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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藥民(장달수)|작성시간17.10.06|조회수155목록댓글 0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정 수 복**
지금까지 한국 대학의 사회학과에서 가르치는 사회학사는 오로지 서구 사회학의 역사를 의미했
다. 이 글에서 저자는 한국사회학의 전통을 만들기 위해서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연구할 것을 주
장한다. 이 논문은 국내 최초로 대학 내에 사회학과를 만들어 사회학을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 제
도화한 이상백에 대한 연구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이상백의 개인사와 학문적‧사회적 활동, 학문
적 성취와 그 내용을 요약하고 그가 사회학과를 창설하는 과정을 역사적 문맥 속에 넣어 두껍게
서술하고 분석한다. 그 결과 1946년 해방 정국에서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한 사회학자들이 여러
명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백이 사회학을 제도화하여 한국 사회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주
요 요인으로 그의 극좌파에 대한 비판적 입장, 지속적인 진단학회 활동, 학문에 대한 헌신, 학문
적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 등 네 가지 요소가 작용했음을 밝혔다. 이 글의 결론에서 저자는 이
상백이 사회사 분야에서 강조한 실증과 사회학에 대한 실증주의적 입장이 이후 한국사회학의 전
개 과정에서 이론적 성찰의 부족과 적합성의 결핍이라는 예기치 않은 문제의 씨앗이 되었다고 해
석했다.
주제어: 이상백, 사회학사, 한국사회학, 제도화, 실증주의
** 2015년 6월 19일 진주 경상대학교에서 열린 한국사회학대회에서 ‘한국사회학의 사회학’ 기획세
션을 마련해주신 김무경 한국사회학회 전임 회장과 최종렬 전임 연구이사에게 감사한다. 이 논
문은 그날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발표 당일 유익한 질문을 해주신 양영진, 강수택 두
분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익명의 토론자 세 분께도 감사드린다.
** 사회학자/작가(pariscielbleu@gmail.com).
기획논문
2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죽음만이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해도 괜찮게 만들어 준다.”
- 김현(불문학자/문학평론가, 1942-1990)
Ⅰ. 한국사회학사 연구의 중요성
2016년은 한국 사회학의 역사에서 볼 때 매우 뜻 깊은 해다. 1906년 이인직이 ‘사
회학’이라는 학문을 이 땅에 소개한지 110주년이 되는 해이고 1946년 이상백이 대
학에 사회학과를 창설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사회학의 역사
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들이 있었지만 한국의 사회학자들은 한국사회학의 역사에 대
해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회학과의 교과 과목으로 가르치는 ‘사회학사’는
서구사회학의 역사만 가르치고 한국사회학의 역사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한국의 사
회학자들은 과거 선배 사회학자들의 유산을 들추어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학문적
으로 낙후되었던 시절 뒤떨어진 선배 사회학자들이 남긴 연구물은 망각의 대상이지
참조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학의 역사를 연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미국과 유럽에서 논의된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연구방법을 활용한
참신한 논문을 쓰기에 바빠서 과거 한국의 선배학자들이 남긴 연구 결과를 눈여겨
볼 마음의 여유가 없기도 하다. 학계의 그런 관행이 계속되다 보면 한국의 사회학자
들이 쓰는 거의 모든 논문이 몇 년만 지나면 거의 아무도 참조하지 않는 무용지물이
된다. 그 결과 우리 나름의 학문적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고 학문적 전통이 만들어지
지 않는다. 한국 사회학의 해외 의존성이 자연스럽게 계속된다.
한국사회학은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한다. 1954년 경북대학교
사회학과를 창설한 배용광(1997: 5-6)은 1960년에 발표한 “우리나라 사회학의 앞날
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문제의식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결국 우리는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한국의 사회적 현실을 정면에서부터 연구 대상으로 삼고 거
기에 보아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욕을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의 학도에게서
진정 기대할 수 있었으면 싶다. ‘우리’ 사회의 과학적 해명을 위하여 먼저 진정한 문
제의식이 확립되어야 할 줄로 안다. 사회학의 과학으로서의 발전이 실증적인 조사연
구의 추진 없이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의식’에 의하여 인도
받지 않는 조사연구는 부질없는 작희로 그칠 것이다.” 배용광의 말대로 학문 활동에
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이라고 할 때 한국의 사회학자라면 우선 한국 사회의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3
현실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선학들의 연구 업적을 읽고 토론하고 비판하
고 계승해야 한다.1) 해외 학계의 연구 경향에 맞추어 외국 저널에 가능한 많은 논문
을 게재하는 학자가 우수학자로 인정받는 오늘날의 상황은 한국사회학의 역사에 대
한 무관심을 정당화하고 강화하고 있다. 최신 이론과 방법론을 갖춘 학자에게는 그
것을 활용하여 요리할 새로운 자료의 확보만이 중요하다(이기홍, 2008: 28).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한국 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축적할 수가 없다. 그런 연구물들
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소멸할 것이고 한국사회학사의 부재는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1876년 개항을 기점으로 하면 서구문명과 접촉하여 서구의 문물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 지 벌써 한 세기 반에 가깝다. 양복이나 아파트가 서양에서
들어왔지만 이제 거의 우리의 옷과 우리의 집이 되었고 우리 스스로 자동차와 컴퓨
터와 스마트폰을 만들게 되었지만 서양에서 수입된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우리의 삶
과 사회를 잘 설명해주는 지적 도구가 되었는지는 아직 의심스럽다. 한국 인류학의
역사를 쓴 전경수(1999: 7; 2010: 45)가 말한 대로 우리 나름으로 노력한 학문 연구
의 역사를 뒤돌아보는 일이야말로 외국의 최신이론과 방법론에 기대어 ‘축적 없는
신생’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 학문의 고질병을 극복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2) 모든
역사 쓰기 작업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대화라면 한국 사회학의 역사를 쓰
는 일은 한국사회학 연구의 과거를 되돌아봄으로써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작업이다. 학사 연구야말로 학문 공동체의 학문
적 전통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다. ‘한국사회학의 전통’Korean Sociological
Tradition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학들이 남긴 연구 성과를 찬찬히 되돌아보면서 잘못
된 과거는 반성하고 의미 있는 업적은 계승해야한다. 한국의 선배 사회학자들이 남
긴 연구업적들로 가득 찬 기억의 창고로 걸어 들어가 그들이 한국 사회와 사회학이
라는 학문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을 찾아내고 그들이 남긴 연구결과의 기여점과 한계
를 밝히면서 한국사회학사의 갈래와 줄기를 잡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한국사회학의
전통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것은 누구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한국사회학 공동체 전
체의 일이다.
1) 배용광의 사회학에 대해서는 이동진(2014)을 볼 것. 근대 시민혁명과 함께 태동한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문제의식을 자유, 평등, 연대, 정의를 증진시키고 억압, 불평등, 부정부패, 과도한 경쟁을
해소하려는 지적 열정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 문제의식을 한국적 상황 속에
서 구체적 연구를 통해 실현하는 것이 한국 사회학자의 사명일 것이다.
2) 이 점에서 전경수(2010)가 쓴 손진태의 인류학 연구와 한국 정치학계의 원로 민병태의 학문활
동과 학문세계를 중심으로 한국 정치학의 소생-성장-발전 과정을 탐구한 김학준(2013)의 저서는
사회학자들의 참조 대상이다.
4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한
국사회학자들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길에 들어서고 한
국사회에 대한 연구의 결과를 논문과 저서를 통해 발표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
회적으로 공론 형성에 기여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사회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들의 삶은 그들의 연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에 이
루어진 한국사회학사 연구의 대부분에는 사회학자들의 삶이 빠져 있었다.3) 그러나
사회학자들의 개인사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와 사회학의 역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일단 한국 사회학의 주요 인물들Masters
of Korean Sociology을 선정해야 하고 그들의 저작을 그들의 개인사와 가족사 그리
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정치사와 사회사, 문화사와 지성사의 맥락 속에 넣어 평가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4)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구성하는 초창기의 주요 인물이라면
서울대, 경북대, 이화여대, 고려대, 서울여대 등에서 사회학의 제도적, 학문적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 다시 말해서 이후 한국 사회학계에서 활동하는 여러 제자들을 양성
하고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 대학 안과 대학 밖에서 사회학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한 학자들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선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이상백(1903-1966), 고황경(1909-2000), 최문환(1916-1975), 변시민(1918-
2003), 이만갑(1921-2010), 배용광(1921-2010), 이효재(1924-), 이해영(1925-1979),
황성모(1926-1992), 최재석(1926-), 홍승직(1929-2014)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회학자들의 삶과 연구업적을 다루는 작업
은 어느 학자 개인의 영예를 칭송하기 위한 작업도 아니고 그의 사회학 연구에 흠집
을 내기 위한 작업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비판적 관점에서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한국 사회학자들이 공유하는 한국 사회학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의 일환이다. 지금까지 사회학자 개인에 대한 비평적 연구가 이루어
지지 않은 이유는 사회학계가 너무 좁아서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관계였기 때문이
3) 지금까지 나온 한국 사회학자의 평전으로는 임형철(1988)의 고황경 평전, 이상백 평전 출판위원
회(1996)의 이상백 평전, 홍성태(2014)의 김진균 평전 등이 있다. 본격적인 평전은 아니지만 박
정희(2012)의 이효재 평전도 나와 있다.
4) 루이스 코저는 그가 선정한 대표적 사회학자들의 삶과 그들이 살았던 사회적, 역사적, 지적 문
맥 그리고 그들의 저술들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Lewis Coser, The Masters
of Sociological Thought: Ideas in Historical and Social Context (Waveland Press, 2003) 2판
을 신용하와 박명규가 우리말로 옮긴 사회사상사(시그마프레스, 2003)를 볼 것. 콩트, 맑스,
스펜서, 뒤르켐, 짐멜, 베버, 베블렌, 쿨리, 미드, 파크, 파레토, 만하임을 다룬 코저의 초판은
1970년에 나왔고 우리말 번역은 신용하와 박명규에 의해 1978년에 상권 1979년에 하권으로 나
뉘어져 나왔다가 1986년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5
다. 서로 다 아는 사실을 굳이 글로 정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초창
기 한국 사회학의 역사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중심으로 하여 사제관계나 선후배
관계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제 한국 사회학회는 크게 확대되었고 선배학자들의 연
구업적은커녕 이름도 모르는 젊은 세대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사회학사 연구
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문화 풍토를 고려할 때 서로가 서로를 잘 아
는 연고관계 속에서 자유로운 글쓰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제자가 스승의 글을,
후배가 선배의 글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는 아직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와 더불
어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동향과 동창이라는 연고주의로 묶여 학회의 토론이나
논문심사, 학회지의 서평 등을 통해 자기 집단 구성원들의 연구업적에는 찬사를 보
내고 반대편 입장에 서거나 자기 집단 밖에 있는 사람들의 연구는 무시하거나 폄하
하는 관행이 없지 않았다. 한국사회학의 전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일방적 칭찬
과 폄하를 넘어서서 좀 더 근거 있는 객관적 비평 작업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한
국사회학의 창건자라고 할 수 있는 이상백이 사회학을 제도화시키는 과정을 두껍게
서술하면서 그의 삶과 저작들이 오늘의 한국사회학에 갖는 의미를 반추해보려고 한
다.5)
Ⅱ. 이상백과 한국 사회학의 제도화
1. 이상백에 대한 선행 연구들
1903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상백은 1919년 3.1운동 당시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
유로 경찰에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이후 192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에서 사회학과 사회사를 전공한 그는 일본 농구의 제도화에 기여하면서
일본체육계의 중요한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6)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는 와
5) 사회학의 창건자 콩트에 대한 신용하(2012)의 연구를 참조할 것. 이상백(1903-1966)은 프랑스의
아날학파 2세대를 대표하는 페르낭 브로델(1902-1985),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미국 사회학의 대
표적 이론가 탈콧 파슨스(1902-1979)와 동년배 인물로서 다소 일찍 세상을 떠났다.
6) 그는 이미 1930년대에 일본체육회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황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와
교류하였으며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는 일본선수단 총무 자격으로 참석하여 1940년 동경올림
픽을 유치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동경올림픽은 중일전쟁의 확대로 실시되지 못하다가
1964년에 가서야 열렸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체육회와 한국올림픽위원회를 만드는 일에 기여
하였고 아시아경기대회를 시작하는 일에도 공을 세웠다.
6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세다대학교 재외특별연구원 자격으로 만주 지역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해방 한 해
전인 1944년 일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해방정국에서는 몽양 여운형과
함께 정치활동을 하다가 몽양 서거 이후 정계를 떠나 사회학자이자 체육인으로 활동
하면서 사회학을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제도화하는데 기여했다(김필동, 1994; 박명규,
2004). 이상백은 1945년 9월 경성대학교 사회학 담당 교수로 임명되었고 1946년 4월
에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였으며 1957년에는 한국사회학회 창립을 주도하
여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64년에는 학회지 한국사회학을 창간함으로써 한
국사회학을 제도화시켰다.
이상백의 사회학을 연구하기 위한 기본 자료는 1978년 을유문화사에서 세 권으로
나온 이상백 저작집과 1996년 상백 이상백 평전 간행위원회에서 펴낸 상백 이상
백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백 사후에 나온 이상백 저작집이 그의 사회사 연
구 논문 및 저서와 “과학적 정신과 적극적 태도”, “질서와 진보”, “중간계급의 성
격”, “사회과학의 통합을 위한 시론”, “사회변동의 제 과제” 등 10여 편의 사회학 논
문들을 망라하고 있어서 그의 학문세계를 보여주는 기본 자료라면, 이상백 타계 30
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상백 이상백 평전에는 역사학자, 사회학자, 체육인 등 이상
백의 다면적인 모습이 나온다. 그 가운데 이만갑, 김채윤, 한완상, 김경동, 강신표, 신
용하, 김필동 등이 쓴 글을 통해 이상백이 후배 교수나 다음 세대 사회학자들에 대
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상백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1978년 신용하가 쓴 “이상백 선생과 한국사회사연
구”라는 논문이다. 그러나 이상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90년대에 들어서 시작
되었다. 이상백에 대한 기본 자료를 바탕으로 가장 충실한 연구를 수행한 사람은 김
필동이다. 그는 이상백에 대해 네 편의 글을 발표했다. 1993년에 발표한 “이상백의
사회사 연구”와 1994년에 발표한 “이상백의 생애와 사회학사상”라는 두 편의 논문
을 통해서 사회사와 사회학 양대 분야에 이상백이 남긴 업적을 정리하고 분석했다.
1994년 역사학자들이 펴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에 ‘이상백’ 편을 쓰기도 했다.
1996년에는 “이상백의 학창시절”이라는 글을 통해 1945년 이전 이상백의 지적 형성
과정을 추적했다. 그의 작업은 이상백의 “사회학적 사유의 재구성을 통해 상백 사회
학을 학문적 관심의 세계로 복원”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평가와 비판에는 신중
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김필동, 1994가: 5).
이상백은 사회학자이면서 체육인으로 활동했는데 한영혜는 1996년 이상백이 일본
에서 활동할 때 일본어로 발표한 글들을 자료로 하여 “이상백과 근대체육-식민지 시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7
대 지식인의 자아실현과 민족아이덴티티: 일본에서의 체육활동을 중심으로”라는 논
문을 발표했다. 이 글은 다른 사회학자들이나 체육인들이 쓴 글과 달리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의 이상백과 그의 친일여부를 신중하게 다루고 있다. 이후 박명규는
2004년에 발표한 “한국사회학의 전개와 분과학문으로서의 제도화”라는 글에서 한국
사회학의 제도화 과정에서 이상백이 한 역할을 밝혔다. 나의 연구는 이런 선행 연구
들을 참조하면서 기존의 연구에서 제기하지 않은 문제들을 다소 비판적으로 접근한
다. 말하자면 이상백을 한국사회학의 태두, 비조, 창건자, 아버지로 보는 기존의 해
석에 동의하지만 1945년 해방 당시 다른 사회학자들이 아닌 이상백이 사회학을 대
학 내에 제도화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과정을 추적하고 이상백이 제도적 아버지
를 넘어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내용을 채운 정신적 아버지로서 충분한 역할을 했는가
를 검토해보려고 한다.7) 그리고 사회학의 제도화 과정에서 그가 생각한 사회학의 모
습이 이후 한국사회학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한다.
2. 진단학회와 사회학과 창설
하나의 분과 학문이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기존의 분과 학문과 구별되는 고유한 이론적 방법론적 패러다임 정립, 둘째 대학 내
에서 제도적 지위 확보, 셋째, 학회 형성과 학회지 발간 등 학문공동체의 형성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나의 학문이 제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박명규, 2004:
41). 아래에서 세 가지 조건을 차례대로 살펴본다. 먼저 두 번째 조건인 사회학의 대
학 내의 제도화 과정부터 살펴보자.8)
해방 당시 대학 안에 사회학과를 설치할 지적 자원을 가지고 있던 “여러 명의 사
회학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백이 사회학의 제도화를 주도할 수 있었던 데에
는 개인적 요인과 함께 여러가지 정치적, 제도적 요인들이 있었을 것”이다(박명규,
2004: 48). 이상백은 1934년 진단학회 창립에서부터 회원으로 활동했고 그 활동을
바탕으로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경성제국대학
7) 김필동(1993: 84-85)은 신용하(1977)가 이상백의 사회사연구에 대해 쓴 글이 “상백에 대한 제자
의 추념 논문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비판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다”고 썼는데 필자가 볼 때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출신이라면 누구라도 이상백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8) 한국사회학의 제도화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1946년에 설치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만이 아니라
1954년에 창설된 경북대학교 사회학과와 1958년에 창설된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에 대한 연
구도 필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상백과 관련하여 한국 최초의 사회학과인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의 창설만을 다룬다.
8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교가 국립서울대학교로 전환되고 그 안에 문리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국사학자
이병도를 중심으로 하는 진단학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9) 진단학회는 일
제강점기에 경성에 거주하며 조선을 연구하던 일본인 학자들의 단체인 ‘청구학회’의
관변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학문 활동에 맞서기 위해 조선인 학자들이 1934년 5월에
만든 학회이다.10) 청구학회가 발간하는 청구논총은 당연히 일본어로 쓴 논문을 게
재했는데 진단학회의 학회지 진단학보는 우리말로 쓴 논문을 실었다. 진단학회 회
원들은 “대개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대학에 진학하는 한편
국어와 역사, 사회, 문화를 전공한 사람들로, 비록 형식적 여건 때문에 일본인 교수
로부터 배웠으나 민족문화의 수호를 위해 한국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만큼, 민족적
자부심,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이현희, 1996: 158). 이병도,
이선근, 김상기, 이상백, 신석호, 문일평, 손진태, 송석하 등의 역사, 민속, 사회 분야
의 학자들, 김윤경, 김태준, 이병기, 이은상, 이윤재, 이희승, 조윤제, 이재욱, 최현배
등의 국어국문학자들, 조선 미술사를 전공한 고유섭, 윤리학자 김두헌, 교회사가 백
낙준 등 총 24명이 발기인었고 그 가운데 이병도, 이윤재, 이희승, 손진태, 조윤제 등
이 위원으로 선출되어 실무를 맡았다.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등 26명은 찬조위원으
로 선출되었다(진단학회, 1994: 82-85). 이 학회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
나면서 진단학회의 회원이기도 했던 이윤재, 이희승, 최현배, 이병기 등이 일본 경찰
에 의해 구속된 이후 일제의 수색과 사찰이 강화됨에 따라 자진해서 활동을 중지한
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상백은 진단학회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1934년 진단학회가 결성될 때부터 참
여해서 진단학보 창간호에 “서얼차대의 연원에 대한 일 문제”를 게재했다. 1939년
에서 1941년 사이에는 진단학보 편집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1942년 조선어학
회 사건 이후 활동을 중단했던 진단학회는 해방이 되자마자 1945년 8월 16일 인사
동 태화관에서 모여 회칙을 개정하고 바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때 이상백은 상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진단학회 위원장이었던 송석하가 사망한 다음에는 위
원장이 되어 학회를 이끌었으며 1954년 진단학회가 사단법인으로 등록할 때는 부이
사장으로 선출되었다(이현희, 1996: 162).
1945년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여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10월 16일에는
9) 경성제국대학에 대한 연구로는 정근식 등(2011)을, 서울대학교 창립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서
울대학교40년사편찬위원회(1986)을, 진단학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진단학회(1994)를 참조할 것.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단학회의 주요 인물들이 조선사편수회에 관여했다거나 만주에서 친일행위
를 했다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9
경성제국대학이 경성대학으로 개칭되었다. 1946년 8월 22일에는 경성대학과 서울에
있던 여러 전문대학을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을 만들려는 이른바 ‘국대안’이 발표되
었다. 국대안에 대한 반대 투쟁이 심해지자 군정청은 1947년 2월 수정안을 발표하고
5월 26일 새로운 이사진을 발표하면서 수정안을 제시했다.11) 국립대학 설립에 반대
하는 운동이 격렬했지만 미군정은 반대파 교수들과 학생들을 몰아내고 경성대학교
를 서울대학교로 개편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상백은 한편으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활동에 참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 창설된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는 일에 힘썼다.12) 그러나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한
이후 정치활동을 접고 오로지 사회학과의 창설에 집중했다. 이상백이 사회학과를 창
설할 수 있었던 근거는 앞서 말했듯이 그가 진단학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점에
있다. 김필동(1994가: 131)에 따르면 “상백의 진단학회 활동은 해방 후 상백이 경성
대학 및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고,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는데 결정적인 배
경이 되었다. 왜냐하면 진단학회 출신들이 문리과대학 문학부의 교수진 구성의 중심
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냈고 진단학회 회원이었던 김재원
(1992: 325)의 회고에 따르면 국대안 반대운동이 전개되던 “1946년 12월 말 진단학
회 회원들이 대거 법문학부의 교수 진용을 구성하였다.” 그에 따라 당시 진단학회에
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이상백도 당연히 서울대학교 교수진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
무렵 민속학자 송석하가 서울대학교 문리대 안에 인류학과를 개설하였다가 일찍 사
망함으로써 학과 설립이 유명무실해진 것을 보면 이상백의 존재와 활동은 사회학과
설립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전경수, 1999: 150-161).
국대안의 실현으로 일본식 대학 제도를 버리고 미국식 대학 체제가 도입되었다.13)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법문학부로부터 법학부가 분리되어 나갔고 홀로 남은 문학부
11) 자료(국사편찬위원회, 2011: 2, 13)에 따르면 1945년 10월 16일자로 공포된 미군정 법령 제15호
는 “경성제국대학을 서울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1946년 8월 22일 공포된 군정법령 102호의
제목은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으로 되어있다. 이 법령의 제 2조는 다음과 같다.
“전 세계 일류 고등기관의 학문 수준에 필적할만한 정도로 동 대학교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필요한 제반 감리제도(경쟁, 시험 급 기타 방법에 의한)를 창정함.” 다른 한편 이화여자대학교는
1946년 8월 11일, 연희대학교는 1946년 8월 15일에 미군정으로부터 설립 인가서를 받았다.
12) 1947년 5월 24일 여운형이 주도하여 창당한 근로인민당의 기본입장은 미소양국에 공정불편한
정책을 취하며 민족통일을 기초로 신흥국가를 건설하고 봉건적 생산관계의 철저한 소탕과 개인
적 창의를 허용하는 민주주의적 신경제 체제를 수립하며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 발양한다는
것이었다. 이상백은 근로인민당에서 중앙감찰위원이라는 직을 맡았다(김삼웅, 2015: 339-340).
13) 이후 법문학문부로부터 법학부가 분리되어 나갔고 문학부는 이학부와 합쳐서 문리과대학으로
출범했다.
