며시 들어갈 수 있다면 사랑아
내 몸 가득 천 년의 단청이 비늘처럼 새겨지고
청동 용뉴를 빠져나온 법열의 종소리가
그대 비단 치마에 고운 주름으로 접히리라
바람이 왕위를 벗어버린 내 금관을 흔들어
금빛 소리 사이 비취빛 곡옥들이 밀어를 속삭일 때
그대 황금귀고리도 수줍은 듯 귀 붉히리라
어두워진들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사랑아
동해로 나간 용들이 대종천을 타고 돌아와
석등마다 둥근 칠월 보름달을 밝히고
아무 근심없이 그대 무릎을 베고 눕는 밤이 오려니
이슬 속에 숨은 종소리가 깨어 서라벌의 새벽을 열 때까지
우리 만나 뼛속까지 불이 되는 한 몸이 될 수 있으려니
눈감은 사이 천 년이 흘러가고
눈뜨는 사이 다시 천 년이 흘러갈지라도 나는 즐거우리
두드리노니 감은사 탑과 탑 사이의 문이여
어떤 밀교의 신비스러운 주문으로
닫힌 시간 저편의 문을 열 수 있는가
감은사지 12
내 몸 어느 금 사이에 숨어 나를 보느냐 뱀이여
푸른 혀를 내밀어 어제와 내일을 나누고
시간과 시간 사이 미끄럽게 빠져 달아나는 유월의 뱀이여
네가 생의 허물 벗듯 나도 무거운 탑의 허물 벗고
그리운 서라벌의 저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칠월 보름날 저녁 둥근 달빛 불러 달아나리라
내 떠난 자리 내가 나를 벗어 내가 없고
사랑이 사랑을 벗어 사랑 없는 감은사 빈터에서
뱀이여 너는 어떤 곡조의 푸른 휘파람으로
떠나간 신라여인들을 부를 것인가
또 어떤 시간을 안고 숨막히는 사랑의 또아리를 틀 것인가
감은사지 13
사라지는 것들은 상처를 남기지 않지만
절은 사라지고 절터만 남은 이 저녁 감은사처럼
사라질 수 없는 것들은 상처로 남아 슬픔을 만드네
무너지는 세월의 무거운 몸을 안고
아픈 허리를 곧추세우고 섰는 동서 쌍탑과
땅 속에 두 발을 묻고 잠들어 버린 깨어진 모퉁잇돌
알 수 없는 바다 깊숙이 달아나버린 목어의 숨소리와
유사의 행간 사이사이 뱀처럼 숨어 바스락거리는 신화 곁에서
나는 보네, 사라진 절터가 남긴 천 년 세월의 상처를
신라사람들이 남긴 쓸쓸한 상처의 저 아름다운 흉터를!
진주조개의 상처가 영롱한 진주를 빚듯
시간의 상처는 눈물같은 슬픔으로 독한 술을 빚어
세상 모든 그리움들을 불러 저녁놀로 불타고
슬픔이 내 마음이라면, 저녁 감은사여
마음의 우주에 칼금 그어진 깊은 상처같은 별을 보네
서쪽 밤하늘 붙박이별로 반짝이는 그대를 보네
감은사지 별사
입춘날 아침 감은사에 갔다가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걸인 부부를 보았습니다
서탑 기단부 하대석 위에 나란히 앉은 부부는
넓은 상대석 면석으로 동해바다 겨울바람을 막고
귀한 순금빛 햇살을 온몸 가득 쬐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을 견디기에 너무 얇은 옷과
풀어헤친 머리며 오랫동안 씻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그들에게 쏟아지는 아침 햇살만으로도
두 사람은 이 세상 어느 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두툼한 겨울 외투를 걸친 사람들은 추위에 웅크리며
걸인 부부 앞을 무심히 지나쳐 갔지만
이름만으로도 빛나는 무소유의 감은사 절터처럼
가지지 않고서도 넉넉한 모습이어서
내 눈동자 속 눈부처로 붙박혀 버렸습니다
동탑과 서탑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우리를 찾아왔을 것이라고
선덕여왕과 지귀가 환생해 사랑나들이 왔을 것이라고
돌아오는 길 나와 같이 간 동행에게 들려주었지만
동행은 그 걸인 부부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감은사 빈터에는 동서 쌍탑만 서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길
- 경 주 남 산
마음이 길을 만드네
그리움의 마음이 없다면
누가 길을 만들고
그 길 지도 위에 새겨놓으리
보름달 뜨는 저녁
마음의 눈도 함께 떠
경주 남산 냉골 암봉 바윗길 따라
돌 속에 숨은 내 사랑 찾아가노라면
산이 사람에게 풀어 놓은 실타래 같은 길은
달빛 아니라도 환한 길
눈을 감고서도 찾아 갈수 있는 길
사랑아, 너는 어디에 숨어 나를 부르는지
마음이 앞서서 길을 만드네
그 길 따라 내가 가네
흑백사진
-歸去來辭
내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지느러미가 주어진다면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삼감리 삼백팔십의 일번지
호적등본 속의 긴 주소 같은 강물을 따라 달려가고 싶네
달려가 막혀버린 시간의 아궁이를 털어 군불을 피우고
신평장 가신 守자 彬자 우리 할아버지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싶네
할머니는 새벽마다 떨어진 알밤 몇 알을 주워 잠든 나를 깨우고
작은 양팔을 펼치며 더 작은 어린 새가슴을 내밀며 만나고 싶은
흐드러지게 떨어진 감꽃을 헤아리면 시작하던 이슬처럼 맑은 아침과
마당 가득 찾아오던 고추잠자리들이 노을보다 붉게 타던 저녁이여
밤이면 젊은 할머니의 늘어진 젖을 막내고모 몰래 훔쳐만지며
벚꽃이 아름답다는 먼 도시에 사는 아버니지와 어머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죽은 여동생을 그리워하고 싶네
호룽불 아래 할어버지 늦도록 춘향던을 읽으시고
