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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배후, 혹은 위대한 수동성
―한현수, 사과꽃이 온다의 시세계
황치복(문학평론가)
1. 섭리, 혹은 존재의 배후
2008년 시집 내 마음의 숲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2012년 <발견>을 통해 문단에 나온 한현수 시인은 그동안 시집으로 오래된 말, 기다리는 게 버릇이 되었다, 눈물만큼의 이름, 그리고 묵상시집 그가 들으시니 등을 발간한 바 있다. 시인은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활동 중이고, 숲생태 전문 강사로서 꽃과 생태의 신비를 알리는 일도 하고 있다고 한다.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고 있으며, 숲생태 전문가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어쩌면 현대인의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자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답답한 듯한 막힌 가슴이 뻥 뚫리고, 혼탁한 영혼이 맑아지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현상은 시인의 맑고 고운 영혼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감염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경 「시편」을 읽으면서 그에 대한 종교적 성찰과 각성을 노래하고 있는 그가 들으시니라는 묵상 시집이 대변해주듯이 한현수 시인의 시적 근원에는 종교적 상상력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시는 자연신학의 발상처럼 우리가 보고 느끼는 현상의 이면에 그것을 작동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그 보이지 않는 손이 꼭두각시 공연의 뒤에서 줄을 조정하듯이 통제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존재의 의지와 법칙을 이해하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러한 맥락에서 이 시집의 주요한 핵심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섭리라든가 공감, 혹은 화음과 수동성 등의 아름다운 시적 자질들이 생성된다. 시집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다음 시집에 이번 시집의 모든 주제가 응축되어 있다.
1
나무에서 새소리가 들리고
나뭇잎 하나 가만히 내려앉는다
저게 화음이 아니면 무엇인지
2
그믐빛이 아득하게 하늘에 스며들었다
작은 소리도 멀리 가는 아침은
깊어지는 것인지
3
바람이 불어 연못에 물주름이 일어난다
누군가 말하는가 싶어
가만히 귀를 열어두었다
4
아침은 막 열린 꽃잎으로
얼마나 맑아지는지
비 오는 날, 흩어졌던 꽃잎들이
추상화를 남긴다
―「아침」, 부분
“아침”이라는 시간을 초점으로 모두 다섯 개의 단상으로 이루어진 이 시편에서 주목되는 점은 화음이라든가, 섭리, 그리고 그윽함과 신비로움 등의 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주체들이 모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단상의 주제는 나무와 새의 교감이 불러일으키는 부름과 응답으로서의 공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인은 이를 “화음”이라고 명명하며 두 존재의 어울림을 강조한다. 두 번째 단상에서는 그믐빛이 하늘에 스며들고 작은 소리가 멀리 나아가는 아침을 “아득하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깊다”고 표현하기도 하면서 그 신비로움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신비로움은 세 번째 단상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신적 존재의 작용 때문이기도 한데, “바람이 불어 연못에 물주름이 일어나”는 현상은 누군가 어떤 메시지를 발산하는 것으로서 현상의 이면에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체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지막 네 번째 단상에서는 아침에 막 열린 꽃잎이 비오는 날에 떨어져 추상화를 그리는데, 이러한 예술 창작 또한 어떤 보이지 않은 존재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는 어떤 보이지 않는 존재의 작용으로 인해서 하모니와 어울림이 탄생하고, 아득하고 그윽한 신비로운 자연의 현상이 발생하며, 자연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예술이 탄생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시적 구도에서 우리는 시인의 주된 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거니와 그것은 자연의 이면에서 그것의 현상과 법칙을 지배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고, 혹은 중국의 도(道)라든가 인도의 다르마(Dharma), 혹은 진리, 정의, 우주 질서의 여신이라는 이집트의 마트(Maat)와 연상할 수도 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섭리라든가 이치, 혹은 이법이라든가 질서, 코스모스 등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존과 작용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하면서 그것의 의지와 의도를 읽어내려고 한다.