10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는 미국식 대학체제에 맞추어 이학부와 합쳐서 문리과대학으로 출범했다. 당시 문리
과대학은 3부로 이루어졌는데 1부는 어학 및 문학, 2부는 사회과학, 3부는 자연과학
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2부의 사회과학부는 사학과, 사회학과, 심리학과, 인류학과,
정치학과, 종교학과, 철학과, 지리학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사회
학과가 만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찾을 길이 없다. 미군정의 관리
가 미국식의 사회학을 도입하여 맑스주의에 기초한 좌파 학술운동에 대안을 마련하
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병도와 이상백을 비롯한 진단학회 회원들이 일본에서
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학과 창설을 기획했는지, 그도 아니면 유억겸과 오천석을
비롯한 미군정의 교육정책 수립가들의 의견이었는지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
지 않다.14) 이상백이 스스로 나서서 사회학과를 만들려고 했다는 의도를 공식적으로
밝힌 적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사회학과의 창립은 이상백의 의도라기보다는 다른
데서 나온 안이고 이상백이 사회학과 창립에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 진단학회 회원들
사이에서 사회학과의 설립자로 승인된 듯하다.15) 아무튼 그 당시 서울대학교 사회학
과 설치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당시의 미군정 당국 및 미국의 정책적
고려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한완상·이기홍, 1997: 192). 미
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점차 냉전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그 시기에 미군정 당국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로 경도되는 것을 막고 한국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수행했을 것이다. 아직 확실한
자료가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냉전체제의 수립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이루어진 서울
대학교 사회학과의 창설은 사회주의 이념에 맞서 자유주의적이며 반공주의 노선의
사회학 도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16)
14) 이만갑(2006: 15)은 사회학과 창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해방 첫해에 사회
학과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난 모르지만, 아마 그 당시에 와세다 사람
들이 상당히 영향력이 컸을 거예요. 우선 두계 이병도가 이상백 선생의 선배고, 또 그 양반들이
다 진단학회 멤버고, 두계 선생이 진단학회 리더쉽도 상당히 강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이고, 그
러니까 서울대학에서 좀 공부한다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회학과 만들자 그런거죠.” 이와 달리
변시민(2007)에 따르면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군정이 사회학
을 미국의 학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립서울대학교안은 오천석과 유억
겸 등 미군정청 학무국의 한국인 관리들이 구상한 것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그들이 사회학과의
창설을 건의했을지도 모른다(서울대학교50년사편찬위원회. 1996: xxx).
15) 당시 진단학회 회원 가운데 역사학자가 많아서 모두 역사학과 교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 정치사에 박식한 이선근은 정치학과로 배치되고 사회사를 전공한 이상백은 사회학과로 가
게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김성은, 2015: 67-68).
16) 냉전 초기 미국의 후진국 정책은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경제원조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주의 이념에 대항할 수 있는 대항적 가치와 이념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워트닉
(Watnick, 1968: 436)을 볼 것. 워트닉의 글은 원래 1951년 시카고대학에서 발표한 것이다. 박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11
3. 초창기 사회학과의 교수진 구성
하나의 학문이 제도화되는 과정에는 학문의 새로운 내용과 연구와 교육을 담당할
학자들이 필요하다. 이상백이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난 다음 어떤 사람을 교수로 충
원했는가가 한국 사회학의 앞날을 결정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과 프랑
스, 독일 등 구미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돌아 온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이상
하게도 모두 식민지 시대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충
원되었다.17) 1920년대와 30년대에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이상백은 1945
년 9월 미 군정청으로부터 경성대학교 사회학 담당 교수로 임명되었고 1946년 4월
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안에 사회학과를 창설하였다. 이상백에 이어 두 번째로
교수가 된 사람은 양회수로서 그 역시 와세다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양회수는 아마도 이상백의 추천으로 교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로 교수가 된 사람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의 변시민이다. 그는 이상백을 통하지 않고
교토대학의 저명한 화학 교수였다가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장으로 일하고 있던 이태
규를 통해 사회학과 교수가 되었다(변시민, 2006: 31). 당시 막스 베버를 독일어로
강독하던 변시민은 지적 자부심에 차있었으며 1952년 사회학을 출간하면서 지적
인 권위를 확보했다. 1946년 이후 사회학과 창설 이후 서울대 사회학과에서는 고황
경, 한치진, 최문환, 배용광, 이만갑 등이 강의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와세
다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최문환은 1949년 근세사회사상사를 펴냈고 1950년
사회학과의 네 번째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로서 서울대 사회학과에는 와세다대학 출
신이 주류가 되었다. 이만갑은 변시민 이후 사회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6·25전
쟁 당시 장교로 복무하면서 서류상으로 해직되었다가 1957년 다시 교수로 임명되었
다. 다른 한편 전쟁 당시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양회수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떠났
다.18) 경제학을 공부했지만 상대 쪽에 자리잡기가 힘들었던 최문환은 1950년 이상
백의 후원으로 사회학과 교수가 된 이후 막스 웨버 연구, 민족주의 전개과정 등
중요한 저서를 펴낸 이후 1961년 서울대 상대 학장이 되어 사회학과를 떠났다. 최문
영신(1985: 17-18)은 남북 분단과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이라는 ‘구조적 유인성’이 작용했지만
그와 더불어 일본 중심에서 미국 중심으로 바뀐 상황에서 남한의 식자층이 실리적 계산에 기초
해 급속하게 미국사회학을 수용했다고 본다.
17) 박영신(1985: 15)은 이를 두고 “이들은 모두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동류의식을 가졌을 것이며,
실제 일본 식의 사회학 연구 경향에 따라 그 분위기에서 훈련‧생산된 인물이었다”라고 썼다.
18) 이만갑은 6·25전쟁 당시 공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서울대 교수직을 상실했다가 1955년 코넬대
학에 연수를 다녀온 이후 1957년에 다시 교수로 임명되었다.
12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환이 사회학과를 떠날 때까지 사회학과는 이상백과 최문환이 주도하는 학과가 되었
다(김채윤, 1980). 그 때문에 사회학과의 권력관계에서 변시민은 소수파가 될 수밖에
없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1958년 문교부 국장이 되어 사회학과를 떠났다. 같은 해
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1회 졸업생인 이해영이 사회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변시
민과 최문환이 사회학과를 떠난 이후 사회학과는 이상백, 이만갑, 이해영이 주도했다
고 볼 수 있다. 이해영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생들이 차례로 교수가 되
기 시작했다.
사회학이 제도화되는 과정에는 다음 세대 학자의 양성이 중요하다. 이상백은 그
점을 충분히 인식하였는지 학문적 자질이 있어 보이는 제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서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대 사회학과 1회 졸업생으로 서울대
교수가 된 사람은 앞서 말한 이해영과 황성모 두 사람이다.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졸
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1회로 입학한 이해영은 이상백의 총애를 받아 1955년
이만갑과 함께 미국무성 초청으로 1년간 연수를 다녀온 이후 1958년 사회학과 졸업
생으로는 처음으로 교수에 임용되었다. 반면에 황성모는 1954년에서 1957년 사이에
강사 생활을 하다가 1957년 독일에 유학하여 1961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다
음 해인 1962년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몇 년 안되어 민비련 사
건으로 해직되었다. 이후 고영복이 1966년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6·25전쟁 중인 1952년 사회학과에 입학한 김채윤은 오랜 기간 동안 이
상백의 무급 조교 역할을 하다가 1967년에 교수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6·25전쟁
직후 1950년대 중반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김일철, 한완상, 김경동 등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으며 1975년 서울대학교
가 개편되면서 상대에서 가르치던 신용하와 김진균, 교양학부에서 가르치던 최홍기
가 사회학과 교수로 합류했다. 신문대학원에서 가르치던 오갑환도 사회학과로 합류
했으나 요절하고 말았다. 한국사회학의 역사에서 2세대에 속하는 이들은 모두 이상
백의 지적 세례를 받고 사회학에 입문한 사람들이다. 이상백은 1966년 정년을 채우
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국내외에서 수학한 2세대 사회학자들을 양성하여
한국사회학의 제도화에 기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19)
19) 하나의 학문이 대학 내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학문의 창시자를 중심으로 제자 집단이 형성되어
야 한다. 1890년대 프랑스에서 뒤르켐이 사회학 연보 L'Année sociologique를 매체로 하여 모
스, 포코네, 시미앙, 부글레, 알박스, 위베르 부르젱 등의 제자들과 함께 학파를 형성하면서 대
학 내에 사회학을 제도화하고 다른 학문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분석한 필립 베나르
(Besnard, 1979)를 볼 것.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13
4.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사회적 승인
사회학의 제도화를 위해서는 대학 내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전문적인 학술활동의
전개를 위해 학회를 구성해야 한다. 그 두 가지 조건이 형식적 조건이라면 사회학이
라는 학문의 고유한 연구 대상, 이론, 방법 등을 제시하고 그것을 다른 학문 분야의
학자를 포함하여 학계 전체에서 승인 받는 것이 필요하다(박명규, 2004: 41). 이 점
에서 1950년 6월 1일 발간된 종합학술지 학풍의 사회학 특집호가 중요하다. 학
풍은 해방 직후 창설된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학술지로서 이상백이 그 창간에서부터
중요하게 관여했다. 이상백은 학술 활동에서 출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을유문화사
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20) 학풍은 “지질과 인쇄가 근래의 호화판일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 있어서도 해방 후 기간에 이 방면 잡지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동
아일보, 1948년 11월 9일자, 천정환, 2014: 41, 재인용). 학풍에는 역사학, 사회학,
법학, 경제학, 정치학, 어문학, 고고학, 미학, 과학 등에 걸친 학술적 논문들이 실렸고
‘경제학 특집’ ‘정치학 특집’ ‘전후 불란서 문학 특집’, ‘사회학 특집’ 등 특집호를 내
기도 했다. 필자로는 고승제, 안응렬, 전석담, 양주동, 이희승, 김기림, 이양하, 홍이섭
등 이후 한국학계의 각 분야에서 비조가 된 학자들이 참여했다. 저명한 외국학자의
논문을 번역하여 싣기도 했고 시와 소설 등으로 채워진 창작란도 마련했다(천정환,
2014: 41). 이상백은 이 학술지에 총 5편의 글을 발표했다.21) 그 가운데 창간호에
발표한 “과학적 정신과 적극적 태도-실증주의 정신의 현대적 의의”와 1950년 6월호
(통권 13호) ‘사회학 특집호’에 발표한 “질서와 진보-‘사회학’ 비판과 ‘진보적 입장’
에 대하여”라는 두 편의 글은 이상백이 대학 내에 사회학과를 만들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논문이다(신용하, 1976; 박명규, 1994가;
20) 이상백은 일찍부터 학술활동을 위해서 출판이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여 해방 직후 설립된 을유
문화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민병도, 1996; 정진숙, 1996). 학풍말고도 이상백이 관련된 진
단학회의 학술지 진단학보, 진단학회 편 한국사 전 7권이 모두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을유문화사 사장 정진숙(1996: 390)은 이상백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다. “상백 이상백 그분은
나의 절친한 선배이자 인자한 스승 격이었고, 내가 평생을 두고 운영해온 을유문화사의 보배로
운 저자이자 뛰어난 편집기획자였다.” 프랑스의 경우 뒤르켐은 알캉(Alcan)출판사와 부르디외
는 미뉘(Minuit)출판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미국의 경우 파슨스는 주로 프리 프레스
(Free Press)에서 주요 저서를 출간했다.
21) 이만갑에 의하면 학풍2권 5호(1949)에 이지동이라는 이름으로 실린 “역사와 사회학”이라는
논문도 이상백의 글이다. 이상백이 같은 잡지에 자신의 이름으로 여러 편의 논문을 싣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필명으로 쓴 글이라고 한다(김필동, 1994: 3). 그 밖에도 “사회학 특집호”에 L이라
는 이름으로 실린 “미국사회심리학의 신경향: 정신분석학과 문화인류학”과 부록으로 실린 40명
의 서구 사회이론가들 소개, 파슨스와 바버의 글 번역 등도 이상백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14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최재석 2002).
이상백이 주도하여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1950년 6월 1일자로 발행된 학풍
의 ‘사회학 특집호’는 지식사회 일반에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성격과 그 중요성을 널
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정치학 특집호와 경제학 특집호에 이어 마련된 사회학 특집
호는 6·25전쟁의 발발로 그 효과가 반감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상 당시 아직
윤곽이 흐릿했던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앞으로 한국의 사회학
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특집호에는 다음과
같이 9편의 논문과 40명의 서양 사회학자를 소개하고 있는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이상백, “질서와 진보-‘사회학’ 비판과 ‘진보적 입장’에 대하여”
② 탈코트 파아슨즈/바아나아드 바아버어, “전쟁 말기와 전후의 미국사회학:
1941-1946”
③ 김종흡, “종교사회학논교”
④ 이만갑, “가족기원론”
⑤ L, “미국사회심리학의 신경향: 정신분석학과 문화인류학”
⑥ 배용광,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 지식사회학적 일 고찰”
⑦ 고재국, “양반제도론-이조사회 형태의 문제”
⑧ 변세진, “문화와 사회- 미국문화사회학론”
⑨ 한상진, “예술사회학의 제문제”
⑩ 부록: “학설 중심 사회학자 군상”
부록에는 그 출처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맑스, 베버, 뒤르켐이라는
3대 고전사회학자는 물론 콩트, 스펜서, 퇴니스, 르플레, 타르드, 짐멜, 파레토, 만하임,
쿨리, 소로킨, 카우츠키, 부하린 등 40명의 사회이론가들의 주요 저서와 학설이 소개
되고 있다. 이상백은 학풍의 사회학 특집호의 기획과 편집에 직접 관여하면서 사
회학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특집호의 구성을 음미해 보
면 당시 이상백이 사회학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상백은 맨
앞에 실린 글에서 한국의 지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사회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 다음에 눈에 띠는 것은 미국사회학에 대한 관심이다. 탈콧 파슨스
와 버나드 바버가 쓴 2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사회학의 흐름을 정리하는 논문을 번역
하여 싣고 있으며 필자 미상의 미국의 정신분석학과 문화인류학을 소개하는 글이
“미국사회심리학의 신경향”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거기에 변세진이 쓴 “문화와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15
사회- 미국문화사회학론”을 실어 미국사회학을 소개하는 글이 전체 9편의 글 가운데
3편이 실려 있는 셈이다. 그 다음에 김종흡의 종교사회학, 이만갑의 가족사회학, 배용
광의 지식사회학, 한상진의 예술사회학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이로서 사회학은 종
교, 지식, 예술, 가족 등 광범위한 영역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형
성하고 있다. 그 다음에 조선사회에 대한 고재국의 글을 실음으로써 한국의 사회학
은 한국의 전통 사회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야함을 밝히고 있다. 이 특집호는 6·25전
쟁이 끝나고 1955년부터 사회학자들의 미국 연수가 시작되어 미국사회학이 본격적
으로 수입되기 이전 초창기 한국사회학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주로 일본에서 공부
한 학자들이 새로 등장하는 미국 사회학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22)
이 특집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대목은 그 필자들이다. 9편의 글 가운데
번역 논문과 저자 미상의 논문을 제외하면 7명의 필자가 남는데 그 가운데 이후 한
국 사회학계에 남아 활동한 사람은 이상백, 배용광, 이만갑 이렇게 세 사람에 불과하
다. 그 가운데 이상백과 이만갑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사회학의 제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배용광은 1954년 경북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여 그곳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한국 사회학의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
다. 학풍의 특집호의 필자와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첫째 왜 당시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회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돌아온 하경덕, 고황경, 한치진,
김현준, 공진항 등의 학자들이 필자로 참여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다. 특집호를
기획한 이상백이 이들을 필자에서 배제한 것인지 아니면 이들이 원고 청탁을 거절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당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는 변시민, 양회수,
최문환, 이만갑 등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이 있었는데 왜 이들 가운데 오
로지 이만갑만이 필자로 참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23)
22) 이 글에 대한 익명의 논평자가 지적했듯이 해방 이후 서울대 문리대文理大 안에 만들어진 사회
학과의 학문적 정체성은 ‘느슨하고 이완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주체적
으로 정의할 수 있는 ‘틈’ 또는 ‘새로운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학의 경우 해방 이전
일본 학계의 지적 영향력을 벗어나 주체적으로 자기 학문을 정의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지적 역
량이 부족했다. 따라서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방법은 미국의 학문을 수용하는 길이었다. 박
영신(1995: 133)에 따르면 당시 우리 학계에는 “미국 의존에 대한 비판이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학문적 전통이 없었(고) ‘미국의 지배’라는 두터운 외곽의 담을 넘어 설 수 있는 지적 초월
성을 가지고 독창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 학자군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23) 변시민과 최문환이 사회학과를 떠나고 이상백이 타계한 1960년대 중반 이후 이만갑은 이해영과
함께 서울대 사회학과를 주도하게 된다. 이만갑(1980)은 이상백이 독신생활을 했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자주 그의 집을 방문하여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회고하면서 이상백과의 밀접
한 관계를 시사했다.
16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사회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성립하려면 주변의 다른 분야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적 인정이 필요하다. 이상백은 “사회학을 제도적으로 정착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을 통해 신생 학문인 사회학이 한국의 학계 내에서
일찍부터 지적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을 만든 인물이다”(박명규,
2004: 41) 그는 역사학자는 물론 법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국어국문학 연구자들
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사회학의 독자성과 중요성을 인식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이상백이 을유문화사에서 ‘한국문화총서’를 발간하고 학풍이라는 종합학술지를 발
간하는 일에 깊게 관여하는 과정과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를 창설하여 한국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48년에서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매일 오후 학교 일이 끝나면 이상백은 을유문화사로 가서
이병도, 이희승, 이숭녕, 김재원 등과 함께 총서 출판 기획과 학풍의 편집에 관여
했다(정진숙, 1996: 390). 그 과정에서 이상백은 다른 학자들에게 사회학이라는 학문
의 중요성을 인식시켰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이자 동아문화연구소장 시절
그의 연구실에는 사회학과 교수들은 물론 역사학과의 고병익, 한우근, 전해종, 김철
준 교수를 비롯하여 영문과의 전제옥 교수, 정치학과의 민병태, 김영국 교수, 그리고
천관우, 이종복 교수 등이 자주 출입했다(김채윤, 1996: 91). 이상백의 회갑 기념 논
총(이상백박사 회갑기념논총 편집위원회, 1964)에는 배용광, 이만갑, 이해영, 황성모,
최재석, 고영복, 김채윤, 김일철, 김경동 등의 사회학자와 더불어 이병도, 김상기, 이
기백, 김철준, 천관우 등의 국사학자, 고병익, 전해종, 민영규 등의 동양사학자, 이희
승, 이숭녕, 김방한 등의 국어학 및 언어학자, 정병욱, 조지훈 등의 국문학자, 중국문
학자 차주환, 고고학, 미술사학 및 미학 분야의 김원룡, 김재원, 황수영, 오병헌, 정치
학자 이용희와 홍순창 등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중요 학자들의 논문이 망라되
었다. 이를 통해 이상백이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학계에서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 인
정 받게 하는데 기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Ⅲ. 이상백의 학문적 유산
1. 실증주의와 과학적 사회학
“한국 사회학의 태두로 인정받는 사회학자 이상백”은 해방 직후의 이념적 대립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17
상황에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난 실증적 태도와 과학적 정신을 강조했
다(박명규, 2008: 174).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창설 이후 이상백은 좌우대립과 분단
의 고착화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의 구성이라는 혼란의 와중에서 한국사회학의 좌표
를 마련해야 했다. 흔히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창건자로 뒤르켐과 베버를 들고 거기
에 맑스를 추가하여 3대 고전사회학자로 보고 있지만 해방 직후 이상백이 사회학과
를 창설했을 당시 한국에 가장 알려진 사회학이론은 맑스주의였다. 그러나 맑스주의
는 좌익운동의 이론적 근거였기 때문에 서울대학교에 만들어진 사회학과에서 맑스
주의사회학을 공식적으로 다루기는 어려웠다. 실증사관에 입각해있던 역사학자로서
이상백은 1930년대 한국에서 이루어진 백남운의 저작을 비롯한 맑스주의 사회경제
사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좌우대립이 심각하던 1947년에 7월에 출
간된 조선문화사연구논교 서문에서 이상백(1978, 1권: 8-9)은 맑스주의 사관에 대
해 다음과 같이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연구의 도정에 있어서 무슨 일반적인 법칙이
나 공식만을 미리 가정하여 그것을 어떤 민족의 생활에 견강부회하는 방법을 취하여
서는 안 된다. (...) 독단적 해석과 기계적 적용은 진리를 탐구하는 방도가 아니요, 참
으로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24) 그렇다면 이상백은 맑스주의 사
회학에 대항해서 베버나 뒤르케임주의 사회학을 내세웠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백은
일본에서 베버와 뒤르켐에 대해서 별로 연구한 내용이 없었던 것 같다.25) 그래서 이
상백은 고전사회학자들을 넘어 사회학의 창시자인 오귀스트 콩트를 불러왔다. 실증
사학자였던 이상백은 콩트의 실증주의에 기대어 자신이 생각하는 한국사회학의 기
본적 지향점을 제시했다.26)
한국 사회학의 미래에 대한 이상백의 생각은 1948년 학풍 창간호에 발표한 “과
학적 정신과 적극적 태도”라는 글과 1950년 같은 잡지 13호에 쓴 “진보와 질서”라
는 글에 잘 나타나있다. 신용하(1976: 50)의 평가에 따르면 이 두 논문은 해방 후 독
립학과로서의 사회학과의 건설의 의의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하나의 기본 지침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사회학을 맑스주의로부터 분리시키고 콩트의 사회학을 근거
로 들어 실증주의, 경험주의적 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을 제시하는 것이었다(김필동,
24) 그렇다고 이상백이 맑스주의 학설을 원초적으로 부인한 것은 아니다. 이상백(1978, 3권: 468-472)
은 맑스주의 “학설의 계급성 때문에 그 진리를 무시, 간과하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정당한 태도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25)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대학 체제에서 맑스, 베버, 뒤르켐 등의 사회이론을 사회학자보다는 법학
부의 정치학 전공 학자들이 주로 다루었다고 한다. 일본 사회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영혜가 옮
긴 다케시(2003)를 참조할 것.
26) 콩트의 저서 실증철학 강의에 대한 비판적 논의로 민문홍(1994)을 참조할 것.
18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1994가: 22-25). 이념적으로 좌우가 대립하던 해방 정국에서 미군정의 주도로 이루
어진 국립대학 사회학과의 이념적 지향은 이미 구조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국립대
학 종합화 과정에서 이념적으로 혁신계 또는 진보적 입장에 서는 학자들은 국대안을
반대했고 그 과정에서 자의든 타의든 대학 교수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1920년대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실증사관으로 무장한 이상백은 한국 사회학을 제도
화하기 위해 콩트의 실증주의를 내세웠던 것이다. 1957년에 쓴 글에서 최문환은 해
방 직후 한국 사회학이 맞이했던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초창기의 사회학은 “유물
사관 속에서 자라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사회과학이란 명칭 아래 가두에 범람한
좌익 이론의 선전을 위한 허다한 팜플렛, 번역본 등은 사회학의 준재를 각성케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박명규, 2004: 53, 재인용). 이런
상황에서 이상백은 콩트의 실증정신을 바탕으로 사회학계 내의 분파를 넘어서 통합
을 지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상백은 콩트의 실증주의에 기대어 한국사회학의 지향점을 어떻게 설
정했는가? 이상백(1978, 3권: 439-449)은 “과학적 정신과 적극적 태도-실증주의 정
신의 현대적 의의”에서 콩트의 사회발전 삼단계 법칙과 실증주의를 비판적으로 소화
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는 콩트의 실증주의를 프랑스 혁명 이후 정신적 무정부 상태
에 빠진 프랑스 사회를 재통합시키는 사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콩트의 실증주의를
내세워 해방 직후 좌우대립으로 혼란해진 한국사회의 혼란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
으로 제시하였다. 그가 볼 때 실증주의는 신학적 단계와 형이상학적 단계를 넘어선
최고의 단계로서 사실에 대한 관찰에 입각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적 정신이었다.
“정신이 사실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실증적 정신이야 말로 “제일의 과학적 정신
이요, 과학적 정신은 관찰의 우위를 믿는 것이요, 따라서 사실을 존중하여 마지않는
태도”이기 때문이다(이상백, 1978, 3권: 445).