밤이면 박꽃처럼 피어나는 고모들 목소리 높여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는 그 노래 부를 때마다
어린 마음의 두레박에 가득 담긴 슬픔이 밤하늘 은하수처럼 쏟아져
에미소가 팔려간 어린 송아지같은 두 눈을 하고 그 별빛을 담았네
그런 밤이면 오줌잠에 깨어 괜한 잠투정으로 멀리 있는 어머니를 찾고
불매야불매야 할머니의 따뜻한 자장가 가락이 눈꺼풀을 덮어야 잠이 들던
아랫목 이불 속의 온기 같은, 그 온기 속의 편안한 잠과 같은 그곳으로
유년의 강으로 모천회귀하는 한 마리 은어가 되어 돌아가고 싶네
돌아가 할아버지의 손자가 되어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저물 무렵 사립문 밖에 서서
그들이 내 이름 길게 불러주었듯이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 이 세상으로 불러 다시 옛집을 이루고
싶네
사라지지 않는 세상의 영원한 집 한 채 이루고 싶네
기다림에 대하여
기다림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일까
늦은 퇴근길 107번 버스를 기다리며
빈 손바닥 가득 기다림의 시를 쓴다
들쥐들이, 무릇 식솔 거느린 모든 포유류들이
품안으로 제 자식들을 부르는 시간.
돌아가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부르고 싶다, 어둠 저편의 길들이여
경화, 태백, 중초 마을의 따스한 불빛들이여
어둠 저편의 길을 불러 깨워
먼 불빛 아래로 돌아가면, 아내는
더운 밥냄새로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리
아이들은 멀리 있는 내 이름을 부르고 있으리
살아 있음이여, 살아 있음의 가슴 뛰는 기쁨이여
그곳에 내가 살아 있어
빈 손바닥 가득 기다림의 시를 쓴다
푸른 별로 돋아나는 그리운 이름들을 쓴다.
나무
동해 바닷가에서 나무 심는 후배 尹一宇는 나무 농사의 고단함을 ‘땅에 절
하고 산다’며 은유법으로 말하지만, 굳은 살 박힌 젊은 文學士의 손은 더 이
상 숨길 수 없는 직유법이다. 허리 굽히지 않고서야, 허리 굽혀 땀방울 적시
지 않고서야 어느 땅이 제 몸을 열어 어린 뿌리들을 따뜻히 받아들이겠는
가. 또 어느 나문들 즐거이 뿌리내려 꽃 피우겠는가.(이상한 일이다, 젊어서
는 보이지 苛?나무가 나이 들어서야 환히 보인다) 울산?울주구 강동면
당사리 까치골 언덕, 뺨을 때리는 해풍의 세찬 손찌검에도 초등학교 학생들
차렷 자세로 서서 잘 자라고 있는 一宇네 어린 나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절
을 하고 싶다, 나무를 절로 삼아 삼천배를 하고 싶다.
나에게 사랑이란
마음속에 누군가를 담고 살아가는 것이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기에
젊은 날엔 그대로 하여 마음 아픈 것도
사랑의 아픔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그대를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냅니다
멀리 흘러가는 강물에 아득히 부는 바람에
잘 가라 사랑아, 내 마음속의 그대를 놓아 보냅니다
불혹, 마음에 빈자리 하나 만들어놓고서야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나봅니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놓고 기다리는 일이어서
그 빈자리로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어서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야 나도 알게 되었나 봅니다.
다운동 고분군에서
生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흔적인가
사면벽화나 스스로 흔들리는 금관
진귀한 부장(副葬)들은 남기지 못했지만
깨어진 즐문토기(櫛文土器) 타다 남은 몇 알의 곡식
돌무지 덧널 그 사이에 누운 주검의 형식에도
나는 正午의 햇살처럼 뜨겁게 환호한다
처음 이 땅에 씨앗 뿌려 열매를 거두고
아궁이에 불을 피워 더운 밥 짓고
붉은 흙그릇 구워 그 안에 밥 담아먹던 사람들
저녁이면 근심없이 잠들고
아침없이 욕심없이 잠을 깨던 사람들
글을 가질 필요가 없었으므로
역사와 이름은 남기지 않았지만
마침내 죽어서 남기는 선명한 生의 흔적
수천년의 시간을 한 획으로 증명하는
저 빛나는 先史의 방정식 앞에서
시대의 文樣으로 남으려 했던 언어의 꿈을 버린다
죽으면 단숨에 사라질 입속의 말을 버린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판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판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판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섞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판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판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목련
나비 날개 같은 부드러운 오수에 빠진 봄날 오후
창문 아래 사월의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누군가 사랑의 전화 버턴을 꼭꼭 누루고 있다.
