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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정서(情緖)가 녹아있는 아리랑
우리나라 민요(民謠)를 꼽아보면 수도 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민요를 꼽으라면 누구든 단연 ‘아리랑’을 꼽을 것이다. 아리랑은 가장 토속적(土俗的)인 정서가 녹아있는 우리민요로, 우리민족의 정서라 할 수 있는 슬픔과 원한의 소리인 애원성(哀怨聲)과 탄성(嘆聲) 등이 절절히 녹아있는 민요이다.
아리랑이라는 어원(語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는데 예를 들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난다.’는 순수한 노랫말에서 연유한다는 설, 경남 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에서의 아랑(阿娘)의 죽음을 두고 아랑의 이름에서 연유하였다는 설, 신라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閼英)부인을 찬미하는 노래인 ‘알영성(閼英聲)’에서 나왔다는 설 등 이 외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모두 부질없는 잡설(雜說)들이고 순수한 우리조상의 한(恨)을 표현한 노랫말의 하나의 용어(用語)로 인식된다.
노랫말에 보면 아리랑은 노래의 앞소리로, 또는 노래의 뒷소리 혹은 받음 소리로도 쓰이고 있고 앞사람의 노랫말이 끝난 뒤 그 뒤를 이어받는 넘김 소리로도 쓰이고 있으며 ‘아라리’라고도 표현된다.
아리랑의 시 형식은 기본적으로 2행시로 노동요(勞動謠)로 분류하지만 강원도아리랑이나 정선아리랑은 노동요(勞動謠)라기보다는 우리민족의 원초적인 정서(情緖)와 다양한 역사성을 포함한 노래로 인식된다.
우리나라에서 불리어지고 있거나 불리어졌던 아리랑을 보면 수 십 가지가 되는데 기본적으로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이라 하여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을 꼽는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아리랑을 꼽는다면 단연 ‘정선아리랑’인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 정선아리랑(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
정선아리랑은 강원도 정선(旌善), 영월(寧越), 평창(平昌)지방을 중심으로 불리어지던 아리랑인데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아리랑으로 꼽히며 강한 지역성(地域性)과 전통성(傳統性)을 간직하고 있다.
장단은 9/8박자의 중모리장단이고 메나리 토리이며 5음계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 ‘메나리’라는 말은 강원도와 경상도 지방에서 김매기 할 때 부르던 노래 이름으로,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부르는 창법(唱法)을 ‘메나리 조’ 혹은 ‘메나리 토리’라고 한다. 즉 ‘메나리’ 노래와 같은 음악어법(音樂語法)으로 된 민요를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 정선아리랑은 밀양아리랑이나 진도아리랑에 비하여 상당히 느린 장단(중모리장단)으로 민족의 애환이 녹아있는, 서글픔이 배어있는 가락이다.
고려 말엽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자 이를 반대한 고려 유신(遺臣) 72명이 송도(松都:개성) 두문동(杜門洞)에 숨어 지내다가 그 중 정선전씨(旌善全氏)인 전오륜(全五倫)을 비롯한 7명이 강원도 정선(旌善 南面 瑞雲山 居七賢洞)으로 은거지(隱居地)를 옮기고,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맹세하며 여생을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았다. 이들은 당시 고려왕조에 대한 흠모(欽慕)와 두고 온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외롭고 고달픈 심정 등을 한시로 지어 읊었는데, 뒤에 사람들은 이를 풀이하여 부른 것이 「정선아리랑」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정선아리랑」은 아리랑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정선아리랑은 시대의 변천을 따라 수많은 노랫말들이 만들어졌는데 현재까지 약 3,000 가지의 노랫말이 전하며 책으로 엮어내어도 몇 권이라고 한다.
강원도아리랑은 정선아리랑에 비하여 느낌이 사뭇 다른 자진아라리이다. 이 아리랑은 8분의 10박자로 엇모리장단에 맞으며 4장단을 메기면 4장단에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하고 뒷소리를 받는 형식이다. 아리랑고개는 실제의 고개가 아니라 상상 속의 고개이다.
<메나리 토리>
메나리 토리는 우리나라 고유 창법으로 주로 강원도지방에서 불리어지던 노래의 창법을 말하는데
‘태(汰)-중(仲)-임(林)-무(無)-황(黃)’의 오음(五音)으로 계면조(界面調)와 유사하고 서양음악의 단음계와 유사한데 음계(音階)로 말하면 ‘미-솔-라-도-레’의 5음 음계와 유사하며, 그 중에서도 주요 음은 ‘미-라-도’이다.
