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죄를 지어도 되겠습니까
-권기선 신작시 중심으로
황유지
한 사람이 세계와 맺는 관계나 세계 내 장소와의 관계는 그가 타자로부터 받을 권리가 보장되고 있다고 느끼는 공간과 시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다. 다시 말해 어떤 공간 안에서 인간은 당당하거나 보류된 혹은 확장적이거나 압축된 자신의 존재를 몸을 통해 표현한다는 부르디외의 말을 빌려올 때, 존재를 부상시키거나 소멸로 수렴하는 장소와 그에 따른 사람의 행위력은 쉽게 이해된다.
이런 존재의 부침을 결정하는 장소는 흔히 집, 학교나 회사 등 반복적이면서도 개인의 고유한 습성과 연결되는 공간에서부터 소비적이고 일회적 공간, 키치적 공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히 ‘집’이란 무엇인가? 이 상징적이고도 생물학적인 공간은 외부에서 바라볼 때, 지붕 아래 들어서는 순간 한 인간의 사회적 속성을 지우는 편으로 비장소성을 요청하며 그 집의 체제 아래로 한 존재를 재편하는 전혀 새로운 권력과 제도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집은 안정과 안전, 충만과 사랑의 공간이길 요청되지만, 그 비밀들은 –그것이 온갖 다정으로 넘쳐날 때조차도- 반드시 긍정으로 수렴되지 않기도 한다. 하물며 시인에게 집이란.
이것은 벌, 별,
법
(중략)
시를 좋아하는 나는 쉽게 슬픔에 빠지고 책을 좋아하는 너는 벌을 받는 것 같다, 가족이 되어도 그럴까
가끔 아주 가끔
생각한다, 가장이 된 나는
광장을 걷다가 멈춰 하늘을 본다, 생각에 잠겨 있다 울고
따라 쓴 시를 읽어주다 혼자 있고 싶어진다. 문학을 한다는 내가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할까 봐
행복을 배웠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될까 봐
-「책벌(冊罰)」 부분
시를 좋아한다는 것은 쉽게 슬픔에 빠지는 체질로 살아가는 일이고 그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까지 전염시킨다. 나와 주변을 망가뜨릴 가능성, 그것이 “책을 많이 읽”은 대가이다. 그래서 그것은 벌이 된다. 이 시의 제목인 「책벌」은 그런 책을 가까이 두는 자의 숙명을 그 말이 품은 본래의 뜻인 잘못, 죄에 따르는 벌(責罰)과 겹쳐놓는다. 그런 벌이 시인의 운명이라 하면 수긍은 좀 더 쉽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별이고 법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마음에 품은 오랜 바람, 저 선험적 이상은 별이자 아버지로부터 받은 여린 심성이기도, 시인의 헌법이기도 하다. 게다가 화자는 이제 ‘가장’의 처지다. 가장의 구실을 해야 한다는 이 윤리적 의무감은 ‘집’을 문제적으로 성립시키는 시적 화자의 안티테제가 된다. ‘시를 쓰는 화자’와 ‘가장 화자’의 이상이 하나로 포개어지기란 요원할 터, 그래서 화자는 “광장을 걷다가 멈춰 하늘을 본다”. 멈춤, 지연이 발생한다. 광장이란 공간은 시민의 삶, 그 이상이 뿌리내린 곳이고 하늘은 시인으로의 욕망이 떠돌고 있는 자유의 공간이랄 수 있다. 까닭에 드넓은 시민의 광장은 오히려 시인의 목을 죄는 밀폐감을 동반한다. 그가 원하는 장소란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다. 광장이 요청하는 정치적 올바름의 시민, 집이 요구하는 윤리적(윤리는 행복, 선에 닿을 터이기에 신자유주의의 가정 윤리란 경제력과도 밀접하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은 홀로 있고 싶은 시인에게 자꾸만 좋은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종용한다. 그래서 시적 화자의 세계는 이런 상반된 충동, 조화의 결여로 인해 이분법의 양 갈래로 나누어지고 만다. 이런 분열증적 심리에 대한 고백은 다음과 같은 시에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쌓인 눈을 간직하고 싶어 겨울마다 눈을 뭉쳐 냉동실에 보관했다. 나만 아는 눈들을 가족은 성애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세 살 위의 형과 눈싸움하고 같이 목욕탕엘 갔다가 게임방으로 향하는 때가 많았다. 돌아오는 길마다 싸우며 집으로 들어오곤 했고 아무리 놀려도 형은 나를, 때리지 않았다. 그때 말이야 형. 우리 행복했던 거겠지? 정신과에서 돌아오는 길, 꿈을 꾸는 게 약이 될 수 있다고 들었다. 있잖아요. 초소에서 졸다가 겨울 밤바람에 잠이 깨서 미치도록 시를 쓰고 싶었단 말이죠. 그 밤을 보낸 후에는 형에게 전화했다. 산에 올라와 훈련하고 있는 참이라는 형에게 사랑합니다 말하고 끊었던 것처럼 그 겨울 부대에 쌓였던 눈을 한 움큼 간직할 수 있다면.