뜨거운 목소리 앚혀진 첫사랑의 귓불을 간지럽히고
화사한 성문이 잠든 몸을 깨워 열꽃의 뜸을 놓는다.
누구일까. 저렇게 더운 사랑을 온몸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내려다 보니 없다 아무도 없는 봄날 오후를 배경으로
담장안의 목련만이 저홀로 터지고 있다.
목수의 손
태풍에 무너진 담을 세우려 목수를 불렀다. 나이가 많은 목수였다. 일이 굼
떴다. 답답해서 일은 어떻게 하나 지켜보는데 그는 손으로 오래도록 나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그 美??못 하나를 박았다. 늙은 목수는 자신의
온기가 나무에게 따뜻하게 전해진 다음 그 자리에 차가운 쇠못을 박았다.
그 때 목수의 손이 경전처럼 읽혔다. 아하, 그래서 木手구나. 생각해보니 나
사렛의 그 사내도 목수였다. 나무는 가장 편안한 소리로 제 몸에 긴 쇠못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진도 늙는다
잠시 왔다간 세상 사진 한 장 남기신 아버지
20대 후반 공군 시절 닫힌 격납고 배경으로
푸른 군복,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서 있는 아버지
어머니 몰래 한 20여 년 그 사진 숨겨두고 아버지를 추억한다
신기하다, 닮고 싶지 않았던 사진 속의 아버지를 내가 닮아가고
사진 속의 아버지는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하루하루 늙어간다
늙으신 어머니 그 곁에 나란히 서로 어울릴 듯
배경 풍경들 욕심 없이 늙어간다
신비한 시간의 힘이여
사진 속에서도 시간은 쉬엄쉬엄 흘러가
사진 밖의 세상과 사람과 함께 늙어간다
사진 속에 담긴 추억도 슬픔도 쭈글쭈글 김빠져간다
이제 사진은 더 이상 옛모습으로 남아 기다리지 않는다
잊고 살아온 사진을 찾아 펼쳐 보라
사진도 늙는다! 우리와 함께
몸
1
내 오래 전부터 네 터에 집짓고 살았지만
네 속에서 내가 자라는 줄 모르고
내 밖에서 네가 자라는 줄만 알았다
뼈가 굵어지고 머리칼이 길어지며
네가 나를 키워주는 세월 동안
나는 그 세월을 앞질러 너를 떠나고 싶었다
가난한 삶이 몸뚱이마저 부끄럽게 해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어 늙어버리고 싶었다
몸이여 나는 너를 버리고 싶었다
너를 버림으로 또다른 나를 얻으려고 했지만
어리석도다, 네가 나를 버리는 줄 이제야 깨닫는다
네가 나를 버리는 날
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정든 집 잃은 나는 어디로 가느냐
2
아버지 괴로운 듯 숨을 쉬고 계셨지만
金 군의관은 얼굴을 좌우로 흔들며 사망을 선고했다
金 군의관은 아버지의 오랜 친구
각진 얼굴에서 날카롭게 잘려나오던 슬픔에 덮여
아버지의 짧은 삶 그 길 위에서 마감되고
1936~1970, 아버지의 생몰연대
달아날 수 없는 튼튼한 괄호 속에 갇혀버렸다
아직 살아 숨쉬는 젊고 건강한 몸을 두고
아버지 몸속의 아버지 어디로 가셨는지
이제 돌아오세요 아버지
3
너는 우주
나는 그 우주 속에 떠 있는 별
별 속에는 또다른 우주가 있고
우주 속에는 또다른 별이 있다
삶이란 윤회의 저 징검다리 밟고
끝없는 우주 속의 별
별 속의 우주를 찾아가는 길
내가 밟고 가는 우주가 소멸될 때마다
하나의 별이 새로 태어나고
네가 밟고 가는 별이 소멸될 때마다
또하나의 우주가 태어난다
주머니 속의 바다
그 마을사람들은 바다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설마? 하고 물어보면 불쑥 주머니 속의 바다를 꺼내 보여준다
