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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오월!
계절의 여왕이란 어절이 붙어 다니듯, 오월의 문학기행은 제주 문학인이 견문을 넓히기 위해 어딘가 가고, 보고, 읽고, 배우고, 하는 오월은 너와 나의 계절이라 부르고 싶지 않은가?
제주문협회원이 그다지 많지 않지만 제주문협회장(강용준)과 함께, 만나면 대화의 소통이 이루어지듯 제주공항에서 반가움과 기쁨의 情을 나누며 중국 문학기행에 올랐다.
특히 권재효 부회장은 불편한 몸인데도 같이 동행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문학기행을 해서 그런지 몸이 가볍고 심신이 맑아, 걷거나 대화하는데 다른 회원들보다 더 밝은 편이었다.
본인도 그렇다며 한바탕 웃음을 자아 냈다. 5월13일 우리회원은 상해시 푸동공항에 한국을 출발한지 1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어, 어쩌면 서울을 나들이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상해시는 중국의 4대 직할시 중 하나다. 면적은 6,341평방미터(제주도의4.2배) 인구는 약 2천만명으로 (서울및 경인지역인구)로 장강의 지루인 황포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으로 서울과 정반대 모습으로 성장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곳 이다.
상해시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 하면서도 잠자는 龍이 아니고 하늘로 비상할려는 龍이었다.
높은 빌딩숲과 거미줄같이 짜여진 도로에는 자동차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자전거 도로에는 자전거와 오토바이로 출근 하는 샐러리 맨(salaried man)들이 북적거리고 있는 거리는 인산인해을 이루어 상해는 거대한 도시였다.
우리들이 중국을 낙후된 국가로 보고있는 사이에 세계를 호령할 것 같이 장강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韓流를 타고 중국 문화가 우리 것인줄 알지만, 등소평이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실용주의 노선으로 개인의 욕구를 다소 충족시키는 경제, 문화, 사회, 정치 분야에 개방정책으로 우리와 대등한 한계를 넘고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상해시 신문(5월15일자) 에 빈부격차가 빨래줄처럼 늘어 나자 중국의 위정자들이 고민 거리가 되고있다고 보도하였다.
어떠튼 우리회원은 인솔자의 안내를 받으며, 첫 기행지인 " 豫園(예원)" 옛거리 기행에 나섰다,
상해시의 중국 전통 정원으로 明나라 관료였던 " 반윤단"이 1559년경에 착공18년만에 완공한 건물(약400여년) 이었다.
"예원"이라는 이름은 "유열노친" 즉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린다는 뜻"이다.
예원의 거리에는 빽빽히 밀집된 상점과 주점, 음식점등이 있었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즐비하여 이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다음 행선지인 황포강 뱃길에 올랐다.
황포강을 중심으로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고 미국의 마천루처럼 110 여층 건물을 중심으로 19세기에 서유럽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옛 서양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대조를 이루며 강가에 얼비친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잠시 시간이 경과하자 어둠이 드리우면서 황포강의 야경과 부연 둥근 달빛과 어울어 낸 상해시는 飛躍(비약)하는 중국의 모습였다.
우리일행은 다음날(5월14일)행선지인 蘇州(소주)로 야간에 이동하여 정해진 숙소에서 1박을 했다.
그리고 아침 일찍 蘇州에있는 留園(유원) 기행에 나섰다.
蘇州는 강소성에 있는 도시다. 장강(양자강)삼각주에 행정의 중심이다.
BC 484년경 춘추전국시대에는 吳(오)나라의 수도로 있었다,
사방이 운하의 도시다. 중국의 곡창지대이며 인구는 9백만명이 된다 했다.
留園은 明나라때, 관리의 私園(사원)이었다가, 淸(청)나라때 유소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산장으로 개명되고 성강이 산 후 유원으로 되었다. 중국의 세계 자연유산중 하나 이다.
특히 연못에서 배를 띄워 악기를 타면서 옛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인방(거실)에는 홍목으로 만든 500년전 만든 탁상과 의자가 있었다.
