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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뭐가 그렇게 문제 였는지 모르겠다. 뭘 하든지 간에 특별해지고 싶었고 뭐가 되든지 간에 튀고 싶었다. 그리고 왜인지 다-크하고 싶었다. 중학교 일 학년 때의 이야기이다. 그 때 내가 인터넷에 남겼던 글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릴 지경이다. 매일 같이 잡문을 SNS에 적어 올리는 내 버릇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라서, 열 네 살의 내가 인터넷상에 남긴 텍스트들의 분량은 내 기억 저편에만 묻어 두기에는 너무 방대하다. 종종 그 글들을 떠올리면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은 삶의 의지가 팍팍 깎여 내려가는 느낌인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당시는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지금처럼 탄탄하게 자리를 잡기 전이었고, 내가 당시 활동하던 커뮤니티들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하기엔 조금 그런가, 아무 튼 지극히 개인적으로 보자면, 그 커뮤니티들이 전부 싸그리 싹싹 죄다 망한 것이, 내 까만 역사들까지 매몰시켜 주었기에 니는 다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점은 내가 웹상에서만 그러고 다녔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언가 특별해지고 싶었던 2000년대 말의 나는 3D세상에서도 다크한 분위기를 풍기고 싶어했다. 그 시기가 내가 인생을 살면서 하얗고 몰랑하던 마지막 순간인데 왜 그 뽀송한 시간을 그따위로 보냈나 모르겠다. 그 때 알던 사람들 중 지금까지 연락이 닿는 건 아무도 없지만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겠지, 끔찍한 일이다. 아무튼 그 때 하던 주요한 헛짓거리중에 하나가 바로 블랙 커피 애호가 행세였다.
사실 내가 블랙 커피, 그러니까 우유나 설탕 같은 걸 넣지 않은 커피를 처음 마셔본 건 스무 살 때쯤이었다. 고등 학생 때까지만해도 커피를 즐기지 않았고, 그나마 마셔봤자 잠 깨려고 마시던 자판기 커피 나 레쓰비 정도가 전부였다. 왜냐면, 아무 것도 넣지 않은 커피는 쓰고 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나한테 그런 걸 주지도 않았고, 찾아 먹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열 네 살 때 블랙 커피 매니아 행세를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도 안 나온다. 나는 블랙 커피를 마셔 본 적조차, 하다 못해 구경을 해 본 적조차 없었으면서 (부모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맥심에서 나온 노란색 스틱 커피만 드신다) 블랙 커피 찬양론을 펼쳤었다. 나는 블랙 커피만 먹어 어쩌고 저쩌고.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택도 없는 짓거리를 했느냐하면 그 이유는 다른 모든 오글거리는 행동의 이유와 같았 다. 블랙 커피만 마신다는 것은 왠지 멋있어 보이는 수식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어른스러워 보이고, 고독해 보이 고, 사회의 쓴 맛을 아는 느낌이고, 그런 소리를 하면 왠지 주변 친구들이 멋있다거나 신기하다거나 이런 식으로 적당히 반응을 해 주었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참 착한 친구들이다) 나는 신이 나서 그런 괴상한 행동을 계속했 다. 그걸 듣던 어떤 친구는 본인은 설탕이 들어간 것밖에 못 마시겠다면서 신기해 했고, 그럼 또 나는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어둡고 다크하고 뭐시기 저시기 거시기. 그런 셈이었다. 열 네 살짜리가 왜 하필이면 커피에 꽃혔는지는 알 수 없다. 블랙 커피를 선망한 이유는 대충 점작이 가지만 대체 왜 커피였을까.
아무튼 나이를 한두 살쯤 더 먹고 정신을 차린 이후 몇 년간은 위에서 말했듯 단 것만 찾아 마셨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부터 그랬지만, 워낙 주변 사람들이 단 것만 마시기도 했고, 마셔보지 않은 뭔가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저런 중2병의 순간들을 걷어내면 나는 아주 소심한 사람이었으니까. 사실 커피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것이, 대부분은 모카 라떼나 핫 초코 같은 것만 마셨다. 나중에 고등학교 삼학년 때인가, 어쩌다 맥도날드 아메리카노를 처음 마시고서는 아 이거 생각보다 좀 구수한데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 그 쯤부터 정말로 까만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을 거다.
스무 살 이후로는 아메리카노, 그러니까 정말로 블랙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 자라면서 점점 약하고 민감해진 위장은 이제 더 이상 우유와 커피의 협공을 버텨내지 못한다. 스무 살이 넘어 본격적으로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내가 카페인 내성이 아주 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유든 카페인이든 둘 중 하나만 들어간 걸 마셔야 했다. 그러나 카페에 가서 굳이 우유만 마실 이유는 없으므로 나는 우유가 없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다. 둘. 이건 비슷한 이유인데, 도핑의 목적으로 커피를 마시게 되다 보니 다른 라떼류 음료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어졌다. 방금 말했듯 나는 카페인 내성이 아주 약했고, 한 모금만 마셔도 눈앞이 번쩍이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화장실을 미친 듯이 들락거려야 했다. 어차피 라떼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굳이 우유 들어간 걸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셋. 아메리카노가 생각보다 내 취향의 음료였다. 많은 커피를 마셔보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마셔본 것들 중에선 스타벅스 아메리카노가 가장 내 취향이다.
사실 나의 카페인 저항 능력이 정말 형편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 (콜라에 들어 있는 카페인에도 반응할 정도이다) 한동안 커피를 멀리했다. 요즘은 다시 커피를 입에 자주 대고 있다. 평소엔 그냥 디카페인 혹은 완전히 카페인과는 관계 없는 음료를 마시다가 일을 할 때만 특별히 진짜배기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좀 바 빠져서 도핑이 필요해서 그렇다. 일단 카페인을 입에 대면 화장실을 엄청나게 들락거려야 하지만 별 수는 없다. 그냥 살려고 마시는 거지. 그래도 내성이 약한만큼 효율은 아주 좋다.
다행히 인스턴트 스틱커피 레벨에서는 커피전문점 아메리카노보다는 부작용이 좀 덜하다. 어차피 마시게 된 거 모카포트 같은 걸 들여서 제대로 마셔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단 커피를 좋아는 하기 때문이다. 뭐 어떻게 할 지는 잘 모르겠다. 이렇게 어영부영하다가 내일 또 카누나 타먹겠지.
어차피 이런저런 이유로 돌아 돌아 이리로 올 거 그 어린 나이에 왜 벌써부터 블랙을 외치고 다녔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까만색 커피 같은 거 마실 필요도 없었을 텐데. 내일 또 일할 생각을 하니 새삼 그때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음, 그래도 역시 잊어 버리고 싶다.
(포토그래퍼 굽기님의 글을 발췌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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