놀라지 마라, 그것은 마을의 아주 어린 꼬녀석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제법 사랑을 아는 나이가 된 친구들은
사랑으로 외롭거나 쓸쓸할 때에는
손바닥 위에 바다를 올려놓고 휘파람을 분다
아무래도 마을 어른들은 한 수 위다
흰 손수건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하얀 갈치 떼로 변하고
손금 위로 바다를 흐르게 하고 흐르는 바다 위에 섬을 뛰운다
아주 오래 전 그 섬을 찾아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안부까지 전해준다
떠나오던 날 마을사람들이 주섬주섬 챙겨 선물로 건네주던 바다
읽다만 시집 속에 곱게 접어온 바다
삶에 지칠 때, 누군가가 아득히 그리울 때
나는 손바닥에 그 바다를 올려놓고 엽서를 쓴다
아침이면 사람과 함께 눈뜨는 바다
저녁이면 사람과 함께 잠드는 바다
사람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바다를 나는 날고 있으니
물에게 절을 한다
아내가 찻집을 하면서부터 물이 고맙다
山수도 꼭지만 틀면 쏴쏴쏴 달려오는 물이 고맙다
솥발산이 푸른 정수리에 하늘을 받으셨다
은현리로 돌려주시는 정갈한 물
제 품에 안겨 사는 모든 식구들에게
젖을 물리듯 나눠주시는 맑은 선물
새벽마다 그 선물로 나는 쌀 씻어 밥을 하고
아내는 그 물 받아 찻집에서 찻물을 끓인다
물에서 생명이 나오고 그 생명을 물이 기르니
물에서 쌀이 나오고 물에서 밥이 나온다
물쓰듯이 물을 쓰다보니 귀한 줄 몰랐는데
山물을 받아먹고 살면서부터
한 잔의 물도 고마워 물에게 절을 하는 날이 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물을 보내주시는 그분 앞에 경건히 무릎 꿇고
그분의 발을 씻겨드리고 싶은 날이 있다
봄이 오는 소리
곡우 오길 기다리며 연초록 작은 혀를 푸는
지리산 화개동 야생 작설(雀舌)들의 착한 소리
어머니 섬진강을 찾아 되돌아오는
은어들의 눈부신 하얀 속살 같은 그리운 소리
산과 강 사이 젖가슴을 펼쳐
땅속 어린것들에게 봄벌판이 새젖 물리는 건강한 소리
그리운 동해바다 봄도다리 뼛속 가득 새살 차고
새살 가득 새뼈 돋는 맛있는 소리
저녁 밥상 곁으로 두러앉은 식구(食口)들
더운 밥숟갈 달그락거리는 정겨운 소리
붉은 우체통이 목련꽃을 피운다
오늘 새벽 붉은 우체통 옆 목련나무에 목련꽃 피었다.
두레박으로 퍼올릴 수 없는 세월 우물처럼 고여
빛깔과 향기로 잘 익은 깊은 산속 절집 마당에
세상의 마을과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모든 길들을
제 몸 속에 담고 있는 키 작은 붉은 우체통이 있었는데,
붉은 우체통 그 옆에는 목련나무 한 그루 서 있었는데,
목련나무는 알고 있었다
산사의 어두운 밤이 슬금슬금 내리면 살금살금 숨어 찾아와
삐뚤삐뚤 사연을 적어 하늘나라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던
파르스름한 머리, 먹빛 가사를 입은
착한 눈빛의 동승을 목련나무도 알고 있었다.
붉은 우체통은 동승의 편지를 삼킬 때마다
제 몸 속에는 찾을 수 없는 길 하나로 하여
끝닿을 수 없는 깊고 깊은 고해의 바다가 되고,
행여나 동승에게 제 마음 들킬까 싶어
발자국 소리 절 안으로 사라진 한참 뒤에서야
긴 한숨을 쉬었다. 슬픈 봄밤
보내지 못한 편지 위에 또 다른 편지가 쌓이고
붉은 우체통은 자신의 몸에 쌓이는 기다림의 무게에
어쩔거나 이 일을 어쩔거나, 홍열이 올라 더욱 붉어지고
그 옆에 서서 내려다보던 목련나무도 함께 붉은 신열이 올라
오늘 새벽 숨길 수 없는 비밀 그분에게 죄다 고백하듯
가지마다 가득히 목련꽃이 피었다. 활짝 피었다.