또한 여자방에서 남자방을 였볼수 있도록 틈이 있도록 만들어 있어 안사람과 바깥 사람과의 대화의 창을 열어놓고 있어, 우리와는 대조적인 문화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원 회랑이 700 여미터 나 되어 있으며, 회랑따라 아름다운 정원과 전각들이 유원의 풍광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필자는 모란꽃이 아름다워 꽃앞에서 폼을 잡아 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서울의 秘苑(비원) 처럼 아기자기한 면모는 없는듯 했다.
다음은 寒山寺(한산사)로 이동했다.
한산사는 서기 502년에 건립된 중국의 고찰이다.
대웅전 앞에는 큰화로가 놓여 있어 사찰을 찾는 사람들이 촛불과 향불으로 집안의 무사안녕과 행운을 빌고 있어서 촛불타는 냄새와 향타는 냄새가 사찰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필자역시 향을 피워 부처님께 우리 모두에게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했다.
그런데 佛像(불상) 모습이 미소상이 아니고 짙은 웃음과 倍(배)는 항아리처럼 불쑥 나와 있어, 불상은 우리 불교 문화와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대웅전을 벗어 나니, 중국이 유명한 張繼(장계)詩文이 있었다,
이는 당 나라시대(778년경) 과거시험에 두번 떨어져 돌아오는 길에 지은 楓橋夜泊(풍교야박) 이라는 시이다
.
月落烏啼霜滿天(월낙오제상만천)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의 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달지고 까마귀울고, 하늘엔 찬서리 가득한데
강.풍교의 고기잡는 불을 보며, 수심어려 잠을 청할 때
고소성(蘇州의 서남쪽) 밖 한산사의 종소리가
나그네의 뱃전에 와서 부서지네
장계 시인은 평생 이 詩 한편을 남겼다 한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보명보탑(높이42미터) 은 사면이 전각이고 당나라 불탑으로
빼어남을 자랑 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석불탑 만큼 은은한 아름다운 곡선미는 따라 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를 뒤로 하고 호구산의 호구탑을 찾았다. 호구산은 蘇州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했다. 그런데
눈으로 보는 높이는 어림잡아 70여미터 높이 밖에 안되었다.
완만한 경사에 길을 따라 오르는데, 吳王이 잠을 잣다는 돌상(石床)과 오왕이 칼이 강함을 보려고 큰돌을 갈라 놀았다는 큰돌등 자연상징석에 빗대여 吳王을 그려놓고 있었다.
조금오르니 天洞有別 앞에는 넓다란 빌래(돌판)가 있는데, 붉은 색을 띠고있어 吳王의 죽을때 피가 묻어 있는 모습이라 했다.
동굴안에는 다소 작은 연못이있는데, 오왕의 무덤이어서 그속에는 오왕이 사용했던 칼이 있다 했다.
호구산위에 호구탑으로 들어섰다. 탑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며 내 앞에 우뚝서 있었다.
탑의 높이는 47.3미터이며 동방의 피사탑 이라 부른다. 탑은 4~5 도 정도 기울어져 있다 한다.
호구산은 호랑이 모양인데, 꼬리가 없어 꼬리를 상징한다. 오왕 부차가 세운 탑이라 한다.
이지역이 吳(오)와 越(월) 나라의 기나긴 전쟁터였다.
그래서 吳越同舟(오월동주) "적은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臥薪嘗膽(와신상담) 오왕 합려는 죽으면서 아들 부차에게 원수을 갑으라고 유언을 남긴다.
그래서 부차는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복수을 도모 한다",
그리고 월왕 구천을 포로로 잡지만, 구천의 꾀임술에 풀어 준다,
돌아온 구천은 "쓸개즙을 핥으며 복수을 다짐" 한다.
이러한 역사 속에 호구산은 춘추전국시대 불쌍하게 멸망한
吳나라 흔적과 원혼이 있어 운암사가 백팔계단을 만들어 그때 그영혼을 달래는듯 했다.
다음은 蘇州(소주) 운하 기행에 나셨다.
운하는 양자강 삼각주 평원과 물의 市(시)라, 부르는 소주시 의 구 도심권에 있다.