그런데 이상백(1978, 3권, 445-446)은 콩트의 실증주의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
했다. 실증적 정신은 사실에 대한 관찰을 존중하는 인식론적 태도에 머무르지 않고
또 하나의 측면을 갖는데 그것은 비판보다는 건설을 중시하고, 파괴보다는 형성을
강조하는 실천 윤리를 의미한다. 이상백이 볼 때 “실증적 정신은 소극적, 부정적 태
도가 아니고 적극적, 긍정적 태도”를 의미한다.27) 그는 콩트의 실증주의를 통해 사
27) 이상백은 ‘실증철학’의 프랑스어philosophie positive를 긍정의 철학, 적극적 철학으로 해석하고
이를 부정의 철학philosophie négative과 대립시켰다. 민문홍(1994: 18)은 콩트의 실증주의가 오
늘날의 경험적 연구를 강조하는 실증주의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보면서 콩트의 실증주의가
내포한 의미를 다섯 가지로 제시했다. 그것은 공상주의와 반대되는 실제적인 것이며, 개인적이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19
회학자로서 학문하는 태도와 현실에 참여하는 태도 양쪽에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
려고 했다. 학문적으로는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실증을 중시하는 과학적 태도를 가져
야 하고 현실에 대해서는 비판과 파괴보다는 건설과 형성을 강조하는 적극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실증주의의 한 요소로 적극적 태도를 강조한
이상백은 콩트의 실증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해방 후의 혼란 상황에서 이상백은
역사와 사회가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지 않고 인간의 주체적 개입에 의
해 새롭게 구성되는 측면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상백은 콩트의 실증주의가 인간의
주체적 행위 가능성의 측면를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현재는 생활하는 인간이 서있
는 장소이다. 콩트는 이것을 무시한다. (…) 그는 인간을 단순한 추상으로 생각하고
인류 혹은 사회만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오는 힘이 여하하더
라도 그것이 미래를 지어가기 위해서는 아무튼 현재의 산 인간을 통해야만 되고, 그
매개를 거쳐야만 되는 것이다. 이같이 살아서 활동하는 현재의 인간을 무시한 데 과
학적 정신과 적극적 정신이 콩트의 의중에는 통일되었으면서 실제에 있어 통일되지
못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금일에 있어서도 실증적 정신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정신과 적극적 정신의 합일 통일이 확보된 한에 있어서만이요, 현재에 생활
하는 인간의 활동을 정당히 파악하는 한에 있어서만이다”(이상백, 1978, 3권: 449).
김필동(1994가: 25-27)은 이와 같은 이상백의 이론적 입장을 ‘인간주의 사회학’이라
고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이상백은 집단간 갈등이 나타나는 정치 현상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해석한다.
이상백은 인간의 실천 능력을 강조하였지만 그것은 당시 강세를 보이던 맑스주의
실천론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는 실천을 이론보다 앞세우는 맑스주의 학
문관을 지지하지 않았다.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1일에 출간된 학풍
13호에 실린 “진보와 질서”에서 이상백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과학
은 보통의 실천과 구별이 있고 맹목으로 실천에 몰입하는 것을 배척하여야만 한다.
학문에 최초부터 ‘진보’라는 것을 선험적 향도 개념으로 원용하여 독단적·맹목적
해석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학문을 진보적 과학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요, 이러한 것
은 그 후의 사회적 실천에 의하여 여지없이 분쇄될 것”이다. 이상백은 해방 이후 남
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맑스주의를 실증주의를 통해 비판하면서 사회학을 하나의
고 집단적인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건전한 성찰이며, 의사소통에서 논리적 조화를 이루는 능력
이며, 현상의 본질과 양립할 수 있는 철학정신의 끊임없는 추구이며, 사회생활을 조직하려는 철
학적 경향이다.
20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경험과학으로 수립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회학은 “철학적 보편성의 추상적
연구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현실의 실태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진실을 파
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상백, 1978, 3권: 480). 이상백은 사회조사와 현지 실태
조사를 과학적 연구방법이라고 생각했고 1954년에는 대학원에서 직접 사회조사방법
론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이만갑, 이해영 등 후배 교수들을 미국에 연수시켜 과학적
사회학의 기초를 마련하려고 했다.28) 1957년에는 미국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귀국
한 이해영과 함께 덕적도에서 흑산도에 이르는 서해의 여러 섬들을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이상백은 실증주의를 강조하면서 과학적 사회학을 한국사회학의 지향점으로
설정했고 후배 교수와 제자들에게 조사방법론 중심의 ‘과학적’ 사회학을 진작시킴으
로써 이론적 사고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경험적 조사를 강조하는 한국사회학의 기본
풍토를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29) 그 결과 1950년대 후반 한국
사회학의 지배적 분위기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사회학자가 미국을 다녀오는 통
로가 넓어지자 일본식이거나 일본을 통해 전수되었던 사회학은 곧 미국식이거나 미
국을 통한 사회학으로 옮아가기 시작하였다. 거의 휩쓸다시피 한 ‘새로운 사회학’ 곧
‘사회 조사 방법’에 의한 연구의 분위기가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것은 어느 한 대학교뿐만 아니라 가히 이 시대를 풍미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그
러한 상황이었다. 마치 사회학의 연구는 조사 연구요, 사회조사 연구는 사회학이라는
등식이 확증되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이었다. 사회 조사 방법에 의하여 우리 사회
의 여러 측면을 연구하는 데 기여한 사회학자들은 고황경, 이만갑, 이해영, 이효재,
뒤이어 홍승직 들이다. 가족, 농촌, 도시, 가치관, 태도, 계층, 인구와 같은 문제에 대하
여 사회 조사 방법은 편리하고 유용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박영신, 1985: 15-16).
김진균(1997: 173-198)은 조사방법론 위주의 사회학이 ‘한국사회학의 몰역사성’을
가져왔다고 비판하면서 민중의 입장에서 한국의 역사현실과 대면하는 역사성의 회
복을 주장하기도 했다.
28) 김경동(1996: 347)의 증언에 따르면 1964년 유교적 가치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완성했을 때 이
상백은 예상과 달리 ‘경국대전’ 등에 나온 유교적 가치 분석에는 무관심한 반면 유교적 태도를
측정하기 위한 척도 구성과 도덕 및 수신 교과서 내용 분석에는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김경동은 이상백이 다음 세대 학자들에게 “한국사회의 특성을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하는
일을 격려하시려 했던 것”으로 해석했다.
29) 이상백이 ‘과학적 정신’과 더불어 사회의 개선에도 기여하는 ‘적극적 태도’를 강조하였지만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주류 사회학자들은 ‘과학적 정신’만 강조하면서 ‘적극적 태도’를 경시하
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21
2. 이상백의 사회사와 학문적 유산
이상백의 가문은 구한말 사회변동기에 축재에 성공한 신흥 부르주아였다. 대구 약
령시에서 한약재를 도매하였으며 1500석 규모의 지주이기도 했다. 이 가문의 재산은
도서관과 학교설립,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이상
백은 조선시대의 양반 체제의 구습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일본에서 공부할 때 서구
의 근대 의식을 남보다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30) 그는 1921년 와세다고등학원을 거
쳐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는데 그 때 손진태와 양주동이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
다. 이상백은 와세다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같은 학교 연구생 자격으로 있으면서
조선사회에 대한 사회사 연구를 진행했다. 이상백에 대해 기본 자료를 바탕으로 치
밀한 논문을 쓴 김필동(1996: 133)의 평가에 따르면 “아마도 상백은 당시 일본에서
교육받은 한국인 인문·사회과학자 중에서 가장 철저하게 학문적 수련을 쌓은 인물
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보여주듯 상백은 체육 관계 일
로 바쁜 가운데서도 많은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고, 그 논문들은 각각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상백이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정치에 관여했고, 일상을 체육 관계
일로 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카데미즘에 충실한 학자일 수 있었던 것도 이
러한 학창 시절의 수련이 배경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 투쟁보다는
아카데미즘에 헌신하는 태도를 견지한 이상백은 1948년 학풍의 창간호에 그때야
말로 “학문의 권위를 수립함이 가장 긴급한 요청”이라고 썼다.31)
아래에서는 한국 사회학의 ‘태두’ 또는 ‘비조’로 인정받고 있는 이상백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첫째로 이상백이 사회학자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졌는가
라는 질문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상백이 한국 사회학의 제도화에 기여한 첫
번째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배경으로 보아
서 그가 사회학자로서 명확한 정체성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들 수 있
다. 이상백의 저서를 검토한 김필동(1994가: 2)에 따르면 “그(이상백)의 연구논문은,
30) 이상백(1978, 3권)은 조선의 폐습 가운데 서얼차대, 천자수모법, 부녀재가금지 등의 습속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를 통해 유교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새로운 학문의 패
러다임 정립과 관련하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홈페이지에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창설한 “이
상백 교수는 사회학이 서구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시민사회 성립’에 필요한 과학적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31) 박영신(1995: 131)은 오늘날에도 사회학자들이 “학문 그 자체에 대한 일차적인 헌신보다는 그
학문을 수단으로 삼아 현존하는 사회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여” 대학 안팎에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 행태를 비판했다.
22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그것이 사회학 논문이건 역사적 연구이건 간에 역사학과 사회학이 합일 돼 있는 모
습을 보여준다. 이점에서 그의 역사적 연구는 그 자체 ‘역사사회학’ 연구이며, 따라서
사회학적 연구라는 것”이다. 이상백이 사회학과를 창설한 이후에는 스스로를 역사학
자이며 동시에 사회학자라고 생각했겠지만 사회학과 창설 이전에도 사회학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반문해볼 수 있다. 이상백은 와세다대학 재학시절
사회학과 역사학을 공부했다고 하지만 사회학자라기보다는 주로 역사학자로서 훈련
받은 사람이다. 당시 일본의 동양사 연구를 대표하는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그의 학문적 아버지였다.32) 이상백이 1930년대 이후 발표한 사회사 분야의 논문들
을 근거로 하여 여러 역사학자들(홍승기, 1991; 이현희,1996: 164)이 이상백을 이병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실증사학의 범위 안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최재석(2002: 76)은
“그(이상백)의 관심은 사회학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말하자면 사회사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아무튼 사회학과 창설 이전 이상백의 사회사
연구를 사회학적 연구로 볼 경우 그의 연구가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어떤 점에서 다
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김필동이 말하듯이 이상백이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
사사회학자라면 그의 연구가 사회학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어야 하며 나름의 이론적
관점과 개념 장치들을 활용했어야 한다. 그런 기준에서 보았을 때 이상백은 역사사
회학자라기보다는 사회사 분야의 역사학자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사회학
과를 개설하고 서양의 사회학사 과목을 담당하여 가르치고 사회학 이론과 방법론에
도 관심을 가졌지만 주로 1930년대 이루어진 그의 연구물들은 아직 사회학 이론과
개념들이 깊게 스며들지 않은 역사 연구물에 더 가깝다. 려말 선초의 불교와 유교
두 종교의 교체 과정과 조선 건국에 대한 연구나 서얼제도, 재가금지, 노비문제 등에
대한 연구는 그 주제 자체가 사회학적인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역사사회학자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1946년 사회학
과 창설 이전이나 이후나 이상백 스스로가 역사 관련 논문이나 저서를 출간할 때 스
스로를 ‘사회학자’라기보다는 ‘사학도’로 생각했음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는 1947
년 7월에 1930년대에 쓴 네 편의 논문을 모아 한국문화사연구논교라는 제목의 저
서를 펴내면서 그 서문에서 “우리 사학도의 중대한 책임”이라든지, “우리 젊은 학도
들에게 사학 연구에 대한 일 자극이 되기를” 등의 표현을 쓰고 있다(이상백, 1978, 1
32)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의 문화사적 연구 방법론이 이상백의 사회사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
쳤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나 이는 필자의 능력을 넘어선다. 역사이론 또는 일본 사상사나 학
문의 역사를 전공하는 다른 학자의 연구를 기대한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23
권: 6, 10). 그렇다면 이상백은 사회학과 창설 이후에도 과거 자기가 했던 연구들은
역사학의 분야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고 사회학은 새롭게 만들어나가야 할 신흥학문
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62년에 진단학회 편 한국사의 조선시대 통사를 발간
한 것을 보면 그는 역사학자이면서 사회학자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이상백, 1962, 1965).
둘째로 이상백은 한국사회학의 전개에 어떤 학문적 유산을 남겼는가라는 질문이
다. 그가 한국사회학의 제도적 아버지인 것은 분명하고 국제적 안목과 개인적 인품
으로 많은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이후 전개될 한국 사회
학의 학문적 기초를 풍부하게 마련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리 쉽게 답할 수가
없다. 사후 그가 남긴 저작물을 모아 세 권으로 정리한 이상백 저작집을 읽어보면
사회사 연구가 주가 되어있고 10여 편의 사회학 논문들은 거의 모두 단편적인 글들
이다. 그가 강의를 통해 제자들에게 깊은 지적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는
주로 사회학개론과 사회학사 과목을 담당했는데 1948년 학풍 창간호에는 이상백
의 사회학개론이 곧 출간된다는 광고가 나와 있다. 그런데 이상백은 이 책을 끝까
지 출간하지 못했다.33) 이상백은 사회학사 수업시간에 겉장을 종이로 싼 일본학자의
사회학사 책을 가지고 들어와 우리말로 번역해주는 방식으로 재미없는 강의를 했다
고 한다. 대한체육회 일로 바빠서 해외여행을 많이 했던 그는 휴강을 많이 한 것으
로도 유명하다.34) 이런 일화도 있다. 이상백이 어느 날 강의를 하고 있는데 열어 놓
은 창문을 통해 바람이 들어왔다. 오래되어 제본이 약해진 일본어 책의 낱장이 바람
에 날려 강의실 바닥에 떨어졌다. 그래서 한 학생이 낱장을 주어서 이상백에게 가져
다주었다는 것이다. 한 원로사회학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런 강의 방식에 불만을 느
끼고 있던 한 학생이 드디어 어느 날 “선생님은 어떻게 일본 학자의 책을 번역하는
방식으로 강의를 하십니까?”라고 항의성 질문을 했다. 그러자 이상백은 허심탄회하
33) 이상백은 스스로 사회학개론서를 쓰는 대신 뒤늦게 조셉 루우쎄크(Joseph Roucek)과 롤란드 와
런(Roland Warren)의 사회학개론Sociology, An Introduction(정음사, 1958)을 번역 출간했다.
이 책은 사회학의 각 분야를 종합적으로 잘 소개하고 있으며 마지막 장에 콩트, 스펜서, 뒤르켐,
맑스, 베버, 짐멜, 파레토, 파크, 섬너 등 “사회학에 영향을 미친 학자들”을 다루고 있어서 이상
백이 그 당시 생각하던 사회학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는 이 책의 1959년 영
어판이 여전히 나와 있다.
34) 1948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던 주락원(2006: 67)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이상백씨는 거의
강의 안 했다. 항상 삐릿삐릿한 구두에다 하얀 양복을 입고 다녔다. 이상백 선생이 거의 학교에
안 나왔기 때문에 학생들이 이상백 선생이 자주 다니는 단골 다방에 찾아가서 강의를 해주시라
요청했다. 그날 마침 비가 오던 날인데, 선생 말씀이 오늘 같은 날 학교 가면 내 구두 버린다고
했다는 얘길 듣고 정말 이상백 씨답다고 생각했다.”
24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게 “이 사람아 내가 아무리 공부해도 이 일본학자를 능가할 수가 없어서 그러네”라
고 답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솔직한 답변같기도 하지만 저술과 강의를 통해 한국
사회학의 탄탄한 기초를 마련하려는 성의가 부족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상백은
강의와 저술보다는 일제시대부터 쌓은 학자로서의 권위와 체육인으로서 세계 각지
를 다니며 갖게 된 국제적 감각으로 제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학문의 길로 이끄는 역
할을 했던 것 같다. 김채윤(1996: 89-90)에 따르면 이상백은 강의실에서 보다는 연
구실에서 제자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이상백은 우수하다고 판단되는 학생들을 정신
적으로 후원하고 때로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데, 그런 제자들이 자신의 연구
실을 방문하면 그의 학문적 경륜과 해외여행을 바탕으로 하는 해박한 지식을 술술
풀어놓았다는 것이다. 이상백은 그런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다음 세대
의 출중한 학자들을 양성했다고 볼 수 있다.
Ⅳ. 이상백이 한국사회학을 제도화할 수 있었던 이유
1. 이상백과 동시대의 사회학자들
해방 직후 경성제국대학에서 변신한 서울대학교와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
에서 승격된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야말로 한국의 학자들이 근대
적력인 학문 연구를 시작한 제도적 출발점이었다. 문제는 일제의 학문적 영향을 벗
어나 독자적인 학풍과 학문의 전통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
단한 일은 아니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학문체계는 거의 모두 일본을 통해서 수
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학의 경우에는 다행스럽게도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
192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 유학하여 직접 사회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1930
년대부터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하경덕(1897-1951),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박사학위
를 받고 귀국한 김현준(1898-1950), 프랑스 소르본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공진
항(1900-1972),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치진(1901-1950 납북) 등이
그들이다. 비록 사회학의 제도화 이전이었지만 이들이 활동한 1930년대의 한국 사회
학계는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활동한 화려한 시대였다. 박영신(1985:
14)은 한국사회학의 역사에서 1930년대가 갖는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 시대는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25
본격적으로 훈련받은 인적 자원이 전에 비하여 풍부하고 다양하였으며, 이들에 의한
사회학의 도입이 활기를 띠었었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이들 가운데서는 이론적 관심
보다는 역사적 사실의 분석에 치중하고 있었으며, 서양에서 훈련받고 돌아온 이들은
사회학의 전통적 관심에 따라 우리 사회의 개량과 개조라는 실천적 문제를 이론적으
로 논의할 뿐만 아니라 사회학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이론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든, 1930년대는 일제하 지성사에서 가히 ‘사회학적’시대라 부르고 싶은 푸짐한
시대였다.” 그런데 문제는 안타깝게도 해방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한 사회학자
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사회학이 한국의 대학 내에 제도화되는 과정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35) 하경덕, 김현준, 공진항, 한치진 등은 해방 이전 사회학을 강의
하고 저술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사회학은 해방 이후 한국사회학계에 계승되
지 못하고 단절되었다(최재석, 2002; 한영혜, 1992). 만약에 그들이 서울대학교 사회
학과 교수진으로 합류하였거나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 다른 대
학에 사회학과를 창설하여 연구와 교육을 할 수 있었다면 한국 사회학의 역사는 한
참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이상백을 비롯하여 변시민, 최문환,
양회수, 이만갑 등 전원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한국 사회학의 제도화 초창기에
서울대학교 교수진을 구성했던 것은 한국사회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아이러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 가운데서도 왜 어떤 사람들은 사회
학과 교수가 되고 다른 사람은 한국 사회학계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는가라
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여기에 냉전이라는 역사적 상황이 작용했다. 좌우대립이
남북분단으로 이어지던 해방 정국에서 좌익 계열의 학자들은 남한에서 사회학을 제
도화하는 일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36) 서울대 국립대학설립안에 반대하던 좌익
계열의 학자들은 월북을 하거나 남한에 남아 침묵을 하거나 전향을 하는 수밖에 없
35) 1890년대 프랑스에서 가브리엘 타르드, 구스타브 르봉, 르플레, 알프레드 비네, 르네 보름스, 에
밀 부트미 등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에밀 뒤르켐이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대학 내에 제도화
하게 되는 과정을 분석한 베나르(Besnard, 1981)를 참조할 것.
36) 분단이 고착되면서 남한 학계에서 좌익의 입장을 지닌 학자들은 주도권을 잡을 수 없었다. 백남
운이나 이극로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들은 월북을 택했고 남한에 남았을 경우에는 학계에서 배
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진균(1997: 191)은 분단 상황이 이후 사회학에 미친 영향을 다음
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북쪽은 소련과 남쪽은 미국과 깊
이 연계되어 세계적 냉전체제하의 양극에 각각 대처해 오고 있는 상황은, 곧 남한 사회과학의
자율성을 상당히 제약하는 조건이다. 분단과 냉전체제는 남북한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표방
하게 하였는데 남한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적극적인 측면보다도 북한에 대처하는 측면이 강조
되어 반공을 국시로 삼았(다). 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국인의 사유, 사상, 그리고 그 표현을 일
정한 테두리 안에서 한정하게 하였다.”
26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었다. 일본 동경 상과대학에서 공부하고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연희전문에서
경제사와 사회학을 가르쳤던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경제
사 상(1937) 등의 저서를 발간했고 1930년대 중반 조선일보에 사회학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해방 직후 1945년 9월 백남운은 경성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남북분단의 분위기가 짙어지자 1947년 월북을 선택했다(이준식, 1993, 1990; 방기
중, 1992). 또 한 사람의 보기를 들자면 도쿄제국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그곳
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사회학과 조교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신진균도 경성대학교 교
수로 임명되었으나 좌익 지식인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7) 신진
균은 일본사회학대회에서 세 번에 걸쳐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었다고 하
는데 1941년부터는 성균관대학의 전신인 명륜전문에서 가르쳤다.38) 그러나 신진균
은 해방 공간에서 월북을 선택함으로써 한국 사회학의 역사에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고 하지만, 당시 서구 사회학 원서를 탐독하며 이론적
성찰을 하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방대한 분량의 연구논문을 축적하고 있던 신진균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남아있었거나 성균관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했더라
면 한국 사회학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래에서는 1920년대 미국, 독일, 프랑스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1930년
대부터 사회학을 가르치고 연구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학의 역사에서 사라진
사회학자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그들이 사회학의 제도화에 기여하지 못한 이유
를 추론해 본다.39) 이러한 논의는 왜 이상백이 한국 사회학을 제도화하는 인물이 되
37) 최재석(2002: 44)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대에 청계천의 중고책방에서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
와 게젤샤프트 독일어 원본을 발견해서 기쁜 마음으로 구매했는데 책 맨 앞 장에 ‘신진균 장
서’라는 표시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신진균의 도쿄제대 사회학과 후배인 이만갑(2006: 21)은 해
방 직후 신진균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난 신진균 선생이라는 사람은 학
자적 성격이 있고, 또 공부도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고, 그런 정치운동이나 사상운동 하는 사람
으로는 생각 안 했거든. 그런데 조선신문에 보게 되면, 상당히 맹렬히 투쟁을 하는 것처럼 나오
거든.” 이만갑은 1947년 신의주사범대학 교수로 있을 때 정세 파악을 위해 소련군 기관지 「조
선신문」을 읽곤했는데 거기에서 신진균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때 좌익의 입장에 서서 법정
밖 투쟁을 하는 것이 보도 된 것을 읽었다고 한다.
38) 신진균과 함께 명륜전문에서 가르치다가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된 이가원의 증언에 따르면
신진균은 해방 이전에 한국사회에 대한 거대한 양의 연구 원고를 완성하였으나 빛을 보지 못하
고 해방 이후 혼란한 와중에 소실되었다고 한다(최재석, 2002: 35). 최재석(2002: 44)에 따르면
신진균은 도쿄제대 사회학과 조교 생활을 하면서 일본사회학대회에서 세 번에 걸쳐 논문을 발
표했다. 1940년에는 “조선의 촌락 사회 연구에 대하여”를 1941년에는 “조선의 씨족에 관한 두
세 고찰”을 1942년에는 “조선의 촌락에 있어서의 종족 결합의 일 사례”를 발표했다. 이상백은
신진균에 앞서 1936년 “중국의 효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39) 이들에 대한 기본 소개로는 최재석(2002: 47-80)의 “1930년대의 사회학”을 참조할 것.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27
었는가에 대한 보완 설명이기도 하다.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다르게 만들 수 있었던
첫 번째 인물로 하경덕을 들 수 있다. 1897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의 숭
실학교 졸업 이후 1916년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일하며 공부하다가 1921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해서 192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사회 법칙:
사회학적 일반화의 타당성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1930년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교 출판부에서 출간되었다. 당시 콜롬비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였던 로버트 매키버
가 ‘미국사회학저널’AJS(1932)에 서평을 썼으며 칼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
아, 로버트 머튼의 사회이론과 사회구조에도 이 책이 언급이 되고 있다. 이 저서
에서 하경덕은 사회학의 ‘과학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사회학을 철학, 심리학 등과 대
화하는 사회예술(social arts)로 정리하였다.40) 이후 하경덕은 귀국하여 1931년에서
1942년까지 연희전문에서 사회학과 영어를 가르쳤다(안계춘, 1978; 원재연, 2012).