각 음들의 특징은 ‘미(汰)’에서 작게 떨고(搖), ‘레(黃)’에서 ‘도(無)’로 흘러내리며(退), 대부분 ‘미’와 ‘라’로 노래가 끝난다. ‘미(태/汰)’의 떨리는 음을 ‘요성(搖聲)’이라 하고 흘러내리는 음을 ‘퇴성(退聲)’이라 하며, 가운데 음 ‘라(임/林)’는 곧게 뻗는 성질이 있어 ‘평성(平聲)’이라고 한다.
<정선아리랑>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너주게 /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 한치 뒷산에 곤드레 딱죽이 임의 맛만 같다면 / 올 같은 흉년에도 봄 살아나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아우라지-정선군 여량(餘糧)의 송천(松川)과 골지천(骨只川)이 합류하는 곳
♣올동백-올해의 동백(冬柏), 동백의 씨로 기름을 짜면 동백기름이다. ♣한치(寒峙)-정선과 평창 경계에 있는 고개이름
♣곤드레 딱죽이-곤드레와 딱죽이는 산나물 이름(이 산나물을 넣고 밥을 지어 먹는다)
<강원도 아리랑>
◯ 열라는 콩팥은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은 왜 여느냐~
◯ 아주까리 동백아 열지를 마라 누구를 괴자고 머리에 기름
(후렴)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간다.
♣아주까리와 동백은 기름을 짜서 식용이나 화장품, 머릿기름 등으로 두루 사용된다.
♣괴자고-사랑하자고(‘꾀자고’로도 나타난다.)
<한오백년>
강원도의 대표적인 민요로 정선아리랑, 강원도 아리랑과 함께 한오백년이 있다. 아리랑이라는 노랫말은 나오지 않지만 느낌은 거의 같은 민요로, 느린 중모리 장단에 성조(聲調)는 메나리 토리이다.
◯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임아 /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후렴)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말고, 한 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
<내가 어릴 적에 부르던 아리랑>
◯ 논밭 전지 쓸만 한 건 신작로(新作路)되고 / 지집년 쓸만 한 건 양갈보 되네
◯ 망덕봉(望德峰) 꼭대기에 실안개 돌고 / 우리 님은 언제 돌아와 배구눌 뛰나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를 넘어 간~다.
♣전지(田地)-논밭 ♣신작로(新作路)-일제강점기 우마차(牛馬車)가 다니도록 강제로 길을 넓힘
♣지집년-계집년 ♣양갈보-6.25때 미군(美軍)들을 상대로 한 창녀(娼女)
♣망덕봉(望德峰)-금광리 앞 봉우리 이름 ♣배구눌-쌍그네(둘이 마주보고 타는 그네)
♣배구눌 뛰나~ -6.25 때 전쟁에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는 의미(意味)
♣♣이 아리랑은 정선아리랑과 같은 장단과 가락이다.
강원도아리랑은 박자가 조금 빠른 엇모리장단으로 영동지방에서 모내기소리로 불리던 아라리에서 나온 것으로 강원도 자진아라리라고도 한다. 이 아리랑은 소박하고 구슬픈 느낌을 주어 서울에서 불리는 경기아리랑보다 훨씬 향토적(鄕土)인 맛이 난다.
그 밖에도 나의 고향마을인 강릉 학산(鶴山)마을의 오독떼기(강원도 무형문화재 제5호)에 나오는 ‘강릉 학산 아라리’도 있는데 모심기를 할 때 부르던 농요이다.
◯심거주게 심거주게 심거주게 / 오종종 줄모루 심거주게 <후렴: 아리랑~~>
♣심거주게-심어주게 ♣줄모루-줄을 맞춰 심는 볏모(모내기)
그 밖에도 강원도 지역엔 아리랑이 많이 있다. 아리랑을 부를 때 쓰이는 장단(長短)도 알아본다.
<중모리 장단>
- Ⓘ ❘ ◯ ❘❘ ❘❘ ◯ ◯ ❘ ◯ ◯<덩 따 쿵 딱따 따닥 쿵 쿵 따 쿵 쿵>
♣ 9번째 박의 따가 강박(强拍)이다.