"동양의 베니스"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중국은 운하를 통해 옛 부터 물자와 자원을 이동시키고, 인적 교류의 교통수단이기도 하다.
운하를 구경하는데는 약30분이 소요 되는데, 뱃삯이 18000원(우리돈)이라 다소 비싸 보였다.
그러나 먼곳에서 왔는데, 그냥 넘기기에는 아쉬워 뱃길에 나셨다. 운하의 폭은 약 10 여미터 였다.
운하길을 따라 펼처진 물길은 다소 혼탁한 물이 었지만 길따라 실버들 가지가 봄바람에 춤을 추고,
간간이 운하길에 우리을 환영이나 하듯 빨간장미가 빨래하는 아가씨와 함께
멋들어진 풍광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군데 군데 오래된 옛 다리는 오작교처럼 님과님의 그리움을 연결해주는 다리 인듯 했다.
옛 수양제가 버드나무 고샅길을 거닐기도 했다 한다.
이 운하는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운하라고 하지만 다소 사람의 손에의해 만들어져 있는 듯하였다.
필자는 蘇州운하 詩文을 올려본다.
제목: 蘇州 운하에서
長江 아닌 蘇州운하
蘇州의 고층숲은 보이지 않고
살포시 늘어뜨린 실버들
님보고 반가와 손짓한다
옛 운하의 명성은 어디가고
칸칸이 이어진 옛집
스물스물한 물에 빨래하는 아낙
수심에 잠겨 있는듯 하지만
오월의 빨간 장미꽃
천년을 돌려 세우고 있다
기행의 시간은 한정되어, 다음날 행지인 杭州(항주)로 향했다.
정해진 숙소에 왔을때는 저녁10시을 알리고 있었다.
우리일행은 세기호텔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杭州기행에 나섰다.
杭州 (항주)는 절강성에 위치해 아름답고 풍요로운 물의 도시였다.
그리고
杭州(항주)는 吳와 越이 패권을 다투던 곳이다. 또한 남송의 도읍지기도 했다.
지금은 6백만명의 큰도시이며 면적은 제주도 6 배정도의 큰 도시이다.
중국의 10 대명승지인 西湖(서호) 기행에 나섰다.
호수의 면적은 60.8키로미터이다.
이는 옛호수를 당 나라때 785-804년에 영간에 백거이 가 제방공사를 하였는데
2 백년후 소동파가 임명되어 보수 했다 한다.
서호는 중국 杭州(항주) 서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西자는 西施(서시)을 의미한다.
중국의 4대 미인하면, 서시(월나라), 양귀비(당나라), 초선(한나라 -삼국지에 왕윤의 수양딸로 여포와 동탁을 이간시킨 여인), 왕소군(한나라)을 말한다.
바다처럼 넓은호수에 3개의 섬이 떠있고 군데군데 정자가 있고
먼 산에는 뇌봉탑이 아침 안개속에 보일듯 말듯하면서 호수를 지키는듯했다.
이는 吳나라 왕이 왕자를 생산한 왕비를 위해 세운 탑이라 했다.
호수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에 거대한 鮫龍(교룡)이 머리와 꼬리를 공중에 잔뜩 치켜들고
수면위에 떠있어, 그옛날 서시와 부차가 호화롭게 타던 배의 모습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인솔자의 설명으로는 일년에 한번 뜰까 말까 한다 했다.
필자의 詩를 올려본다.
제목: 西湖에서
바다 같이 넓은 西湖
아침 안개속에 감춰져
몸을 숨기고 있지만
내 눈은 그를 뗄 수가 없다
부차는 吳나라를 西施와 바꿔
西湖에 뇌봉탑을 짓고
그녀의 보조개 같은 섬을 만들어
천상같은 영원한 제국에서
오월에 꿀을 따는 나비처럼
사랑은 그런 것 인줄 알았다
나는 구천처럼 고소성을 점령하면
그녀는 내 것 인줄 알았다
그녀가 흐르는 눈물
빗 물이 못 되여 요염한 안개만이
西湖를 휘감고 있다
이제사
男女의 사랑은
西湖에 떨어지는
오월의 붉은 장미꽃과 같다.