빨래
다시 시작 해야겠다
찌든 걸레 같은 삶을 헹구고
부는 바람 앞에 하얗게 펄럭이고 싶다
한 줌 오욕의 물기마저
다 말리고 싶다
남루여
산 번지 빈 마당 가득 눈부신
깨끗한 남루여
사월에 걸려온 전화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일찍 핀 벚꽃처럼 저도 일찍 혼자가 되어
우리가 좋아했던 나이쯤 되는 아들아이와 살고 있는,
아내 앞에서도 내 팔짱을 끼며, 우리는 친구지
사랑은 없고 우정만 남은 친구지, 깔깔 웃던 여자 친구가
꽃이 좋으니 한 번 다녀가라고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사라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서리꽃
차가워진 적이 없는 사람은
사랑으로 뜨거워지지 못한다
세상의 모든 약속 빙점 아래 잠들어
꽃눈 속의 봄꽃들 아직 눈뜨지 못하는데
겨울의 새벽 입숙이 유리창에 닿는
얼음의 길을 따라 서리꽃 핀다
서리꽃은 빙점하에 피는 뜨거운 꽃
허공에 뿌리내린 불가해의 꽃
차가운 하늘에서 빛나기 이해
별이 스스로 뜨거워지듯
땅의 가장 차가운 곳에서 피는
하늘의 가장 뜨거운 꽃이여
사랑의 비등점은 빙점에도 있으니
사랑에 꽃피우기 위해
오랜 눈물 버리고 차가워지려니
내 끓는 영혼의 꽃밭으로 찾아와 피어라
피어라 사랑의 뜨거운 꽃이려
쌀
서울은 나에게 쌀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또 살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나에게는 쌀이 살이고 살이 쌀인데 서울은 웃는다
쌀이 열리는 쌀 나무가 있는 줄만 알고 자란 그 서울이
농사짓는 일을 하늘의 일로 알고 살아온 우리의 농사가
쌀 한 톨 제 살점같이 귀중히 여겨온 줄 알지 못하고
제 몸의 살이 그 쌀로 만들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쌀과 살이 동음동의어라는 비밀을 까마득히 모른 채
서울은 웃는다
쑥부쟁이 사랑
사랑하면 보인다, 다 보인다
가을 들어 쑥부쟁이 꽃과 처음 인사했을 때
드문드문 보이던 보랏빛 꽃들이
가을 내내 반가운 눈길 맞추다 보니
은현리 들길 산길에도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이름 몰랐을 때 보이지도 않던 쑥부쟁이 꽃이
발길 옮길 때마다 눈 속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
이름 알면 보이고 이름 부르다 보면 사랑하느니
사랑하는 눈길 감추지 않고 바라보면, 모든 꽃송이
꽃잎 낱낱이 셀 수 있을 것처럼 뜨겁게 선명해진다
어디에 꼭꼭 숨어 피어있어도 너를 찾아가지 못하랴
사랑하면 보인다, 숨어있어도 보인다
아득함을 위하여
멀다고 느끼는 그 순간 그만큼
우리는 가까와지고 있음이로다
유리창 밖 미류나무 잎새를 흔들며
그냥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lt;/P>
손을 내밀면 이내 부서지는 아침 햇살,
그 아득함의 거리속에서도 우리는 지금
바람이며 햇살과 만나고 있지 않은가
사랑이여, 섬이나 별이 또 그렇게 멀면 어떠랴
우리 그리움의 눈물 한 방울 속에
섬인들 가두어 흐르게 할 수 없으랴
무량의 별빛인들 퍼 담을 수 없으랴
무릎에 얼굴 묻고 마디잠을 자는 날의 사랑이여
아득한, 아아득한 그리움의 날들이면 어떠랴
하루 지나면 또 하루
우리는 그만큼 더 가까와지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의 그륵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륵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륵이다
물을 담아 오신 어머님의 그륵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륵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님의 그륵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는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는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무릇 시인이라면 하찮은 것들의 이름이라도
뜨겁게 살아 있도록 불러 주어야 하는데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여름편지
여름은 부산우체국 신호등 앞에 서 있다
바다로 가는 푸른 신호를 기다리며
중앙동 플라타너스 잎새 위에 여름편지를 쓴다
지난 여름은 찬란하였다
추억은 소금에 절여 싱싱하게 되살아나고
먼 바다 더 먼 섬들이 푸른 잎맥을 타고 떠오른다
그리운 바다는 오늘도 만조이리라
그리운 사람들은 만조바다에 섬을 띄우고
밤이 오면 별빛 더욱 푸르리라
여름은 부산우체국 신호등을 건너 바다로 가고 있다
나는 바다로 돌아가 사유하리라
주머니 속에 넣어둔 섬들을 풀어주며
그리운 그대에게 파도 소리를 담아 편지를 쓰리라
이름 부르면 더욱 빛나는 칠월의 바다가
그대 손금 위에 떠오를 때까지
연가
허락하신다면, 사랑이여
그대 곁에 첨성대로 서고 싶네, 입 없고 귀 없는 화강암 첨성대로
서서 아스라한 하늘 먼 별의 일까지 목측으로 환히 살폈던 신라 사람의
형형한 눈빛 하나만 살아,하루 스물 네 시간을, 일년 삼백예순닷세를 그대만
바라보고 싶네
사랑이란 그리운 사람의 눈 속으로 뜨는 별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밤하늘의 별이 되어 저마다의 눈물로 반짝이고,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의 순금 팔찌와 아사달을 그리워한 아사녀의 잃어
버린
그림자가 서라벌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로 떠오르네,
사람아 경주 남산 돌 속에
숨은 사랑아, 우리 사랑의 작은 별도 하늘 한 귀퉁이 정으로 새겨
나는 그 별을 지키는 첨성대가 되고 싶네
밤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쌓아 하늘로 올라가 그대 고운 눈 곁에 누운
초승달로 떠 있다가, 새벽이 오면 한 단 한 단 몸을 풀고 땅으로 내려와
그대 아픈 맨발을 씻어주는 맑은 이슬이 되는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第一信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
로차(竹露茶)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 바다를 건너 우두봉(牛頭峰)
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몰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 형
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 가는 얼음장 밑 찬물 소리
에는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
아 스러지는 적소(謫所)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고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 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난발(蓬頭亂髮)을 끌고 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
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
뼈 자옥히 깎고 가는 바람 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第二信
이 깊고 긴 겨울 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우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새워 무우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
가 두렵지 않고 유배(流配)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
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선재(四
宣齋)에 앉아 시(詩) 몇 줄을 읽으면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
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
을 만드누나.