♣ Ⓘ:합장단(북편과 채편 동시 연주), ◯:북편(왼쪽), ❘:채편(오른쪽)
<엇모리 장단>
- Ⓘ ◯ ❘ ◯ ❘ ◯ ◯ ❘ ◯ ❘<덩 쿵 따 쿵 따 쿵 쿵 따 쿵 따>
♣ 8번째 박의 따가 강박(强拍)이다.
(2) 진도아리랑
진도아리랑은 전라남도 진도(珍島)에서 발생한 아리랑으로 알려져 있는데「아리랑타령」이라고도 불린다.
호남지역(湖南地域)에서 많이 불리어지는 아리랑으로 창법(唱法)은 육자배기 토리와 유사하나 조금 차이가 난다. 사설(辭說)은 기본적으로 남녀의 사랑과 이별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진도 총각과 경상도 처녀의 사랑이야기라고 하며, 가사의 내용을 보면 제법 진하고 외설스럽기조차 하다.
장단은 9/8박자의 상당히 빠른 세마치장단이며, 음계(律名)은 태(汰)-임(林)-무(無)-황(黃)-남(南)으로 서양음계로 말하면 미-라-도-레-시와 유사하다.
○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느냐. 날 두고 가신 님은 가고 싶어 가느냐.
○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 씨엄씨 잡년아 잠 깊이 들어라 문밖에 섰는 낭군 밤이슬 맞는다.
○ 서방님 오까매이 깨벗고 잤더니 문풍지 바람에 설사가 났네.
(후렴)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리라가 났네.
♣구부-굽이 ♣씨엄씨-시어머니 ♣오까매이-올까 싶어 ♣깨벗고-홀딱 벗고
<세마치장단>
- Ⓘ◯❘◯❘<덩 쿵 따쿵따>
♣ 6번째 박의 따가 강박(强拍)이다.
(3) 밀양아리랑
밀양아리랑은 영남지방(경상도)의 대표적인 통속민요(通俗民謠)로, 밀양 영남루의 전설인 아랑(阿娘)의 설화(說話)가 그 기원(起源)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추측일 뿐이다.
장단은 9/8박자 세마치장단으로 상당히 빠른 장단이며 진도아리랑과 느낌이 유사하다.
음계(律名)는 임(林)-무(無)-황(黃)-태(汰 )-중(仲)으로 서양음계로 말하면 라-도-레-미-솔과 유사하다.
◯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 정든 임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후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밀양 영남루(嶺南樓)와 아랑(阿娘)의 전설>
아랑(阿娘)의 본명은 윤동옥(尹東玉)으로 밀양부사의 딸이었는데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 손에서 자랐다고 한다. 아랑은 뛰어난 미모(美貌)를 지녔는데 음흉한 유모와 통인(通引:지방 관아의 심부름꾼) 백주기(白朱旗)가 흉계를 꾸며 어느 날 밤 달구경 나온 아랑을 욕보이려 하였다. 아랑은 통인에게 결사적으로 항거하다가 끝내는 칼에 맞아 죽고 대(竹) 숲에 버려졌다. 부사는 딸 아랑이 외간 남자와 내통하다 함께 달아난 것으로 알고 벼슬을 사직한다.
이때부터 밀양에서는 신임 부사마다 부임하는 첫날밤에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되기 시작하여 모두 밀양부사로 가기를 꺼리게 되었다. 이때 이상사(李上舍)라는 담력이 있는 사람이 밀양부사를 자원하여 왔다.
부임 첫날밤, 나타난 아랑의 원혼(冤魂)에게서 억울한 죽음을 들은 그는 원한을 풀어주기로 약속하였다.
이상사는 곧 백가를 잡아 처형하고 아랑의 시신을 찾아내어 장사지내니 그 뒤로는 원혼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 아래에는 아랑의 혼백에게 제사를 지내는 아랑각(阿娘閣)이 있는데「밀양아리랑」은 이 영남루 설화(說話)에서 발생하였다는 설(說)도 있다.
그 밖에 아리랑을 꼽아보면 춘천아리랑(의병아리랑), 본조아리랑(경기아리랑), 광복군아리랑(독립군아리랑), 연변아리랑(연변 조선족 자치주), 고려아리랑(카자흐스탄), 긴남도아리랑(진도아리랑), 여주아리랑, 북간도아리랑(중국 연변), 치르치크(우즈베키스탄) 아리랑 등이 있고 일종의 캠페인(Campaign) 송인 종두(種痘:천연두)아리랑, 한글아리랑도 있다.