시인은 표제시인 「사과꽃이 온다」라는 시에서 “산골 마을의 농부는 사과꽃이 핀다고 말하지 않고 사과꽃이 온다고 말한다”고 전제하고, 다시금 그들은 “보내 주는 분을 아는 것처럼 사과꽃을 기다리고 사과꽃의 배후를 말한다”라고 하면서 사과꽃이 저절로 피지 않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 꽃의 개화를 조종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나무는 집」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빛을 기다리는 카페 같은 집은/ 빛을 모아 꽃을 만드는 마법을 부리지”라고 하면서 나무가 햇빛으로 꽃을 만드는 마법에 주목하면서 신비한 섭리의 작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홍시」라는 시에서는 “붉어진 그대로 단단하게 있었으면 했는데 껍데기로 질기게 버텨주었으면 했는데 무르게 하는 힘을 견뎌낼 재간이 없나 봐요”라고 하면서 무르게 하는 힘을 강조하기도 하고 “주저하고 있을 때 그걸 끌어당기는 힘에 흘러내리며 주저앉아요”라고 하면서 “끌어당기는 힘”에 대해 관심을 촉구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서 감을 무르게 하는 힘이라든가 끌어당기는 힘이라는 것은 자연의 섭리로서 보이지 않는 존재가 지닌 권능을 의미한다.
사과꽃을 보내주시는 분, 혹은 사과꽃의 배후라든가 나무가 꽃을 만드는 마법을 부리도록 하는 배후, 그리고 감을 홍시로 만드는 무르게 하는 힘이라든가 끌어당기는 힘 등은 현상의 이면이나 뒤편에 어떤 존재의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이러한 시인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해서 시인의 시편들이 어떤 성스러움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상은 현상 자체로 투명한 세계가 아니라 어떤 이면의 존재와 등을 맞대고 있는 중층적이고 입체적인 세계이며, 현상이란 세속적인 것의 작동이 아니라 어떤 신성한 힘의 영향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되는 셈이다. 신의 입김이 언제나 작용하는 현세이기에 시인이 주목하는 “최씨 할아버지”는 “죽을 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모든 때를 아름답게 만드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눈이 내리는 장면을 보면서도 시인은 “눈이 저리도 내리는 것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자연 현상의 이면에 있는 초월적 존재를 상정할 수 있는데, 이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임종의 때라든가 눈이 내리는 현상은 어떤 신성함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자연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신성을 지닌 신화적 지평으로 탈바꿈하고 마는 것인데, 다음 작품에서 그러한 현상을 직접 목격할 수 있다.
남아공 요나스코프에 들어가려면 질리안과 빌리의 열쇠가 필요하다 저들은 이 산을 수없이 오르고 내린 천사 같은 안내자들이다 출입문이 열리면 아담과 이브를 만날 것 같은 녹색이 열리고 그림동화가 있는 풍경이 열린다 거대한 손이 다녀간 듯 바위들이 위태롭게 솟아있다 어떤 것은 손가락 모양으로 어떤 것은 얼굴 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불이 지나가듯 계곡을 넘어온 구름이 뻐근한 허리를 끌어 당긴다 개미들은 불구덩이 같은 집을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바위를 등지고 불에 탄 나무가 재를 털고 올라온 새싹을 품고 있다 둥지의 새를 본 것인가 삶과 죽음이 서로에게 기대어 아름다운 것인가 몸부림치며 공존하는 풍경에 섞이어 코앞에 있는 하늘을 마신다 잠시 빌려 서 있는 정상, 지상의 모든 것은 아래에 있다 질리안과 빌리가 만든 소세지 브라이를 먹는다 이제야 바람이 부드럽다는 걸 안다 프로테아꽃을 튀어 오르는 꿀새를 앞세우고 산을 내려온다 출입문이 닫힌다 마음은 알몬드꽃처럼 잠잠해지고 누구에게나 문장 하나씩 남는다 비로소 여행이 완성되었다
―「요나스코프」, 전문
요나스코프라는 남아공의 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제의와 영매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이며, 태고적 세계와 원초적 신화가 숨쉬고 있는 제의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아담과 이브를 만날 것 같은” 정취가 있고, 또한 그곳은 “거대한 손이 다녀간 듯 바위들이 위태롭게 솟아있”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묘사에서 우리는 요나스코프라는 산이 태고의 신비를 지니고 있고,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처럼 유토피아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는데, 그러한 이유가 바로 ‘거대한 손’으로 암시되고 있는 절대자의 흔적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성한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성한 존재의 초대를 받거나 혹은 신성한 존재의 안내를 받아야 하는데, “질리안과 빌리”가 그러한 역할을 한다. 그들은 “이 산을 수없이 오르고 내린 천사 같은 안내자”들인데, 그들이 신성한 영역으로 인도하는 사제 혹은 영매로서의 샤먼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 신성한 산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세속의 때를 씻어내고 정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신성한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세속에 대한 정화와 각성 같은 것이 필요한 셈인데, 이러한 정화와 각성이란 신성의 자각과 수용의 마음 자세를 의미할 것이다.