봄인데.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싶어
조용히 나와
새벽길을 걷다 들어온 집, 아침에 헤어졌던 가족은 밤에 만나 저녁을 먹었고 이제는 쓸쓸할 줄로 알아야 한다, 고요한 눈사막`
-「겨울과 봄눈」 전문
시간은 기억에 의해 재편된다. 그건 지연된 소망과 결합하며 시적 화자의 분열 기제로 작용한다. 들여다보자면, 이 시에는 세 가지의 기억공간(시간)이 등장한다. 하나는 형과 눈싸움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공간일 어린 시절이고, 또 하나는 군 초소에서 지낸 밤과 이튿날 들었던 형의 목소리가 어우러진 기억공간이다. 그리고 그 사이와 끝에 현재일 정신과 방문과, 집이라는 공간이 놓인다. 눈을 냉동실에 넣는 행위는 과거의 박제를 통한 무해한 기억의 영구보존에 대한 소망이랄 수 있다. 초소의 밤이 놓이는 두 번째 기억공간에서 화자의 욕망은 시-쓰기를 향해 있지만, 실행되지 못한 시 쓰기의 자리에는 형과의 통화가 놓인다. 이때 고백으로서의 말하기는 시 쓰기를 대신하는 유사 형식으로 행해지기에 무구한 처음의 기억공간으로 형과 ‘나’를 돌려놓는 일종의 퇴행으로 처방은 이루어진다. 그래서 형이 나를 “때리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 행복했던 거겠지”라는 물음과 짐작은 확신을 요청하는 타자를 갈구하는 형태로불안을 일시적으로만 잠재울 수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문제적인것은 “꿈”이 “약”의 대체요법으로 처방된다는 것이다. 이때 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런데 우리는 “봄인데, 내리는 눈을” 원하는 소망의 불일치, 부조화가 집으로 돌아와 “이제는 쓸쓸할 줄로 알아야 한다”는 고요한 다짐으로 표명되고 있는 시의 결말에서 꿈이, 과거의 원기억으로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퇴행이 아닌 집을 나서는 길, 실행하지 못한 소망 즉 시-쓰기에 닿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권기선의 신작시에서 공통적으로 포착되는 행위는 ‘집으로 돌아오기’이다. 그러나 이 귀가는 휴식과 안락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대신 집으로 돌아오기는 불안함, 이래도 되나 싶은 초조함을 유포한다. 그래서 집에 오면 집을 나가야 된다는 다짐을, 가족과 ‘밥을 먹는’ 일에 대한 감사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새벽 산책을 해야만 트이는 숨통 같은 것을 증상으로 읽어내게 된다. 시적 화자의 사유가 이루어지는 곳이 그런 집의 바깥에 있다는 것과 함께.
거리를 걷다 사람들 속에 있는 나를 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사람 사이에 있는 일이 어려웠다, 이렇게 고백하고 집에 오면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라는 표현이 자주 있는 곳이었다, 여기는
여름을 배경으로 새로 시작한 일과
사람 많은 홍대 거리
신호등 앞에
줄지어 쌓이는 사람들 속에서
잠시 더 머물다 가도 되겠구나 생각한다, 사람의 온기가 좋아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여름의 무게가 내려앉은 길을 걸으며
배경과 사람 사이를 채워주는, 잘하고 있는 거야하고 말해줄
영화음악 같은 대화와
애정을
나는 찾고 있는 것이다.
-「영화음악」 부분
“홍대 거리”에 섰다. “신호등 앞에/ 줄지어 쌓이는 사람들 속에서/ 잠시 더 머물다 가”고 싶어진다. 영화음악은 자연히 주인공들의 여정을 상기시킨다. 할머니와 사는 집이 아닌 엄마가 있을 ‘진짜’ 집을 찾아가는 어린아이와 그 길에 동행하게 된 철부지 어른의 영상-기억은 시적 화자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이 ‘진짜’ 집인지 묻게 한다. 시민 ‘가장’이 가족의 ‘밥’을 책임질 때 ‘시인’ 화자는 ‘무력감’을 느낀다. 결국 이 무력감이 집을 의심하게 하고 의심은 ‘죄’를 생성해낸다. 그러니까 죄는 ‘시를 쓴다’는 것이다. 죄의식은 어딘가에서 연유했을 유전의 흔적-책을 가까이 하고 시를 사랑함-시를 택하고 시인이 됨의 단계를 통과하며 시인이라는 외재성의 승인이 내부의 죄의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권기선 시의 특징은 이런 죄의식을 고백하고 죄를 선언하는 한편, 정작 시적 화자의 의식과 행동은 죄짓기 앞에 머뭇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왜일까? 역시 ‘집’에 대한 시적 화자의 태도에 그 답이 있는 듯하다. 시인과도 겹쳐놓을 수 있을 시적 화자의 집에 대한 인식은 일면 감상적이다. 그건 진정한 장소 경험이 실존, 개인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외부 세계를 재편하는 잣대로서 기능하는 것과 달리 그의 장소 경험이 추상적 선험적 모델이나 인습적 사고 또는 행위의 축적을 통해 형성되는 무비판, 무의식적으로 수용되었을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윤리적으로 밀어붙인 의무의 계승과정에서 당위로 받아들였을 ‘가장’의 역할, ‘시민’의 역할이 실은 직접적이고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전승된 것이 아닐 가능성 말이다.