그런가하면 1926년 일제 때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아리랑도 우리민족의 한을 잘 표현했는데 이 영화의 주제가가 바로 경기아리랑(일명 서울아리랑, 본조아리랑)이다.
또 한국전쟁(6.25) 때 참전했던 미 육군 7사단의 사단가가 ‘아리랑’인데 6.25때 이승만이 공식 승인하여 미 육군 7사단의 공식 사단가(師團歌)가 되었다고 하는데 멜로디가 바로 아리랑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역사와 모든 지역의 토속민요에 아리랑은 결코 빠질 수 없는 주제라 할 것이다.
(4) 다양한 아리랑들
♠ 춘천아리랑(의병아리랑)
춘천아 봉의산(鳳儀山)아 저 잘 있느냐 신연강 뱃머리가 하직일세<후렴: 아리랑~~>
구약통 납날개 양총메고 벌업산 대전에 승리했네
♣구약통 납날개 양총-처음 보는 신식 소총(小銃)을 이르던 말
<벌업산 전투>
강원 도계인 서면 주길리에 있는 벌업산은 지금은 보납산(寶納山)이라고 불리는 제법 우뚝 솟은 봉우리이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의병(義兵)활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항일운동(抗日運動)에 참여하였다가 목숨을 바치는데 그 시발점이 바로 춘천에서 1894년에 일어난 의병활동이다. 강원도 일원에서 결집한 400여 명의 의사(義士)들이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데 결국 벌업산(寶納山) 전투에서 대패하고 만다.
정부에서 항일전투(抗日戰鬪)에서 강원도지방의 항일독립투사로 의병독립유공자(義兵獨立有功者)를 조사하여 발표했는데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149명으로, 영월이 25명, 원주가 23명, 춘천이 16명, 평창이 14명, 강릉이 10명 순이었다고 한다.
가평에서 춘천으로 넘어가는 자루목 고개를 이루는 보납산은 조선 전기(前期)에 명필(名筆)로 이름을 떨치던 한호(韓濩) 석봉(石峯)이 가평군수로 오는데 이 벌업산이 한 덩어리의 바위로 솟아있는 산이라 하여 석봉(石峯)이라고 불렀고, 이 봉우리를 보고 자신의 호(號)를 석봉(石峯)이라고 하여 한석봉(韓石峯)으로 불리게 된다.
이 벌업산이 보납산(寶納山)으로 불리게 된 것은 훗날 이 산속 어디엔가 굴속에 한석봉이 사용하던 붓과 벼루를 숨겨놓았다 하여 보납산(寶納山)이라 바꾸어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춘천아리랑 노래가사에서 벌업산 전투에 승리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대패(大敗)의 아픔을 승리로 표현한 것이다.
♠ 광복군 아리랑
우리네 부모가 날 찾으시거든 광복군 갔다고 말 전해주소<후렴: 아리랑~~>
♠ 고려 아리랑(카자흐스탄)
원동 땅 불술기에 실려서 카작스탄 중아시아 러시아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도 우리는 한 가족 고려사람
♣원동(遠東)-아시아대륙 동쪽 ♣불술기-함경도 방언으로 기차(汽車)
♠ 북간도(北間島) 아리랑
어머니 아버지 어서오소 / 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 밭 잃고 집 잃은 동무들아
어디로 가야만 좋을까나 /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산중에 귀물은 머루나 다래 / 인간의 귀물은 너와 나로구나
내일은 북간도로 떠나가네 / 세간을 다 팔아도 여비 아니라네
검둥이 팔아 길 떠나네 / 북간도는 좋은 곳 이밥 먹는 곳
♠ 치르치크 아리랑(우즈베키스탄)
수십 년 전 이 고장에 와 / 우리 심은 백양나무 자라
치르치크 풍년 벌을 지키는데 / 우거진 녹음 농부들의 쉼터 되었네
오늘도 쉴 참에 거기 모였구나 / 목화 따는 꽃나이 처녀들아 / 풍년 벌 탐스러워 흥겨워하누나.