하경덕은 해방이 되자 ‘더 코리아 타임스’The Korea Times라는 영자 신문을 만들어
미군정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역할을 했고 해방 당시 가장 큰 규모의 관제 신문사
였던 ‘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서울신문’으로 개편하는 작업을 맡았다. 해방 정국에서
중요한 지식인 잡지였던 「신천지新天地」와 「주간 서울」도 그가 창간한 것이다. 그
무렵 많은 지식인들이 대학 교수로 부임했는데 하경덕에게도 “연세대, 서울대 등에
서 성화와 같은 초청 교섭이 있었다”고 한다(김동선, 2014: 190). 그러나 하경덕은
언론 활동을 계속하면서 1938년 여순반란 사건을 있는대로 보도하여 이승만 정권과
불화를 빚다가 결국 서울신문을 떠났고 6·25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무르다가 인민군에게 잡혀 모진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서울 수복 이후 그는 일본으
로 떠나 미 국무성 촉탁으로 미군정 메카더 사령부를 위해 일하다가 1951년 4월 사
망했다. 해방 이후 하경덕이 언론인의 길을 걷는 대신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사회학
을 제도화하는 역할을 했더라면 한국 사회학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해방 이후 대학에 사회학과를 만들어 사회학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였더
라면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다르게 만들었을 인물로 하경덕에 이어 한치진을 들 수
있다.41) 1901년 평남 용강군에서 출생한 한치진은 16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공부하
다가 1921년 도미하여 1930년 미국 남가주대학USC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이후 1932년에서 1937년 사이에 감신대를 거쳐 이화여
40) 원재연(2012: 27)에 따르면 하경덕의 이런 입장은 “현재의 맹목적인 과학 지향적 학문적 풍토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41) 한치진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사진들과 그의 저서 29권의 목록을 싣고 있는 한치진 기념사업회
(2013)를 참조할 것.
28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전에서 강의하면서 1933년에는 사회학 개론을 출간했다.42) 한치진의 딸 한영숙의
증언에 따르면 한치진은 1937년 일본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탄압에 의해 이
화여전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이후 한치진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1년 동안 일본어
를 배우며 두 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43) 해방 몇 년 전부터 요주의 인물로 서대
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한치진은 1945년 8월 17일 출감하여 미군정의 공보부 고
문을 지내면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민주주의의 원리를 해설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민
주주의에 관한 5권의 책을 집필했다. 한영숙의 증언에 따르면 한치진은 1947년부터
서울대 교수를 했다고 하는데 강의를 했을지는 모르지만 정식 교수는 아니었을 것이
며 사회학과가 아닌 다른 학과에서 강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치진은 1950년 8월
납북되었다고 하는데 이후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한치진의 부인은 ‘납치가족회’를
만들어 1960년까지 남편의 행방을 추적하고 납북자 소환을 위해 힘썼으나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자녀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930년대 보성전문에서 가르치던 김현준도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동경유학 시절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으며 3·1운
동 이후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 유학하여 1928년 “동아시아(한국, 중국, 일본)에 있
어서의 근대 신문의 생성·발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이후
「동광」 34호에 국내 언론계에 학술전문잡지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고
「신동아」에 “시위운동과 군중심리”, “현대사회사상의 동향” 등의 글을 발표했다.
그는 1930년 근대사회학이라는 제목의 사회학 개론서를 출간하기도 했다(최재석,
2002: 48-69). 1930년대에 보성전문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던 그는 광복 직후 성균관
대학교 학장과 전주사범 교장을 거쳐 조선대학교 문리학부장으로 재임 중 좌익계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만약에 그가 해방 이후 고려대학교나 성균관대학교 아니면 조선
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였다면 한국사회학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인물로 1930년대 프랑스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공진항을 들
수 있다. 1900년 개성에서 출판 사업을 전개한 실업가 공성학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공진항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개성 제일공립보통학교에서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다(이은주, 2012: 181-212). 이후 서울에 올라와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
여 수년간 수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도지샤중학에 편입하였다. 졸업 후 와
세다대학 영문과를 다니다가 유럽으로 건너가 런던대학에서 2년을 공부한 다음 프
42) 한치진의 박사학위논문 제목은 “중국윤리체계들에 대한 비판: 불교, 도교, 유교”였다.
43) 한치진의 납북경위에 대한 딸 한영숙의 증언은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2009: 431-438)을 볼 것.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29
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1932년 7월 시베리아철도로 만주를 거
쳐 귀국한 공진항은 천도교 조직을 중심으로 사회학을 강의하고 사회과 강의라는
사회학 교재도 편찬했다(최재석 2002: 10-80). 그러다가 그는 교육사업을 떠나 가업
을 정리한 후 만주로 진출하여 사업가가 되었다. 1935년 만주의 요하(遼河) 연안에
농지 20만평을 매입하여 고려농장을 시작한 그는 민족기업가로서 만주에 이상향 건
설을 목표로 사업을 확대하여 만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경기도 양주군에서 목축농장을 하다가 주 프랑스공사를 역임했고 1950년에는 농림
부 장관, 1957년에는 농협중앙회 회장, 1961년 고려인삼흥업사장, 천도교 교령 등을
역임하다 1972년 사망했다. 만약에 그가 해방 이후 어느 대학에 사회학과를 창설하
고 연구와 교육에 헌신하였다면 한국 사회학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위에 언급한 사회학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해방 이후 새로 만들어진 대학 안에
사회학과를 만들어 제자를 양성하는 일을 하지 못한 반면에 이상백은 1946년 서울
대학교 문리대에 사회학과를 만들고 1966년까지 20여년을 동안 제자들을 양성함으
로써 한국사회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여기서 “만약에 뭐뭐였다면”이라는 가정법을
써가면서 백남운, 신진균, 하경덕, 한치진, 김현준, 공진항 같은 이상백과 동시대의
사회학자들을 거론한 이유는 그 이후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단서
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과 더불어 경성제국대학에서 경성대학이 되었다가 서
울대학으로 개편된 국립대학의 사회학과의 교수진에는 신진균 같은 월북 지식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승만과 불화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취한 하경덕 같은 사회학자도
없었으며 미국에서 공부한 한치진, 독일에서 공부한 김현준, 프랑스에서 공부한 공
진항 등 구미에서 공부한 사회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44)
1946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의 창설과 1957년 한국사회학회의 창립에 이상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백을 한
국사회학의 ‘정신적 아버지’로 보기에는 다소 불편한 점이 있다. 이미 1930년대 국
내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서를 펴내
던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대학 내에 자리 잡고 학문적 업적을 쌓고
차세대 학자를 키우는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한국사회
학의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단절된 한국사회학사의 앞 토막을 장식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상백에 비해 사회학 본령의 연구에서 앞선
44) 그 결과 서구사회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사회학
을 급속하게 수용하면서 한국사회학의 내용을 채워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30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측면도 있다. 그러기에 이상백이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설립한 제도적 아버지임
은 분명하지만 그를 사회학의 학문적 내용을 갖춘 한국사회학의 아버지로 선뜻 내세
우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45) 그가 뒤르켐이나 베버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 사회학
의 역사에서 기본이 될 연구의 이론과 방법론을 제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상백은 사회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기보다는 역사학 가운데 사회사를 전공한
학자였다. 물론 그의 사회사 연구는 서얼차대, 천자수모법, 부녀재가금지, 려말선초
의 사회변동과 조선의 건국과정 등 사회학적인 주제를 다루었지만 그것을 오늘날에
말하는 역사사회학 저작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46)
2. 이상백이 한국 사회학의 아버지가 된 이유
그렇다면 일본에서 공부한 이상백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한국사회학
의 제도적 아버지가 되는 과정에는 어떤 요인들이 작용하였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는 앞에서 이미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 바 있다. 첫째는 좌우 이념 대립의 상황에서
명백하게 좌익의 입장에 섰던 사람들은 일단 한국사회학의 아버지가 되기에 부적합
했다. 이상백은 여운형 계열에 속하는 중도 좌파에 속했지만 국대안을 반대하는 좌
익계열에는 속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을 제도화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47) 두 번째 이유는 그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일본에서 조선사
회에 대한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했고 진단학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활동했다는 점
이다. 해방 이후 진단학회가 국립대학이 된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진 구성에 주축
이 되었기 때문에 이상백이 사회학과의 창설에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 짧게 소개한 193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상백이 사회학을 제도화할 수 있었던 이유로 두 가지를 추가할 수 있을 것
이다. 첫째는 넓게 보자면 학문의 세계에, 좁혀 보자면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헌신하
45) 김필동(1993: 98)에 따르면 “상백은 연구‧조사활동을 조직하고, 학술활동을 지원하며, 한국학의
국제적 교류를 촉진하는 등 논문 이외의 일을 통해 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상백은 하버드
대학교의 옌칭연구소의 동아문화연구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61년 서울대 문리대에 ‘동아문
화연구소’를 창설하고 초대 소장으로 일했다. 조선일보의 학술담당 기자를 역임한 이한우(1995:
182)는 “어떤 의미에서 이상백의 성가는 학자로서보다는 학술행정가로서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체육행정가로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썼다.
46) 이만갑(2007: 10)은 이상백의 사회사 연구에 대해 “문화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사회학적 통찰력
을 가지고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일반 역사학자가 놓치기 쉬운 측면에 학문적 시야를 돌리도록
노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47) 이상백(1961: 208)은 사회혁명을 부르짖으면서 실제의 생활에서는 자본가의 은혜나 일제의 혜
택을 받고 사는 사람들의 언행의 불일치를 비판했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31
려는 태도의 유무와 그 정도였을 것이다. 해방 당시 누구나 다 어려운 삶을 살았지
만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직업이 그렇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고
경제적 보상도 겨우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박봉이었다.48)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언
론계 등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다른 영역
으로 진출했던 것이다. 그와 반면에 이상백은 한 때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줄곧
학문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만약에 여운형이 계속 정치 활동을 했더라면 이
야기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1947년 여운형 암살 이후 이상백은 정치로부
터 완전히 물러나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건국 직후인 1948년 9월 28일에 출간된
학풍 창간호 권두에 실린 “학문의 권위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창간사에서 이상백
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이비 모리배 학자들과 권력 당국의 학문에 대한 정치적
개입을 다 같이 비판하면서 학자들 스스로 학문의 권위를 확립하는 일에 매진할 것
을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49) “학문에 전심전력을 경도해야 할 학자가 오늘은 생활을
위하여 몸을 영리기업에 두기도 하며, 내일은 세속적 위력에 아첨하여 학계를 파는
데 여념이 없다. 학문은 단순히 광범한 지식의 획득만으로써 권위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학문하는 태도 다시 말하면 학문을 욕구하는 강력한 윤리적 힘이 필요
한 것이다”(천정환, 2014: 74-75).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상백은 학문의 세
계에 헌신하려는 내적 신념이 강했던 듯 하다. 이상백은 제자들에게 저널리즘보다는
학문에 헌신하는 일이 필요함을 강조했는데 최재석(2015: 102)은 이상백의 글 “저널
리즘과 아카데미즘”을 읽고 나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
기도 했다. “나는 한국의 사회학처럼 연구 업적이 축적되지 못하고, 따라서 그 학문
의 학풍과 전통이 확고히 수립되지 못한 단계에서는 저널리즘보다 아카데미즘이 우
위에 서야한다고 생각한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저널리즘이 아카데미즘보다 우위에
서고 그 기풍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아카데미즘의 확립은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저
널리즘도 공허해지기 때문이다.”50)
이상백이 한국사회학을 제도화시킬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 위에 말한 학문
에 대한 헌신과 더불어 그의 지도자적 자질과 능력을 덧붙여볼 수 있다.51) 최문환
48) 변시민(2006: 32-33)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교수들이 월급으로는 생활하기에 바빠 책을 사볼 여
유도 없었고 매일 낡은 와이셔츠에 헌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다고 한다.
49) 을유문화사 대표 정진숙(1996:, 392)에 따르면 학풍 창간호의 익명의 권두언은 이상백이 쓴
것이다.
50) 이상백의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은 「문리대학보」 2호(1953년)에 처음 실렸고 이상백 저작집
3권(을유문화사, 1978)에 다시 실렸다. 양영진도 1970년대 초 대학국어에 실린 이 글을 읽고
아카데미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32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상백 이상백 평전 출판위원회, 1996)은 이상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온후담박
한 그의 성격, 항상 앞을 내다보는 그의 전망적 자세와 예리한 통찰력, 현실사회의
동향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면서 학문을 하는데 보이는 역사에 침잠하는 신중한 학
구적 태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최신의 학문에 주의를 아끼지 아니한 연
구열, 다방면의 사교를 하면서도 자기의 고고한 인격, 개성을 살리는 특성, 끊임없이
산만한 세속적인 화제 안에서도 엿보이는 해박한 지식을 그는 가졌다.” 김채윤
(1996: 85)은 ‘선생이 갖춘 뛰어난 속성’으로 “6척 장신에 수려한 용모, 고매한 인품,
좌중을 매혹하는 고담준화(高談埈話), 중후한 강의, 고미술에 대한 높은 식견”등을
열거하였고 을유문화사 사장을 거쳐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한 민병도(1996: 359)는
이상백에 대해 “후리후리한 6척의 거구, 수려하고 온후한 용모, 세련된 몸차림 등 외
관상의 우월성에다, 정열적인 학술 연구를 통해 축적된 탁월한 식견, 농구를 비롯한
체육 발전을 위해 보여주신 초인적인 활동, 고매하고 고고한 인품 등이 종합되어 시
현(示顯)하는 상백 선생의 위풍은 참으로 당당하여 그와 가까이 하는 학계, 체육회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일본인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라고 썼다. 말하자면 이
상백은 외적 용모나 내적 인격, 학문적 능력과 조직 역량에서 뛰어난 지도자적 자질
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했다. 다시 김채윤
(1996: 87)의 증언을 들어보면 “선생의 모습을 처음 대하는 문리대 신입생들은 우선
그 귀족 같은 외양에 압도되어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교수로 생각하기 일쑤였다. 뿐
만 아니라 3면의 벽이 신구서적으로 꽉 들어찬 선생의 연구실 분위기에 또한 기가
죽게 마련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카리스마적 자질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상백이
풍기는 내적 외적 분위기가 그가 동료 교수들과 사회학과 학생들을 이끌고 나가면서
사회학을 제도화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서울대 사회학과 1955년 입학생들 가
운데 한완상, 김경동, 강신표 세 사람이 모두 이상백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은 그런 사실을 입증한다. 한완상은 상백 이상백 평전에 실린 글에서 이상백
을 회고하고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있으며 자신의 저서 현대사회와 청
년문화(1973) 맨 앞장에 “잊을 수 없는 스승 故 李相佰 선생님께 삼가 이 책을 드
립니다”라는 문구를 적어놓았다.52) 김경동(1964)은 이상백 박사 회갑기념논문집
51) 박명규(2004: 48)는 “한국의 사회학계는 이상백이라는 개인의 강한 영향력을 배경으로 제도화
되었다”고 썼다.
52) 이상백을 추모하는 한완상의 글 “나의 스승 이상백 선생,”은 한완상(2000: 325- 340)에 다시 실렸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33
에 실린 “교과서 분석에 의한 한국사회의 유교가치관 연구”의 맨 마지막에 “지도를
아끼지 아니하신 이상백 선생님께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글귀를 남겼다. 강
신표(2010: 376)는 “상백 선생의 미완성 유고와 나의 학문의 길 그리고 올림픽 운동”
이란 글에서 “이상백 선생의 미완성 유고 ‘한국인의 사고방식의 연구방법론(1966)’
은 나의 학문의 길에 있어서 ‘시발점’이었다고 밝혔다.
Ⅴ. 한국사회학사 연구와 한국사회학의 미래
이상백은 한국사회학의 아버지로서 한국사회학을 대학 내에 제도적으로 안정화시
키고 후배 교수들과 제자들을 양성하여 한국사회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수립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창설하여 한국사회학의
아버지가 되는 과정에는 그가 일제 강점기 일본체육회에서 활동하면서 얻게 된 세계
적인 안목과 진단학회에서 활동한 경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일
찍이 정치에서 손을 떼고 사회학과 창설에 힘을 기울였다. 향후 한국 사회학의 전개
를 위한 분명한 패러다임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긴 학문적 유산은 동료 학
자들이나 후배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학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
고 있다. 그가 후학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회사 연구는 최
재석, 신용하, 김영모, 김진균 등 2세대 학자를 거쳐 박명규, 김필동, 정근식 등 3세
대 학자로 이어졌으며 그 연구의 흐름은 ‘한국사회사학회’라는 독자적인 학회 활동
으로 계속되고 있다.53) 이상백은 한국의 사회학이 사회사 연구보다는 실증주의 정신
으로 무장한 ‘과학적’ 사회학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의 그런 방향 설정은 이만갑과
이해영을 비롯하여 후속 세대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사회조사와 통계분석을 강조
하는 ‘과학적’ 사회학으로 발전하여 한국 사회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사회사 연구이
건 실증주의 사회학이건 이상백은 ‘자료’와 ‘실증’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이상백이 학풍의 ‘사회학 특집호’를 편집하면서 서구의 사회이론가 40명을
소개했으며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사회학사 과목을 통해 제자들에게 서구의 사회이
53) 한국사회사학회가 발간하는 사회와 역사에 실린 논문들이 사회학보다 역사학 쪽에 더 가깝다
는 일반적 평가를 받는 것은 이상백이 사회학자라기보다는 역사학자에 가깝다는 평가의 연속으
로 볼 수 있다. 최재석(2011: 30)은 자신의 사회사 연구의 뿌리가 이상백의 사회사에 있음을 다
음과 같이 증언했다. “대학원(석사과정)에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을 횡적인 현재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종적인 역사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이상백)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34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론을 가르친 것과 잘 이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연구에서는 ‘실증’을 강조하고 강의
에서는 ‘이론’을 가르쳤는데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지 못한 것 같다. 그 결과 이후
한국의 사회학 연구는 의미있는 ‘사실’과 ‘자료’를 찾아낼 때나 그것을 해석할 때 깊
이 있는 이론적 성찰의 전통을 쌓지 못했다(박영신, 1985, 1992). 한국사회학 7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학계는 여전히 외국의 사회이론을 수입하고 해석하고
한국의 자료와 사실을 가지고 입증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다(강신표,
1985; 2005). 다른 한편 ‘사실’과 ‘자료’에 대한 강조는 한국사회의 구체적 현실과
관련하여 ‘적합성의 부족’이라는 문제를 낳았다. 식민지 체험, 분단과 전쟁, 권위주
의 체제와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겪은 사회적 현상들을 파고드는 적합성이
높은 지식을 생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 ‘적합성 문
제’가 제기되고 1980년대 이후에는 ‘비판 사회학’이 태동하게 된 것이다(한완상·이
기홍, 1987; 김진균, 1997).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한국사회학계는 내부 분열을 경험
했지만 그것은 한국사회학의 발전 과정에서 성숙을 위한 디딤돌이 되기도 했다. 앞
으로 한국사회학계는 이론적 성찰이 풍부한 경험적 연구와 경험적 연구를 제시하는
이론적 성찰이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로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사회학계
내부의 전문성을 증진시키면서도 한국사회와 관련된 문제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지식
의 적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어차피 여
러 이론적 방법론적 패러다임이 공존하는 “비정상”과학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학
계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 안에서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우리
사회에 울림이 있는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제시해야할 것이
다.54) 그와 더불어 한국사회학자들은 지식생산을 통해 공적 토론을 활성화시키는
‘공공사회학자’의 역할을 자임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앞에서 이상백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의 초
창기 역사를 살펴보았지만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탐구하는 작업은 “단순히 역사적 사
실의 회고”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사회학자들에게 성찰의 기회
를 제공할 때 의미있는 작업이 된다. 한국사회학의 역사는 “자기 성찰의 역사이어야
하며 자체 생산을 위한 반성적 작업”이어야 한다(박영신, 1985: 28; 김필동, 1994가:
34).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에서 그림을 그리던 고갱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
54) 현재 한국사회학계의 내부 구성을 ‘이론/문화적 접근’ ‘사회사/역사사회학적 접근’ ‘사회조사/통
계적 접근’으로 구별하고 그 세 가지 접근 사이의 ‘협업’을 통한 공감대 형성을 건의한 익명의
논평자에게 감사한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35
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의 작품을 남겼다. 고갱의 그 세 가
지 질문을 ‘역사의 3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김기봉, 2016: 99-121). 한국사회학 70
년을 맞이하여 한국 사회학의 초창기 역사를 다룬 이 글이 지금 여기의 한국사회학
자들 각자가 한국사회학의 역사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성찰하면서 한국사회학
사의 3문을 더 깊게 탐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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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nick, Morris, 1968, “The Appeal of Communism to the People of Underdeveloped
Areas” edited by Reinhard Bendix and S. M. Lopset in Class, Status and
Power, New York: The Free Press. pp.428-436.
정수복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의미세계와
사회운동(1993), 시민의식과 시민참여(2002),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2007), 응답하는 사
회학(2015) 등의 사회학 저서를 펴내었으며 파리를 생각한다(2007), 프로방스에서의 완전
한 휴식(2010), 책인시공(2013) 등의 인문 교양도서를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연세대학교
강사,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 크리스챤아카데미 기획연구실장, 사회운동연구소장, 파리 사회
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다.
[2016. 4. 8. 접수; 2016. 4. 28. 수정; 2016. 4. 29. 게재확정]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39
Lee Sang-Beck and Origin of Contemporary Korean Sociology
Soo Bok Cheong
Sociologist/Writer
Korean sociology celebrates this year, it's 70th anniversary. Concentrating it's focus on
the role of Lee Sang-Beck, this article sheds lights on the institutionalization process of
sociology in Korea. Lee studied sociology and history in Japan during the colonial period.
After liberation, in spite of the presence of several rival sociologists who had been trained
in the U. S., Germany, France and Japan, Lee became the main actor in the institutionalization
of Korean sociology. This article describes this process and explains his success as the
founding father of Korean sociology by four main factors: his non-leftist political position,
his active participation at Jindan Hakhoe(Jindan academic circle) which played a central
role in the reconstruction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his sincere academic attitude and
his charismatic leadership. Both his achievement in social history and his conception of
sociology as an empirical science had been inherited by the next generation of Korean
sociologist. Nevertheless Lee's intellectual legacy produced two side effects: insufficient
theoretical reflection and lack of relevance.
Key words: History of sociology, Korean sociology, Institutionalization, Lee Sang-Beck,
Positiv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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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회학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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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작성자樂民(장달수)|작성시간17.10.06|조회수155목록댓글 0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정 수 복**
지금까지 한국 대학의 사회학과에서 가르치는 사회학사는 오로지 서구 사회학의 역사를 의미했
다. 이 글에서 저자는 한국사회학의 전통을 만들기 위해서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연구할 것을 주
장한다. 이 논문은 국내 최초로 대학 내에 사회학과를 만들어 사회학을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 제
도화한 이상백에 대한 연구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이상백의 개인사와 학문적‧사회적 활동, 학문
적 성취와 그 내용을 요약하고 그가 사회학과를 창설하는 과정을 역사적 문맥 속에 넣어 두껍게
서술하고 분석한다. 그 결과 1946년 해방 정국에서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한 사회학자들이 여러
명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백이 사회학을 제도화하여 한국 사회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주
요 요인으로 그의 극좌파에 대한 비판적 입장, 지속적인 진단학회 활동, 학문에 대한 헌신, 학문
적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 등 네 가지 요소가 작용했음을 밝혔다. 이 글의 결론에서 저자는 이
상백이 사회사 분야에서 강조한 실증과 사회학에 대한 실증주의적 입장이 이후 한국사회학의 전
개 과정에서 이론적 성찰의 부족과 적합성의 결핍이라는 예기치 않은 문제의 씨앗이 되었다고 해
석했다.