“삶과 죽음이 서로에게 기대어 아름다운” 공간, 그리고 그것들이 “몸부림치며 공존하는 풍경”이 있는 요나스코프라는 산은 자연이면서 그 이면에 “거대한 손”의 입김을 간직하고 있는 신성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한 공간을 들어가기 위해서 시인은 “질리안과 빌리”라는 사제나 샤먼과 같은 안내자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거니와 시인은 자신의 시에 신성을 부여함으로써 독자들을 신성한 영역으로 안내함으로써 질리안과 빌리와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신성한 영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세속적 이해관계에 대한 정화와 각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정화와 각성을 어떻게 세속적 삶에서 이루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게 된다. 이를테면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든가 윤리적 태도 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과제에 대해서 공감과 어울림이라는 가치를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한다.
2. 공감과 화음의 세계
가을은 저물고
어쩌지 못해 그냥 있는 아침
스윽, 낙엽이 내 곁에 내려앉는다
무엇을 말하였나 싶은데
손등에 기대어 있는
구멍난 뒷모습이 따뜻하다
―「가을 볕뉘」, 전문
저무는 가을에 “어쩌지 못해 그냥 있는 아침”은 상실과 곤경의 어떤 삶의 국면을 암시한다. 실존적 한계일 수도 있고, 혹은 사회적 문제일 수도 있지만, 기울어가는 햇살처럼 쇠락하고 몰락해가는 운명의 모습은 안타까운 국면임에 틀림없다. 그때 “스윽, 낙엽이 내 곁에 내려앉는다.” 화자는 닉엽을 보면서 “손등에 기대어 있는/ 구멍난 뒷모습이 따뜻하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내 곁에 내려앉은 낙엽의 모습이 따뜻한 것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공감과 위로의 메시지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낙엽 또한 나의 몰락과 상실의 처지와 비슷한 “구멍난 뒷모습”을 간직하고 있기에 그 공감과 위로는 더욱 진정성 있게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존재의 배후를 읽는 시인답게 내 곁에 내려앉은 낙엽을 보면서 “무엇을 말하였나 싶은데”라고 하면서 내 곁에 내려앉은 낙엽이 어떤 의지나 의도를 지니고 있음을 읽어내고 있는데, 물론 이러한 성찰과 관점이 있었기에 낙엽에서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쩌지 못해 그냥 있는 시적 화자의 옆에 구멍난 뒷모습을 지닌 낙엽이 내려앉아 위로와 공감의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에 제목인 “가을 볕뉘”처럼 세상은 밝고 따뜻한 곳이 될 수 있다. 공감과 연민, 위로와 배려가 세상을 신성이 깃든 곳으로 만들고, 따뜻한 곳으로 변하게 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폐가」라는 시에서는 “봄비는 나 보다 먼저 흘러내린다// 잃어버렸던 목소리로/ 말을 걸어 온다”라고 하면서 「가을 볕뉘」의 낙엽처럼 봄비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적는다. 시인에게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단순히 현상적 존재가 아니라 신성이 깃든 존재이기에 이처럼 자신을 향해 말을 걸어올 수 있으며, 말을 걸어오기에 공감과 연대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부름과 응답, 공감과 연대가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내는 장면을 다음 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치매 앓는 어머니 입 앞에 수저가 멈추어 있다
머리 희끗한 아들이 먼저 입을 크게 벌린다
아 -
어머니도 입을 벌린다
육십 년 넘어 되돌아온 당신의 메아리를 먹는다
―「메아리」, 전문
어렵지 않게 그 시적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아 숟가락으로 미음을 떠먹여 주며 “아 -”하는 소리를 발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 육십 년이 지나 어머니는 쇠락하여 수저를 들 힘도 없는 연약한 아이처럼 되었다는 것, 그래서 이번에는 자식이 다시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어머니에게 음식을 떠먹여 주고 있다는 것이 전체적인 시적 구도이다. 감동적인 점은 육십 년 전에 어머니가 자식에게 했던 “아 -”하는 소리가 육십 년이 지난 지금 메아리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육십 년 전의 “아 -” 하는 소리는 없어지지 않고, 아들의 입에 닿아 응답하는 소리를 낳게 했다는 것인데, 어머니는 그 응답의 메아리 소리를 먹고 있다는 시적 해석이 감동적이다.