조선처녀 우즈벡 처녀들이 여러 태머리 / 우즈벡 처녀들이 넘짓 않더니 쥐는 구나
돔브라를 어쩌면 그리도 잘타느냐 / 조선민요 아리랑 곡조를~~
목화송이 만지는 손이 / 그리도 날쌘 줄 뉘가 알랴
돔브라 줄 퉁길 제 그 손이 / 나비처럼 춤을 추는구려!
일처럼 노래 즐기는 처녀들 / 돔브라 가락에 맞춰 부르네
청아한 아리랑 노래를 흥겹게 흥겹게 부르네 / 노래처럼 춤도 즐기는 처녀들이
아리랑 곡조에 성수나니 / 서로서로 손잡고 춤을 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아리랑아
해마다 만 풍년드는 치르치크 벌에 네 오늘 친선의 멜로디가 되었구나!
♣치르치크(Chirchiq)-우즈베키스탄 북동부의 벌판(현재는 공업도시)
♣돔브라(Dombra)-카자흐스탄에서 연주하는 목이 긴 현악기<손가락으로 퉁겨서 연주한다.>
♠ 연변(沿邊) 아리랑
우리 모두 연변아리랑 너랑 나랑 두 손 꼭 잡고 꽃길 따라 꿈길을 따라 사랑 사랑이 솟아나는 곳
♣연변-북간도(北間島)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로 일제강점기 때 일제를 피해 가서 살던 곳
♠ 해주(海州)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웬 고갠가 넘어갈 적 넘어올 적 눈물이 난다
저기 가는 저 아가씨 눈매를 보소 겉눈을 감고서 속눈만 떴네
(후렴) 아리아리 얼쑤 아라리요 아리랑 얼씨구 노다 가세
♠ 강성부흥 아리랑(북한)
무릉도원 꽃펴가니 흥미롭다 아리랑 제힘으로 세워가니 멋이로다. 아리랑
장군님의 손길 따라 주체강국 나래친다.
아리랑은 2011년에 대한민국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이어서 201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연이어 2014년에는 북한에서도 북한아리랑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다고 한다.
사물(四物)놀이의 기원(起源)
김덕수 사물(四物)놀이 공연 / 호남(湖南) 농악 / 강릉(江陵) 농악 / 농기(農旗-農者天下之大本)
예전, 농촌에서는 이웃들끼리 조를 짜서 각 농가를 돌아가며 일을 하던 것을 두레, 혹은 울력이라고 했다.
울력 때면 아침에 농악기를 보관하고 있는 집 마당에 먼저 온 사람들이 농악기를 꺼내 두드리며 흥을 돋우면 일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다 모이면 농기(農旗-農者天下之大本)를 앞세우고 농악을 연주하며 나가서는 논밭 근처에 농기(農旗)를 꽂아놓고 악기를 내려놓은 다음 일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새참이나 점심을 먹은 후에도 잠시 연주하고, 또 저녁이 되어 일을 마치면 다시 농기를 앞세우고 악기를 두드리며 돌아와서는 마당에서 한바탕 흥겹게 놀고는 악기를 닦아 보관하고 헤어진다. <새참-간식>
두레는 집집마다 돌아가며 하는 일, 울력은 마을사람들이 힘을 합쳐 하는 일을 이르는 말인데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이때 사용하는 꽹과리, 징, 장구, 북의 네 가지 악기를 사물(四物)이라고 하는데 날라리(太平簫)가 추가되고 잡패라 하여 장죽을 문 노인이나 가면을 쓴 사람이 추가되기도 한다.
이 연주(演奏)를 ‘풍물(風物)놀이’라고 불렀는데 언제부터인가 ‘농악(農樂)’으로 부르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이 농악은 농사지을 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정초(正初)가 되면 마을의 집집마다 돌며 일 년 동안 안택(安宅)을 기원하는 고사(告祀)를 올렸는데 보통 방문 앞에 상(床)을 놓고 그 위에 말(斗)에다 쌀을 수북이 담고 그 위에 무명실타래를 걸쳐놓는다. 그리고 촛불을 켜 놓고 술도 한잔 따라 놓기도 하였다.
그러면 비손이(축원을 드리는 사람)가 꽹과리를 치며 청산유수로 사설을 읊어 안택을 빌고는 이어서 집안 곳곳을 돌며 지신(地神)밟기를 하였는데 집안의 악귀(惡鬼)와 잡신(雜神)을 제거하는 절차이다.