주제어: 이상백, 사회학사, 한국사회학, 제도화, 실증주의
** 2015년 6월 19일 진주 경상대학교에서 열린 한국사회학대회에서 ‘한국사회학의 사회학’ 기획세
션을 마련해주신 김무경 한국사회학회 전임 회장과 최종렬 전임 연구이사에게 감사한다. 이 논
문은 그날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발표 당일 유익한 질문을 해주신 양영진, 강수택 두
분께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익명의 토론자 세 분께도 감사드린다.
** 사회학자/작가(pariscielbleu@gmail.com).
기획논문
2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죽음만이 어떤 사람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해도 괜찮게 만들어 준다.”
- 김현(불문학자/문학평론가, 1942-1990)
Ⅰ. 한국사회학사 연구의 중요성
2016년은 한국 사회학의 역사에서 볼 때 매우 뜻 깊은 해다. 1906년 이인직이 ‘사
회학’이라는 학문을 이 땅에 소개한지 110주년이 되는 해이고 1946년 이상백이 대
학에 사회학과를 창설한지 7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사회학의 역사
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들이 있었지만 한국의 사회학자들은 한국사회학의 역사에 대
해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회학과의 교과 과목으로 가르치는 ‘사회학사’는
서구사회학의 역사만 가르치고 한국사회학의 역사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한국의 사
회학자들은 과거 선배 사회학자들의 유산을 들추어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학문적
으로 낙후되었던 시절 뒤떨어진 선배 사회학자들이 남긴 연구물은 망각의 대상이지
참조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한국 사회학의 역사를 연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미국과 유럽에서 논의된 새로운 이론과 새로운 연구방법을 활용한
참신한 논문을 쓰기에 바빠서 과거 한국의 선배학자들이 남긴 연구 결과를 눈여겨
볼 마음의 여유가 없기도 하다. 학계의 그런 관행이 계속되다 보면 한국의 사회학자
들이 쓰는 거의 모든 논문이 몇 년만 지나면 거의 아무도 참조하지 않는 무용지물이
된다. 그 결과 우리 나름의 학문적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고 학문적 전통이 만들어지
지 않는다. 한국 사회학의 해외 의존성이 자연스럽게 계속된다.
한국사회학은 한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야한다. 1954년 경북대학교
사회학과를 창설한 배용광(1997: 5-6)은 1960년에 발표한 “우리나라 사회학의 앞날
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문제의식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결국 우리는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한국의 사회적 현실을 정면에서부터 연구 대상으로 삼고 거
기에 보아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의욕을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의 학도에게서
진정 기대할 수 있었으면 싶다. ‘우리’ 사회의 과학적 해명을 위하여 먼저 진정한 문
제의식이 확립되어야 할 줄로 안다. 사회학의 과학으로서의 발전이 실증적인 조사연
구의 추진 없이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의식’에 의하여 인도
받지 않는 조사연구는 부질없는 작희로 그칠 것이다.” 배용광의 말대로 학문 활동에
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이라고 할 때 한국의 사회학자라면 우선 한국 사회의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3
현실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선학들의 연구 업적을 읽고 토론하고 비판하
고 계승해야 한다.1) 해외 학계의 연구 경향에 맞추어 외국 저널에 가능한 많은 논문
을 게재하는 학자가 우수학자로 인정받는 오늘날의 상황은 한국사회학의 역사에 대
한 무관심을 정당화하고 강화하고 있다. 최신 이론과 방법론을 갖춘 학자에게는 그
것을 활용하여 요리할 새로운 자료의 확보만이 중요하다(이기홍, 2008: 28).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한국 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축적할 수가 없다. 그런 연구물들
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소멸할 것이고 한국사회학사의 부재는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1876년 개항을 기점으로 하면 서구문명과 접촉하여 서구의 문물을 수입하여 우리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 지 벌써 한 세기 반에 가깝다. 양복이나 아파트가 서양에서
들어왔지만 이제 거의 우리의 옷과 우리의 집이 되었고 우리 스스로 자동차와 컴퓨
터와 스마트폰을 만들게 되었지만 서양에서 수입된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우리의 삶
과 사회를 잘 설명해주는 지적 도구가 되었는지는 아직 의심스럽다. 한국 인류학의
역사를 쓴 전경수(1999: 7; 2010: 45)가 말한 대로 우리 나름으로 노력한 학문 연구
의 역사를 뒤돌아보는 일이야말로 외국의 최신이론과 방법론에 기대어 ‘축적 없는
신생’을 반복하고 있는 우리 학문의 고질병을 극복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다.2) 모든
역사 쓰기 작업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대화라면 한국 사회학의 역사를 쓰
는 일은 한국사회학 연구의 과거를 되돌아봄으로써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작업이다. 학사 연구야말로 학문 공동체의 학문
적 전통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다. ‘한국사회학의 전통’Korean Sociological
Tradition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학들이 남긴 연구 성과를 찬찬히 되돌아보면서 잘못
된 과거는 반성하고 의미 있는 업적은 계승해야한다. 한국의 선배 사회학자들이 남
긴 연구업적들로 가득 찬 기억의 창고로 걸어 들어가 그들이 한국 사회와 사회학이
라는 학문 사이에서 고민한 흔적을 찾아내고 그들이 남긴 연구결과의 기여점과 한계
를 밝히면서 한국사회학사의 갈래와 줄기를 잡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한국사회학의
전통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것은 누구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한국사회학 공동체 전
체의 일이다.
1) 배용광의 사회학에 대해서는 이동진(2014)을 볼 것. 근대 시민혁명과 함께 태동한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문제의식을 자유, 평등, 연대, 정의를 증진시키고 억압, 불평등, 부정부패, 과도한 경쟁을
해소하려는 지적 열정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반적 문제의식을 한국적 상황 속에
서 구체적 연구를 통해 실현하는 것이 한국 사회학자의 사명일 것이다.
2) 이 점에서 전경수(2010)가 쓴 손진태의 인류학 연구와 한국 정치학계의 원로 민병태의 학문활
동과 학문세계를 중심으로 한국 정치학의 소생-성장-발전 과정을 탐구한 김학준(2013)의 저서는
사회학자들의 참조 대상이다.
4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한
국사회학자들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길에 들어서고 한
국사회에 대한 연구의 결과를 논문과 저서를 통해 발표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
회적으로 공론 형성에 기여하는 사람들이다. 한국사회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
들의 삶은 그들의 연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에 이
루어진 한국사회학사 연구의 대부분에는 사회학자들의 삶이 빠져 있었다.3) 그러나
사회학자들의 개인사와 그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와 사회학의 역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일단 한국 사회학의 주요 인물들Masters
of Korean Sociology을 선정해야 하고 그들의 저작을 그들의 개인사와 가족사 그리
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정치사와 사회사, 문화사와 지성사의 맥락 속에 넣어 평가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4)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구성하는 초창기의 주요 인물이라면
서울대, 경북대, 이화여대, 고려대, 서울여대 등에서 사회학의 제도적, 학문적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 다시 말해서 이후 한국 사회학계에서 활동하는 여러 제자들을 양성
하고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남기고 대학 안과 대학 밖에서 사회학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한 학자들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선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이상백(1903-1966), 고황경(1909-2000), 최문환(1916-1975), 변시민(1918-
2003), 이만갑(1921-2010), 배용광(1921-2010), 이효재(1924-), 이해영(1925-1979),
황성모(1926-1992), 최재석(1926-), 홍승직(1929-2014)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사회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회학자들의 삶과 연구업적을 다루는 작업
은 어느 학자 개인의 영예를 칭송하기 위한 작업도 아니고 그의 사회학 연구에 흠집
을 내기 위한 작업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비판적 관점에서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한국 사회학자들이 공유하는 한국 사회학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의 일환이다. 지금까지 사회학자 개인에 대한 비평적 연구가 이루어
지지 않은 이유는 사회학계가 너무 좁아서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관계였기 때문이
3) 지금까지 나온 한국 사회학자의 평전으로는 임형철(1988)의 고황경 평전, 이상백 평전 출판위원
회(1996)의 이상백 평전, 홍성태(2014)의 김진균 평전 등이 있다. 본격적인 평전은 아니지만 박
정희(2012)의 이효재 평전도 나와 있다.
4) 루이스 코저는 그가 선정한 대표적 사회학자들의 삶과 그들이 살았던 사회적, 역사적, 지적 문
맥 그리고 그들의 저술들이 어떻게 이어져 있는가를 잘 보여주었다. Lewis Coser, The Masters
of Sociological Thought: Ideas in Historical and Social Context (Waveland Press, 2003) 2판
을 신용하와 박명규가 우리말로 옮긴 사회사상사(시그마프레스, 2003)를 볼 것. 콩트, 맑스,
스펜서, 뒤르켐, 짐멜, 베버, 베블렌, 쿨리, 미드, 파크, 파레토, 만하임을 다룬 코저의 초판은
1970년에 나왔고 우리말 번역은 신용하와 박명규에 의해 1978년에 상권 1979년에 하권으로 나
뉘어져 나왔다가 1986년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5
다. 서로 다 아는 사실을 굳이 글로 정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초창
기 한국 사회학의 역사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중심으로 하여 사제관계나 선후배
관계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이제 한국 사회학회는 크게 확대되었고 선배학자들의 연
구업적은커녕 이름도 모르는 젊은 세대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사회학사 연구
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문화 풍토를 고려할 때 서로가 서로를 잘 아
는 연고관계 속에서 자유로운 글쓰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제자가 스승의 글을,
후배가 선배의 글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는 아직도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와 더불
어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동향과 동창이라는 연고주의로 묶여 학회의 토론이나
논문심사, 학회지의 서평 등을 통해 자기 집단 구성원들의 연구업적에는 찬사를 보
내고 반대편 입장에 서거나 자기 집단 밖에 있는 사람들의 연구는 무시하거나 폄하
하는 관행이 없지 않았다. 한국사회학의 전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일방적 칭찬
과 폄하를 넘어서서 좀 더 근거 있는 객관적 비평 작업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한
국사회학의 창건자라고 할 수 있는 이상백이 사회학을 제도화시키는 과정을 두껍게
서술하면서 그의 삶과 저작들이 오늘의 한국사회학에 갖는 의미를 반추해보려고 한
다.5)
Ⅱ. 이상백과 한국 사회학의 제도화
1. 이상백에 대한 선행 연구들
1903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상백은 1919년 3.1운동 당시 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
유로 경찰에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이후 192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와세다대학
사회철학과에서 사회학과 사회사를 전공한 그는 일본 농구의 제도화에 기여하면서
일본체육계의 중요한 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했다.6)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는 와
5) 사회학의 창건자 콩트에 대한 신용하(2012)의 연구를 참조할 것. 이상백(1903-1966)은 프랑스의
아날학파 2세대를 대표하는 페르낭 브로델(1902-1985), 그리고 2차 대전 이후 미국 사회학의 대
표적 이론가 탈콧 파슨스(1902-1979)와 동년배 인물로서 다소 일찍 세상을 떠났다.
6) 그는 이미 1930년대에 일본체육회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황족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와
교류하였으며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는 일본선수단 총무 자격으로 참석하여 1940년 동경올림
픽을 유치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동경올림픽은 중일전쟁의 확대로 실시되지 못하다가
1964년에 가서야 열렸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체육회와 한국올림픽위원회를 만드는 일에 기여
하였고 아시아경기대회를 시작하는 일에도 공을 세웠다.
6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세다대학교 재외특별연구원 자격으로 만주 지역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해방 한 해
전인 1944년 일본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해방정국에서는 몽양 여운형과
함께 정치활동을 하다가 몽양 서거 이후 정계를 떠나 사회학자이자 체육인으로 활동
하면서 사회학을 하나의 분과학문으로 제도화하는데 기여했다(김필동, 1994; 박명규,
2004). 이상백은 1945년 9월 경성대학교 사회학 담당 교수로 임명되었고 1946년 4월
에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였으며 1957년에는 한국사회학회 창립을 주도하
여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64년에는 학회지 한국사회학을 창간함으로써 한
국사회학을 제도화시켰다.
이상백의 사회학을 연구하기 위한 기본 자료는 1978년 을유문화사에서 세 권으로
나온 이상백 저작집과 1996년 상백 이상백 평전 간행위원회에서 펴낸 상백 이상
백 평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백 사후에 나온 이상백 저작집이 그의 사회사 연
구 논문 및 저서와 “과학적 정신과 적극적 태도”, “질서와 진보”, “중간계급의 성
격”, “사회과학의 통합을 위한 시론”, “사회변동의 제 과제” 등 10여 편의 사회학 논
문들을 망라하고 있어서 그의 학문세계를 보여주는 기본 자료라면, 이상백 타계 30
주년을 기념하여 나온 상백 이상백 평전에는 역사학자, 사회학자, 체육인 등 이상
백의 다면적인 모습이 나온다. 그 가운데 이만갑, 김채윤, 한완상, 김경동, 강신표, 신
용하, 김필동 등이 쓴 글을 통해 이상백이 후배 교수나 다음 세대 사회학자들에 대
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상백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1978년 신용하가 쓴 “이상백 선생과 한국사회사연
구”라는 논문이다. 그러나 이상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90년대에 들어서 시작
되었다. 이상백에 대한 기본 자료를 바탕으로 가장 충실한 연구를 수행한 사람은 김
필동이다. 그는 이상백에 대해 네 편의 글을 발표했다. 1993년에 발표한 “이상백의
사회사 연구”와 1994년에 발표한 “이상백의 생애와 사회학사상”라는 두 편의 논문
을 통해서 사회사와 사회학 양대 분야에 이상백이 남긴 업적을 정리하고 분석했다.
1994년 역사학자들이 펴낸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에 ‘이상백’ 편을 쓰기도 했다.
1996년에는 “이상백의 학창시절”이라는 글을 통해 1945년 이전 이상백의 지적 형성
과정을 추적했다. 그의 작업은 이상백의 “사회학적 사유의 재구성을 통해 상백 사회
학을 학문적 관심의 세계로 복원”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평가와 비판에는 신중
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김필동, 1994가: 5).
이상백은 사회학자이면서 체육인으로 활동했는데 한영혜는 1996년 이상백이 일본
에서 활동할 때 일본어로 발표한 글들을 자료로 하여 “이상백과 근대체육-식민지 시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7
대 지식인의 자아실현과 민족아이덴티티: 일본에서의 체육활동을 중심으로”라는 논
문을 발표했다. 이 글은 다른 사회학자들이나 체육인들이 쓴 글과 달리 식민지 시대
지식인으로서의 이상백과 그의 친일여부를 신중하게 다루고 있다. 이후 박명규는
2004년에 발표한 “한국사회학의 전개와 분과학문으로서의 제도화”라는 글에서 한국
사회학의 제도화 과정에서 이상백이 한 역할을 밝혔다. 나의 연구는 이런 선행 연구
들을 참조하면서 기존의 연구에서 제기하지 않은 문제들을 다소 비판적으로 접근한
다. 말하자면 이상백을 한국사회학의 태두, 비조, 창건자, 아버지로 보는 기존의 해
석에 동의하지만 1945년 해방 당시 다른 사회학자들이 아닌 이상백이 사회학을 대
학 내에 제도화시키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과정을 추적하고 이상백이 제도적 아버지
를 넘어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내용을 채운 정신적 아버지로서 충분한 역할을 했는가
를 검토해보려고 한다.7) 그리고 사회학의 제도화 과정에서 그가 생각한 사회학의 모
습이 이후 한국사회학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한다.
2. 진단학회와 사회학과 창설
하나의 분과 학문이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기존의 분과 학문과 구별되는 고유한 이론적 방법론적 패러다임 정립, 둘째 대학 내
에서 제도적 지위 확보, 셋째, 학회 형성과 학회지 발간 등 학문공동체의 형성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하나의 학문이 제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박명규, 2004:
41). 아래에서 세 가지 조건을 차례대로 살펴본다. 먼저 두 번째 조건인 사회학의 대
학 내의 제도화 과정부터 살펴보자.8)
해방 당시 대학 안에 사회학과를 설치할 지적 자원을 가지고 있던 “여러 명의 사
회학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백이 사회학의 제도화를 주도할 수 있었던 데에
는 개인적 요인과 함께 여러가지 정치적, 제도적 요인들이 있었을 것”이다(박명규,
2004: 48). 이상백은 1934년 진단학회 창립에서부터 회원으로 활동했고 그 활동을
바탕으로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경성제국대학
7) 김필동(1993: 84-85)은 신용하(1977)가 이상백의 사회사연구에 대해 쓴 글이 “상백에 대한 제자
의 추념 논문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비판은 지극히 절제되어 있다”고 썼는데 필자가 볼 때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출신이라면 누구라도 이상백에 대한 비판적 언급은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8) 한국사회학의 제도화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1946년에 설치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만이 아니라
1954년에 창설된 경북대학교 사회학과와 1958년에 창설된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에 대한 연
구도 필요하지만 이 글에서는 이상백과 관련하여 한국 최초의 사회학과인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의 창설만을 다룬다.
8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교가 국립서울대학교로 전환되고 그 안에 문리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국사학자
이병도를 중심으로 하는 진단학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9) 진단학회는 일
제강점기에 경성에 거주하며 조선을 연구하던 일본인 학자들의 단체인 ‘청구학회’의
관변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학문 활동에 맞서기 위해 조선인 학자들이 1934년 5월에
만든 학회이다.10) 청구학회가 발간하는 청구논총은 당연히 일본어로 쓴 논문을 게
재했는데 진단학회의 학회지 진단학보는 우리말로 쓴 논문을 실었다. 진단학회 회
원들은 “대개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대학에 진학하는 한편
국어와 역사, 사회, 문화를 전공한 사람들로, 비록 형식적 여건 때문에 일본인 교수
로부터 배웠으나 민족문화의 수호를 위해 한국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던 만큼, 민족적
자부심, 사명감, 그리고 책임감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이현희, 1996: 158). 이병도,
이선근, 김상기, 이상백, 신석호, 문일평, 손진태, 송석하 등의 역사, 민속, 사회 분야
의 학자들, 김윤경, 김태준, 이병기, 이은상, 이윤재, 이희승, 조윤제, 이재욱, 최현배
등의 국어국문학자들, 조선 미술사를 전공한 고유섭, 윤리학자 김두헌, 교회사가 백
낙준 등 총 24명이 발기인었고 그 가운데 이병도, 이윤재, 이희승, 손진태, 조윤제 등
이 위원으로 선출되어 실무를 맡았다. 김성수, 송진우, 조만식 등 26명은 찬조위원으
로 선출되었다(진단학회, 1994: 82-85). 이 학회는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
나면서 진단학회의 회원이기도 했던 이윤재, 이희승, 최현배, 이병기 등이 일본 경찰
에 의해 구속된 이후 일제의 수색과 사찰이 강화됨에 따라 자진해서 활동을 중지한
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상백은 진단학회의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1934년 진단학회가 결성될 때부터 참
여해서 진단학보 창간호에 “서얼차대의 연원에 대한 일 문제”를 게재했다. 1939년
에서 1941년 사이에는 진단학보 편집에 직접 관여하기도 했다. 1942년 조선어학
회 사건 이후 활동을 중단했던 진단학회는 해방이 되자마자 1945년 8월 16일 인사
동 태화관에서 모여 회칙을 개정하고 바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때 이상백은 상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진단학회 위원장이었던 송석하가 사망한 다음에는 위
원장이 되어 학회를 이끌었으며 1954년 진단학회가 사단법인으로 등록할 때는 부이
사장으로 선출되었다(이현희, 1996: 162).
1945년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하여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10월 16일에는
9) 경성제국대학에 대한 연구로는 정근식 등(2011)을, 서울대학교 창립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서
울대학교40년사편찬위원회(1986)을, 진단학회의 역사에 대해서는 진단학회(1994)를 참조할 것.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단학회의 주요 인물들이 조선사편수회에 관여했다거나 만주에서 친일행위
를 했다는 이유로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2009)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9
경성제국대학이 경성대학으로 개칭되었다. 1946년 8월 22일에는 경성대학과 서울에
있던 여러 전문대학을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을 만들려는 이른바 ‘국대안’이 발표되
었다. 국대안에 대한 반대 투쟁이 심해지자 군정청은 1947년 2월 수정안을 발표하고
5월 26일 새로운 이사진을 발표하면서 수정안을 제시했다.11) 국립대학 설립에 반대
하는 운동이 격렬했지만 미군정은 반대파 교수들과 학생들을 몰아내고 경성대학교
를 서울대학교로 개편했다.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상백은 한편으로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활동에 참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 창설된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는 일에 힘썼다.12) 그러나 여운형이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한
이후 정치활동을 접고 오로지 사회학과의 창설에 집중했다. 이상백이 사회학과를 창
설할 수 있었던 근거는 앞서 말했듯이 그가 진단학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점에
있다. 김필동(1994가: 131)에 따르면 “상백의 진단학회 활동은 해방 후 상백이 경성
대학 및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고,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는데 결정적인 배
경이 되었다. 왜냐하면 진단학회 출신들이 문리과대학 문학부의 교수진 구성의 중심
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냈고 진단학회 회원이었던 김재원
(1992: 325)의 회고에 따르면 국대안 반대운동이 전개되던 “1946년 12월 말 진단학
회 회원들이 대거 법문학부의 교수 진용을 구성하였다.” 그에 따라 당시 진단학회에
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이상백도 당연히 서울대학교 교수진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
무렵 민속학자 송석하가 서울대학교 문리대 안에 인류학과를 개설하였다가 일찍 사
망함으로써 학과 설립이 유명무실해진 것을 보면 이상백의 존재와 활동은 사회학과
설립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전경수, 1999: 150-161).
국대안의 실현으로 일본식 대학 제도를 버리고 미국식 대학 체제가 도입되었다.13)
경성제국대학 시절의 법문학부로부터 법학부가 분리되어 나갔고 홀로 남은 문학부
11) 자료(국사편찬위원회, 2011: 2, 13)에 따르면 1945년 10월 16일자로 공포된 미군정 법령 제15호
는 “경성제국대학을 서울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했고 1946년 8월 22일 공포된 군정법령 102호의
제목은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으로 되어있다. 이 법령의 제 2조는 다음과 같다.
“전 세계 일류 고등기관의 학문 수준에 필적할만한 정도로 동 대학교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필요한 제반 감리제도(경쟁, 시험 급 기타 방법에 의한)를 창정함.” 다른 한편 이화여자대학교는
1946년 8월 11일, 연희대학교는 1946년 8월 15일에 미군정으로부터 설립 인가서를 받았다.
12) 1947년 5월 24일 여운형이 주도하여 창당한 근로인민당의 기본입장은 미소양국에 공정불편한
정책을 취하며 민족통일을 기초로 신흥국가를 건설하고 봉건적 생산관계의 철저한 소탕과 개인
적 창의를 허용하는 민주주의적 신경제 체제를 수립하며 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계승 발양한다는
것이었다. 이상백은 근로인민당에서 중앙감찰위원이라는 직을 맡았다(김삼웅, 2015: 339-340).
13) 이후 법문학문부로부터 법학부가 분리되어 나갔고 문학부는 이학부와 합쳐서 문리과대학으로
출범했다.