그러니까 주목되는 점은 어머니의 입에서 ‘아-’ 하는 소리가 발해지고 육십 년 후에 아들의 입에 그 소리가 닿아 메아리를 이루어 되돌아왔다는 것인데, 이러한 시적 해석으로 인해서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부르고 응답하는 하모니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과 관계가 바로 이 메아리의 하모니 속으로 들어와 동근 형상을 취하게 되는데, 이러한 삶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을 까닭이 없다. 시인은 「응」이라는 시에서 “눈빛으로 만들어진 사랑이/ 응, 하고 태어난다는 말이지// 응? 하면 응!”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대목에서도 부름과 응답, 혹은 질문과 확답의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응’이라는 소리가 하나의 선을 중심으로 ‘ㅇ’이라는 형상으로 조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음성상징을 통한 응답의 구조 또한 시인이 공감과 조응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공감과 어울림의 덕목이 지닌 구체적인 가치와 의미는 다음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별이 무성한 우주도 아니고 물결 일렁이는 바다도 아닙니다 외로운 섬은 더욱 아닙니다 그건 당신과 나 사이에 만들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마주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도도하게 혹은 외롭게 바른 자세로 앉아 속삭이듯 기억을 불러오며 어색한 기운을 한 겹씩 벗겨내는 촛불 같은 이야기입니다 조금씩 닳아 없어지며 빛을 토해내는 이야기입니다 당신과 나를 잇는 징검다리처럼 건너가고 건너오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달팽이의 걸음으로 때론 새의 날갯짓으로 작은 것으로 큰 꿈을 꾸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문을 열어주는 이야기입니다 견고한 음성으로 하찮은 것부터 진중한 것까지 새롭게 쓰여지는 이야기입니다 새롭게 쓰여져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잘 쓰여지는 이야기입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 그건 강력한 이야기입니다
―「과」, 전문
접속 조사 ‘과’는 상대로 하는 대상과 대상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여기서는 ‘관계’라는 하나의 세계, 혹은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생성과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과’는 어떤 대상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 혹은 어떤 대상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생성해내는 어떤 새로운 가치와 의미 등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구체적인 대상으로 “당신과 나”를 제시하고 있는데, ‘당신’이란 무수한 타자들을 지칭하고, ‘나’ 또한 무수한 주체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니까 무수한 타자와 무수한 주체들이 서로 관계를 형성하면서 생성해내는 세계가 바로 ‘과’의 세계인 셈이다.
시인은 굳이 그러한 세계를 명명하여 “이야기”라고 한다. 시인이 강조하는 ‘이야기’란 “당신과 나 사이에 있는 것”이기도 하고, “서로 마주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당신과 나를 잇게 하는 징검다리처럼 건너가고 건너오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공감과 어울림이 만들어내는 세계일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세계의 성격에 대해서 “기억을 불러오며 어색한 기운을 한 겹씩 벗겨내는 촛불 같은 이야기”라고 규정하기도 하고, “작은 것으로 큰 꿈을 꾸게 하는 이야기”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규정에서 우리는 ‘과’가 만들어내는 세계란 곧 ‘시’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이자 새로운 공간일 수 있 수도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특히 “세상의 문을 열어주는 이야기”라는 구절, 그리고 “새롭게 쓰여지는 이야기”라든가 “어두운 곳에서 잘 쓰여지는 이야기” 등의 은유들을 보면, 그것은 고난과 결핍에 공감하면서 새로운 연대와 화음을 만들어가는 세계, 세속적 가치와 진부한 관습에서 벗어나 어떤 정화와 신성의 영역으로 안내하는 세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시인이 굳이 ‘과’를 통해서 형성되는 세계를 ‘이야기’라고 명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야기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정체성을 표현하는 강력한 수단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어떤 신념이나 가치를 공유하거나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이야기란 개체적 차원에서 정체성 형성의 근간이 되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공통적인 가치나 의미를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한 개인에게 그가 그일 수 있도록 하고, 하나의 집단에게 그 집단의 가치를 공유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하나의 신화로서 신성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가치들이 모두 공감과 어울림을 통해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이러한 공감과 어울림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될 것이다. 시인은 자신을 낮추고 자연의 섭리를 수용하는 ‘수동성’의 가치에 주목한다.