그럼에도 욕망과 죄의식의 충돌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보다 과감하게 한 발을 떼려 하기에, 우리는 머뭇거림 뒤에 드디어 다가올 ‘죄짓기’라는 시적 행위를 기다려 봄직하다.
얼어붙은 세상과 구원하는 신을 그린 그림을 보며 서 있다. 화가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내리는 비에 그림이 젖는다.
신기(神氣)를 누르지 못한 누나는 열여섯에 무속인이 되었다. 선배 한 명이 내림굿을 받고 그만뒀다는 말을 들으며, 티브이에서 보았던 왕꽃선녀님을 생각했다.
철거해야 하는 집 앞에서
무속인의 집이란 이런 곳이구나 기분 탓으로 음습해하며
굴삭기가 버킷을 들어 올린다. 벽이 무너진다. 무구(巫具)들이 흔들린다.
신을 받은 인간에게 감정이란
자제할 만한 어떤 충동 같은 것이 될는지
감당해야 할 삶이 너무도 깊어
지우지 못하는 벌에
애가 씌우는 것이 될는지
잊힌 기억을 되살려 보다
어떤 영화에서처럼 저 벽이 부서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했는데
가볍게 부서진 세상과 신
일렁이는 먼지들이 다 시시한 농담 같다.
오방색 깃발과 방울
나뒹구는 하얀 벽지와
쓰러진 신상(神像)의 눈빛도 다
멍멍하다.
-「이상 심리」 전분
이 시는 「이상 심리」로 표명된다. 병리적으로 부적응을 뜻하는 이 말에서 ‘날기’로써 추락의 행위를 육화한 소설의 인물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여기, 시적 화자는 ‘집으로 돌아오기’가 유일한 행위에 가까웠던 시편들을 지나와 이제 허물어지는 무당의 집 앞에 서 있다. 무당집 벽의 무너짐, 오랜 믿음의 추락이다. 눈앞에 재현된 신성의 몰락은 시적 화자의 세계 내 공간, 절대 중심이었던 집의 헐림에 다름 아니다. 무너진 것은 시적 화자를 옥죈 과거의 유산들, 허위의 신성이다. 그건 바로 집이다. 집의 허물어짐 앞에 시적 화자가 느끼는 이상 심리는 허망함에 홀가분함이 더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과 ‘밥’을 먹는 행위는 시적 화자의 윤리적 의무를 향해 다정하게 손짓하지만, 길 위에서 사유하는 시인의 숙명은 이제 그런 윤리적 선과 결별하기로 한다.
시인은 이런 말을 했다. “지금부터는 죄를 짓기로 한다. (중략) 시를 놓지 못하는 내 죄 또한 영원하다.”물론, 작품과 개인사를 연결지어 해석하는 표현이론은 모두에게 그 유효성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시작 노트이기도 할 이 결심은 낭만주의적인 그의 시편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죄가 자기에 대한 소외라고 볼 때, 그 체험은 자연 현상보다 훨씬 더 놀랍고 혼란스럽고 물음투성이가 된다.”는 말을 가져올 때, 기왕에 죄를 선언한 시인이 물음을 밀어붙여야 할 방향은 자명해 보인다.
아름다운 건물과 소설에 빠져선 영원히 하숙하는 일과 같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에도
아름답지 않은 미래가 섞여 있다, 매서운 눈보라 속을 걸어야만 하는 일 같아. 언제나 대기 중인 상처가 있었다.
-「써니 사이드 업」 부분
“대기 중인 상처”가 봉긋 부풀어 오를 그림에 포개어 시인은 이 시들을 경유하며 결심을 한 듯 보인다. 아직은 공손하기만 한 시인의 앞에 지금 놓여있을 한 문장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지금부터 제가 죄를 지어도 되겠습니까?
약력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수료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2022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