10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는 미국식 대학체제에 맞추어 이학부와 합쳐서 문리과대학으로 출범했다. 당시 문리
과대학은 3부로 이루어졌는데 1부는 어학 및 문학, 2부는 사회과학, 3부는 자연과학
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2부의 사회과학부는 사학과, 사회학과, 심리학과, 인류학과,
정치학과, 종교학과, 철학과, 지리학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떻게 사회
학과가 만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찾을 길이 없다. 미군정의 관리
가 미국식의 사회학을 도입하여 맑스주의에 기초한 좌파 학술운동에 대안을 마련하
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이병도와 이상백을 비롯한 진단학회 회원들이 일본에서
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학과 창설을 기획했는지, 그도 아니면 유억겸과 오천석을
비롯한 미군정의 교육정책 수립가들의 의견이었는지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
지 않다.14) 이상백이 스스로 나서서 사회학과를 만들려고 했다는 의도를 공식적으로
밝힌 적이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사회학과의 창립은 이상백의 의도라기보다는 다른
데서 나온 안이고 이상백이 사회학과 창립에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 진단학회 회원들
사이에서 사회학과의 설립자로 승인된 듯하다.15) 아무튼 그 당시 서울대학교 사회학
과 설치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당시의 미군정 당국 및 미국의 정책적
고려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한완상·이기홍, 1997: 192). 미
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점차 냉전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그 시기에 미군정 당국은
한국의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로 경도되는 것을 막고 한국에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수행했을 것이다. 아직 확실한
자료가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냉전체제의 수립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이루어진 서울
대학교 사회학과의 창설은 사회주의 이념에 맞서 자유주의적이며 반공주의 노선의
사회학 도입을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16)
14) 이만갑(2006: 15)은 사회학과 창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해방 첫해에 사회
학과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난 모르지만, 아마 그 당시에 와세다 사람
들이 상당히 영향력이 컸을 거예요. 우선 두계 이병도가 이상백 선생의 선배고, 또 그 양반들이
다 진단학회 멤버고, 두계 선생이 진단학회 리더쉽도 상당히 강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이고, 그
러니까 서울대학에서 좀 공부한다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사회학과 만들자 그런거죠.” 이와 달리
변시민(2007)에 따르면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군정이 사회학
을 미국의 학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립서울대학교안은 오천석과 유억
겸 등 미군정청 학무국의 한국인 관리들이 구상한 것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그들이 사회학과의
창설을 건의했을지도 모른다(서울대학교50년사편찬위원회. 1996: xxx).
15) 당시 진단학회 회원 가운데 역사학자가 많아서 모두 역사학과 교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 정치사에 박식한 이선근은 정치학과로 배치되고 사회사를 전공한 이상백은 사회학과로 가
게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김성은, 2015: 67-68).
16) 냉전 초기 미국의 후진국 정책은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경제원조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주의 이념에 대항할 수 있는 대항적 가치와 이념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워트닉
(Watnick, 1968: 436)을 볼 것. 워트닉의 글은 원래 1951년 시카고대학에서 발표한 것이다. 박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11
3. 초창기 사회학과의 교수진 구성
하나의 학문이 제도화되는 과정에는 학문의 새로운 내용과 연구와 교육을 담당할
학자들이 필요하다. 이상백이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난 다음 어떤 사람을 교수로 충
원했는가가 한국 사회학의 앞날을 결정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당시 미국과 프랑
스, 독일 등 구미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돌아 온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이상
하게도 모두 식민지 시대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충
원되었다.17) 1920년대와 30년대에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고 연구한 이상백은 1945
년 9월 미 군정청으로부터 경성대학교 사회학 담당 교수로 임명되었고 1946년 4월
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안에 사회학과를 창설하였다. 이상백에 이어 두 번째로
교수가 된 사람은 양회수로서 그 역시 와세다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양회수는 아마도 이상백의 추천으로 교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로 교수가 된 사람은 교토제국대학 출신의 변시민이다. 그는 이상백을 통하지 않고
교토대학의 저명한 화학 교수였다가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장으로 일하고 있던 이태
규를 통해 사회학과 교수가 되었다(변시민, 2006: 31). 당시 막스 베버를 독일어로
강독하던 변시민은 지적 자부심에 차있었으며 1952년 사회학을 출간하면서 지적
인 권위를 확보했다. 1946년 이후 사회학과 창설 이후 서울대 사회학과에서는 고황
경, 한치진, 최문환, 배용광, 이만갑 등이 강의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 와세
다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최문환은 1949년 근세사회사상사를 펴냈고 1950년
사회학과의 네 번째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로서 서울대 사회학과에는 와세다대학 출
신이 주류가 되었다. 이만갑은 변시민 이후 사회학과 교수로 임용되었으나 6·25전
쟁 당시 장교로 복무하면서 서류상으로 해직되었다가 1957년 다시 교수로 임명되었
다. 다른 한편 전쟁 당시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양회수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떠났
다.18) 경제학을 공부했지만 상대 쪽에 자리잡기가 힘들었던 최문환은 1950년 이상
백의 후원으로 사회학과 교수가 된 이후 막스 웨버 연구, 민족주의 전개과정 등
중요한 저서를 펴낸 이후 1961년 서울대 상대 학장이 되어 사회학과를 떠났다. 최문
영신(1985: 17-18)은 남북 분단과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이라는 ‘구조적 유인성’이 작용했지만
그와 더불어 일본 중심에서 미국 중심으로 바뀐 상황에서 남한의 식자층이 실리적 계산에 기초
해 급속하게 미국사회학을 수용했다고 본다.
17) 박영신(1985: 15)은 이를 두고 “이들은 모두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동류의식을 가졌을 것이며,
실제 일본 식의 사회학 연구 경향에 따라 그 분위기에서 훈련‧생산된 인물이었다”라고 썼다.
18) 이만갑은 6·25전쟁 당시 공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서울대 교수직을 상실했다가 1955년 코넬대
학에 연수를 다녀온 이후 1957년에 다시 교수로 임명되었다.
12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환이 사회학과를 떠날 때까지 사회학과는 이상백과 최문환이 주도하는 학과가 되었
다(김채윤, 1980). 그 때문에 사회학과의 권력관계에서 변시민은 소수파가 될 수밖에
없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1958년 문교부 국장이 되어 사회학과를 떠났다. 같은 해
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1회 졸업생인 이해영이 사회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변시
민과 최문환이 사회학과를 떠난 이후 사회학과는 이상백, 이만갑, 이해영이 주도했다
고 볼 수 있다. 이해영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생들이 차례로 교수가 되
기 시작했다.
사회학이 제도화되는 과정에는 다음 세대 학자의 양성이 중요하다. 이상백은 그
점을 충분히 인식하였는지 학문적 자질이 있어 보이는 제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서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대 사회학과 1회 졸업생으로 서울대
교수가 된 사람은 앞서 말한 이해영과 황성모 두 사람이다.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졸
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1회로 입학한 이해영은 이상백의 총애를 받아 1955년
이만갑과 함께 미국무성 초청으로 1년간 연수를 다녀온 이후 1958년 사회학과 졸업
생으로는 처음으로 교수에 임용되었다. 반면에 황성모는 1954년에서 1957년 사이에
강사 생활을 하다가 1957년 독일에 유학하여 1961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다
음 해인 1962년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러나 그는 몇 년 안되어 민비련 사
건으로 해직되었다. 이후 고영복이 1966년 이화여대 교수를 거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6·25전쟁 중인 1952년 사회학과에 입학한 김채윤은 오랜 기간 동안 이
상백의 무급 조교 역할을 하다가 1967년에 교수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6·25전쟁
직후 1950년대 중반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김일철, 한완상, 김경동 등 미국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으며 1975년 서울대학교
가 개편되면서 상대에서 가르치던 신용하와 김진균, 교양학부에서 가르치던 최홍기
가 사회학과 교수로 합류했다. 신문대학원에서 가르치던 오갑환도 사회학과로 합류
했으나 요절하고 말았다. 한국사회학의 역사에서 2세대에 속하는 이들은 모두 이상
백의 지적 세례를 받고 사회학에 입문한 사람들이다. 이상백은 1966년 정년을 채우
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국내외에서 수학한 2세대 사회학자들을 양성하여
한국사회학의 제도화에 기초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19)
19) 하나의 학문이 대학 내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학문의 창시자를 중심으로 제자 집단이 형성되어
야 한다. 1890년대 프랑스에서 뒤르켐이 사회학 연보 L'Année sociologique를 매체로 하여 모
스, 포코네, 시미앙, 부글레, 알박스, 위베르 부르젱 등의 제자들과 함께 학파를 형성하면서 대
학 내에 사회학을 제도화하고 다른 학문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분석한 필립 베나르
(Besnard, 1979)를 볼 것.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13
4.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사회적 승인
사회학의 제도화를 위해서는 대학 내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전문적인 학술활동의
전개를 위해 학회를 구성해야 한다. 그 두 가지 조건이 형식적 조건이라면 사회학이
라는 학문의 고유한 연구 대상, 이론, 방법 등을 제시하고 그것을 다른 학문 분야의
학자를 포함하여 학계 전체에서 승인 받는 것이 필요하다(박명규, 2004: 41). 이 점
에서 1950년 6월 1일 발간된 종합학술지 학풍의 사회학 특집호가 중요하다. 학
풍은 해방 직후 창설된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학술지로서 이상백이 그 창간에서부터
중요하게 관여했다. 이상백은 학술 활동에서 출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을유문화사
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20) 학풍은 “지질과 인쇄가 근래의 호화판일 뿐만 아니라
내용면에 있어서도 해방 후 기간에 이 방면 잡지의 최고봉”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동
아일보, 1948년 11월 9일자, 천정환, 2014: 41, 재인용). 학풍에는 역사학, 사회학,
법학, 경제학, 정치학, 어문학, 고고학, 미학, 과학 등에 걸친 학술적 논문들이 실렸고
‘경제학 특집’ ‘정치학 특집’ ‘전후 불란서 문학 특집’, ‘사회학 특집’ 등 특집호를 내
기도 했다. 필자로는 고승제, 안응렬, 전석담, 양주동, 이희승, 김기림, 이양하, 홍이섭
등 이후 한국학계의 각 분야에서 비조가 된 학자들이 참여했다. 저명한 외국학자의
논문을 번역하여 싣기도 했고 시와 소설 등으로 채워진 창작란도 마련했다(천정환,
2014: 41). 이상백은 이 학술지에 총 5편의 글을 발표했다.21) 그 가운데 창간호에
발표한 “과학적 정신과 적극적 태도-실증주의 정신의 현대적 의의”와 1950년 6월호
(통권 13호) ‘사회학 특집호’에 발표한 “질서와 진보-‘사회학’ 비판과 ‘진보적 입장’
에 대하여”라는 두 편의 글은 이상백이 대학 내에 사회학과를 만들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논문이다(신용하, 1976; 박명규, 1994가;
20) 이상백은 일찍부터 학술활동을 위해서 출판이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여 해방 직후 설립된 을유
문화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민병도, 1996; 정진숙, 1996). 학풍말고도 이상백이 관련된 진
단학회의 학술지 진단학보, 진단학회 편 한국사 전 7권이 모두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을유문화사 사장 정진숙(1996: 390)은 이상백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했다. “상백 이상백 그분은
나의 절친한 선배이자 인자한 스승 격이었고, 내가 평생을 두고 운영해온 을유문화사의 보배로
운 저자이자 뛰어난 편집기획자였다.” 프랑스의 경우 뒤르켐은 알캉(Alcan)출판사와 부르디외
는 미뉘(Minuit)출판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미국의 경우 파슨스는 주로 프리 프레스
(Free Press)에서 주요 저서를 출간했다.
21) 이만갑에 의하면 학풍2권 5호(1949)에 이지동이라는 이름으로 실린 “역사와 사회학”이라는
논문도 이상백의 글이다. 이상백이 같은 잡지에 자신의 이름으로 여러 편의 논문을 싣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필명으로 쓴 글이라고 한다(김필동, 1994: 3). 그 밖에도 “사회학 특집호”에 L이라
는 이름으로 실린 “미국사회심리학의 신경향: 정신분석학과 문화인류학”과 부록으로 실린 40명
의 서구 사회이론가들 소개, 파슨스와 바버의 글 번역 등도 이상백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14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최재석 2002).
이상백이 주도하여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1950년 6월 1일자로 발행된 학풍
의 ‘사회학 특집호’는 지식사회 일반에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성격과 그 중요성을 널
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정치학 특집호와 경제학 특집호에 이어 마련된 사회학 특집
호는 6·25전쟁의 발발로 그 효과가 반감되었을지 모르지만 그 내용상 당시 아직
윤곽이 흐릿했던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앞으로 한국의 사회학
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특집호에는 다음과
같이 9편의 논문과 40명의 서양 사회학자를 소개하고 있는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이상백, “질서와 진보-‘사회학’ 비판과 ‘진보적 입장’에 대하여”
② 탈코트 파아슨즈/바아나아드 바아버어, “전쟁 말기와 전후의 미국사회학:
1941-1946”
③ 김종흡, “종교사회학논교”
④ 이만갑, “가족기원론”
⑤ L, “미국사회심리학의 신경향: 정신분석학과 문화인류학”
⑥ 배용광,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 지식사회학적 일 고찰”
⑦ 고재국, “양반제도론-이조사회 형태의 문제”
⑧ 변세진, “문화와 사회- 미국문화사회학론”
⑨ 한상진, “예술사회학의 제문제”
⑩ 부록: “학설 중심 사회학자 군상”
부록에는 그 출처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지만 맑스, 베버, 뒤르켐이라는
3대 고전사회학자는 물론 콩트, 스펜서, 퇴니스, 르플레, 타르드, 짐멜, 파레토, 만하임,
쿨리, 소로킨, 카우츠키, 부하린 등 40명의 사회이론가들의 주요 저서와 학설이 소개
되고 있다. 이상백은 학풍의 사회학 특집호의 기획과 편집에 직접 관여하면서 사
회학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특집호의 구성을 음미해 보
면 당시 이상백이 사회학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상백은 맨
앞에 실린 글에서 한국의 지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한국사회학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 다음에 눈에 띠는 것은 미국사회학에 대한 관심이다. 탈콧 파슨스
와 버나드 바버가 쓴 2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사회학의 흐름을 정리하는 논문을 번역
하여 싣고 있으며 필자 미상의 미국의 정신분석학과 문화인류학을 소개하는 글이
“미국사회심리학의 신경향”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거기에 변세진이 쓴 “문화와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15
사회- 미국문화사회학론”을 실어 미국사회학을 소개하는 글이 전체 9편의 글 가운데
3편이 실려 있는 셈이다. 그 다음에 김종흡의 종교사회학, 이만갑의 가족사회학, 배용
광의 지식사회학, 한상진의 예술사회학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이로서 사회학은 종
교, 지식, 예술, 가족 등 광범위한 영역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형
성하고 있다. 그 다음에 조선사회에 대한 고재국의 글을 실음으로써 한국의 사회학
은 한국의 전통 사회에 대한 연구를 수행해야함을 밝히고 있다. 이 특집호는 6·25전
쟁이 끝나고 1955년부터 사회학자들의 미국 연수가 시작되어 미국사회학이 본격적
으로 수입되기 이전 초창기 한국사회학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주로 일본에서 공부
한 학자들이 새로 등장하는 미국 사회학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22)
이 특집호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대목은 그 필자들이다. 9편의 글 가운데
번역 논문과 저자 미상의 논문을 제외하면 7명의 필자가 남는데 그 가운데 이후 한
국 사회학계에 남아 활동한 사람은 이상백, 배용광, 이만갑 이렇게 세 사람에 불과하
다. 그 가운데 이상백과 이만갑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사회학의 제도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배용광은 1954년 경북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여 그곳에서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한국 사회학의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
다. 학풍의 특집호의 필자와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첫째 왜 당시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회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돌아온 하경덕, 고황경, 한치진,
김현준, 공진항 등의 학자들이 필자로 참여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다. 특집호를
기획한 이상백이 이들을 필자에서 배제한 것인지 아니면 이들이 원고 청탁을 거절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당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는 변시민, 양회수,
최문환, 이만갑 등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이 있었는데 왜 이들 가운데 오
로지 이만갑만이 필자로 참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23)
22) 이 글에 대한 익명의 논평자가 지적했듯이 해방 이후 서울대 문리대文理大 안에 만들어진 사회
학과의 학문적 정체성은 ‘느슨하고 이완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주체적
으로 정의할 수 있는 ‘틈’ 또는 ‘새로운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학의 경우 해방 이전
일본 학계의 지적 영향력을 벗어나 주체적으로 자기 학문을 정의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지적 역
량이 부족했다. 따라서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는 방법은 미국의 학문을 수용하는 길이었다. 박
영신(1995: 133)에 따르면 당시 우리 학계에는 “미국 의존에 대한 비판이 적절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학문적 전통이 없었(고) ‘미국의 지배’라는 두터운 외곽의 담을 넘어 설 수 있는 지적 초월
성을 가지고 독창적인 주장을 할 수 있는 학자군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23) 변시민과 최문환이 사회학과를 떠나고 이상백이 타계한 1960년대 중반 이후 이만갑은 이해영과
함께 서울대 사회학과를 주도하게 된다. 이만갑(1980)은 이상백이 독신생활을 했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자주 그의 집을 방문하여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회고하면서 이상백과의 밀접
한 관계를 시사했다.
16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사회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성립하려면 주변의 다른 분야의 학자들로부터
학문적 인정이 필요하다. 이상백은 “사회학을 제도적으로 정착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을 통해 신생 학문인 사회학이 한국의 학계 내에서
일찍부터 지적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을 만든 인물이다”(박명규,
2004: 41) 그는 역사학자는 물론 법학자, 정치학자, 경제학자, 국어국문학 연구자들
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사회학의 독자성과 중요성을 인식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이상백이 을유문화사에서 ‘한국문화총서’를 발간하고 학풍이라는 종합학술지를 발
간하는 일에 깊게 관여하는 과정과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를 창설하여 한국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1948년에서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 매일 오후 학교 일이 끝나면 이상백은 을유문화사로 가서
이병도, 이희승, 이숭녕, 김재원 등과 함께 총서 출판 기획과 학풍의 편집에 관여
했다(정진숙, 1996: 390). 그 과정에서 이상백은 다른 학자들에게 사회학이라는 학문
의 중요성을 인식시켰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장이자 동아문화연구소장 시절
그의 연구실에는 사회학과 교수들은 물론 역사학과의 고병익, 한우근, 전해종, 김철
준 교수를 비롯하여 영문과의 전제옥 교수, 정치학과의 민병태, 김영국 교수, 그리고
천관우, 이종복 교수 등이 자주 출입했다(김채윤, 1996: 91). 이상백의 회갑 기념 논
총(이상백박사 회갑기념논총 편집위원회, 1964)에는 배용광, 이만갑, 이해영, 황성모,
최재석, 고영복, 김채윤, 김일철, 김경동 등의 사회학자와 더불어 이병도, 김상기, 이
기백, 김철준, 천관우 등의 국사학자, 고병익, 전해종, 민영규 등의 동양사학자, 이희
승, 이숭녕, 김방한 등의 국어학 및 언어학자, 정병욱, 조지훈 등의 국문학자, 중국문
학자 차주환, 고고학, 미술사학 및 미학 분야의 김원룡, 김재원, 황수영, 오병헌, 정치
학자 이용희와 홍순창 등 당시 각 분야에서 활동하던 중요 학자들의 논문이 망라되
었다. 이를 통해 이상백이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학계에서 하나의 분과 학문으로 인
정 받게 하는데 기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Ⅲ. 이상백의 학문적 유산
1. 실증주의와 과학적 사회학
“한국 사회학의 태두로 인정받는 사회학자 이상백”은 해방 직후의 이념적 대립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17
상황에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난 실증적 태도와 과학적 정신을 강조했
다(박명규, 2008: 174).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창설 이후 이상백은 좌우대립과 분단
의 고착화 그리고 남한 단독정부의 구성이라는 혼란의 와중에서 한국사회학의 좌표
를 마련해야 했다. 흔히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창건자로 뒤르켐과 베버를 들고 거기
에 맑스를 추가하여 3대 고전사회학자로 보고 있지만 해방 직후 이상백이 사회학과
를 창설했을 당시 한국에 가장 알려진 사회학이론은 맑스주의였다. 그러나 맑스주의
는 좌익운동의 이론적 근거였기 때문에 서울대학교에 만들어진 사회학과에서 맑스
주의사회학을 공식적으로 다루기는 어려웠다. 실증사관에 입각해있던 역사학자로서
이상백은 1930년대 한국에서 이루어진 백남운의 저작을 비롯한 맑스주의 사회경제
사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좌우대립이 심각하던 1947년에 7월에 출
간된 조선문화사연구논교 서문에서 이상백(1978, 1권: 8-9)은 맑스주의 사관에 대
해 다음과 같이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연구의 도정에 있어서 무슨 일반적인 법칙이
나 공식만을 미리 가정하여 그것을 어떤 민족의 생활에 견강부회하는 방법을 취하여
서는 안 된다. (...) 독단적 해석과 기계적 적용은 진리를 탐구하는 방도가 아니요, 참
으로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24) 그렇다면 이상백은 맑스주의 사
회학에 대항해서 베버나 뒤르케임주의 사회학을 내세웠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백은
일본에서 베버와 뒤르켐에 대해서 별로 연구한 내용이 없었던 것 같다.25) 그래서 이
상백은 고전사회학자들을 넘어 사회학의 창시자인 오귀스트 콩트를 불러왔다. 실증
사학자였던 이상백은 콩트의 실증주의에 기대어 자신이 생각하는 한국사회학의 기
본적 지향점을 제시했다.26)
한국 사회학의 미래에 대한 이상백의 생각은 1948년 학풍 창간호에 발표한 “과
학적 정신과 적극적 태도”라는 글과 1950년 같은 잡지 13호에 쓴 “진보와 질서”라
는 글에 잘 나타나있다. 신용하(1976: 50)의 평가에 따르면 이 두 논문은 해방 후 독
립학과로서의 사회학과의 건설의 의의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하나의 기본 지침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사회학을 맑스주의로부터 분리시키고 콩트의 사회학을 근거
로 들어 실증주의, 경험주의적 학문으로서의 사회학을 제시하는 것이었다(김필동,
24) 그렇다고 이상백이 맑스주의 학설을 원초적으로 부인한 것은 아니다. 이상백(1978, 3권: 468-472)
은 맑스주의 “학설의 계급성 때문에 그 진리를 무시, 간과하는 것”은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정당한 태도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25)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대학 체제에서 맑스, 베버, 뒤르켐 등의 사회이론을 사회학자보다는 법학
부의 정치학 전공 학자들이 주로 다루었다고 한다. 일본 사회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한영혜가 옮
긴 다케시(2003)를 참조할 것.
26) 콩트의 저서 실증철학 강의에 대한 비판적 논의로 민문홍(1994)을 참조할 것.
18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1994가: 22-25). 이념적으로 좌우가 대립하던 해방 정국에서 미군정의 주도로 이루
어진 국립대학 사회학과의 이념적 지향은 이미 구조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 국립대
학 종합화 과정에서 이념적으로 혁신계 또는 진보적 입장에 서는 학자들은 국대안을
반대했고 그 과정에서 자의든 타의든 대학 교수로 자리 잡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1920년대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실증사관으로 무장한 이상백은 한국 사회학을 제도
화하기 위해 콩트의 실증주의를 내세웠던 것이다. 1957년에 쓴 글에서 최문환은 해
방 직후 한국 사회학이 맞이했던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초창기의 사회학은 “유물
사관 속에서 자라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사회과학이란 명칭 아래 가두에 범람한
좌익 이론의 선전을 위한 허다한 팜플렛, 번역본 등은 사회학의 준재를 각성케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박명규, 2004: 53, 재인용). 이런
상황에서 이상백은 콩트의 실증정신을 바탕으로 사회학계 내의 분파를 넘어서 통합
을 지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상백은 콩트의 실증주의에 기대어 한국사회학의 지향점을 어떻게 설
정했는가? 이상백(1978, 3권: 439-449)은 “과학적 정신과 적극적 태도-실증주의 정
신의 현대적 의의”에서 콩트의 사회발전 삼단계 법칙과 실증주의를 비판적으로 소화
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는 콩트의 실증주의를 프랑스 혁명 이후 정신적 무정부 상태
에 빠진 프랑스 사회를 재통합시키는 사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콩트의 실증주의를
내세워 해방 직후 좌우대립으로 혼란해진 한국사회의 혼란을 극복하는 하나의 방법
으로 제시하였다. 그가 볼 때 실증주의는 신학적 단계와 형이상학적 단계를 넘어선
최고의 단계로서 사실에 대한 관찰에 입각하여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적 정신이었다.
“정신이 사실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실증적 정신이야 말로 “제일의 과학적 정신
이요, 과학적 정신은 관찰의 우위를 믿는 것이요, 따라서 사실을 존중하여 마지않는
태도”이기 때문이다(이상백, 1978, 3권: 445).