은현리 천문학교
내 사는 은현리 산골에 별을 보러 가는 천문학교가 있다
은현리 천문학교에서 나는 별반 담임 선생님
가난한 우리 반 교실에는 천체 망원경이나 천리경은 없다
그러나 어두워지기 전부터 칠판을 깨끗이 닦아놓는 착한
하늘이 있고, 일찍 등교해서 교실 유리창을 닦는
예쁜 초저녁 별이 있다
덜커덩 덜커덩 은하열차를 타고 제 별자리를 찾아오는
북두칠성 같은 덩치 큰 별들이 있고 먼 광년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숨을 헐떡이는 별들도 있다
오래전 나도 별과 같은 학생이였다.
그때의 우리들처럼 별들도 여간 말썽꾸러기가 아니다
내가 출석을 부르는 사이 슬쩍 자리를 바꾸어 앉은
개구쟁이 별이 있고, 시간 시간 붉은 옷 노란 옷으로
갈아입는 멋쟁이 별도 있다 그러나 나는 별들을
야단치지않는다. 혹시 별이 울려서는 안된다. 별이
울어버리면 하늘 제자리에 손톱자국 같은 생채기를 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래, 아주 오래 별을 바라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가령, 첨성대에 올라 별을 바라보았던 서라벌의 점성가들은
벌써 알고 있었을 비밀이다 그 비밀을 말하자면,
모든 별들은 악기라는 것이다.
하늘의 눈물로 만들어진 하늘의 악기. 그래서 별들은
쨍그랑 쨍그랑 수정유리 소리를 내고, 바람 부는 날
은현리 천문학교에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혹 당신은 듣지 못했다 해도 부정해서는 안된다.
믿지 않으면 별들의 연주를 영원히 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 날 내가 지휘자가 되고 싶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던가
하얀 연미복을 입고 하얀 구두를 신고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을 열광적으로 연주하고 싶었다 이제 그 꿈이 이뤄졌다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했던 카라얀 선생도 나보다 가슴
뛰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작은 산공에서 지휘봉을 들고
밤하늘에 뿌려져 있는 별들의 소리를 조율한다. 나의 지휘로
은현리 별들이 서서히 합주를 시작하면 미리내는 안단테로
흘러가고 밤하늘은 유려한 음악에 젖는다
별은 자신을 때리며 소리를 낸다. 별은 소리를 낼때
가장 빛난다. 작은 별은 맑은 소리로 웃고 큰 별은 우렁찬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물고기자리의 별들은 물고기가 되어
튀어 오르고 전갈자리의 별들은 전갈이 되어 달아난다.
개구쟁이 녀석들이라 1악장이 끝나기도 전에 내 지휘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편안하다
연미복을 벗어 던지고 구두를 벗어던지고 지휘봉마저
던져버리고 풀밭에 눕는다
하늘의 별들이 내게로 뛰어 내린다. 선생님 하며
내 품으로 달려온다. 내가 바다가 보이는 교실의
선생님이었던 그때처럼 내게로 달려와 아이들은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천문학교 교실에서
한 몸이 되어 노래를 부른다
별들이 모두 제 집으로 돌아간 새벽 나는 악보를 그린다
아주 옛날 은현리에 살았던 우시산국 사람들이 바위에
그 별자리를 새겼듯이 천상열처분야지도 같은 황홀한
하늘의 합창을 잊어버릴까 내 마음의 천문도에
또박또박 그려 넣는다
이제는 내가 바람이 되어
바람개비가 바람을 부르는 주술인 줄 알았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사학년이었고 봄부터 아버지는 세상에 계시지 않았다
슬픔의 오색 색종이로 바람개비를 만들어 방안에 서면
아버지의 방에는 분명 바람이 없는 것 같은데 바람개비가 돌고
바람개비를 빠져 나온 바람이 핑그르르 나를 돌렸다
그 혼절할 듯한 바람 앞에서 아버지 바람이 되어 나를 찾아오셨구나
나도 알 수 없는 그리움의 방언으로 아버지를 부르고
깨어나면 빈 마당에는 벚꽃이 눈처럼 날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마를 짚으며 어린 아들의 풍병을 걱정하셨지만
나는 바람이 머물다 가는 휘추리의 작은 일렁거림에도 눈시울을 적셨고
푸른 보리밭 이리저리 그려지는 바람의 몸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바람이 나를 키웠고 그 눈물이 나에게 시를 가르쳐 불혹의 고개 넘어왔으니
이제는 내가 회억의 바람이 되어 돌아가야 하는데
바람개비를 돌리는 바람이 되어 돌아가야 하는데
자주색 감자를 캐면서
꽃은 허공 가지에서 지고
슬픔은 땅속 뿌리로 맺혔으니
여름날 자주색 감자를 캐면서
뿌리에 맺힌 자주색 슬픔을 본다
로에게 답장을 쓸 것인가에 대해
여름 내내 생각했다. 그 사이
자주색 감자꽃은 피었다 지고
자주색 감자는 굵어졌다
감자를 캐느라 종일 웅크린
늑간이 아프다. 웅크린 채 누군가를