3. 위대한 수동성, 혹은 자연과 섭리에의 귀의
오늘도 항복하라는 협박성 메세지가 왔다
뒤이어 정정하는 문자가 올라온다
손가락에 살이 쪄서 종종 실수한다고 했다
"네, 항복할게요!" 답장을 한다
항복과 행복, 둘 사이는 가깝기도 혹은 멀기도 하지
어쩌면 같은 말이기도 하지
하나를 부르면 동시에 대답하는 사이
우리는 항복이라 쓰고
행복이라 읽는다
―「오타」, 전문
삶의 국면에서 사소한 실수가 커다란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시적 구도는 매우 단순하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메시지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어떤 지인에게서 시적 화자는 “오늘도 항복하라”는 문자를 받는데, 그것은 사실 “오늘도 행복하라”는 메시지의 오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손가락에 살이 쪄서 종종 실수한다”고 하면서 정정 문자를 보내오지만, 시적 화자는 이를 예사롭게 여기지 않는다. 항복과 행복은 전혀 다른 말같이 보이지만, “어쩌면 같은 말이기도 하”며, “하나를 부르면 동시에 대답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상의 전개 과정은 곧 항복과 행복이 다르지 않다는 점, 그러니까 항복이란 행복을 야기할 수 있는 전제조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한 셈이다. 항복이란 물론 적이나 상대편의 힘에 눌려서 굴복하는 상황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항복은 어떤 가치를 지니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인이 성찰한 것처럼 행복과 연관시켜 항복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면, 항복이란 곧 자신의 고집과 욕망에 집착하는 악착(齷齪)에서 벗어나 이치에 따르는 것, 곧 자신의 욕망과 억지에서 벗어나 순리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항복이란 자신을 내세우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태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적 논리는 행복이란 이러한 항복에서 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시인은 「기도」라는 시에서도 “덥썩 엎드린다// 엎드리면/ 네 속에서 주인 행세하려던 가짜들/ 스스로 뒷걸음치며 물러난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숙이면 거짓과 허위가 사라지고 “진짜 주인이/ 가만히 와서 앉는다”고 강조한다. “덥썩 엎드린다”는 것이 자신을 낮추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면, 바로 아집과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점에서 “가짜들”이 물러나고 “진짜 주인이” 다가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덮썩 엎드린다”는 것이 곧 “항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면 시인의 시적 메시지를 보다 분명히 파악할 수도 있다. 시인은 「씀바귀」라는 시에서는 씀바귀 꽃을 보면서 “낮아진 하늘/ 낮아진 세상”이라고 하면서 낮아진 세상을 강조하는데, 이처럼 항복하는 것과 덮썩 엎드리는 것, 그리고 낮아지는 것이 모두 겸양의 미덕으로서 ‘수동성’을 의미한다고 볼 때, 이 수동성은 진정한 행복을 가져오고, 진실을 발현시키며, “어린아이 웃음소리”(「씀바귀」) 같은 세상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위대한 수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상정하는 수동성의 의미는 다음 작품에서 구상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앞마당에 큰 풍경을 열어두었다
누구나 들뜬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은
둘이 하나 되는 강,
새떼를 몰고 휘돌아 갈 때
다산茶山을 만든 두물머리는 넌지시 두 눈까지 치밀고
난 한걸음 떼었을 뿐인데
첫마디부터 묵언!