그런데 이상백(1978, 3권, 445-446)은 콩트의 실증주의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
했다. 실증적 정신은 사실에 대한 관찰을 존중하는 인식론적 태도에 머무르지 않고
또 하나의 측면을 갖는데 그것은 비판보다는 건설을 중시하고, 파괴보다는 형성을
강조하는 실천 윤리를 의미한다. 이상백이 볼 때 “실증적 정신은 소극적, 부정적 태
도가 아니고 적극적, 긍정적 태도”를 의미한다.27) 그는 콩트의 실증주의를 통해 사
27) 이상백은 ‘실증철학’의 프랑스어philosophie positive를 긍정의 철학, 적극적 철학으로 해석하고
이를 부정의 철학philosophie négative과 대립시켰다. 민문홍(1994: 18)은 콩트의 실증주의가 오
늘날의 경험적 연구를 강조하는 실증주의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보면서 콩트의 실증주의가
내포한 의미를 다섯 가지로 제시했다. 그것은 공상주의와 반대되는 실제적인 것이며, 개인적이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19
회학자로서 학문하는 태도와 현실에 참여하는 태도 양쪽에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
려고 했다. 학문적으로는 이데올로기를 벗어난 실증을 중시하는 과학적 태도를 가져
야 하고 현실에 대해서는 비판과 파괴보다는 건설과 형성을 강조하는 적극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실증주의의 한 요소로 적극적 태도를 강조한
이상백은 콩트의 실증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해방 후의 혼란 상황에서 이상백은
역사와 사회가 정해진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지 않고 인간의 주체적 개입에 의
해 새롭게 구성되는 측면이 있음을 강조했다. 이상백은 콩트의 실증주의가 인간의
주체적 행위 가능성의 측면를 무시했다고 비판했다. “현재는 생활하는 인간이 서있
는 장소이다. 콩트는 이것을 무시한다. (…) 그는 인간을 단순한 추상으로 생각하고
인류 혹은 사회만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과거로부터 오는 힘이 여하하더
라도 그것이 미래를 지어가기 위해서는 아무튼 현재의 산 인간을 통해야만 되고, 그
매개를 거쳐야만 되는 것이다. 이같이 살아서 활동하는 현재의 인간을 무시한 데 과
학적 정신과 적극적 정신이 콩트의 의중에는 통일되었으면서 실제에 있어 통일되지
못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금일에 있어서도 실증적 정신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적 정신과 적극적 정신의 합일 통일이 확보된 한에 있어서만이요, 현재에 생활
하는 인간의 활동을 정당히 파악하는 한에 있어서만이다”(이상백, 1978, 3권: 449).
김필동(1994가: 25-27)은 이와 같은 이상백의 이론적 입장을 ‘인간주의 사회학’이라
고 볼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이상백은 집단간 갈등이 나타나는 정치 현상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해석한다.
이상백은 인간의 실천 능력을 강조하였지만 그것은 당시 강세를 보이던 맑스주의
실천론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이었다. 그는 실천을 이론보다 앞세우는 맑스주의 학
문관을 지지하지 않았다.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 1일에 출간된 학풍
13호에 실린 “진보와 질서”에서 이상백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과학
은 보통의 실천과 구별이 있고 맹목으로 실천에 몰입하는 것을 배척하여야만 한다.
학문에 최초부터 ‘진보’라는 것을 선험적 향도 개념으로 원용하여 독단적·맹목적
해석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학문을 진보적 과학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요, 이러한 것
은 그 후의 사회적 실천에 의하여 여지없이 분쇄될 것”이다. 이상백은 해방 이후 남
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맑스주의를 실증주의를 통해 비판하면서 사회학을 하나의
고 집단적인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건전한 성찰이며, 의사소통에서 논리적 조화를 이루는 능력
이며, 현상의 본질과 양립할 수 있는 철학정신의 끊임없는 추구이며, 사회생활을 조직하려는 철
학적 경향이다.
20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경험과학으로 수립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사회학은 “철학적 보편성의 추상적
연구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현실의 실태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여 진실을 파
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상백, 1978, 3권: 480). 이상백은 사회조사와 현지 실태
조사를 과학적 연구방법이라고 생각했고 1954년에는 대학원에서 직접 사회조사방법
론 강의를 하기도 했으며 이만갑, 이해영 등 후배 교수들을 미국에 연수시켜 과학적
사회학의 기초를 마련하려고 했다.28) 1957년에는 미국에서 인류학을 공부하고 귀국
한 이해영과 함께 덕적도에서 흑산도에 이르는 서해의 여러 섬들을 직접 답사하기도
했다. 이상백은 실증주의를 강조하면서 과학적 사회학을 한국사회학의 지향점으로
설정했고 후배 교수와 제자들에게 조사방법론 중심의 ‘과학적’ 사회학을 진작시킴으
로써 이론적 사고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경험적 조사를 강조하는 한국사회학의 기본
풍토를 만드는데 기여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29) 그 결과 1950년대 후반 한국
사회학의 지배적 분위기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사회학자가 미국을 다녀오는 통
로가 넓어지자 일본식이거나 일본을 통해 전수되었던 사회학은 곧 미국식이거나 미
국을 통한 사회학으로 옮아가기 시작하였다. 거의 휩쓸다시피 한 ‘새로운 사회학’ 곧
‘사회 조사 방법’에 의한 연구의 분위기가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것은 어느 한 대학교뿐만 아니라 가히 이 시대를 풍미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그
러한 상황이었다. 마치 사회학의 연구는 조사 연구요, 사회조사 연구는 사회학이라는
등식이 확증되었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이었다. 사회 조사 방법에 의하여 우리 사회
의 여러 측면을 연구하는 데 기여한 사회학자들은 고황경, 이만갑, 이해영, 이효재,
뒤이어 홍승직 들이다. 가족, 농촌, 도시, 가치관, 태도, 계층, 인구와 같은 문제에 대하
여 사회 조사 방법은 편리하고 유용한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박영신, 1985: 15-16).
김진균(1997: 173-198)은 조사방법론 위주의 사회학이 ‘한국사회학의 몰역사성’을
가져왔다고 비판하면서 민중의 입장에서 한국의 역사현실과 대면하는 역사성의 회
복을 주장하기도 했다.
28) 김경동(1996: 347)의 증언에 따르면 1964년 유교적 가치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완성했을 때 이
상백은 예상과 달리 ‘경국대전’ 등에 나온 유교적 가치 분석에는 무관심한 반면 유교적 태도를
측정하기 위한 척도 구성과 도덕 및 수신 교과서 내용 분석에는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를
두고 김경동은 이상백이 다음 세대 학자들에게 “한국사회의 특성을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하는
일을 격려하시려 했던 것”으로 해석했다.
29) 이상백이 ‘과학적 정신’과 더불어 사회의 개선에도 기여하는 ‘적극적 태도’를 강조하였지만
1960년대 이후 한국의 주류 사회학자들은 ‘과학적 정신’만 강조하면서 ‘적극적 태도’를 경시하
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21
2. 이상백의 사회사와 학문적 유산
이상백의 가문은 구한말 사회변동기에 축재에 성공한 신흥 부르주아였다. 대구 약
령시에서 한약재를 도매하였으며 1500석 규모의 지주이기도 했다. 이 가문의 재산은
도서관과 학교설립,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이상
백은 조선시대의 양반 체제의 구습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일본에서 공부할 때 서구
의 근대 의식을 남보다 쉽게 수용할 수 있었다.30) 그는 1921년 와세다고등학원을 거
쳐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는데 그 때 손진태와 양주동이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
다. 이상백은 와세다대학에서 학부를 마치고 같은 학교 연구생 자격으로 있으면서
조선사회에 대한 사회사 연구를 진행했다. 이상백에 대해 기본 자료를 바탕으로 치
밀한 논문을 쓴 김필동(1996: 133)의 평가에 따르면 “아마도 상백은 당시 일본에서
교육받은 한국인 인문·사회과학자 중에서 가장 철저하게 학문적 수련을 쌓은 인물
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보여주듯 상백은 체육 관계 일
로 바쁜 가운데서도 많은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고, 그 논문들은 각각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상백이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정치에 관여했고, 일상을 체육 관계
일로 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카데미즘에 충실한 학자일 수 있었던 것도 이
러한 학창 시절의 수련이 배경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 투쟁보다는
아카데미즘에 헌신하는 태도를 견지한 이상백은 1948년 학풍의 창간호에 그때야
말로 “학문의 권위를 수립함이 가장 긴급한 요청”이라고 썼다.31)
아래에서는 한국 사회학의 ‘태두’ 또는 ‘비조’로 인정받고 있는 이상백에 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 첫째로 이상백이 사회학자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가졌는가
라는 질문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상백이 한국 사회학의 제도화에 기여한 첫
번째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배경으로 보아
서 그가 사회학자로서 명확한 정체성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들 수 있
다. 이상백의 저서를 검토한 김필동(1994가: 2)에 따르면 “그(이상백)의 연구논문은,
30) 이상백(1978, 3권)은 조선의 폐습 가운데 서얼차대, 천자수모법, 부녀재가금지 등의 습속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를 통해 유교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새로운 학문의 패
러다임 정립과 관련하여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홈페이지에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창설한 “이
상백 교수는 사회학이 서구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시민사회 성립’에 필요한 과학적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31) 박영신(1995: 131)은 오늘날에도 사회학자들이 “학문 그 자체에 대한 일차적인 헌신보다는 그
학문을 수단으로 삼아 현존하는 사회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하여” 대학 안팎에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는 행태를 비판했다.
22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그것이 사회학 논문이건 역사적 연구이건 간에 역사학과 사회학이 합일 돼 있는 모
습을 보여준다. 이점에서 그의 역사적 연구는 그 자체 ‘역사사회학’ 연구이며, 따라서
사회학적 연구라는 것”이다. 이상백이 사회학과를 창설한 이후에는 스스로를 역사학
자이며 동시에 사회학자라고 생각했겠지만 사회학과 창설 이전에도 사회학자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반문해볼 수 있다. 이상백은 와세다대학 재학시절
사회학과 역사학을 공부했다고 하지만 사회학자라기보다는 주로 역사학자로서 훈련
받은 사람이다. 당시 일본의 동양사 연구를 대표하는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그의 학문적 아버지였다.32) 이상백이 1930년대 이후 발표한 사회사 분야의 논문들
을 근거로 하여 여러 역사학자들(홍승기, 1991; 이현희,1996: 164)이 이상백을 이병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실증사학의 범위 안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최재석(2002: 76)은
“그(이상백)의 관심은 사회학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말하자면 사회사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아무튼 사회학과 창설 이전 이상백의 사회사
연구를 사회학적 연구로 볼 경우 그의 연구가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어떤 점에서 다
른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김필동이 말하듯이 이상백이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
사사회학자라면 그의 연구가 사회학적 관심을 반영하고 있어야 하며 나름의 이론적
관점과 개념 장치들을 활용했어야 한다. 그런 기준에서 보았을 때 이상백은 역사사
회학자라기보다는 사회사 분야의 역사학자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가 사회학
과를 개설하고 서양의 사회학사 과목을 담당하여 가르치고 사회학 이론과 방법론에
도 관심을 가졌지만 주로 1930년대 이루어진 그의 연구물들은 아직 사회학 이론과
개념들이 깊게 스며들지 않은 역사 연구물에 더 가깝다. 려말 선초의 불교와 유교
두 종교의 교체 과정과 조선 건국에 대한 연구나 서얼제도, 재가금지, 노비문제 등에
대한 연구는 그 주제 자체가 사회학적인 관심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역사사회학자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1946년 사회학
과 창설 이전이나 이후나 이상백 스스로가 역사 관련 논문이나 저서를 출간할 때 스
스로를 ‘사회학자’라기보다는 ‘사학도’로 생각했음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는 1947
년 7월에 1930년대에 쓴 네 편의 논문을 모아 한국문화사연구논교라는 제목의 저
서를 펴내면서 그 서문에서 “우리 사학도의 중대한 책임”이라든지, “우리 젊은 학도
들에게 사학 연구에 대한 일 자극이 되기를” 등의 표현을 쓰고 있다(이상백, 1978, 1
32)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의 문화사적 연구 방법론이 이상백의 사회사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
쳤는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나 이는 필자의 능력을 넘어선다. 역사이론 또는 일본 사상사나 학
문의 역사를 전공하는 다른 학자의 연구를 기대한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23
권: 6, 10). 그렇다면 이상백은 사회학과 창설 이후에도 과거 자기가 했던 연구들은
역사학의 분야에 속한 것으로 생각하고 사회학은 새롭게 만들어나가야 할 신흥학문
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62년에 진단학회 편 한국사의 조선시대 통사를 발간
한 것을 보면 그는 역사학자이면서 사회학자라는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이상백, 1962, 1965).
둘째로 이상백은 한국사회학의 전개에 어떤 학문적 유산을 남겼는가라는 질문이
다. 그가 한국사회학의 제도적 아버지인 것은 분명하고 국제적 안목과 개인적 인품
으로 많은 제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가 이후 전개될 한국 사회
학의 학문적 기초를 풍부하게 마련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리 쉽게 답할 수가
없다. 사후 그가 남긴 저작물을 모아 세 권으로 정리한 이상백 저작집을 읽어보면
사회사 연구가 주가 되어있고 10여 편의 사회학 논문들은 거의 모두 단편적인 글들
이다. 그가 강의를 통해 제자들에게 깊은 지적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는
주로 사회학개론과 사회학사 과목을 담당했는데 1948년 학풍 창간호에는 이상백
의 사회학개론이 곧 출간된다는 광고가 나와 있다. 그런데 이상백은 이 책을 끝까
지 출간하지 못했다.33) 이상백은 사회학사 수업시간에 겉장을 종이로 싼 일본학자의
사회학사 책을 가지고 들어와 우리말로 번역해주는 방식으로 재미없는 강의를 했다
고 한다. 대한체육회 일로 바빠서 해외여행을 많이 했던 그는 휴강을 많이 한 것으
로도 유명하다.34) 이런 일화도 있다. 이상백이 어느 날 강의를 하고 있는데 열어 놓
은 창문을 통해 바람이 들어왔다. 오래되어 제본이 약해진 일본어 책의 낱장이 바람
에 날려 강의실 바닥에 떨어졌다. 그래서 한 학생이 낱장을 주어서 이상백에게 가져
다주었다는 것이다. 한 원로사회학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런 강의 방식에 불만을 느
끼고 있던 한 학생이 드디어 어느 날 “선생님은 어떻게 일본 학자의 책을 번역하는
방식으로 강의를 하십니까?”라고 항의성 질문을 했다. 그러자 이상백은 허심탄회하
33) 이상백은 스스로 사회학개론서를 쓰는 대신 뒤늦게 조셉 루우쎄크(Joseph Roucek)과 롤란드 와
런(Roland Warren)의 사회학개론Sociology, An Introduction(정음사, 1958)을 번역 출간했다.
이 책은 사회학의 각 분야를 종합적으로 잘 소개하고 있으며 마지막 장에 콩트, 스펜서, 뒤르켐,
맑스, 베버, 짐멜, 파레토, 파크, 섬너 등 “사회학에 영향을 미친 학자들”을 다루고 있어서 이상
백이 그 당시 생각하던 사회학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는 이 책의 1959년 영
어판이 여전히 나와 있다.
34) 1948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던 주락원(2006: 67)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이상백씨는 거의
강의 안 했다. 항상 삐릿삐릿한 구두에다 하얀 양복을 입고 다녔다. 이상백 선생이 거의 학교에
안 나왔기 때문에 학생들이 이상백 선생이 자주 다니는 단골 다방에 찾아가서 강의를 해주시라
요청했다. 그날 마침 비가 오던 날인데, 선생 말씀이 오늘 같은 날 학교 가면 내 구두 버린다고
했다는 얘길 듣고 정말 이상백 씨답다고 생각했다.”
24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게 “이 사람아 내가 아무리 공부해도 이 일본학자를 능가할 수가 없어서 그러네”라
고 답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솔직한 답변같기도 하지만 저술과 강의를 통해 한국
사회학의 탄탄한 기초를 마련하려는 성의가 부족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상백은
강의와 저술보다는 일제시대부터 쌓은 학자로서의 권위와 체육인으로서 세계 각지
를 다니며 갖게 된 국제적 감각으로 제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학문의 길로 이끄는 역
할을 했던 것 같다. 김채윤(1996: 89-90)에 따르면 이상백은 강의실에서 보다는 연
구실에서 제자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이상백은 우수하다고 판단되는 학생들을 정신
적으로 후원하고 때로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는데, 그런 제자들이 자신의 연구
실을 방문하면 그의 학문적 경륜과 해외여행을 바탕으로 하는 해박한 지식을 술술
풀어놓았다는 것이다. 이상백은 그런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다음 세대
의 출중한 학자들을 양성했다고 볼 수 있다.
Ⅳ. 이상백이 한국사회학을 제도화할 수 있었던 이유
1. 이상백과 동시대의 사회학자들
해방 직후 경성제국대학에서 변신한 서울대학교와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
에서 승격된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야말로 한국의 학자들이 근대
적력인 학문 연구를 시작한 제도적 출발점이었다. 문제는 일제의 학문적 영향을 벗
어나 독자적인 학풍과 학문의 전통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
단한 일은 아니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학문체계는 거의 모두 일본을 통해서 수
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학의 경우에는 다행스럽게도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
192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 유학하여 직접 사회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1930
년대부터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하경덕(1897-1951),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박사학위
를 받고 귀국한 김현준(1898-1950), 프랑스 소르본느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공진
항(1900-1972), 미국 남가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치진(1901-1950 납북) 등이
그들이다. 비록 사회학의 제도화 이전이었지만 이들이 활동한 1930년대의 한국 사회
학계는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학자들이 활동한 화려한 시대였다. 박영신(1985:
14)은 한국사회학의 역사에서 1930년대가 갖는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이 시대는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25
본격적으로 훈련받은 인적 자원이 전에 비하여 풍부하고 다양하였으며, 이들에 의한
사회학의 도입이 활기를 띠었었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이들 가운데서는 이론적 관심
보다는 역사적 사실의 분석에 치중하고 있었으며, 서양에서 훈련받고 돌아온 이들은
사회학의 전통적 관심에 따라 우리 사회의 개량과 개조라는 실천적 문제를 이론적으
로 논의할 뿐만 아니라 사회학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이론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든, 1930년대는 일제하 지성사에서 가히 ‘사회학적’시대라 부르고 싶은 푸짐한
시대였다.” 그런데 문제는 안타깝게도 해방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한 사회학자
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사회학이 한국의 대학 내에 제도화되는 과정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35) 하경덕, 김현준, 공진항, 한치진 등은 해방 이전 사회학을 강의
하고 저술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사회학은 해방 이후 한국사회학계에 계승되
지 못하고 단절되었다(최재석, 2002; 한영혜, 1992). 만약에 그들이 서울대학교 사회
학과 교수진으로 합류하였거나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 다른 대
학에 사회학과를 창설하여 연구와 교육을 할 수 있었다면 한국 사회학의 역사는 한
참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이 부재하는 상황에서 이상백을 비롯하여 변시민, 최문환,
양회수, 이만갑 등 전원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한국 사회학의 제도화 초창기에
서울대학교 교수진을 구성했던 것은 한국사회학의 역사에서 하나의 아이러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 가운데서도 왜 어떤 사람들은 사회
학과 교수가 되고 다른 사람은 한국 사회학계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는가라
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여기에 냉전이라는 역사적 상황이 작용했다. 좌우대립이
남북분단으로 이어지던 해방 정국에서 좌익 계열의 학자들은 남한에서 사회학을 제
도화하는 일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36) 서울대 국립대학설립안에 반대하던 좌익
계열의 학자들은 월북을 하거나 남한에 남아 침묵을 하거나 전향을 하는 수밖에 없
35) 1890년대 프랑스에서 가브리엘 타르드, 구스타브 르봉, 르플레, 알프레드 비네, 르네 보름스, 에
밀 부트미 등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에밀 뒤르켐이 사회학이라는 학문을 대학 내에 제도화
하게 되는 과정을 분석한 베나르(Besnard, 1981)를 참조할 것.
36) 분단이 고착되면서 남한 학계에서 좌익의 입장을 지닌 학자들은 주도권을 잡을 수 없었다. 백남
운이나 이극로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들은 월북을 택했고 남한에 남았을 경우에는 학계에서 배
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진균(1997: 191)은 분단 상황이 이후 사회학에 미친 영향을 다음
과 같이 지적했다.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되고 북쪽은 소련과 남쪽은 미국과 깊
이 연계되어 세계적 냉전체제하의 양극에 각각 대처해 오고 있는 상황은, 곧 남한 사회과학의
자율성을 상당히 제약하는 조건이다. 분단과 냉전체제는 남북한에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표방
하게 하였는데 남한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적극적인 측면보다도 북한에 대처하는 측면이 강조
되어 반공을 국시로 삼았(다). 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국인의 사유, 사상, 그리고 그 표현을 일
정한 테두리 안에서 한정하게 하였다.”
26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었다. 일본 동경 상과대학에서 공부하고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연희전문에서
경제사와 사회학을 가르쳤던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1933), 조선봉건사회경제
사 상(1937) 등의 저서를 발간했고 1930년대 중반 조선일보에 사회학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해방 직후 1945년 9월 백남운은 경성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남북분단의 분위기가 짙어지자 1947년 월북을 선택했다(이준식, 1993, 1990; 방기
중, 1992). 또 한 사람의 보기를 들자면 도쿄제국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그곳
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사회학과 조교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신진균도 경성대학교 교
수로 임명되었으나 좌익 지식인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7) 신진
균은 일본사회학대회에서 세 번에 걸쳐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었다고 하
는데 1941년부터는 성균관대학의 전신인 명륜전문에서 가르쳤다.38) 그러나 신진균
은 해방 공간에서 월북을 선택함으로써 한국 사회학의 역사에 아무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고 하지만, 당시 서구 사회학 원서를 탐독하며 이론적
성찰을 하면서 한국 사회에 대한 방대한 분량의 연구논문을 축적하고 있던 신진균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남아있었거나 성균관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했더라
면 한국 사회학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래에서는 1920년대 미국, 독일, 프랑스에서 사회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1930년
대부터 사회학을 가르치고 연구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학의 역사에서 사라진
사회학자들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그들이 사회학의 제도화에 기여하지 못한 이유
를 추론해 본다.39) 이러한 논의는 왜 이상백이 한국 사회학을 제도화하는 인물이 되
37) 최재석(2002: 44)의 증언에 따르면 1950년대에 청계천의 중고책방에서 퇴니스의 게마인샤프트
와 게젤샤프트 독일어 원본을 발견해서 기쁜 마음으로 구매했는데 책 맨 앞 장에 ‘신진균 장
서’라는 표시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신진균의 도쿄제대 사회학과 후배인 이만갑(2006: 21)은 해
방 직후 신진균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난 신진균 선생이라는 사람은 학
자적 성격이 있고, 또 공부도 열심히 잘하는 사람이고, 그런 정치운동이나 사상운동 하는 사람
으로는 생각 안 했거든. 그런데 조선신문에 보게 되면, 상당히 맹렬히 투쟁을 하는 것처럼 나오
거든.” 이만갑은 1947년 신의주사범대학 교수로 있을 때 정세 파악을 위해 소련군 기관지 「조
선신문」을 읽곤했는데 거기에서 신진균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때 좌익의 입장에 서서 법정
밖 투쟁을 하는 것이 보도 된 것을 읽었다고 한다.