西湖를 빠져 나오니 소동파 문학관이 있었다.
소동파는 송나라시대 사천성 미산현에서 1036 년에 출생했다.
본명은 蘇軾(소식)이며 자는 子瞻(자첨),
동파는 그의 호로 東坡居士(동파거사)에서 따온 별칭이다.
그는 시인이며, 정치가, 서예가, 화가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적벽부가 유명하다.
赤壁賦(적벽부)
而今安在哉況(이금안재재 황) 吾輿子....(오여자),
駕一葉之編舟(가일엽지편주) 擧匏樽而相囑(거포준이상촉)
寄孵遊於天地(기부유어천지) 渺蒼海之一粟(묘창해지일속)
哀吾生之須留(애오상지수유) 苡長江之無窮(이장강지무궁)
挾飛仙而傲遊(협비선이오유) 抱明月而將終(포명월이장종)
託遺響於悲風(탁유향어비풍)
지난날 전사들은 어데로가고..... 오늘밤 그대와나....
일엽편주타고 두영박 차를 서로 권하노라,
하루살이 같은 이몸을 천지에 붙으니, 아득한 창해에 한알의 좁쌀이니
나의 삶이 잠깐임을 슬퍼하고 장강의 무궁함을 부러워 하며,
날으는 신선을 옆에 끼고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 장차 마치려 하건만 그렇게 될 수 없음을 아노니
은은히 퉁소 소리를 가을 밤에 부처보노라.....,
우리기행은 항주에서 송성 가무쇼를 관람했다. 이는 송 나라시대 왕의 생일을 축하는 의미에서 춤과 노래를 엮어내어 현대적 무대와 조명으로 활란한 가무인들의 몸 놀림은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항주시와 강능시가 자매결연을 맺어 우리 아리랑을 연출하고 있어, 세계 여행객들과 관람하는 순간은 가슴이 뿌듯함을 느꼈다.
주요내용은 항주의 천년전의 역사와 송나라와 금나라의 전쟁, 아름다운서호, 아름다운전설등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송성 가무쇼는 세계4대 쇼중에 하나라 했다. (미국의 라스베이거쇼, 태국의 알카자 쇼, 파리의 리도쇼)
마지막날 성황각과 상해 임시정부 사적지를 둘러 보았다,
성황각은 서호10 경중에 하나 이며 오산에 위치한 명 나라때 주신의 신을 모신 곳이다.
높이는 41.6 미터의 7 층건물로 오 나라왕 손권이 진을 쳤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성황각은 7층가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를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바라 본 풍광은 산수가 아름답고 굽어보는 정자건물과 멀리 西湖를 바라볼 수 있어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는듯 했다 , 상해로 돌라오는 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관람하고 귀국길을 잡았다.
돌아오는 길에 안내인이 이야기 하는데, 중국사람은 蘇州에서 낳고,
杭州에서 살고, 廣州에서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했다.
그러는 순간 언듯 필자의 뇌리에 스치는 생각은, 중국과 일본의 여러도시에서, 교통문화는 출퇴근및 쇼핑, 여가 이동수단은 오토바이와 자전거 인데, 지리적으로 그 중간에 끼어 있는 우리나라의 문화는 자동차다.
필자는 빨리빨리 문화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을 까, 다소 思惟(사유)의 시간에 빠져 보기도 했다.
가깝고도 먼 문학기행으로 유익한 한주일을 보냈다. 특히 부회장 김가영 선생은 음료수및 간식, 회원간에 우애를 챙기느라 다소 힘들었던같아 고맙고 미안했다. 필자는 이동간 버스 안에서 다소 지루한시간을 노래와 회원 소개알림에 일조 한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문학기행분들은 제주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받고, 출국 로비에서 그동안 유익했던 기행을 시발점으로 보다 나은 제주 문학인이 될것을 다짐 하면서 일상으로 돌아가 직장과 가정에 충실 할 것을 다짐 하면서 헤어 졌다.
ㅇ, 상해시 황포강변에서 고층빌딩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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