마음에서 강 하나씩 일어나게 하라고
바람이 오백 년 은행나무 손끝을 친다
―「수종사」, 전문
오백 년 된 은행나무로 유명한 수종사가 시적 대상이 되고 있다. 시인이 주목하는 것은 ‘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둘이 하나 되는 강”이라든가 “다산을 만든 두물머리”, 혹은 “마음에서 강 하나씩 일어나게 하라고” 등의 표현에서 강에 대한 시인의 초점화된 관심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주된 관심사인 강은 “앞마당에 큰 풍경을 열어두었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수종사라는 절이 품고 있는 풍경 속에 있는데, 그것이 수종사가 시인에게 감명적으로 다가온 이유이기도 하다.
수종사가 품고 있는 강이 전하는 메시지는 두 가지이다. “첫마디부터 묵언!”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아무 말도 하지 말하는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말하는 것은 곧 침묵하라는 것인데, 침묵하라는 것은 곧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세상을 관조하며 타자를 받아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자신이 품고 있는 신념과 주장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지 말고 세상의 이치와 흐름을 받아들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강이 전하는 두 번째 메시지는 “마음에서 강 하나씩 일어나게 하라”는 전언인데, 이러한 메시지 역시 자연의 섭리를 깨우치고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물의 흐름은 도(道)를 닮아 있으며, 그러한 물의 흐름이라는 이치를 따르는 것이 지극한 도에 이르는 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마음에서 강 하나씩 일어나게 하라”는 강의 메시지는 바로 이러한 이치를 체현하고 있는 전언으로서, 위대한 수동성이 삶의 이치라든가 자연의 섭리와 닿아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다음 시를 보면 위대한 수동성에 도달하는 길이 곧 돌아가는 길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나무 속으로 들어가세요
한 걸음씩 가운데로 들어가세요
나이 들수록 안으로 들어가세요
비어있는 공간이 너무 많아요
머뭇거리지 말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세요
가운데는 춥지 않아요
거기서 당신의 몸을 조금씩 줄이세요
단단해질 때까지 숨을 죽이세요
밀착 밀착
조금만 더 안으로 밀고 들어가세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쑥쑥 자라날 수 있습니다
지구 끝까지라도 닿을 수 있습니다
바깥에는 꽃이 피고 있어요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이번 역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나이테역」, 전문
“나무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 “한 걸음씩 가운데로 들어가”라는 것, “안으로 들어가”라는 것 등의 표현에서 안으로 응축하고 집중하라는 시적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기를 권장하는 것은 안으로 들어가면 “비어있는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 등의 메리트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상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쑥쑥 자라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지구 끝까지라도 닿을 수 있”다는 것, 혹은 “바깥에는 꽃이 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시인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당신의 몸을 조금씩 줄”여야 하고, “단단해질 때까지 숨을 죽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시인이 강조하는 바에 따르면 나무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 한 가운데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러한 틈입이 매우 긍정적인 가치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왜 시인은 이토록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유하는 것일까? “나이테역”이라는 제목에 유의해 보면, 나무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나이테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뜻하고, 나이테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곧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이테의 중심이란 곧 가장 오래전에 생성된 나무의 중심이며, 과거의 시간이 오롯이 남아 있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시인이 강조하는 것처럼 나이테의 중심으로 들어가라는 것은 곧 순수했던 유년의 시공으로 돌아가라는 것, 세속의 때가 묻지 않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럴 때 숨쉴 수 있는 비어있는 공간이 나타나고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럴 때 자아는 우주만큼 커다랗게 확장할 수 있으며 세상에는 꽃이 피어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현수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인 사과꽃이 온다의 시세계를 조망해 보았다. 맑고 깨끗한 심성으로 시를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시적 이미지와 시적 사유가 그윽하고 아득하게 펼쳐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인은 세상의 더러움과 오물을 청소하는 청소부처럼, 혹은 세상에 만연한 고통과 질병을 치유하는 의사이자 영혼의 치유자처럼, 그리고 독자들을 성스러운 영역으로 인도하는 사제이자 샤먼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인이 신성한 영역을 시적 공간에 펼쳐 놓는 것은 그것을 통해 독자들이 영혼의 정화를 체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맑은 영혼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공감과 어울림, 그리고 섭리와 이치에 귀의하는 위대한 수동성을 지닐 것을 강조하고 있다. 시인의 시적 메시지와 시의식, 그리고 시적 태도에서 종교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여전히 우리 시에서 종교적 영역이 필요하다는 하나의 방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