그리고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다른 마을로 다니기도 하였는데 그 집의 안택을 빌어주고 쌀을 모아다가는 마을의 악기를 사거나 장례에 사용하는 상여(喪輿)와 곳집을 손보기도 하였는데 걸립(乞粒)이라고 하였다. 원래는 절의 스님들이 목탁을 치고 염불을 하며 탁발(托鉢)하는 것을 걸립(乞粒)이라고 했다.
곳집은 상여와 그에 딸린 제구(祭具)를 넣어 두는 초막을 말하는데 주로 마을에서 떨어진 외딴곳에 있다.
지역마다, 마을마다 농악이 있다 보니 지역마다 농악경연대회도 열렸는데 호남농악(湖南農樂), 영남농악(嶺南農樂), 경기농악(京畿農樂), 동부농악(東部<江原>農樂) 등 각 지역마다, 심지어 같은 지역이라도 마을마다 특색이 있는 다양한 가락과 발림(몸동작)이 발달하게 되었다.
농악은 예전 풍물굿이라고도 불렀는데 연주내용을 살펴보면 다양한 몸동작인 발림, 꽹과리와 북 및 장구의 다양한 연주기법인 가락, 상모꾼과 무동(舞童)이 움직이면서 만들어가는 진(陳)풀이가 있다.
발림은 화려한 발놀림, 머리에 쓴 상모를 돌리는 상모놀음과 소고(버꾸)치기, 여성복장을 한 무동(舞童)들의 춤사위 등이다. 가락은 꽹과리의 상쇠와 부쇠, 장구, 북의 다양한 연주기법이 위주이고 징은 거의 강박에만 연주된다. 진풀이는 단원들이 줄을 맞추면서 판을 만들어가는 것을 말하는데 원진(圓陣), 방울진, 오방진(五方陣) 등이 있고 지방의 특색을 나타내는 독특한 진풀이도 있다.
여기에 흥을 돋우기 위한 잡패(端役)도 있는데 대체로 영감님의 가면을 쓰고 장죽을 휘두르며 가락에 맞추어 진(陣) 바깥을 돌면서 관객들을 보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을 일컫는다.
사물(四物)의 기원
농악(農樂-風物)에서 사용되는 주요악기인 꽹과리, 징, 장구, 북을 사물(四物)악기라고 하는데 모두 타악기(打樂器)로 다양한 리듬을 연주한다. 그러나 가락악기인 날라리(太平簫)가 연주되고 지방에 따라서는 기다란 대롱모양의 악기로 뿌억~ 하는 소리가 나는 나발(喇叭)이 연주되는 곳도 있었다.
법고(法鼓) / 목어(木魚) / 운판(雲版) / 범종(梵鐘)
그런데 이 사물(四物)은 원래 불교(佛敎)에서 사용하는 악기를 나타내는 말로 지금도 큰 사찰에는 모두 갖추어져 있는데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의 네 가지가 그것이다.
쇳물을 부어 만든 범종(梵鐘)은 죽은 영혼들인 명부중(冥府衆), 가죽을 씌워 만든 북인 법고(法鼓)는 현세의 모든 생명체인 세간중(世間衆), 나무로 물고기형상을 깎아 만든 목어(木魚)는 온갖 물속(水中) 생물들인 수부중(水府衆), 철판을 구름처럼 잘라 만든 운판(雲板)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날짐승인 공계중(空界衆)으로, 모든 영혼들을 제도(濟度)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제도(濟度)는 불교 용어로, 모든 중생을 고해(苦海)에서 구제하여 열반(涅槃)의 언덕을 건너게 한다는 뜻.
목어(木魚)를 연주하는 방법은 연주자(打者-스님)가 채 두 개를 들고 구멍이 뚫려있는 배 부분 속으로 채를 넣어 쭉 돌아가며 두드려 연주하는 방법이다.
범패(梵唄)와 바깥채비 소리
스님들의 범패(梵唄) 공연 / 목탁(木鐸) / 징 / 태평소(太平簫) / 요령(搖鈴)
중요한 불교의식에서 공연되는 범패(梵唄)는 ‘인도 소리’라고도 부르는데 스님들만의 공연으로 굉장히 복잡하고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고 하며, ‘안채비소리’와 ‘바깥채비소리’가 있고 비교적 단순한 몸짓이 있다.
