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이 책의 시작에서 나는 역사를 물리학, 화학, 생물학으로 이어진 연속체의 다음 단계라고 말했다.
사피엔스 역시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는 물리적 힘, 화학반응, 자연선택 과정에 종속된다.
자연선택의 결과, 호모 사피엔스는 다른 어떤 생명체도 누리지 못했던 거대한 운동장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 운동장에도 여전히 경계선이 있다.
그렇다면 사피엔스는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고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룩한다고 할지라도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이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는 중이다.
이제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 선택의 법칙을 깨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지적설계의 법칙으로 대체하고 있다.
40억 년 가까운 세우러 동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연선택의 법칙에 따라 진화했다.
지적인 창조자에 의해 설계된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예컨대 기린의 목이 길어진 것은 고대에 있었던 기린 사이의 경쟁 때문이었지,
초월적 지성을 가진 모종의 존재가 변덕을 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목이 좀 더 긴 원시 기린은 좀 더 많은 먹을 거리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자신보다 목이 짧은 기린에 비해 더 많은 자손을 남겼다. 기린을 포함해 아무도
"목이 길다면 나무 꼭대기의 잎을 우적우적 씹어 먹을 수 있을 텐데, 그러니 목을 늘이자"라고 말하진 않았다.
다윈의 이론이 아름다운 점은 기린이 어떻게 해서 목이 길어졌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지적인 설계자를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수십억 년 동안 생명의 역사에서도 지적 설계는 가능한 선택지조차 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다른 무언가를 설계할 지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당히 최근까지도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체였던 미생물은 나름대로 놀라운 일을 할 줄 안다.
한 종의 미생물은 완전히 다른 종의 미생물로부터 유전 부호를 가져와
자신의 세포 속에 통합함으로써 항생제 내성 같은 새로운 능력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미생물은 의식이나 삶이 목표, 미리 계획을 세우는 능력은 갖추지 못했다.
어느 단계에선가 기린, 돌고래, 침팬지, 네안데르탈인 같은 생물들에게서 의식과 계획수립 능력이 진화했다.
하지만 설사 어떤 네안데르탈인이 아주 통통하고 행동을 굼떠서
자신이 언제든 배가 고플 때 손으로 잡기만하면 되는 가금류를 키운다는 몽상을 풍었더라도,
그에게는 그 환상을 실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는 자연선택된 새들을 사냥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런 구체제에 첫 균열이 생긴 것은 약 1만 년 전, 농업혁명이 진행되던 시기였다.
통통하고 굼뜬 영계를 꿈꾸던 사피엔스들은 가장 통통한 암탉과 가장 굼뜬 수탉과 교배시키면
그 자손 중 일부는 통퉁하면서도 굼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런 자손들끼리 교배시키면, 통통하고 굼뜬 새의 혈통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계통으로서,
신이 아니라 인간이 지적으로 설계해서 만들어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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