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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김명희가 당신에게 드리는 글
[신공의 힘을 보여주세요! 오늘의 당신이, 내일의 당신을 위해, 해야 할 일!]
신춘문예공모나라 회원여러분 안녕하세요? 김명희입니다.
이른 아침에 이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아 두 시간을 그냥 보냈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밤새 뒤척이며 고민을 하다 당신 앞에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마주 앉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까 저는 잠시 망설입니다. 그러다 저는 생각합니다. 우선 ‘나’라는 사람을 정식으로 당신께 소개하는 것이 순서이겠다고 말입니다.
제 소개를 하자고 생각하니, 과연 ‘나’라는 건물을 어디서부터 열어 당신한테 보여드려야 할까 또 잠시 고민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또 다시 커피 두 잔을 마시는 시간이 흘러가고 맙니다. 하얀 백지를 검은 활자로 채워가며 당신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언제나 힘든 과정이구나···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알다시피 저는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지금 글을 쓰는 작가이거나, 곧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지금 고된 창작과 습작의 연마과정을 걷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도 저도 너무 잘 아는 것 하나가 있어요. 당신도 저도 글만 써서 삶을 꾸려가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몇몇의 대표적인 작가 외에는 당신도 저도 또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저는 늘 두 개의 겸업을 합니다. 그러다보면 주객이 전도되어 어느 것이 당신과 저의 본업인지 혼동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합니다.
물론, 저도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이른 나이부터 무수한 직업을 그간 거쳐 왔습니다. 80년대 어느 3월에 고등학교를 입학해 딱 두 달을 다니고, 5월에 아버지 약값을 벌기 위해 고등학교 중퇴를 했습니다. 그 때 담임선생님으로 제가 만난 국어선생님은, 제가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두달만에 학교를 중퇴하고 마지막으로 책가방과 교복을 챙겨 그 교문을 나설 때 저보다 더 많이 우시더군요. 그분께 저는 교문 앞에서 약속을 했지요. 반드시 다시 돌아와 이 교문 앞에서 선생님을 찾겠노라고···. 그러니 지금은 저 때문에 울지 마시라고···. 그렇게 학생 신분을 놓치고, 바로 다음날부터 저는 아버지 약값을 벌기 위해 공장으로 일을 나갔습니다. 도로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제 친구들은 안전한 여고생이었고, 저는 봉제공장 시다로 삶이 재편성 되더군요. 군복을 만드는 봉제공장 시다를 거쳐 미싱사가 되었습니다. 까뜨리네뜨 바바리를 만들고, 아동복 뱅뱅도 만들었고, 이불공장을 거쳐, 가방 공장을 지나, 일본으로 수출했던 가죽잠바공장을 또 거쳤고, 그러는 동안 열악한 환경과 임금이 힘에 겨웠습니다. 몸의 고됨은 이미 학교를 떠날 때 각오했던 터였지만 이왕 고생할 거라면 짧은 시일에 돈을 벌어 한 맺힌 공부를 마치고 싶었고, 그래서 저는 이십대 초반에 말로만 들었던 노점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여자 몸으로 만난, 거친 그 세상은 제가 그간 겪어보지 못한 면들이 엄청났지요. 세상의 모든 거리가 누군가의 자리였고 이미 그들의 영역으로 암묵적인 법이 있었습니다. 불법 노점상 속에도 삼촌이라는 무법자들이 있었고, 시청 노점단속반도 저승사자만큼 무서운 존재였지요. 세상 어디든 그들이 만든 그들만의 무서운 법이 있었지요. 그 험난한 세계를 비집고 들어가, 그 당시 저의 전 재산 5만원을 털어 장사밑천으로 칫솔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에서 물건을 팔기는커녕, 우선은 그 골목에서 쫓겨나지 않는 법부터 익혀야했습니다. 가장 먼저 은박돗자리 하나를 시장 가장 후미진 곳에 펴고 앉아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팔릴 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도 못 파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그런 날에는 파장 시간에 시장을 돌며 그날의 반찬거리와 생필품을, 사정사정하다시피 해서 제가 가진 칫솔과 맞바꿔 먹고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아픈 아버지를 곁에서 지켜드리기 위해, 곳곳으로 이사를 다녔고, 그래서 저는 지금껏 친구도 동창도 전혀 없어요. 그래서 저는 너무 힘들어 주저 앉고 싶을 때마다 묵묵히 하늘을 보았지요. 그러면서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해, 그 후로도, 빵장사, 양말장사, 책장사, 의료기영업, 보험, 붕어빵장사를 했지요.