38) 신진균과 함께 명륜전문에서 가르치다가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된 이가원의 증언에 따르면
신진균은 해방 이전에 한국사회에 대한 거대한 양의 연구 원고를 완성하였으나 빛을 보지 못하
고 해방 이후 혼란한 와중에 소실되었다고 한다(최재석, 2002: 35). 최재석(2002: 44)에 따르면
신진균은 도쿄제대 사회학과 조교 생활을 하면서 일본사회학대회에서 세 번에 걸쳐 논문을 발
표했다. 1940년에는 “조선의 촌락 사회 연구에 대하여”를 1941년에는 “조선의 씨족에 관한 두
세 고찰”을 1942년에는 “조선의 촌락에 있어서의 종족 결합의 일 사례”를 발표했다. 이상백은
신진균에 앞서 1936년 “중국의 효도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39) 이들에 대한 기본 소개로는 최재석(2002: 47-80)의 “1930년대의 사회학”을 참조할 것.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27
었는가에 대한 보완 설명이기도 하다.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다르게 만들 수 있었던
첫 번째 인물로 하경덕을 들 수 있다. 1897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그는 평양의 숭
실학교 졸업 이후 1916년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일하며 공부하다가 1921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해서 192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사회 법칙:
사회학적 일반화의 타당성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1930년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교 출판부에서 출간되었다. 당시 콜롬비아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였던 로버트 매키버
가 ‘미국사회학저널’AJS(1932)에 서평을 썼으며 칼 만하임의 이데올로기와 유토피
아, 로버트 머튼의 사회이론과 사회구조에도 이 책이 언급이 되고 있다. 이 저서
에서 하경덕은 사회학의 ‘과학성’에 대해 고민하다가 사회학을 철학, 심리학 등과 대
화하는 사회예술(social arts)로 정리하였다.40) 이후 하경덕은 귀국하여 1931년에서
1942년까지 연희전문에서 사회학과 영어를 가르쳤다(안계춘, 1978; 원재연, 2012).
하경덕은 해방이 되자 ‘더 코리아 타임스’The Korea Times라는 영자 신문을 만들어
미군정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는 역할을 했고 해방 당시 가장 큰 규모의 관제 신문사
였던 ‘매일신보’를 인수하여 ‘서울신문’으로 개편하는 작업을 맡았다. 해방 정국에서
중요한 지식인 잡지였던 「신천지新天地」와 「주간 서울」도 그가 창간한 것이다. 그
무렵 많은 지식인들이 대학 교수로 부임했는데 하경덕에게도 “연세대, 서울대 등에
서 성화와 같은 초청 교섭이 있었다”고 한다(김동선, 2014: 190). 그러나 하경덕은
언론 활동을 계속하면서 1938년 여순반란 사건을 있는대로 보도하여 이승만 정권과
불화를 빚다가 결국 서울신문을 떠났고 6·25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무르다가 인민군에게 잡혀 모진 고초를 겪기도 했다. 서울 수복 이후 그는 일본으
로 떠나 미 국무성 촉탁으로 미군정 메카더 사령부를 위해 일하다가 1951년 4월 사
망했다. 해방 이후 하경덕이 언론인의 길을 걷는 대신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사회학
을 제도화하는 역할을 했더라면 한국 사회학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해방 이후 대학에 사회학과를 만들어 사회학을 연구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였더
라면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다르게 만들었을 인물로 하경덕에 이어 한치진을 들 수
있다.41) 1901년 평남 용강군에서 출생한 한치진은 16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공부하
다가 1921년 도미하여 1930년 미국 남가주대학USC에서 사회학과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이후 1932년에서 1937년 사이에 감신대를 거쳐 이화여
40) 원재연(2012: 27)에 따르면 하경덕의 이런 입장은 “현재의 맹목적인 과학 지향적 학문적 풍토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41) 한치진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사진들과 그의 저서 29권의 목록을 싣고 있는 한치진 기념사업회
(2013)를 참조할 것.
28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전에서 강의하면서 1933년에는 사회학 개론을 출간했다.42) 한치진의 딸 한영숙의
증언에 따르면 한치진은 1937년 일본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탄압에 의해 이
화여전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이후 한치진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1년 동안 일본어
를 배우며 두 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한다.43) 해방 몇 년 전부터 요주의 인물로 서대
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한치진은 1945년 8월 17일 출감하여 미군정의 공보부 고
문을 지내면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민주주의의 원리를 해설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민
주주의에 관한 5권의 책을 집필했다. 한영숙의 증언에 따르면 한치진은 1947년부터
서울대 교수를 했다고 하는데 강의를 했을지는 모르지만 정식 교수는 아니었을 것이
며 사회학과가 아닌 다른 학과에서 강의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치진은 1950년 8월
납북되었다고 하는데 이후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한치진의 부인은 ‘납치가족회’를
만들어 1960년까지 남편의 행방을 추적하고 납북자 소환을 위해 힘썼으나 아무런
성과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자녀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930년대 보성전문에서 가르치던 김현준도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동경유학 시절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으며 3·1운
동 이후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 유학하여 1928년 “동아시아(한국, 중국, 일본)에 있
어서의 근대 신문의 생성·발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이후
「동광」 34호에 국내 언론계에 학술전문잡지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글을 발표했고
「신동아」에 “시위운동과 군중심리”, “현대사회사상의 동향” 등의 글을 발표했다.
그는 1930년 근대사회학이라는 제목의 사회학 개론서를 출간하기도 했다(최재석,
2002: 48-69). 1930년대에 보성전문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던 그는 광복 직후 성균관
대학교 학장과 전주사범 교장을 거쳐 조선대학교 문리학부장으로 재임 중 좌익계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만약에 그가 해방 이후 고려대학교나 성균관대학교 아니면 조선
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였다면 한국사회학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인물로 1930년대 프랑스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공진항을 들
수 있다. 1900년 개성에서 출판 사업을 전개한 실업가 공성학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공진항은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개성 제일공립보통학교에서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다(이은주, 2012: 181-212). 이후 서울에 올라와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
여 수년간 수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도지샤중학에 편입하였다. 졸업 후 와
세다대학 영문과를 다니다가 유럽으로 건너가 런던대학에서 2년을 공부한 다음 프
42) 한치진의 박사학위논문 제목은 “중국윤리체계들에 대한 비판: 불교, 도교, 유교”였다.
43) 한치진의 납북경위에 대한 딸 한영숙의 증언은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2009: 431-438)을 볼 것.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29
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1932년 7월 시베리아철도로 만주를 거
쳐 귀국한 공진항은 천도교 조직을 중심으로 사회학을 강의하고 사회과 강의라는
사회학 교재도 편찬했다(최재석 2002: 10-80). 그러다가 그는 교육사업을 떠나 가업
을 정리한 후 만주로 진출하여 사업가가 되었다. 1935년 만주의 요하(遼河) 연안에
농지 20만평을 매입하여 고려농장을 시작한 그는 민족기업가로서 만주에 이상향 건
설을 목표로 사업을 확대하여 만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도
경기도 양주군에서 목축농장을 하다가 주 프랑스공사를 역임했고 1950년에는 농림
부 장관, 1957년에는 농협중앙회 회장, 1961년 고려인삼흥업사장, 천도교 교령 등을
역임하다 1972년 사망했다. 만약에 그가 해방 이후 어느 대학에 사회학과를 창설하
고 연구와 교육에 헌신하였다면 한국 사회학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위에 언급한 사회학자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해방 이후 새로 만들어진 대학 안에
사회학과를 만들어 제자를 양성하는 일을 하지 못한 반면에 이상백은 1946년 서울
대학교 문리대에 사회학과를 만들고 1966년까지 20여년을 동안 제자들을 양성함으
로써 한국사회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여기서 “만약에 뭐뭐였다면”이라는 가정법을
써가면서 백남운, 신진균, 하경덕, 한치진, 김현준, 공진항 같은 이상백과 동시대의
사회학자들을 거론한 이유는 그 이후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단서
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과 더불어 경성제국대학에서 경성대학이 되었다가 서
울대학으로 개편된 국립대학의 사회학과의 교수진에는 신진균 같은 월북 지식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승만과 불화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취한 하경덕 같은 사회학자도
없었으며 미국에서 공부한 한치진, 독일에서 공부한 김현준, 프랑스에서 공부한 공
진항 등 구미에서 공부한 사회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44)
1946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의 창설과 1957년 한국사회학회의 창립에 이상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백을 한
국사회학의 ‘정신적 아버지’로 보기에는 다소 불편한 점이 있다. 이미 1930년대 국
내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학생들을 가르치고 저서를 펴내
던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대학 내에 자리 잡고 학문적 업적을 쌓고
차세대 학자를 키우는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한국사회
학의 역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단절된 한국사회학사의 앞 토막을 장식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상백에 비해 사회학 본령의 연구에서 앞선
44) 그 결과 서구사회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사회학
을 급속하게 수용하면서 한국사회학의 내용을 채워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30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측면도 있다. 그러기에 이상백이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설립한 제도적 아버지임
은 분명하지만 그를 사회학의 학문적 내용을 갖춘 한국사회학의 아버지로 선뜻 내세
우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45) 그가 뒤르켐이나 베버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 사회학
의 역사에서 기본이 될 연구의 이론과 방법론을 제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상백은 사회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했다기보다는 역사학 가운데 사회사를 전공한
학자였다. 물론 그의 사회사 연구는 서얼차대, 천자수모법, 부녀재가금지, 려말선초
의 사회변동과 조선의 건국과정 등 사회학적인 주제를 다루었지만 그것을 오늘날에
말하는 역사사회학 저작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46)
2. 이상백이 한국 사회학의 아버지가 된 이유
그렇다면 일본에서 공부한 이상백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한국사회학
의 제도적 아버지가 되는 과정에는 어떤 요인들이 작용하였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는 앞에서 이미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 바 있다. 첫째는 좌우 이념 대립의 상황에서
명백하게 좌익의 입장에 섰던 사람들은 일단 한국사회학의 아버지가 되기에 부적합
했다. 이상백은 여운형 계열에 속하는 중도 좌파에 속했지만 국대안을 반대하는 좌
익계열에는 속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을 제도화하는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47) 두 번째 이유는 그가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일본에서 조선사
회에 대한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했고 진단학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활동했다는 점
이다. 해방 이후 진단학회가 국립대학이 된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진 구성에 주축
이 되었기 때문에 이상백이 사회학과의 창설에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 짧게 소개한 193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상백이 사회학을 제도화할 수 있었던 이유로 두 가지를 추가할 수 있을 것
이다. 첫째는 넓게 보자면 학문의 세계에, 좁혀 보자면 사회학이라는 학문에 헌신하
45) 김필동(1993: 98)에 따르면 “상백은 연구‧조사활동을 조직하고, 학술활동을 지원하며, 한국학의
국제적 교류를 촉진하는 등 논문 이외의 일을 통해 학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상백은 하버드
대학교의 옌칭연구소의 동아문화연구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61년 서울대 문리대에 ‘동아문
화연구소’를 창설하고 초대 소장으로 일했다. 조선일보의 학술담당 기자를 역임한 이한우(1995:
182)는 “어떤 의미에서 이상백의 성가는 학자로서보다는 학술행정가로서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는 체육행정가로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썼다.
46) 이만갑(2007: 10)은 이상백의 사회사 연구에 대해 “문화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사회학적 통찰력
을 가지고 역사를 고찰함으로써 일반 역사학자가 놓치기 쉬운 측면에 학문적 시야를 돌리도록
노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고 평가했다.
47) 이상백(1961: 208)은 사회혁명을 부르짖으면서 실제의 생활에서는 자본가의 은혜나 일제의 혜
택을 받고 사는 사람들의 언행의 불일치를 비판했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31
려는 태도의 유무와 그 정도였을 것이다. 해방 당시 누구나 다 어려운 삶을 살았지
만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직업이 그렇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었고
경제적 보상도 겨우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박봉이었다.48)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언
론계 등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보장하는 다른 영역
으로 진출했던 것이다. 그와 반면에 이상백은 한 때 정치에도 관심을 가졌으나 줄곧
학문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만약에 여운형이 계속 정치 활동을 했더라면 이
야기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1947년 여운형 암살 이후 이상백은 정치로부
터 완전히 물러나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건국 직후인 1948년 9월 28일에 출간된
학풍 창간호 권두에 실린 “학문의 권위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창간사에서 이상백
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이비 모리배 학자들과 권력 당국의 학문에 대한 정치적
개입을 다 같이 비판하면서 학자들 스스로 학문의 권위를 확립하는 일에 매진할 것
을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49) “학문에 전심전력을 경도해야 할 학자가 오늘은 생활을
위하여 몸을 영리기업에 두기도 하며, 내일은 세속적 위력에 아첨하여 학계를 파는
데 여념이 없다. 학문은 단순히 광범한 지식의 획득만으로써 권위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학문하는 태도 다시 말하면 학문을 욕구하는 강력한 윤리적 힘이 필요
한 것이다”(천정환, 2014: 74-75).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상백은 학문의 세
계에 헌신하려는 내적 신념이 강했던 듯 하다. 이상백은 제자들에게 저널리즘보다는
학문에 헌신하는 일이 필요함을 강조했는데 최재석(2015: 102)은 이상백의 글 “저널
리즘과 아카데미즘”을 읽고 나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
기도 했다. “나는 한국의 사회학처럼 연구 업적이 축적되지 못하고, 따라서 그 학문
의 학풍과 전통이 확고히 수립되지 못한 단계에서는 저널리즘보다 아카데미즘이 우
위에 서야한다고 생각한다.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저널리즘이 아카데미즘보다 우위에
서고 그 기풍이 오랫동안 지속된다면 아카데미즘의 확립은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저
널리즘도 공허해지기 때문이다.”50)
이상백이 한국사회학을 제도화시킬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 위에 말한 학문
에 대한 헌신과 더불어 그의 지도자적 자질과 능력을 덧붙여볼 수 있다.51) 최문환
48) 변시민(2006: 32-33)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교수들이 월급으로는 생활하기에 바빠 책을 사볼 여
유도 없었고 매일 낡은 와이셔츠에 헌 넥타이를 매고 출근했다고 한다.
49) 을유문화사 대표 정진숙(1996:, 392)에 따르면 학풍 창간호의 익명의 권두언은 이상백이 쓴
것이다.
50) 이상백의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은 「문리대학보」 2호(1953년)에 처음 실렸고 이상백 저작집
3권(을유문화사, 1978)에 다시 실렸다. 양영진도 1970년대 초 대학국어에 실린 이 글을 읽고
아카데미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32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상백 이상백 평전 출판위원회, 1996)은 이상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온후담박
한 그의 성격, 항상 앞을 내다보는 그의 전망적 자세와 예리한 통찰력, 현실사회의
동향에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면서 학문을 하는데 보이는 역사에 침잠하는 신중한 학
구적 태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최신의 학문에 주의를 아끼지 아니한 연
구열, 다방면의 사교를 하면서도 자기의 고고한 인격, 개성을 살리는 특성, 끊임없이
산만한 세속적인 화제 안에서도 엿보이는 해박한 지식을 그는 가졌다.” 김채윤
(1996: 85)은 ‘선생이 갖춘 뛰어난 속성’으로 “6척 장신에 수려한 용모, 고매한 인품,
좌중을 매혹하는 고담준화(高談埈話), 중후한 강의, 고미술에 대한 높은 식견”등을
열거하였고 을유문화사 사장을 거쳐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한 민병도(1996: 359)는
이상백에 대해 “후리후리한 6척의 거구, 수려하고 온후한 용모, 세련된 몸차림 등 외
관상의 우월성에다, 정열적인 학술 연구를 통해 축적된 탁월한 식견, 농구를 비롯한
체육 발전을 위해 보여주신 초인적인 활동, 고매하고 고고한 인품 등이 종합되어 시
현(示顯)하는 상백 선생의 위풍은 참으로 당당하여 그와 가까이 하는 학계, 체육회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일본인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라고 썼다. 말하자면 이
상백은 외적 용모나 내적 인격, 학문적 능력과 조직 역량에서 뛰어난 지도자적 자질
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했다. 다시 김채윤
(1996: 87)의 증언을 들어보면 “선생의 모습을 처음 대하는 문리대 신입생들은 우선
그 귀족 같은 외양에 압도되어 접근하기조차 어려운 교수로 생각하기 일쑤였다. 뿐
만 아니라 3면의 벽이 신구서적으로 꽉 들어찬 선생의 연구실 분위기에 또한 기가
죽게 마련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카리스마적 자질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상백이
풍기는 내적 외적 분위기가 그가 동료 교수들과 사회학과 학생들을 이끌고 나가면서
사회학을 제도화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1970년대 이후
한국사회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서울대 사회학과 1955년 입학생들 가
운데 한완상, 김경동, 강신표 세 사람이 모두 이상백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은 그런 사실을 입증한다. 한완상은 상백 이상백 평전에 실린 글에서 이상백
을 회고하고 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있으며 자신의 저서 현대사회와 청
년문화(1973) 맨 앞장에 “잊을 수 없는 스승 故 李相佰 선생님께 삼가 이 책을 드
립니다”라는 문구를 적어놓았다.52) 김경동(1964)은 이상백 박사 회갑기념논문집
51) 박명규(2004: 48)는 “한국의 사회학계는 이상백이라는 개인의 강한 영향력을 배경으로 제도화
되었다”고 썼다.
52) 이상백을 추모하는 한완상의 글 “나의 스승 이상백 선생,”은 한완상(2000: 325- 340)에 다시 실렸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33
에 실린 “교과서 분석에 의한 한국사회의 유교가치관 연구”의 맨 마지막에 “지도를
아끼지 아니하신 이상백 선생님께 특별히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글귀를 남겼다. 강
신표(2010: 376)는 “상백 선생의 미완성 유고와 나의 학문의 길 그리고 올림픽 운동”
이란 글에서 “이상백 선생의 미완성 유고 ‘한국인의 사고방식의 연구방법론(1966)’
은 나의 학문의 길에 있어서 ‘시발점’이었다고 밝혔다.
Ⅴ. 한국사회학사 연구와 한국사회학의 미래
이상백은 한국사회학의 아버지로서 한국사회학을 대학 내에 제도적으로 안정화시
키고 후배 교수들과 제자들을 양성하여 한국사회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수립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창설하여 한국사회학의
아버지가 되는 과정에는 그가 일제 강점기 일본체육회에서 활동하면서 얻게 된 세계
적인 안목과 진단학회에서 활동한 경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일
찍이 정치에서 손을 떼고 사회학과 창설에 힘을 기울였다. 향후 한국 사회학의 전개
를 위한 분명한 패러다임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긴 학문적 유산은 동료 학
자들이나 후배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오늘날 한국 사회학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
고 있다. 그가 후학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회사 연구는 최
재석, 신용하, 김영모, 김진균 등 2세대 학자를 거쳐 박명규, 김필동, 정근식 등 3세
대 학자로 이어졌으며 그 연구의 흐름은 ‘한국사회사학회’라는 독자적인 학회 활동
으로 계속되고 있다.53) 이상백은 한국의 사회학이 사회사 연구보다는 실증주의 정신
으로 무장한 ‘과학적’ 사회학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의 그런 방향 설정은 이만갑과
이해영을 비롯하여 후속 세대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사회조사와 통계분석을 강조
하는 ‘과학적’ 사회학으로 발전하여 한국 사회학의 주류를 형성했다. 사회사 연구이
건 실증주의 사회학이건 이상백은 ‘자료’와 ‘실증’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이상백이 학풍의 ‘사회학 특집호’를 편집하면서 서구의 사회이론가 40명을
소개했으며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사회학사 과목을 통해 제자들에게 서구의 사회이
53) 한국사회사학회가 발간하는 사회와 역사에 실린 논문들이 사회학보다 역사학 쪽에 더 가깝다
는 일반적 평가를 받는 것은 이상백이 사회학자라기보다는 역사학자에 가깝다는 평가의 연속으
로 볼 수 있다. 최재석(2011: 30)은 자신의 사회사 연구의 뿌리가 이상백의 사회사에 있음을 다
음과 같이 증언했다. “대학원(석사과정)에서 사회학의 연구 대상을 횡적인 현재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종적인 역사적 측면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이상백) 선생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34 한국사회학 제50집 제2호(2016년)
론을 가르친 것과 잘 이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연구에서는 ‘실증’을 강조하고 강의
에서는 ‘이론’을 가르쳤는데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지 못한 것 같다. 그 결과 이후
한국의 사회학 연구는 의미있는 ‘사실’과 ‘자료’를 찾아낼 때나 그것을 해석할 때 깊
이 있는 이론적 성찰의 전통을 쌓지 못했다(박영신, 1985, 1992). 한국사회학 7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학계는 여전히 외국의 사회이론을 수입하고 해석하고
한국의 자료와 사실을 가지고 입증하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다(강신표,
1985; 2005). 다른 한편 ‘사실’과 ‘자료’에 대한 강조는 한국사회의 구체적 현실과
관련하여 ‘적합성의 부족’이라는 문제를 낳았다. 식민지 체험, 분단과 전쟁, 권위주
의 체제와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 사회가 겪은 사회적 현상들을 파고드는 적합성이
높은 지식을 생산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 ‘적합성 문
제’가 제기되고 1980년대 이후에는 ‘비판 사회학’이 태동하게 된 것이다(한완상·이
기홍, 1987; 김진균, 1997).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한국사회학계는 내부 분열을 경험
했지만 그것은 한국사회학의 발전 과정에서 성숙을 위한 디딤돌이 되기도 했다. 앞
으로 한국사회학계는 이론적 성찰이 풍부한 경험적 연구와 경험적 연구를 제시하는
이론적 성찰이 서로를 지지하는 관계로 발전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사회학계
내부의 전문성을 증진시키면서도 한국사회와 관련된 문제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지식
의 적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회학이라는 학문은 어차피 여
러 이론적 방법론적 패러다임이 공존하는 “비정상”과학이다. 그렇다면 한국사회학
계는 서로 다른 패러다임 안에서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우리
사회에 울림이 있는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제시해야할 것이
다.54) 그와 더불어 한국사회학자들은 지식생산을 통해 공적 토론을 활성화시키는
‘공공사회학자’의 역할을 자임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긴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앞에서 이상백을 중심으로 한국사회학의 초
창기 역사를 살펴보았지만 한국사회학의 역사를 탐구하는 작업은 “단순히 역사적 사
실의 회고”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것은 오늘날의 한국사회학자들에게 성찰의 기회
를 제공할 때 의미있는 작업이 된다. 한국사회학의 역사는 “자기 성찰의 역사이어야
하며 자체 생산을 위한 반성적 작업”이어야 한다(박영신, 1985: 28; 김필동, 1994가:
34).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에서 그림을 그리던 고갱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
54) 현재 한국사회학계의 내부 구성을 ‘이론/문화적 접근’ ‘사회사/역사사회학적 접근’ ‘사회조사/통
계적 접근’으로 구별하고 그 세 가지 접근 사이의 ‘협업’을 통한 공감대 형성을 건의한 익명의
논평자에게 감사한다.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35
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의 작품을 남겼다. 고갱의 그 세 가
지 질문을 ‘역사의 3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김기봉, 2016: 99-121). 한국사회학 70
년을 맞이하여 한국 사회학의 초창기 역사를 다룬 이 글이 지금 여기의 한국사회학
자들 각자가 한국사회학의 역사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성찰하면서 한국사회학
사의 3문을 더 깊게 탐구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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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복은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의미세계와
사회운동(1993), 시민의식과 시민참여(2002),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2007), 응답하는 사
회학(2015) 등의 사회학 저서를 펴내었으며 파리를 생각한다(2007), 프로방스에서의 완전
한 휴식(2010), 책인시공(2013) 등의 인문 교양도서를 펴낸 작가이기도 하다. 연세대학교
강사,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 크리스챤아카데미 기획연구실장, 사회운동연구소장, 파리 사회
과학고등연구원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다.
[2016. 4. 8. 접수; 2016. 4. 28. 수정; 2016. 4. 29. 게재확정]
이상백과 한국사회학의 성립 39
Lee Sang-Beck and Origin of Contemporary Korean Sociology
Soo Bok Cheong
Sociologist/Writer
Korean sociology celebrates this year, it's 70th anniversary. Concentrating it's focus on
the role of Lee Sang-Beck, this article sheds lights on the institutionalization process of
sociology in Korea. Lee studied sociology and history in Japan during the colonial period.
After liberation, in spite of the presence of several rival sociologists who had been trained
in the U. S., Germany, France and Japan, Lee became the main actor in the institutionalization
of Korean sociology. This article describes this process and explains his success as the
founding father of Korean sociology by four main factors: his non-leftist political position,
his active participation at Jindan Hakhoe(Jindan academic circle) which played a central
role in the reconstruction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his sincere academic attitude and
his charismatic leadership. Both his achievement in social history and his conception of
sociology as an empirical science had been inherited by the next generation of Korean
sociologist. Nevertheless Lee's intellectual legacy produced two side effects: insufficient
theoretical reflection and lack of relevance.
Key words: History of sociology, Korean sociology, Institutionalization, Lee Sang-Beck,
Positiv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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