안채비소리는 불경독송에 리듬과 약간의 고저를 넣어 비교적 쉽지만 바깥채비소리는 홋소리와 짓소리가 있는데 내용이 한문이나 범어(梵語)의 사설로 되어있고 복잡하여 익히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1964년), 오대산월정사 대웅전 상량식에 갔다가 범패(梵唄)를 처음보고 감동했었다.
이 범패에 사용되는 악기도 사물(四物)이라고 했는데 태평소(太平簫), 징(澄), 북(鼓), 목탁(木鐸)이다.
목탁(木鐸)은 목어(木魚)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돗자리위에 놓고 치는 대형 목탁, 동그란 손잡이가 달려있어 들고 치는 작은 목탁이 있는데 물고기는 눈을 감지 않는 생물로 경각심(警覺心)을 의미한다.
목탁과 비슷한 것으로 요령(搖鈴)도 있는데 손잡이를 잡고 흔들면 속에 혀(舌)가 부딪혀 소리가 나는데 혀를 쇠로 만들면 금탁(金鐸)으로 무사(武事)에 사용되었고, 혀가 나무면 목탁(木鐸)이라 하였으며 둔탁한 소리가 나는데 문사(文事)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커다랗게 만든 대(大) 목탁은 공양(供養:식사시간)을 알릴 때에는 길게 한 번 치고 스님들이 모여 공동으로 작업하는 시간을 알릴 때에는 길게 두 번, 불경(佛經) 학습이나 입선(入禪) 때에는 길게 세 번을 친다.
길게 치는 방법은 세게 치다가 차츰 작게 치면서 소리가 잦아들게 연주하는 방식이다.
손에 들고 치는 작은 소(小) 목탁(휴대용)은 염불(念佛)을 외면서, 또는 사찰을 도는 도량식(道場式)이나 불경을 욀 때나 기도를 올릴 때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도구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풍물단이나 두레패의 공연에서 전체의 연기를 총지휘하는 사람은 꽹과리를 치는 상(上)쇠인데 꽹과리 소리가 굉장히 날카롭고 째지는 듯 고음을 내어 수꽹과리라고 하며, 모양은 같지만 소리가 낮고 부드러운 꽹과리는 부(副)쇠로 암꽹과리라고 하는데 중후(重厚)한 소리를 낸다.
꽹과리는 예전 소금(小金)·매구·쇠라고도 불렀는데 소리가 날카롭게 꽹꽹 난다고 꽹매기라고도 불렀다.
상쇠(수꽹과리)와 부쇠(암꽹과리)를 함께 치면 모양은 거의 같지만 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이 둘을 함께 부르는 말로 짝쇠라고 하였다.
꽹과리의 연주방법은 왼손에 들고 왼손가락으로 안쪽을 눌러 소리를 막고 손가락을 떼어서 소리를 열어 울림을 조절하며, 오른 손에는 단단한 나무로 깎은 채로 쳐서 다양한 리듬과 음색을 표현할 수 있다.
또 북춤과 장구춤도 볼만한데 화려한 연주기법(장단)과 덩실거리며 추는 춤은 절로 흥이 나고, 특히 일어서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치는 장구연주를 ‘설장구 춤’이라고 했는데 특별훈련을 했다. 다음은 소고(벅구)를 들고 벙거지를 돌리는 상모꾼, 상모 끈 길이가 12발이나 된다고 하여 12발 상모를 돌리는 ‘열 두발 상모’, 머리에 고깔을 쓰고 여성복장 차림으로 춤을 추는 무동(舞童)춤 등으로 공연이 진행된다.
풍물단(농악대)의 연주 내용은 지방마다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영남(嶺南)·호남(湖南) 지방은 주로 진풀이나 개인기를 펼치는 내용이 많은 반면 영동지방(강릉농악)은 씨뿌리기, 모심기, 김매기, 추수하기.... 등 주로 일 년 농사의 과정을 차례로 연기하고 마지막에는 뱃놀이, 열 두발 상모 등으로 마무리된다.
사물놀이를 현대판으로 재해석하여 춤이나 진풀이 등은 생략하고 네 가지 악기(꽹과리, 징, 장구, 북)만으로 앉아서 다양한 가락을 연주하는 것이 한때 크게 인기를 끌었는데 ‘김덕수 사물놀이단’이 유명했다.
이들은 전 세계를 돌며 공연을 하여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