붕어빵 장사를 했던 날이 떠오릅니다. 아파트 신도시 진입로에서 붕어빵을 팔다보니, 그 안의 상가 제과점들이 다 몰려나와 저를 내쫓더군요. 그들 입장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결국 얼마 안 가서 그들까지 제 손님으로 만들었고, 제과점 사장님들이 붕어빵을 사먹도록 저는 만들었습니다. 어찌나 바빴던지 지금은 부사관인 아들놈이 그때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녀석이 학교 끝나면 붕어빵 봉지를 품에 안고 이곳저곳 배달원으로 뛰어야 할 만큼 바빴던 기억도 납니다.
그 뒤, 저는 수입을 좀 더 늘이기 위해, 평택 삼리 창녀촌에서 리어카로 오뎅 김밥 떡볶이 순대장사를 했습니다. 꽃처럼 예쁜 어린 창녀아이들···. 그 아이들과 그녀들의 성을 사는 남자들이 제 유일한 손님이었습니다. 흰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에도 그 아이들은 벌건 나체로, 망사로 된 날개 옷 하나만 걸치고 밖에서 떨며 손님을 받더군요. 나는 그 아이들을 위해 다음날부터는 오뎅국물을 두 배로 더 늘였지요. 리어카를 한 곳에 세워 둘 수 없는 그곳이었어요. 펄펄 끓는 오뎅국물이 든 커다란 솥이 담긴 리어카를 밤새 이동하며 끌고 또 끌며 장사를 했어도 그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어 좋았지요. 새벽까지 마음껏 퍼주고도 남을 뜨끈한 국물이 제가 제 손님에게 줄 수 있는 소중하고 유일한 선물이었어요.
중고 화물차로 과일장사를 할 때에는 여름이면 성주산지로 내려가 적재함 가득 참외를 싣고 산골동네 어디든 찾아다니며 팔았고, 밤이면 산속에서 길을 잃거나 차가 고장 나 새벽에 집에 올 때도 참 많았어요. 도로에서 간판을 놓고도 팔았고, 가을이면 안동 산지로 내려가 사과를 한가득 싣고 올라와 또 온 세상을 누비며 장사를 했지요. 그때 몇 명의 고아아이들에게는 과일이모로 통했고, 불쌍한 어른들 대문에는 퇴근길에 늘 과일봉지를 걸어드리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러고 보면 저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제 쌀값만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소중한 것들을 선물로 받은 저는 세상에 큰 빚을 진 빚쟁이지요. 하루 장사를 마치고 화물차 마이크 방송을 끄고 돌아오는 길에는, 그들의 불 꺼진 창을 보며 다짐하곤 했지요. ‘반드시 좋은 글로 이 세상 음지를 위로하는 시인이자 작가가 되겠노라고···.’
돌아보니, 현재의 학원 강사까지 그동안 대략 열세 가지 가량의 직업을 거쳤군요. 그 속에서도 저는 미친 듯 시를 썼습니다. 제가 속해있는 곳에서 보이는 세상 음지의 모든 것들을 눈물과 시로 노래하려 노력했고, 그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삶을 글로 대변해 세상에 알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지요.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앞으로 제가, 죽을 때까지 모든 삶을 바쳐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그러면서 저는 그들을 위한 노래를 더 잘하기 위해 고졸검정고시를 거쳤고, 2006년에는 한라일보 신춘문예에 詩가 당선되어 등단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26년 전 제가 약속했던 그 두달의 인연을 찾기 시작했지요. 그녀는 바로 26년 전 두 달간 제 담임선생님이셨던 국어선생님이지요. 제가 마지막으로 다녔던 학교와 곳곳을 수소문 해보니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교직을 떠나 일본에 사시더군요. 그분께 연락을 했지요. 제가 잘못 되지 않고 지금껏 똑바로 살아왔음을 당당히 보여드리고 싶었지요. 오래전 중퇴해 학교 교문을 나섰던, 그 교문 앞에서 선생님과 저는 26년 만에 다시 만났어요. 그때 선생님이 저를 대신해 많이 우시더군요. 그 다음해에 저는 방송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을 해 4년 만에 무사히 졸업을 하게 됩니다.
그 후로도 화물차 하나를 끌고 과일을 싣고 무수한 공장을 뚫었습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하자! 는 것이 제 삶의 신조입니다. 가는 곳마다, 뜨내기 장사꾼인 저를 쫓아내면, 저는 그분들이 가장 신경 안 쓰는 공장 밖, 에어컨 환풍기 앞에 몰래 차를 세우고 물건을 팔았지요. 한여름 30도를 넘는 날씨에 에어컨 환풍기 앞은 40도가 넘었지요. 작업복 청바지가 비지땀에 다 젖고 속옷 자국이 훤히 드러나도, 그곳이 제가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어요. 그곳에는 직원들도 환풍기 열기가 너무 뜨거워 절대 차를 대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언제든 그 자리는 제 차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자리였지요. 텅 비어 나를 기다리는 그 자리를 보면 저는 늘 기뻤습니다. 그런 자리라도 제가 차를 세우고 물건을 팔 수 있다는 것이···. 그다음 저의 목표는 공장 안까지 들어가 물건을 파는 것이었어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지요.
