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나를 낳은 이유
김미희
엄마는 나를 꼭 낳고 싶었대요
첫째가 태어났는데요
내가 아니더래요
그래서 둘째를 낳았대요
또 내가 아니더래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낳았더니
글쎄, 짜잔! 내가 태어났대요
형들은 아직 몰라요
알면 엄청 슬플 거예요
그래서 나만 알기로 했어요
엄마랑 꼭꼭 약속했어요.
-《동시발전소》 (2021 겨울호)
집으로 가는 길
김정순
비 오는 날
우산 가지고 오는 엄마와
비 맞고 가는 내가
길이 엇갈렸다.
엄마는 큰길로 왔지만
나는 샛길로 갔다.
샛길엔 야옹이도 있고
개미도 있다.
비 오는 날엔
지렁이도 만난다.
-동시집 『색깔가게 와이파이』 (2022 청개구리)
눈치 없는 저녁
송명숙
학원 끝나고
친구들과 놀고 싶은데
나를 찾아 온 저녁
훼방을 놓는다
학원 차타고 집으로 가야하는
저녁 때문에
내 마음은 캄캄한 밤이 된다.
-동시집 『현무암이 되고 싶다』 (2022 걸음)
무시무시한 생각
유희윤
오솔길에 알록달록,
혀를 날름대는
뱀과 딱 마주쳤어.
무섭기도 하고
예쁘기도 했어.
나한테 덤비면
허리띠 만들 거다.
아니
어깨에 척 걸치는
가방끈 만들 거다.
땅꾼 아저씨에게
전화할 거다.
생각이 책장 넘어가듯
넘어가는데
뱀은 참 똑똑해.
이 무시무시한 생각을
날름날름 받아 읽고
슬그머니 풀숲으로 사라졌어.
-《동시빵가게》 (2022 30호)
이름값
윤삼현
엄마가 떠 먹여준 맘마를
어느 날부터
내 손으로 입 안에 떠 넣었습니다
입학하던 무렵은
엄마 아빠가 입혀주던 옷을
내 힘으로 챙겨 입게 되었습니다
서툴지만
운동화 끈 묶기도
내 손으로 하려 합니다
아직은 두렵지만
시내 서점에 들러 책도 사 오고
혼자 지하철도 타고 돌아오려 합니다
부모님이 붙여주신 이름이지만
그 이름값
스스로 감당해가야 하니까요.
-별밭동인 동시집 『물어보기 선수』 (2022 아동문예)
막다른 골목에서
이서영
산복도로 가는 빠른 길 찾다가
잘못 들어와 한숨 쉬는 사람들.
표지판이 없는 탓이라고
투덜거리면 속상해요.
막힌 골목이지만
구경거리는 많아요.
골목 안 끝 집 석류나무
졸고 있는 삼색 고양이
올망졸망 다육이 화분
담벼락을 오르는 덩굴손
금방 되돌아나가지 말고
볼거리 하나씩 찾아보세요.
어쩌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왔다면
한숨 쉬지 말고
한숨 돌리고 가세요.
-《동시 먹는 달팽이》 (2022 가을호)
콩콩콩
이준관
콩꼬투리 속에서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통통 여문 자신을
또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을까요
가을 햇볕에
콩이
콩콩콩 튀어나와요
콩아
마음껏 콩콩콩 굴러라
땅이
콩콩콩 울리도록
-《시와동화》 (2021 여름호)
힘내요, 아저씨
정두리
누가 봐도 알아요
마음 먹은대로
다닐 수 있으려면
달려야 하는 아저씨
하루에 찾아가는 집
400곳,
17시간 일의 무게
사람보다 물건을 기다리지만
기다림을 놓고 가는 일은
좋아요, 좋은 일이야
그래요
천천히 뛰어요
택배 아저씨.
-동시집『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 (2021 답게)
여우
차영미
간이 팥알만 해졌겠다.
뛰어가며 몇 번씩 돌아봤겠지.
눈물도 글썽였겠다.
산 아래 마을 밀밭
황금빛 향기에 두근거렸겠지, 오후
3시부터 안절부절 설레었을 거야.
포획틀 가진 사람들 우르르 몰려들자
작은 여우는 폴짝폴짝 다시 울타릴 넘었겠지.
이게 뭐지. 달아나면서도 고갤 갸웃거렸을 거야.
저녁 뉴스에 잠시 나온
작고 외로운 여우는
-《어린이와문학》 (2022 여름호)
장수 흑염소 건강원
홍재현
학교 앞 사거리에 있는
그 앞을 지날 땐
바닥만 보고 가게 된다
장수, 좋은 말
흑염소, 귀엽고
건강원, 좋은 말
좋은 것만 합쳤는데
간판 속 웃고 있는 흑염소를
똑바로 못 쳐다보겠다
-동시집 『달팽이 사진관』 (2022 소금북)
출처: 한국동시문학회공식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박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