기다렸던 나도 한 알의 아픈 감자였다
사람의 사랑도 자주색 감자 같아
누가 나의 뿌리를 쑥 뽑아 올리면
크고 작은 슬픔 자주색 감자알로
송알송알 맺혀 있을 것 같으니
저녁
아침에 반가사유하던 저 목련, 저녁에 꽃문을 연다
봄날 햇살은 고양이 목덜미 털처럼 따듯하고
바람은 고양이 목을 쓰다듬는 착한 손길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한낮에 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가는
저녁에는 꽃 그늘에서 빛나는 시집을 읽는다
스스로 꽃문을 열어 빛나는 나무의 연꽃들
그 빛에 젖어 함께 부활하는 행간의 아름다운 침묵을
무당벌레 한 마리가 제 꽃등에 지고 돌아온다
세상의 어느 손과 어떤 주술이 꽃문을 열 수 있으랴
꽃의 닫힌 문을 연 봄날 하루는 위대하였으니
하루가 경건한 느낌표로 남아 묵상하는 이 저녁
땅에는 목련꽃이 하늘에는 별이 불을 밝힐 것이다
머지않아 밤 휘파람새가 우듬지로 날아와 노래할 것이다
적(寂)
작은 등불을 밝히고 일주문 밖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전화를 거는 젊은 여승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녁부터 시작한 산사의 눈 공양은 새벽이 와도 그치지 않고
고요한 절 마당 위로 더욱 적요한 눈만 덮여 법도 말씀도
동백나무들의 뿌리마저 추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몰래 마음 문 열고 나와, 끊어진 세상의 길에 줄 이으며
파르스름하게 떨리는 목덜미를 보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 누가 볼까, 눈발은 소리 없이 굵어졌지만
문 안에서 따라나온 긴 발자국들도 이내 숨어버렸지
점심, 후회스러운
한여름 폭염. 무더운 거리 나서기 싫어, 냉방이 잘 된 서늘한
사무실에서 시켜 먹는 편안한 점심. 오래 되지 않아 3층
계단을 힘겹게 올라올 단골 밥집 최씨 아주머니. 나는 안다
머리에 인 밥과 국, 예닐곱 가지 반찬의 무게, 염천에 굵은
염주알 같은 땀 흘리며 오르는 고통의 계단,........나는 안다,
머리에 인 밥보다도 무겁고 고통스러운 그녀의 삶.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남편과 늙은 시어머니의 치매, 아직도 공부가 끝나지
않은 어린 사남매, 단골이란 미명으로 믿고 들려준 그녀의 가족사.
(나는 그녀의 눈을 피한다) 서늘한 사무실에 짐승처럼 갇혀,
흰 와이셔츠 넥타이에 목 묶인 채 먹는 점심.
먹을수록 후회스러운 식욕.
주머니 속의 바다
그 마을사람들은 바다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설마? 하고 물어보면 불쑥 주머니 속의 바다를 꺼내 보여준다
놀라지 마라, 그것은 마을의 아주 어린 꼬마녀석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제법 사랑을 아는 나이가 된 친구들은
사랑으로 외롭거나 쓸쓸할 때에는
손바닥 위에 바다를 올려놓고 휘파람을 분다
아무래도 마을 어른들은 한 수 위다
흰 손수건인가 싶어 보면 어느새 하얀 갈치 떼로 변하고
손금 위로 바다를 흐르게 하고 흐르는 바다 위에 섬을 띄운다
아주 오래전 그 섬을 찾아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안부까지 전해준다
떠나오던 날 마을사람들이 주섬주섬 챙겨 선물로 건네주던 바다
읽다 만 시집 속에 곱게 접어온 바다
사람에 지칠 때, 누군가가 아득히 그리울 때
나는 손바닥에 그 바다를 올려놓고 엽서를 쓴다
아침이면 사람과 함께 눈뜨는 바다
저녁이면 사람과 함께 잠드는 바다
사람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바다를 나는 알고 있으니
죽비
스승께 죽비를 선물 받고 몸이 뜨거워진다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욕심이 많아
평생 세 벌의 옷과 밥 그릇 하나로 만족한
삭발의 길을 걷지 못했으나
한 철이라도 黙言의 겨울 선방에 들어
흩어지는 마음 팽팽하게 붙잡아 앉고 싶었다
화두 하나 이고 굽은 허리 곧게 세우고
졸면 천 리 만 리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시퍼렇게 날선 작둣날 위에 앉아
내리치는 죽비에 마음의 피를 흘리고 싶었다
시의 길을 걸어온 지 스무 해
한 소식 얻지 못하고 세간 저자를 떠돌다
만 권 책을 등짐 지고 산 속에 들어갔다는 소식 듣고는
스승은 죽비를 준비하셨을 것이다
죽비는 마음을 치는 뜨거운 警策
이 놈 시야, 내 이제 너를 잡을 것이니
게을러 질 때마다 스스로 어깨 죽지를 내리치며
木魚인 양 두 눈 부릅뜨고 너에게로 가려니
솥발산이 보이는 창가에 죽비를 걸어 놓고
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는다
청도, 방음리에서 듣다
아침이면 동촌 할머니 콩밭 푸른 콩잎들 깨끗한 햇살 한줌 놓치지 않으려
고 쑥쑥 손바닥 펼치는 소리 들었습니다.
