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강정은 해방 이후 산좋고 물맑은 경치를 찾아 6명의 계원들이 의기투합하여 정자를 세우고 시를 짓던 곳이다. 이곳은 앞에 깊은 냇물이 흘러 겨울에는 물이 적어 건널 수 있지만, 여름에는 반드시 발을 벗고 건너야 도달할 수 있다.
이곳은 찾은 이유는 88고속도로를 타고 남원에서 번암을 지나가려면 산밑에 아담한 정자가 아주 특이하게 보여서 필자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한 여름에 찾았다. 물을 건너고 숲을 헤치고 당도하니 정자는 잡초속에 묻혀버렸고 깨진 유리창만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상량문을 보니 정자를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 건립 시기는 단기 4295년으로 서기로 치면 1972년 임인년 8월 16일이다. 먼저 용용자와 거북구자를 양쪽에 쓰고 헌시로는 요지일월 순지건곤(堯之日月 舜之乾坤: 요임금의 일월처럼 순임금의 건곤같이)라는 글귀를 적어 넣었다.
춘강정은 원래 시멘트기와집으로 했을 것으로 추정하나 지금은 스레트로 변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약 40년전에 지었기 때문에 창문을 유리창으로 했으며, 뒤에는 석벽을 약 3미터 정도로 쌓았고 입구부분은 철문을 달고 옆으로 담을 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은 철문이 다 녹슬어 쓸모가 없게 되었지만 과거에는 근사했으리라.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6개의 돌기둥을 약 1미터정도 세운 위에 목조기둥을 세웠다. 보주받침돌도 약 1.5미터 정도가 되며 그 위에 가늘고 힘찬 기둥을 올렸다. 정자에 오르게 위해서는 동쪽으로 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정자에 오르면 앞의 맑은 시냇물이 한눈에 펼쳐진다.
춘강정 기둥에는 주련이 붙어있다.
白首幾營構 촌노들이 정자를 짓으려 한뜻은
名利浮雲遠 명리를 뜬구름처럼 저멀리 하였네
凉秋始竣功 서늘한 가을에 비로소 준공을이루니
漁樵結社同 어초가 결사를 함께한 겉이네
瑩淨蓮峰月 밝고 깨끗한 연봉에 달이 뜨니
悠揚蓼水風 멀리 요수바람이 드날린 것이네
주련위에는 연봉우리 꽃과 태극문양이 연갈아 조각되어 있으며, 서체는 행서체로 아주 잘 쓴 글씨이다. 필자의 낙관이 없어 유감이지만 아마도 편액을 쓴 고당 김규태의 글씨로 추정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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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강정 편액 중에서 첫글자인 봄춘자는 고자로 써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잘 모르게 썼다. 김규태는 구례에서 활동했던 인물로 노사 기정진의 맥을 이어받은 유학자이다. 그는 구례문화원에서 문집인 고당집을 발간했고, 특히 시문에 능하여 많은 후학들을 양성했고 아들 창석 김창동이 서맥을 이어가고 있다.
춘강정 입구에는 무술생(1898) 갑계기념비가 서있다. 이들의 명단은 백윤명, 임창길, 죽당 이문옥, 이중현, 요은 오재주, 죽포 장원화로 아들과 조카들이 1963(단기 4296년 계묘)년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비석을 세웠다. 단지 아쉬운 것은 기념비에 이름만 기록되어 있지 내용이 없었다.
춘강정에서 동쪽으로 남원 운봉가는 길로 접어 들면 바로 의병장 전해산묘소가 있다. 전해산은 1905년 을사조약체결로 국권이 침탈되자 이에 통분하고 1908년 대동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5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장수, 남원, 순창, 장성, 담양, 광주 등 9개군에서 70여회의 전투를 치르며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다. 이에 1909년 12월 17일 체포되어 이듬해 8월 23일 대구감옥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던 의병장이다. 꼭 춘강정에 가면 바로 전해산 의병장묘소가 옆에 있는 만큼 옛 선열들의 정신을 한번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김진돈 전라금석문연구회장. 전북문화재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