쫓겨나면 쫓겨날수록 저는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고, 진실을 보여줬지요. 시간이 갈수록, 회사 입구에는 근접도 못하게 했던 제 화물차는 그들 모두가 기다리는 차가 되었지요. 저와 제 낡은 화물차를 문전박대 했던 회사들이 하나 둘 씩 주차장을 내어주었고, 잡상인인 저를 내쫓았던 경비아저씨가, 사장님 특별 지시라며 회사 대문을 활짝 열어주는 날이 왔어요. 그곳 사장님과 회장님과 부장님 그리고 공장장님과 겸상을 하며 그들과 구내식당에서 공짜 밥을 마음껏 먹으며 장사를 하기까지 사람에 대한 무수한 경험을 쌓은 듯합니다. 추석이나 설 명절에는 회사 사장님들과 모든 간부들이 배달사원을 자초하며 나서주었지요. 본인 승용차에, 주변 아파트로 물건 배달을 해 주며 부족한 저를 도와주었고 제게 큰 힘이 되었던 적이 참 많았지요.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쉽게 된 일은 절대 없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번 약값으로 아버지는 40년을 병상에 누워계시다 몇 년 전 하늘로 떠나셨지요.
각설하고, 이제 저는 당신과 또 하나의 고개를 넘기 위해 지금 이 앞에 섰습니다.
어쩌면 제가 오늘 서 있는 이 고개에, 얼마 후 당신이 서게 될 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제 첫 장편소설 [불멸의 꽃]이 세상에 책으로 나왔어요. 저는 이 책을 반드시 많이 팔아야 합니다. 저뿐만이 아니고, 이 땅의 모든 작가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익히 이름이 알려진 작가라면 아무 걱정이 없겠지요. 그러나 그들에게도 ‘처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처음’이라는 짐을 저 역시 지금 등에 지고 있어요. 그 행복하고 고독한 짐을 당신도 곧 등에 지는 문운을 비는 마음도 간절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읽어주지 않고 사주지 않는 책은 거리에 버려진 미아와 같습니다. [불멸의 꽃]이 미아가 되지 않도록, 신공 여러분이 1인 1책 구입을 해 주세요.
이것을 시발점으로 해서, 저는 여러분들이 [신공나라 1인 1책 구입하기 운동]으로 등불을 켜주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제가 만약 여기서 실패한다면, 곧 제 길을 걷게 될 신공나라의 작가여러분들도 더는 길이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 잘 되어서 신공의 미래 작가분들께 하나의 희망이 되고 싶다면 욕심일까요? 그것은 곧 얼마 후 당신의 희망이 될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인원수가 많고 아름다운 소통이 자랑인 신공나라는 지금 우수카페가 되었습니다. 그 자랑스러운 우수카페의 힘과 무서운 단결력을 이번 기회에 보여주시기를 저는 바랍니다. 이것은 저 혼자만을 위한 바람이거나 욕심이 결코 아니니, 행여 오늘의 제 글을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일이 절대 없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불멸의 꽃] 독자가 되어 힘 있게 나서주세요. 훗날 저도 지금의 모든 경험을 모아 여러분이 내는 그 책 [......] 의 독자가 되어 용기 있게 나서겠습니다. 역사는 당신과 제가 직접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저는 지금껏 믿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믿고 묵묵히 살아갈 것입니다.
김명희 고려역사장편소설 [불멸의 꽃]은 어제부터, 인터넷 서점 신간 코너에 올라있습니다. 이제 이 [불멸의 꽃]이 정말 앞으로 창창하게 불멸의 꽃으로 활활 타오를지, 얼마 못 가 불이 꺼지고 단 며칠 만에 기억의 뒤편으로 사라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는 이 책을 최선을 다 해 썼고, 이제 당신이라는 독자의 손에 이 책의 운명은 달려 있습니다.
오늘, 내일, 그리고 모레... 더 나아가 모든 신공나라의 미래 작가들을 위해, 그리고 그 자리에 곧 서게 될 내일의 당신을 위해, [불멸의 꽃]을 구입해 주세요.
이러한 새 역사를 당신과 내가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신공나라는 그저 신공나라라는 지극히 평범한 우수카페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모두 깊이 생각해 보시길 저는 바랍니다.
첫댓글 감명받은 글 하나 퍼 왔습니다. 격려차 독자가 되어 주시길.
나라솔 선생님 새 해부터 눈물을 흠치게 만드는군요
고난의 길에서도 불멸의 꽃으로 피워 낸 김명희 작가님을 응원합니다
저도 그 분의 독자가 되겠습니다 ~
나라솔 선생님 !
새 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운이 함께 하시길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