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장애도 생태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촘촘한 그물이 되어버린 정신장애 진단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의 저자이자 미국 정신과 의사인 앨런 프랜시스는
정신장애 진단의 세계적 교본으로 쓰이는 ‘정신장애진단통계편람(DSM-IV)’의 편찬위원장을 지낸 사람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현재 일상의 거의 모든 느낌과 감정 따위에 병명을 붙이는 DSM의 폐해를 앞장서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용하는 진단 틀은 일상적인 불안, 기벽, 건망증, 나쁜 식습관까지
정신장애의 새로운 유형으로 추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촘촘한 그물 같은 진단 사정표가 정상적인 사람들을 오진할 테고, 진단 인플레이션을 부추기며,
부적절한 의약품 사용을 장려할지 모른다며
‘죄 없는 아이들이 거짓 진단으로 쓸데없는 투약을 받아서 비만이 되거나 일찍 죽을 수 있다’고 염려합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지난 15년 동안 소아 양극성장애가 40배, 자폐증이 20배,
소아 ADHD 진단을 받은 사람은 3배가 늘어났습니다(한겨레21, 2014.4.14.).
갑자기 이런 정신장애인이 넘쳐나게 된 건
DSM이 개정될 때마다 일상적인 심리 증상 다수를 정신질환으로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이 갑자기 늘어났다기보다, 정신장애 대상 범위를 적극적으로 확대한 결과입니다.
기준을 조금만 바꿔도 어제는 ‘정상’이었던 것이 오늘은 ‘비정상’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접하는 질병 통계 상당수는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1952년 처음 발행된 편람(DSM-I)에서 100여 개 수준이던 정신장애 진단은,
오늘날 개정을 거듭하며 300여 개가 넘는 분류로 늘어났습니다.
이 사정표 속에서는 일시적이고 일상적인 심리 증상이 너무나 쉽게 정신병으로 분류됩니다.
진단 뒤에는 늘 처방이 따라오고, 처방은 제약 시장의 거대한 수익을 만들어냅니다.
2013년 개정한 편람(DSM-V)은 어린이의 평범한 ‘짜증’마저
‘파탄적 기분조절 곤란장애’(한겨레, 2014.4.6.)라는 병명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 정신의학계는 아이들에게 ‘조울증’이라는 무거운 진단과 독한 약물이 처방되는 걸 막으려고 이 병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들의 감정 조절 실패를 너무 쉽게 정신질환으로 부르게 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사회사업도 경계해야 하는 ‘서비스 대상자’를 만드는 일
정신의학계가 주도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평범한 개인이 ‘정상’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사회복지사의 전문적 행위’를 드러내는 방식 속에서도 당사자와 지역사회는 정상이기 쉽지 않습니다.
당사자의 문제를 드러내고, 그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어야만 사회복지사의 존재와 그 행위가 빛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사회복지 분야가 성장할수록 오히려 서비스 대상자 수도 함께 증가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은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당사자를 대하는 사회의 모습과 태도에 따라 당사자는 문제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과잉행동장애나 우울증, 스마트폰 중독 같은 문제도 상대적인 모습이며,
개인에게만 원인이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당사자를 진단명으로 부르며 서비스 대상자로만 여길 때,
바로 그때부터 당사자는 사회로부터 본격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합니다.
기댈 수 있는 공동체
정신장애 그 자체보다 더 무서운 건 그 때문에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일입니다.
세상에 혼자라는 느낌이 얼마나 참담하고 섬뜩할까요.
이러한 외로움과 단절이 깊어지면 삶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기 쉽습니다.
그 칼날이 안으로 향하면 외로움이 절망이 되어 스스로 상하게 하고,
밖으로 향하면 외로움이 억울함과 분노가 되어 우리 사회의 가슴 아픈 비극으로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
생태 관점으로 이 어려움을 바라보는 사회사업가는 당사자를 이해하려고 그를 둘러싼 환경을 봅니다.
개인과 환경을 따로 보지 않고 서로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정신장애가 있어도 나를 편견 없이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도 내가 잘하는 일을 어디선가 발휘할 기회가 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로써 주변에 인정받으며 스스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눈 떴을 때 갈 곳이 있고 나를 반겨주며 어울릴 사람이 있다면,
고립이 빚어내는 비극과 범죄도 자연스럽게 줄거나 사라질 겁니다.
사회사업가의 지원 방법은 당사자가 때때로 만나고 어울릴 둘레 사람과 만남을 주선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기댈 공동체가 있으면 연결하고, 없으면 지역사회 안에서 함께 조직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진정으로 절실한 시선이 이 같은 사회사업가의 생태 관점입니다.
영미 씨와 직장
우리 지역사회는 정신장애인을 특별한 존재로 대하는가, 혹은 평범한 사람으로 어울리는가.
이는 사회사업가에게 중요한 관점입니다. 어디에 뜻을 두는가에 따라 정신장애인을 돕는 방법이 달라집니다.
정신장애인거주시설 실천 이야기 『나는 혼자가 아니야』(2016) 가운데 간호사 김 선생님의 영미 씨 이야기가 좋은 예입니다.
영미 씨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눈이 올라가 흰자를 보이며 그대로 서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며 꼼짝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로 평범한 직장생활이 쉽지 않았습니다.
김 선생님이 영미 씨를 지원했습니다.
보통의 삶을 위해서는 영미 씨도 달라져야 하지만,
영미 씨 둘레 사람이 영미 씨를 이해하는 일도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미 씨가 일하는 어묵 공장을 찾아가 직장 동료들에게 이런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이런 증상을 보인다면 잠시 앉아 쉬게 하면 된다고 안내했습니다.
직장 동료들이 영미 씨 증상을 이해했고 어떻게 대처하면 되는지를 알았습니다.
이제 영미 씨 증상은 더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미 씨도 여느 사람처럼 직장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환청·환시·망상이 있어도 이렇게 어울려 지내면 그런 증상이 조금씩 나아질지 모릅니다.
나아지지 않아도 그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 너그럽게 대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 살아갈 만합니다.
영미 씨의 사정을 직장에 알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 후로는 직장 동료들의 이해 덕에 별 어려움이 없이 잘 지낸다.
지금도 눈이 올라간다고 할 때면 직장 동료들이 이해해 준다.
회사 팀장님도 눈이 올라간다며 가만히 서 있는 영미 씨에게 쉬었다가 오라며 배려해 준다고 한다.
그런 좋은 사람들 덕에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다.
환청이 들리고 눈이 올라가는 어려움에도 동료의 도움을 받아가며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영미 씨가 무척 대견하다.
영미 씨처럼 어려움이 있는 이도 둘레 사람의 이해와 도움만 있으면 잘 지낼 수 있다는 걸 영미 씨 덕에 알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푸른복지,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