한낮 마당 가득 옥양목(玉洋木) 흰 빨래 속 맑은 물기가 뽀도록 뽀도록 마
르는 소리 들었습니다.
저물 무렵 그대와의 저녁밥상을 위해 맑은 샘물을 길어 담근 쌀들이 편안
하게 불어나는 소리 들었습니다.
푸른 자전거
잠시 비켜 서 주시겠습니까, 시간은 언제나 저물무렵에서 시작되고 저기
푸른 동그라미를 가진 자전거 한 대 저녁을 향해 천천히 굴러가고 있습니
다.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는 그 집에는 아직도 더운 차 한잔과 읽다만 가을
시편들, 펼쳐진 사랑의 페이지, 납작납작 흘러나오는 낮은 속삭임의 口音
도 바람이 되어 굴러갑니다.
들리시는지요, 저물어 돌아오던 길, 그 길 위의 바람, 그 바람이 흔들던 나
무들의 부드러운 손바닥, 그 나무에 기대어 부르던 푸른 휘파람 소리. 아,
성당의 저녁 미사 종소리 따라 마을의 작은 창들이 저마다 착한 등불의 심
지를 돋울 때, 언제나 놀이 쓸리어간 쓸쓸함 쪽으로 더욱 쓸쓸히 등이 굽어
지는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돌아보면 푸른자전거, 저녁 안개 속으로 새떼들은 먼 숲으로 돌아가
둥지에 들고, 추억의 휜 등을 펴고 잠들고 싶은 지상의 작은 방 더운 이부자
리를 찾아, 어둔 밤 스스로 불을 켜고 찾아오는 그리운 點燈 별을 향
해, 짤랑짤랑 굴러가는 저기 저 푸른 자전거.
첫사랑을 덮다
도서관 겨울 벤치에 앉아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시인선 십일번
에이츠의 시집 『첫사랑』을 읽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일천구백
칠십사년 초판이 나왔던 시집은 올해 넓은 판형 두툼한 두께의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초판과 개정증보판 사이 이십 년이란 세
월이 뚜벅뚜벅 흘러갔다. 초판본을 읽던 시절 나는 그녀를 사랑
했다. 첫사랑이었다. 그때 월영동 고목나무에 그녀의 이름을 칼
로 새기며 밤새워 신열에 떨며 오지 않는 그녀를 기다린 적이
있었다. 모름지기 시인의 사랑은 그러해야 한다고 믿으며 깊은
밤 홀로 깨어 빈 원고지에 눈물을 채웠다. 세월은 흘러갔고 첫
사랑이 남긴 아픈 상처는 내 시집 속에 몇 편 슬픈 사랑의 물무
늬로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첫사랑의 개정증보판이라니! 시간
과 시간 사이에 쌓인 세월의 검은 먼지를 후후 불어내고 가슴
설레는 첫사랑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초판이 절판된 내 첫
사랑도 개정증보판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꿈을 꾸며 그녀를
기다렸지만 그날처럼 더이상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다. 판형이
커진 첫사랑의 개정증보판처럼 어느새 내 그리움의 허리도 기
름져 굵어져버렸다. 두툼해진 책의 무게처럼 내가 가지고 살아
가는 죄의 무게만 무거워져왔을 뿐이다. 이게 세월이구나, 아
득히 절망하며 첫사랑을 덮었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오지 않았
다.
갇힌 소가 우는데
은현리에 살면서 들었다. 황금들판에서 일하는 소는 움머- 하며 해설피* 울지만 감옥 같은 창고
에 갇혀 사육되는 소는 엉-엉- 휴대폰 진동소리처럼 기계음으로 우는 것을. 처음에는 기계의 진
동음으로 알았다가 무슨 소리가 뼈마디에 스며들도록 아픈가 싶어 찾아갔다 신문지크기 만한 창
문 하나 가지고 컴컴한 어둠 속에 징역사는 소를 만났다. 그 순한 눈망울 가득 타오르는 사람의
원죄를 보고 말았다. 그 소리 가끔 전화기로도 듣는다. 도시 사는 친구가 술에 취해 전화를 하는
밤, 보고 싶다 보고 싶다며 대책 없이 우는 밤, 그 울음 뒤로 도시가 엉-엉- 휴대폰 진동 기계음
으로 갇힌 소처럼 따라 우는 소리를.
*해설피:정지용의 시 '향수'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